1. 서론
성령세례와 충만은, 성령의 사역에 관한 설교 내용을 책으로 낸 것이다. 저자인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성공회 사제이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이 책의 목적은, 성령의 사역 가운데, 성령의 약속, 성령의 충만, 성령의 열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각각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최근에 영향력을 크게 끼치고 있는 신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주의를 염두에 두고 내용을 개정한 것이다.
2. 요약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인데,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다 내주하시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자녀를 삼으시기 전에 그리고 후에 성령을 준다고 성경은 동시에 말하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모든 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또한 성령을 소유한 이가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는 것이다. 또한 선한 열매를 맺는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또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성도를 연합 시키시고, 성령에 의해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부터 마침까지, 성령의 사역에 의존하고있다.
하지만 성령이라는 약속된 '선물'은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 이 부분에서 사람들의 확신이 나뉜다. 다르다고생각하는 이들은, 성령 세례를 두 번째요 나중 경험이라고 가르친다. 같다고 보는 이들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성경을 '받은 것' 을 나타내는 생생한 수사학적 표현이며, 이 '세례'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것으로 여긴다.
'부어 주심' 또는 '세례' 는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 중 하나이다. 예수님은 '세례자' 또는 '세례 주는 자'로 불렸는데, 그것은 성령으로 세례 주는 것이 그분의 사역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죄를 지고 가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두 가지이다. 이것은 새 언약의 두가지 주된 복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8장 가운데, 이 두가지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두 가지 선물로 이해했다.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약속 또는 선물과 동일한 것이고, 구원의 복음에 필수적인 것이다. 성령의 부어주심 또는 세례는,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일 뿐 아니라 또한 보편적 축복이다.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성령이라는 선물의 보편성을 확인한다. 구약과 비교할 때에, 성령의 사역은 더 넓고 깊어 졌다. 모든 믿는 이들에게 성령의 축복이 있다. 구약 성도들이 알지 못했던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고, 본질적으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오순절에 서로 다른 두 그룹이 성령의 세례 또는 선물을 받았는데, 그것은 초두에 나오는 120명과, 말미에 나오는 3,000명이다. 120명은 이미 중생한 자들이고, 3천명은 불신자들이었다가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았다. 그 일에 대해 기다림 없이 회개하고 믿은 즉시 일어났다. 오늘날의 표준은 첫째 그룹이 아니라 둘째 그룹이며, 120명의 경험이 두 단계에 걸친 것은, 단지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순절의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하지 못해 현대에 혼란이 있다. 성령의 부어 주심은 예수님이 행하신 구속 사역 중마지막 사건이다. 따라서 그 일은,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축복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다. 모든 이들은 그 날 이후 새 시대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고,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또한 오순절은 최초의 부흥이다. 그러므로 3천명의 회개는, 표준적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표준적인 것으로, 그 내용은 죄사함과 성령을 둘 다 받는 것이다.
사도행전 8:5-17절은, 사도들이 파송된 이유는, 이 회심자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루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에 대한 묘사 중 일부이다. 사마리아인들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사도가 그들의 회심을 검토하고 안수하고 확증하기 전까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성령의 선물을 보류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외적인 상황임으로, 오늘날의 영적 경험의 표준이 될 수 없다. 빌립이 잘못 가르치거나,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상황 가운데 성령이 나중에 주어진 것이다.
사도행전 19:1-7절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누가의 묘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그리고 복음을 그들에게 다시 설명했다. 즉 이들에게 바울이 세례를 주었고, 안수 했을 때에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은 그 이전에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회심에 뒤 따르는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신약 성경은, '성령의 세례'라는 표현과 '성령의 선물'을 동의어로 사용하며,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하거나 '세례를 받는다'고 할 때 사용되는 동사와 동의어로 쓰인다. 성령을 '가진 것', '성령으로 사는 것'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 등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들의 믿음의 성숙도와 관계없이, 그들이 새롭게 출생하는 바로그 순간부터 똑같이 적용되는 표현들이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다'와 '한'이 반복되어 강조되어 사용되는데, 그 장의 후반부에서 은사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전에, 서두에서 영적 은사의 수여자이신 성령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성경의 선물과 성령의 은사들사이의 차이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며 또 우리에게 성령을 마시게 하신 분이시다. 세례받는 것과 마시는 것은 동일한 표현이며, 모든 그리스도 인들은 이 두 가지를 다 경험했다.
