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은, 예일대 졸업식 설교를 확대하여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저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미국 교회사 가운데 최고의 신학자 그리고 철학자이며 18세기 부흥 운동의 주역이다.
이 책은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는 역사적인 부흥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부흥시 발생하는 여러 현상들로 인해 부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일어난 참된 부흥임을 논증하는 것이다.
2. 요약
사도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엄청나게
부어진 시대였다. 그러나 모조품들도 동시에 많이 나왔다. 그러므로
참된 영과 거짓 여을 분별할 수 있는 어떤 분명한 규칙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표지들이 필요했다. 그것이
요한일서 4장의 목적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데 있어서 증거가
될 수 없는 소극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주
비범하고 특별하게 일어난 일, 즉 어떤 일이 일상적이지 않고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비범하게 일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롭고 특이한 역사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과 작용이
특별하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죄의 본성에 대해서 비범하게 깨닫게 될 때에, 아주
비범한 정서들이 솟아나는 일이 있다고 할 때, 그 일들이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성경적 표지들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그 역사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특이하고 비범한 역사라 할지라도, 그 본질이 성경의 표지들과 일치한다면 성령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사도
시대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만일 매우 특이한 역사는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옳다면, 항상 그러해야 하고 사도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도 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많은 면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또한 성경은 마지막 성령의 부으심이 있을 때, 그
방식이 아주 비범하여 새로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둘째로, 몸에
일어나는 특이한 증상들에 의해서는,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이 참된 성령의 표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은 아니기 대문이다. 또한
어떤 외적인 모습을 보고서, 그 사람이 성령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 지을 근거 또한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런 영향들을 배척하는 영 분별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고뇌할 때에, 비참함에 대한 인식으로 울부짖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때로는 성도들에게서 신체적 힘을 약화시키면서 천국을 맛보게 하시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성경과
이성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생기는 신체의 특이한 현상을 반대하지 않는다. 제자들처럼 무서움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어 힘이 다 빠지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열광주의자들이 보통 신체에 큰 영향을 가진다는 이유로, 신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을 반박할 필요는 없다.
셋째로, 소동과
종교에 대한 큰 잡음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은 참으로 위대하기 때문에 미지근하게 감동 받거나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아주 불합리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세상의
눈에 공개적으로 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 커다란 소요와 소동이 모든 곳에서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로,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에 커다란 인상들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묵상 가운데 수반되는 상상적인 생각 없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의 사고를 고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상상력을 주셨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적당하게 사용하면 마음의 다른 기능들을 보조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일종의 황홀경에 빠진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이 행한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사람의 사고가 집중되고, 정서가 강해지며, 영혼이 몰두하고 황홀케 되며
삼켜질 때는, 모들 체질이 녹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상상력을
통한 감각은 무조건 적인 신적 계시는 아니지만, 성령은 상상력을 통해 진리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주시기도 한다.
다섯째, 다른
사람의 모범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고 이루어진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모범을 통하여 영향을 받는 것은
성경에 부합하며 또한 합리적인 일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분발하게
했다고 해서, 그 효과의 선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모범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세계를 관찰했을 때에 명백한 사실이다. 부흥 시대에는
모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일이 많았고, 모범을 통한 영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영향의 보조
수단이다. 또한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여섯째, 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매우 신중하지 못하고 변칙적인
일들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양한 군중들이 혼합되어 있는 곳에서, 그들의 마음이 깊은 감명을 받을 때에, 그들 중에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예가 고린도 교회이다. 기적적인 은사와 성령의 영향력에 있어서 성령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 속에 변칙적인 이들과 혼돈이 있었다. 또한 베드로도 실수를 했다. 신자 속에 있는 어두움과 부패 때문에 실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또한
지나친 열심으로 인해 실수를 범하는 수도 많다.
일곱번째, 판단에
있어 많은 실수들이 있고 사단이 그 역사에 어떤 미혹들을 뒤섞어 놓았다고 해서, 그 역사 전체가
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도 은혜와 많은 부패가
함께 존재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가 같은 마음 안에 잠시 동안 함께 있다.