성령의 세례는 단회적인 선물이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례는 반복될 수도 혹은 잃어버릴 수도 없지만, 충만은 반복될 수 있고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성령 충만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특징이며, 특정한 사역을 위해서 내려 주시며, 위기 상황에서 준비시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 세례에 관련된 신약 성경의 일곱 구절은, 명령형으로 된 권면은 없지만, 성령 충만은 받으라고 하는 명령들의 구절들이 존재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의 은사를 넘치게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계속적인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
또한 성령 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다. 에베소서 5:18-21에는, 성령의 충만을받으라는 단 하나의 명령 다음에, 성령충만의 결과들을 보여주는 네 가지 묘사가 이어진다. 술취함과 비교할 때에 성령 충만은, 억제되고 이성적인 도덕적 품행으로 끌어감으로써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들은 관계에서 나타난다. 성령 충만의 건전한 결과들의 두 가지 주된 영역은, 예배와 교제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 양쪽과 다 바른 관계를 맺게 하신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들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믿음으로 붙잡는 정도가 다르다.
보통 수준의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하면서도 전혀 극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를 받았다고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의 수준 낮은 신앙 생활이 문제라면, 성령 충만을 회복해야 한다. 오순절적인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그것을 성령으로 받는 세례라고 부르는 자들에게는, 그런 경험의 일부가 마귀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또한 많은 부분이 심리적이며, 또 어떤 부분들은 실제의 회심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표준은, 단회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 그 후로 거룩함과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향해 꾸준히 자라가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정인의 경험이, 매우 다양하며, 타당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판에 박힌 어떤 정형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어떤 경험들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첫 번째 은혜의 사역과 그 중요성에서 비교될 수 없다. 또한 모두 불완전한 것이다.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성령의 열매는, 특질들을 세 개씩 묶어서 나누는 것이 가장 간단한 구분이다. 첫째로 하나님, 둘째로 다른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묘사한다. 성령의 열매는, 고르거나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함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 을 이루기 때문이다. 성령은 서로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신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열매를 맺도록 일하신다. 치우친 그리스도인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반면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나타내는 인격적 특성은 언제나 온전하고 성숙하며 충만하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인격적 특성들을 개발할 수 있는가? 첫째로,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둘째로, 이것은 열매이기 때문에, 조건이 충족된다면 자연스럽게 자란다. 근본적인 원리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심을 것인지를 결정함으로써 우리가 거두게 될 것이 무엇인지 미리 결정할 수 있다. 사도가 '심는 것' 으로 의미하고자 한 것은, 우리의 생각과 습관, 생활 방식, 삶의 방향과 삶의 훈련 등으로 구성된 전체적인 삶의 패턴으로 보인다.
자연적 성화와 관련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밭에 제대로 된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를 위해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으면 '영생' 을 거두게 된다. 또한 성품이라는 것은 일생에 걸쳐 열매를 맺는다. 이 점진성 때문에, 우리가 심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며, 공적, 개인적 경건의 삶의 습관을 위해 자신을 더 훈련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기원이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겸손과 믿음이필요하다. 또한 성장을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점진적이기때문에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 교회는 하나인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신자 안에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그 이유는 한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 그것은 어떤 은사와 그 은사를 발휘할 수 있는 역할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그 어떤 역할과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사를 가리킨다. 신약 성경에는 모두 합쳐서 스무 개 이상의 은사가 나온다. 그리고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많은 은사들을 주실 수 있다.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는 분명히 연관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실 때 부터 마지막을 계획하신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회심 이전과 이후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고 쉽게 결론 짓지 말아야 한다. 또한 몇가지은사는 기적적이지 않고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타고난 자질을 영적인 은사로 바꾸어 놓는 요인은 그 목적과 동기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은사는, 그분이 주시는 타고난 재능과 잘 들어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영원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 성령의 하나님과 더 조화를 이룬다. 어떤 은사들은 무척 평범해 보인다. 가르치는 은사나 권위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나 긍휼을 베푸는은사는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양 극단을 경계해야 하는데, 기적의 은사가 없다고 대답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거의 모든 일이 기적적이라는 견해이다. 성경의 기적들은, 성경에서 몇 군데 뭉쳐서 등장한다. 율법, 선지자, 주님, 사도라는 게시의 주된 네 시대이다. 기적들의 주된 목적은, 새로운 게시의 시대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특별한 계시가 완성 되었기 때문에 기적의 일상성을 믿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기적의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하는가? 고전 12:28-29 그리고 엡 4:11의 목록을 분석 해 볼 때에, 두 곳 동시에 사도라는 말이 목록의 맨 처음에 나타나고, 고린도전서의 목록에서는 사도를 '첫째'로 지칭하여 처음 세 은사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도의 은사는 열두 제자, 바울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한두 사람이 더 포함되는 그리스도의 사도들로서, 바로 그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선지자는 어떠한가? 그것은 '예언'과 '선지자'에 대한 우리의 정의에 달려 있다. 구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선지자는 계시가 주어지는 통로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자들이다. 그런 성경적 의미에서 보면, 더 이상선지자는 없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사도와 선지자들' 은 함께 묶여 있고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터이다. 즉 기초 자체는 다시 놓여질 수 없으며, 선지자라는 일차적 의미에서는 이 은사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성경에서 선지자는, 일차적으로 미래에 대한 예언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계시의 통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적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는 신약 성경의 네장 모두가 각 절에서 강조하는 단어들은 '파스' 혹은 '헤카스토스' 이다. 은사란 널리 퍼져있는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지역교회 전통 이미지는, 많은 일을 하는 목회자그리고 기여하는 바가 없는 대다수 교인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은사주의적 운동의 성장의 배경이 된다. 그리스도의 몸을 믿는다면, 모든 은사를 각 사람에 주셨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하나님의 은사를 가진 일꾼들을 일으켜 주시도록 간구하고, 활용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하고 기회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교회는 은사적 공동체이다. 모든 구성원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든지 한 가지 이상을 가지고 있다.
영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어떤 지체도 자신을 경멸해서는 안되며, 동시에 자만해서도 안된다. 은사는, 하나님이 임의로 나누어 주시는 하사금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어떻게 사용 되어야 하는가? 은사는 자신을 위해서도, 혹은 에배를 위해서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에 덕을 끼치는 것,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그러므로 봉사의 선물이다. 세운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건하게 하는 것이다. 덕을 세우는 것에 따라서 은사의 중요성이 다른데, 세우는 역할을 많이 할 수록 가치가 더욱 커진다. 그리고 가르치는 은사야말로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잘 세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이라 알려진 현대의 현상이,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은사와 동일한 것인지는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의 방언의 심리적 해방감 혹은 새로운 차원의 자유는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에 볼 때에, 바울은, 말하는 자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개인적인 방언을 강하게 저지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또한,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개입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찬미란 바울에게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이 틀림 없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 덕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말하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영적 은사들 역시 봉사의 은사이며,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면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바울 사도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역의 영광스러운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온전한 연합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도록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와 사랑이라는 한 쌍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해야 한다. 