여덞번째, 소위
성령의 영향을 받았다는 몇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들을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
사역 전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성령 충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서도 배교자가 생길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 부흥의
시대, 그리고 청교도의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러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참된 역사가 영광스럽게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아홉번째,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공포가 강조되고, 격한 감정과 열정의 설교자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진행되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일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커다란 현실적인 재난인 지옥의 위기를 경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지옥은 무한히 두려운 곳이기 때문에, 냉담한 태도로 지옥을 설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순 되는
것이다. 또한 복음의 설교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 율법은
매우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 겁을 주어서라도 지옥에 대해서 경고해 주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게 해 주는 적극적인
증거를 통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어떠한 영적인 역사도 현혹되는 위험이 없이 판단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이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확신하게 되고 공고히 나타난다면, 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확실한 표징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촉진시키는 영은 성령이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인정하게 하는 영은 성령이시다. 반면에 마귀는, 예수님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절대 높이지 않으며, 예수님을 높이는 영은 오직 성령이시다.
둘째로,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세상을 미워하도록 하며, 마귀는 세상을 사랑하도록 한다. 세상이라는 말은, 죄의 욕심에 속한 모든 것이며, 마귀는 이 세상에
속한 영이다. 반면에 성령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게 하신다. 사단은
사람의 죄와 양심을 깨우치는 일을 하지 않으며, 또한 양심이 각성된 사람일수록 마귀에게 미혹될
확률이 적다. 양심을 깨우치고 죄의 악함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을
추구하게 만들며, 하나님 나라의 탁월함으로 세상 욕망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성령님이시다.
셋째로,
성령은 성경을 존중하게 하고, 성경을 사랑하도록 하신다.
반면에 마귀는, 그의 거룩한 책, 즉 성경에
대하여 언제나 치명적인 악의와 증오를 보인다. 넷째로,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를 드러내 주고,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 즉
영의 작용 방식이 진리의 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 영이 바르고 참된 영이라고 안심하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사단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다.
다섯째로, 사랑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고 있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표징이다. 성령은 사람들을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으로
이끈다. 참 사람의 모조품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는 겸손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원수들에게까지
향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겸손은, 마귀의
영과 가장 반대되는 성령의 특징이다. 이러한 사랑의 표지들은, 마귀가
하려고도 하지 않고 또 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지금에 일어나고 있는 비상한 영향력은, 전체적으로 봐서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제시한 기준으로 볼때, 성령의 역사가 틀림 없으며, 또한 많은 이들의 관찰을 통해서, 그리고 직접
그들과 교제하고 관찰한 결과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죄의 비참함을 사람들이 깨달았으며, 그들은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죄와 심판에 대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큰 신체적인 영향력을 받은 것이었고, 잠시 예배 순서가
중단된 적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각성케 하심으로 그러한 현상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은 혼란이나 방해라고 여길 수 없다.
현재의 부흥은 사도 요한이 제시한 표지와
동일하며, 하나님의 역사라도 처음부터 완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이들은, 예전과 다른 새로운
성격의 기쁨을 느끼고 있고, 과거와 비교할 때에 훨씬 위대한 하늘과의 교통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방해하거나 저지하는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던 자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
이들은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되었다. 지금 일어나는 역사는, 본질적으로
초림 때의 성령의 역사와 동일하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은헤가 나타났는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임하셨다고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걸림돌을 만나게 될 것이고, 영광스러운 개혁을
위해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지만, 그들은 정작 개혁이 온다면 인정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을 것이
틀림 없다. 또한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단순히
의심할 뿐만 아니라, 자세하게 관찰하고 부지런하게 조사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 현재 부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며, 부흥을
찬성하는 편에 서지 않는 것 역시 부흥을 반대하는 편에 서는 것과 동일하다.
성령의 역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촉진시키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모든 실수와 비행을 피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주의하여야 한다. 겸손과 자기 부인, 그리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책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이, 충동과 강한 인상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었지만, 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운 영향력과는 상당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충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의 이유는, 다가올 교회의 영광의 시대에 특이한 은사들이 회복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영향력은, 성령의 은혜이지 특이한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은사가, 성령의 평상적이고 거룩하게 하시는 영향력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신적인 사랑으로 전달하시며, 그것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시기의 특징은, 기적적인 은사들의 회복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과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기쁨을 자아내시는 성령 하나님의 영향력이다. 영감이 아니라 인간적인 학문에 힘을 써야 한다. 지식이 많아지는 만큼, 원하는대로 선을 행하는
것이 쉬워진다. 다른 사람을 함부러 판단하지 말고, 그들의
회심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또한 너무 화를 내거나 대적들과 논쟁해서는 안된다. 또한 본질상 상당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사람들에게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서 하는 것이 좋다.
3. 비평적 평가
이 책의 탁월한 점은, 참된 부흥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성도들의 순간적인 반응만을 가지고 부흥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소극적인 증거들을 먼저 살펴보고,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적극적인 증거를 살펴 보았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어떤 현상이 참된 부흥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잘 제시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씀한 영광스러운 개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면, 그것을 위해 기도하여도 실상 그것은 모르는 것을 그저 추상적으로 기도하는
것일 뿐이다(173). 중요한 것은, 정확한
기준을 이해할 때에, 성령의 역사를 더욱 간절히 사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영들을 시험해야 한다는 저자의 권면은
지금 한국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46). 흥미로운 것은, 소극적인 혹은 중립적인 기준과 적극적인 기준을 구분하는 것이, 사단이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성령께서 반드시 그 일을 하시는가 하지 않는가로 구분하였다는
점이다. 즉 사단은 소극적인 9가지 증거들은
일으킬 수 있지만, 적극적인 5가지 증거들은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소극적인 9가지
기준은 성령님께서 만들어내시기도 하지만, 적극적인 5가지
증거들은 오직 성령님만이 만들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일인 부흥을, 영적 존재인 사단과 성령의 역사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어떠한 부흥의 역사를 평가할 때에 가장 적합한 판단 기준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마치, 애굽의 술사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내었지만, 결국 물러가고 말았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나게 한다.
성령의 비범하게 역사하심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조용한” 역사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비범하고 특별한 일 그리고 몸에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중립적인 기준으로 놓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을 것이 틀림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의 눈에 이것은 광신도들의, 이성을 잃은 채 황홀경에 빠져서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분명히, 성령 하나님이 부어지실 때에, 그 역사의 방식이
비범하다고 말한다(56). 또한 지옥의 경고 앞에서 몸에 특별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도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60).
그렇다면 냉담하고 지식 중심적인 교회 가운데
이것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비록 이 현상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중립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가운데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거나 터부시 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일 수도 있다는 경각심과 기대감을 동시에 가지고 면밀하게 그 영의 영향력을 관찰하려고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준은, 성령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좀더 넓은 가능성의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성령의 영향력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 나오는 비정상적인 행동이, 중립적인 기준이 된다는 것 역시 매우 놀랍다. 이것을 통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소위 “완전주의” 를 배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린도 교회 그리고 베드로도
실수를 했다는 것을 지적한다(85).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러한 성도들의 완전치 못함이, 반드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새 사람과 옛 사람이 같은 사람 안에 공존한다.(92)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사람들 가운데 실수가
나올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것이고, 부흥이라는 것을 때로는 완전한 급진적인 변화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부흥에 대한 상식에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무엇인가 불완전하고 부족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성도가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되고, 그런 상황에서 조차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를 진술하면서, 그
첫째를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영이 역사할 때에 바로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제시한 것은 매우 탁월하다(109). 그리고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존경심과
애정을 나타내면서 선언하는 것이라는 그의 정의 역시 매우 유용하다(110).
이러한 기준은 특별히 최근에 한국에서 급격히
세를 확장하고 있는 이단들을 볼 때에 더욱 그 가치를 드러낸다. 만약 이단이 부흥하는 이유가, 진정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 모임
안에 오직 그리스도가 높아져야 한다. 그분을 향한 독점적인 애정과 사랑과 존경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가 사랑과 존경과 애정을 독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이다.
또 다른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 가운데, 사단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하고 양심을 깨우치는 일에 힘쓰지 않으며, 오직
성령만이 그렇게 하신다라는 것은, 목회 가운데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을 살피며, 우리가 참된 성령의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는 탁월한 기준이 된다(116).