진리는 영적 성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진리는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져야 한다. 그러므로 은사들은 사랑 안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사랑은 가장 높은 은사보다도 더 귀한 제일 좋은 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사랑, 진리, 은사, 봉사라는 네 측면을 가진끊어질 수 없는 고리 또는 원과 같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성령이 사시도록 하신 사실에 하나님께 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회개와 믿음, 순종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더욱더 구해야 한다. 계속적으로 성령을 위해 심음으로써 그분의 열매가우리의 성품 가운데 자라나 무르익도록 해야 한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인 개개인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도관심을 갖고 계신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은사는 봉사를위한 많은 다양한 능력들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한가지 은사는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주권과 은혜 가운데 분배되며,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교회를 세워 성숙케 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한다. 그리고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3. 비평적 평가
저자의 주장 가운데, 예수님의 특징적인 사역이 옮겨 버리는 것과 가져다 주는 것으로써 이중적이라는 것은 한국교회 가운데 매우 큰 시사점을 가진다(25). 왜냐하면 일반적인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옮겨버리는 것은 강조하지만, 가져다주는 것 즉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절반만 인정하는 것이며 신학적인 구조적 결함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서, 성도는 자신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에 대한 건전한 지식과 이해는 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이 현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즉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영적으로 부어주신 축복에 대한 인식이 약하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된다. 하나님의 칭의가나에게 있었다면, 도대체 현재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하나님께서나에게 주시는 은혜와 그분의 도우심은 어떤 것인가? 과연 성령 하나님은 나의 삶 가운데 어떤 역할을 하시는 것인가? 이러한 실질적인 질문과 혼란들에 대하여 이 책은 답을 준다.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죄의 용서와 성령이라는 두가지임을 분명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은 영적인 자만심과 엘리트주의에 빠진다(27).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약속 또는 선물과 동일한 것이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편적으로 주신 것을, 특정한 누군가만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하나님께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자랑하며, 마치 다른 이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영적 엘리트주의를 깨트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 작업은, 믿는 자들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성령의 세례는 곧 하나님의 선물이며 모두가 구원의 과정 가운데 경험하는 것임을, 즉 보편적인 축복임을 성경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흔들리면, 은사주의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며, 교회는 잘못된 성령론에 사로잡힌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성령의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특별히 성령의 은사를 생각할 때에 중요하다. 한국 교회는 기도원을 통해서 많은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고, 그곳에서 소위 은혜 받은 성도들이 지역 교회 가운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문제는 그들이, 성령의 은사를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노력으로 얻은 것 처럼 특권 의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령의 은사들과 성령의 열매가 익어가는 그 두가지를 철저하게 구분한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은 성령의 은사를 충만히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임을 논증하는데, 그것은 목회의 현실가운데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65).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성령 충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저자의 논증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평생동안 힘쓰고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 준다.
저자가 염려하는 것 처럼 나 역시, 사람들이 소위 성령 체험을 하고서는, 그것을 모든 이들이 경험해야 하는 정형으로 강요하는 것을 염려한다(85). 저자의 이야기하는 것 처럼, 그 어떤 경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라는 첫 번째 은혜의 사역과 비교될 수 없다(86). 바로 이 부분이 확실하게 지켜질 때에, 사람들은 영적인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훨씬 내면적이며 관계적인 성령의 참된 열매를 추구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특별히 최근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심각한 가정 폭력 이후에 안수를 받은 목사의 경우를 생각할 때에, 참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몇가지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목회자가 될 경우, 그것이 얼마나 큰문제가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성경 전체를 살펴볼 때에, 성경의 기적들이 전체적으로 네 군데에 몰려서 등장하며, 그것은 새로운 계시의 시대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목적으로 나타난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현대의 시대에 있어서 교회가 무엇을 더욱 힘써야 하는지에 대한 탁월한 방향을 제시한다(122).
그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지금에도 기적을 능히 베푸실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힘써야 하는 것은, 외적으로 보이는 기적이 아니라 내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성령의충만과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이야 말로, 영적으로 미성숙한 성도들의 죄들로 인해 사회로부터 지탄 받고 있는 한국 교회가 힘써 가야할 길이라 할 수 있다.
은사라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탁월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다(131). 영적인 엘리트주의를 벗어나, 모든 성도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할 때에, 드디어 목회자중심이 아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를 갖는다.
결국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이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임을 책을 통해서 확신하게 된다(133).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은사가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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