교회에 다니면서 성도라고 말하면서, 거짓과 기만으로 자신의 양심을 덮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못하며 양심에 화인을 맞은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히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들이 틀림 없다. 오직 죄에 예민하며, 양심이
살아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준을 통해서 확인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떤 이에게 역사하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표징이라 말한다(128).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충격적이다. 물론 사랑이
중요하다. 그러나 소위 “사역”이 훨씬 중요하지 않은가? 부흥이라 부르는 많은 집회들 가운데, 만약 그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살아나지 않으면 분명히 그것은 거짓
부흥이 틀림 없다.
중요한 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종교적인 그 어떤 외적인 아니라, 우리의 삶의 가장 작은 부분들과 내면의 변화라는
점이다. 다툼을 억제하고, 화평과 우호가
일어나고, 외적인 행동이 친절해 지고, 다른
이들의 영혼의 구원을 열렬히 바라는 것이다(131). 그것은 겸손한 사랑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133).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적은, 어떠한
종교적인 일을 행하는 의미로서의 사역이라는 용어에 익숙한 나 자신이 그리고 한국 교회가, 성령의
역사하심의 확실한 성경적 표지인 사랑을 향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4. 결론
이 책은, 부흥을
실제로 경험했을 때에, 그것이 정말 성령 하나님의 역사인지 아닌지에 대한 탁월한 기준들을 제시한다. 이 기준들은 자기 자신의 영적인 현상에 대하여 또한 공동체가 경험하는 영적인 현상에 대하여 분석적
적용이 가능한 기준들이다.
특별히 부흥이라는 맥락 가운데 외적인 규모와 현상들을 강조해 왔던 한국 교회 가운데, 그리고 이단이 부흥의 모습을 위장하여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는 이 때에, 진정한
부흥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며,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며, 성경과 진리에 대한 관심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
지는 것임을 정확하게 지적함으로써, 부흥을 사모하는 성도가, 그리고
앞으로 한국 교회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바가 무엇인지 그 방향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은, 예일대 졸업식 설교를 확대하여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저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미국 교회사 가운데 최고의 신학자 그리고 철학자이며 18세기 부흥 운동의 주역이다.
이 책은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는 역사적인 부흥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부흥시 발생하는 여러 현상들로 인해 부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일어난 참된 부흥임을 논증하는 것이다.
2. 요약
사도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엄청나게 부어진 시대였다. 그러나 모조품들도 동시에 많이 나왔다. 그러므로 참된 영과 거짓 여을 분별할 수 있는 어떤 분명한 규칙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표지들이 필요했다. 그것이 요한일서 4장의 목적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데 있어서 증거가 될 수 없는 소극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주 비범하고 특별하게 일어난 일, 즉 어떤 일이 일상적이지 않고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비범하게 일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롭고 특이한 역사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과 작용이
특별하다고 해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죄의 본성에 대해서 비범하게 깨닫게 될 때에, 아주
비범한 정서들이 솟아나는 일이 있다고 할 때, 그 일들이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성경적 표지들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그 역사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특이하고 비범한 역사라 할지라도, 그 본질이 성경의 표지들과 일치한다면 성령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사도 시대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만일 매우 특이한 역사는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옳다면, 항상 그러해야 하고 사도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도 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많은 면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났다. 또한 성경은 마지막 성령의 부으심이 있을 때, 그 방식이 아주 비범하여 새로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둘째로, 몸에 일어나는 특이한 증상들에 의해서는, 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이 참된 성령의 표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은 아니기 대문이다. 또한 어떤 외적인 모습을 보고서, 그 사람이 성령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 지을 근거 또한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런 영향들을 배척하는 영 분별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고뇌할 때에, 비참함에 대한 인식으로 울부짖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때로는 성도들에게서 신체적 힘을 약화시키면서 천국을 맛보게 하시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성경과 이성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생기는 신체의 특이한 현상을 반대하지 않는다. 제자들처럼 무서움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어 힘이 다 빠지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열광주의자들이 보통 신체에 큰 영향을 가진다는 이유로, 신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을 반박할 필요는 없다.
셋째로, 소동과 종교에 대한 큰 잡음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은 참으로 위대하기 때문에 미지근하게 감동 받거나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아주 불합리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세상의 눈에 공개적으로 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 커다란 소요와 소동이 모든 곳에서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로,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에 커다란 인상들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묵상 가운데 수반되는 상상적인 생각 없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의 사고를 고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상상력을 주셨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적당하게 사용하면 마음의 다른 기능들을 보조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일종의 황홀경에 빠진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이 행한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사람의 사고가 집중되고, 정서가 강해지며, 영혼이 몰두하고 황홀케 되며 삼켜질 때는, 모들 체질이 녹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상상력을 통한 감각은 무조건 적인 신적 계시는 아니지만, 성령은 상상력을 통해 진리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주시기도 한다.
다섯째, 다른 사람의 모범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고 이루어진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모범을 통하여 영향을 받는 것은 성경에 부합하며 또한 합리적인 일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분발하게 했다고 해서, 그 효과의 선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모범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세계를 관찰했을 때에 명백한 사실이다. 부흥 시대에는 모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일이 많았고, 모범을 통한 영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영향의 보조 수단이다. 또한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여섯째, 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 매우 신중하지 못하고 변칙적인 일들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양한 군중들이 혼합되어 있는 곳에서, 그들의 마음이 깊은 감명을 받을 때에, 그들 중에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예가 고린도 교회이다. 기적적인 은사와 성령의 영향력에 있어서 성령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 속에 변칙적인 이들과 혼돈이 있었다. 또한 베드로도 실수를 했다. 신자 속에 있는 어두움과 부패 때문에 실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또한 지나친 열심으로 인해 실수를 범하는 수도 많다.
일곱번째, 판단에 있어 많은 실수들이 있고 사단이 그 역사에 어떤 미혹들을 뒤섞어 놓았다고 해서, 그 역사 전체가 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도 은혜와 많은 부패가 함께 존재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가 같은 마음 안에 잠시 동안 함께 있다.
여덞번째, 소위 성령의 영향을 받았다는 몇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들을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 사역 전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성령 충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서도 배교자가 생길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 부흥의 시대, 그리고 청교도의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마귀가 그러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참된 역사가 영광스럽게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아홉번째,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공포가 강조되고, 격한 감정과 열정의 설교자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진행되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일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커다란 현실적인 재난인 지옥의 위기를 경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지옥은 무한히 두려운 곳이기 때문에, 냉담한 태도로 지옥을 설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순 되는 것이다. 또한 복음의 설교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 율법은 매우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 겁을 주어서라도 지옥에 대해서 경고해 주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게 해 주는 적극적인 증거를 통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어떠한 영적인 역사도 현혹되는 위험이 없이 판단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이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확신하게 되고 공고히 나타난다면, 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확실한 표징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촉진시키는 영은 성령이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인정하게 하는 영은 성령이시다. 반면에 마귀는, 예수님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절대 높이지 않으며, 예수님을 높이는 영은 오직 성령이시다.
둘째로,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세상을 미워하도록 하며, 마귀는 세상을 사랑하도록 한다. 세상이라는 말은, 죄의 욕심에 속한 모든 것이며, 마귀는 이 세상에 속한 영이다. 반면에 성령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게 하신다. 사단은 사람의 죄와 양심을 깨우치는 일을 하지 않으며, 또한 양심이 각성된 사람일수록 마귀에게 미혹될 확률이 적다. 양심을 깨우치고 죄의 악함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을 추구하게 만들며, 하나님 나라의 탁월함으로 세상 욕망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성령님이시다.
셋째로, 성령은 성경을 존중하게 하고, 성경을 사랑하도록 하신다. 반면에 마귀는, 그의 거룩한 책, 즉 성경에 대하여 언제나 치명적인 악의와 증오를 보인다. 넷째로,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를 드러내 주고,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 즉 영의 작용 방식이 진리의 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 영이 바르고 참된 영이라고 안심하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사단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다.
다섯째로, 사랑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고 있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표징이다. 성령은 사람들을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으로 이끈다. 참 사람의 모조품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는 겸손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원수들에게까지 향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겸손은, 마귀의 영과 가장 반대되는 성령의 특징이다. 이러한 사랑의 표지들은, 마귀가 하려고도 하지 않고 또 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지금에 일어나고 있는 비상한 영향력은, 전체적으로 봐서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제시한 기준으로 볼때, 성령의 역사가 틀림 없으며, 또한 많은 이들의 관찰을 통해서, 그리고 직접 그들과 교제하고 관찰한 결과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죄의 비참함을 사람들이 깨달았으며, 그들은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죄와 심판에 대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큰 신체적인 영향력을 받은 것이었고, 잠시 예배 순서가 중단된 적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각성케 하심으로 그러한 현상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은 혼란이나 방해라고 여길 수 없다.
현재의 부흥은 사도 요한이 제시한 표지와 동일하며, 하나님의 역사라도 처음부터 완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이들은, 예전과 다른 새로운 성격의 기쁨을 느끼고 있고, 과거와 비교할 때에 훨씬 위대한 하늘과의 교통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방해하거나 저지하는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던 자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 이들은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되었다. 지금 일어나는 역사는, 본질적으로 초림 때의 성령의 역사와 동일하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은헤가 나타났는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임하셨다고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걸림돌을 만나게 될 것이고, 영광스러운 개혁을
위해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지만, 그들은 정작 개혁이 온다면 인정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을 것이
틀림 없다. 또한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단순히
의심할 뿐만 아니라, 자세하게 관찰하고 부지런하게 조사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 현재 부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며, 부흥을
찬성하는 편에 서지 않는 것 역시 부흥을 반대하는 편에 서는 것과 동일하다.
성령의 역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촉진시키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모든 실수와 비행을 피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주의하여야 한다. 겸손과 자기 부인, 그리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책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이, 충동과 강한 인상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었지만, 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운 영향력과는 상당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충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의 이유는, 다가올 교회의 영광의 시대에 특이한 은사들이 회복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영향력은, 성령의 은혜이지 특이한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어떤 은사가, 성령의 평상적이고 거룩하게 하시는 영향력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신적인 사랑으로 전달하시며, 그것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시기의 특징은, 기적적인 은사들의 회복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과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기쁨을 자아내시는 성령 하나님의 영향력이다. 영감이 아니라 인간적인 학문에 힘을 써야 한다. 지식이 많아지는 만큼, 원하는대로 선을 행하는 것이 쉬워진다. 다른 사람을 함부러 판단하지 말고, 그들의 회심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또한 너무 화를 내거나 대적들과 논쟁해서는 안된다. 또한 본질상 상당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사람들에게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서 하는 것이 좋다.
3. 비평적 평가
이 책의 탁월한 점은, 참된 부흥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성도들의 순간적인 반응만을 가지고 부흥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소극적인 증거들을 먼저 살펴보고,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적극적인 증거를 살펴 보았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어떤 현상이 참된 부흥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잘 제시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씀한 영광스러운 개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면, 그것을 위해 기도하여도 실상 그것은 모르는 것을 그저 추상적으로 기도하는 것일 뿐이다(173). 중요한 것은, 정확한 기준을 이해할 때에, 성령의 역사를 더욱 간절히 사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영들을 시험해야 한다는 저자의 권면은 지금 한국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46). 흥미로운 것은, 소극적인 혹은 중립적인 기준과 적극적인 기준을 구분하는 것이, 사단이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성령께서 반드시 그 일을 하시는가 하지 않는가로 구분하였다는 점이다. 즉 사단은 소극적인 9가지 증거들은 일으킬 수 있지만, 적극적인 5가지 증거들은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소극적인 9가지 기준은 성령님께서 만들어내시기도 하지만, 적극적인 5가지 증거들은 오직 성령님만이 만들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일인 부흥을, 영적 존재인 사단과 성령의 역사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어떠한 부흥의 역사를 평가할 때에 가장 적합한 판단 기준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마치, 애굽의 술사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내었지만, 결국 물러가고 말았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나게 한다.
성령의 비범하게 역사하심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조용한” 역사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비범하고 특별한 일 그리고 몸에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중립적인 기준으로 놓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을 것이 틀림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의 눈에 이것은 광신도들의, 이성을 잃은 채 황홀경에 빠져서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분명히, 성령 하나님이 부어지실 때에, 그 역사의 방식이 비범하다고 말한다(56). 또한 지옥의 경고 앞에서 몸에 특별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도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60).
그렇다면 냉담하고 지식 중심적인 교회 가운데 이것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비록 이 현상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중립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가운데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거나 터부시 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일 수도 있다는 경각심과 기대감을 동시에 가지고 면밀하게 그 영의 영향력을 관찰하려고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준은, 성령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좀더 넓은 가능성의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성령의 영향력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 나오는 비정상적인 행동이, 중립적인 기준이 된다는 것 역시 매우 놀랍다. 이것을 통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소위 “완전주의” 를 배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린도 교회 그리고 베드로도
실수를 했다는 것을 지적한다(85).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러한 성도들의 완전치 못함이, 반드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새 사람과 옛 사람이 같은 사람 안에 공존한다.(92)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사람들 가운데 실수가 나올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것이고, 부흥이라는 것을 때로는 완전한 급진적인 변화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부흥에 대한 상식에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무엇인가 불완전하고 부족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성도가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되고, 그런 상황에서 조차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를 진술하면서, 그 첫째를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영이 역사할 때에 바로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제시한 것은 매우 탁월하다(109). 그리고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존경심과 애정을 나타내면서 선언하는 것이라는 그의 정의 역시 매우 유용하다(110).
이러한 기준은 특별히 최근에 한국에서 급격히 세를 확장하고 있는 이단들을 볼 때에 더욱 그 가치를 드러낸다. 만약 이단이 부흥하는 이유가, 진정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 모임 안에 오직 그리스도가 높아져야 한다. 그분을 향한 독점적인 애정과 사랑과 존경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가 사랑과 존경과 애정을 독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이다.
또 다른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 가운데, 사단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하고 양심을 깨우치는 일에 힘쓰지 않으며, 오직 성령만이 그렇게 하신다라는 것은, 목회 가운데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을 살피며, 우리가 참된 성령의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는 탁월한 기준이 된다(116).
교회에 다니면서 성도라고 말하면서, 거짓과 기만으로 자신의 양심을 덮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못하며 양심에 화인을 맞은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히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들이 틀림 없다. 오직 죄에 예민하며, 양심이 살아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준을 통해서 확인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떤 이에게 역사하는 영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표징이라 말한다(128).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충격적이다. 물론 사랑이 중요하다. 그러나 소위 “사역”이 훨씬 중요하지 않은가? 부흥이라 부르는 많은 집회들 가운데, 만약 그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살아나지 않으면 분명히 그것은 거짓 부흥이 틀림 없다.
중요한 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종교적인 그 어떤 외적인 아니라, 우리의 삶의 가장 작은 부분들과 내면의 변화라는 점이다. 다툼을 억제하고, 화평과 우호가 일어나고, 외적인 행동이 친절해 지고, 다른 이들의 영혼의 구원을 열렬히 바라는 것이다(131). 그것은 겸손한 사랑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133).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적은, 어떠한 종교적인 일을 행하는 의미로서의 사역이라는 용어에 익숙한 나 자신이 그리고 한국 교회가, 성령의 역사하심의 확실한 성경적 표지인 사랑을 향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4. 결론
이 책은, 부흥을 실제로 경험했을 때에, 그것이 정말 성령 하나님의 역사인지 아닌지에 대한 탁월한 기준들을 제시한다. 이 기준들은 자기 자신의 영적인 현상에 대하여 또한 공동체가 경험하는 영적인 현상에 대하여 분석적 적용이 가능한 기준들이다.
특별히 부흥이라는 맥락 가운데 외적인 규모와 현상들을 강조해 왔던 한국 교회 가운데, 그리고 이단이 부흥의 모습을 위장하여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는 이 때에, 진정한 부흥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며,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며, 성경과 진리에 대한 관심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 지는 것임을 정확하게 지적함으로써, 부흥을 사모하는 성도가, 그리고 앞으로 한국 교회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바가 무엇인지 그 방향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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