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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9일 목요일

저는 설교 본문이 길어도, 다 함께 읽고 싶습니다 / 사무엘상 8장 1-22절 설교

 


제가 섬기는 교회는 매일 성경 본문을 새벽 설교 본문으로 삼고 예배를 드립니다. 설교자에게는 꾸준하게 다양한 본문을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성도님들에게는 균형 잡힌 신앙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소 수동적으로 본문이 주어지기 때문에 언제나 기대감이 있습니다. 과연 이번주는 어떤 본문으로 설교하게될까, 또 어떤 은혜를 내려주실까 그런 기대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문이 주어질 때에 늘 고민하게 되는 것은 "과연 설교 본문을 끝까지 다 읽을 것인가" 입니다.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이 설교 본문이 길 때에 일부분만 읽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앞 부분만 읽든지, 뒷 부분만 읽든지, 앞에 조금 뒤에 조금을 읽든지, 혹은 가장 중요한 부분만 읽든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추측할 때에는, 한정된 예배 시간을 조절해서 조금이라도 설교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 크게 아쉬운 것은, 이렇게 본문의 일부분만 읽는 것은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신앙 혹은 설교의 목표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그 자체" 입니다. 어떤 설교자의 어떤 위대한 설교도, 감히 성경 말씀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의 설교문 자체보다, 성경 본문 그 자체를 성도님들이 더 중시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가 성경 본문의 일부분만 읽는다면, 마치 성경은 적당한 부분만 읽어도 저의 설교를 들으면 성경 자체를 대해본 것 보다 훨씬 낫다라는 인상을 성도님들이 받을까 크게 염려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고민은 "혼자 읽을 것인가, 교독할 것인가, 아니면 합독할 것인가"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저에게 어떤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한 분은 아직 없었습니다. 보통은 주일 예배 때에는 목회자가 혼자서 봉독을 하고, 다른 예배 때에는 목회자와 성도가 돌아가면서 읽는 교독을 하는 듯 합니다. 최근에는 합독이 드물어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염려하는 것은, "성경 본문을 어떤 방식으로 읽을 것인가"가 예배의 영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목회자가 봉독을 하는 경우, 마치 예배의 시간이 목회자 혼자서 쇼를 이끌어가는 느낌을 줄까 염려가 됩니다. 

성도는 함께 예배드리는 자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배의 형태가 성도 자신은 자리에 앉아서 매우 수동적으로, 단지 누군가가 읽어주는 성경을 듣기만 한다면, 자신이 예배자가 아니라 단지 청중이라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혼자서만 성경을 봉독한다면, 마치 목회자만 예배 중에 혹은 중요한 시간 중에 성경을 소리내어 읽을 자격이 있는 것이며, 성경을 소리내어서 읽는 것이 소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일이라고 은연중에 마음에 심어줄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는 것이 목회자만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교회 전체에 주어진 것이며 목회자를 포함해서 우리는 함께 그 공통된 하나님의 계시를 소유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예배 시간마다 진실하게 함께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도님들께서 직접 성경을 자신의 입으로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라도 그 의미와 맥락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서 읽으면서, 설교자인 제 자신이 이미 성경을 아주 소중하게 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성도님들의 마음 속에 깊이 남기고 싶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무리 주어진 본문이 길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성도님들과 합독을 합니다. 물론 저 혼자서 소리내어 읽으면 훨씬 더 빠르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연세 드신 분들 중에 천천히 읽으시는 분들도 염두에 두고 배려하면서 속도를 적당히 조절합니다. 처음부터 정성을 들여서 읽기 시작하고 마지막 단어가 끝나는 순간까지 최대한 집중해서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본문이 정말 너무 길다면, 차라리 저의 설교의 길이를 줄여서 전체 예배 시간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주 동안 본문이 길었는데, 성경 말씀을 함께 읽을 때에 어떤 감동이 있습니다. 온 예배당 안을 울려 펴지는 성도들의 성경을 읽는 소리를, 세상의 그 무슨 소리와 감히 비교할 수 있을까요? 강대상에서 성경을 함께 읽으며 저 역시 그 소리 속에 동참할 때에, 마치 가을의 가장 신선한 바람을 온 몸으로 경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 흥미롭고 또 좋았습니다. 예배에 모인 분들은 삶의 모든 부분이 다른 각자의 개별적인 사람들이지만, 성경을 함께 읽는 그 시간만큼은 하나의 목소리로 하나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읽는 것이기에 매우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본문을 읽으면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확인하고 함께 설교를 들을 준비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단순히 일반적인 책을 함께 읽을 때에 목소리가 일치하는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깊은 영적인 감동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요즘, 설교자는 단순히 설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설교자는 영적인 지도자이고, 영적인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 본문을 어떤 태도로 어떤 분량 만큼 어떤 형태로 읽을 것인가" 역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요즘에 새롭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특별히 이유가 생기지 않는한 앞으로도 "긴 설교 본문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합독하여서 본문을 읽는 진지한 시간"을 저의 목회의 중심적인 축으로 삼고 계속해서 가지고 싶습니다.

* 사무엘상 8장 1-22절 설교문

오늘의 말씀은, 늙어가는 사무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사 시대가 저물어 가고 새로운 왕정 시대를 열어가는 전환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전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8장 1절에서 9절까지인데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이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21절까지인데, 인간 왕에 대한 경고라고 소제목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이 내용으로 함께 말씀 나누기를 원합니다.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짧은 말씀 안에 굉장히 의미 심장한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도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도 나이가 들고 사사의 역할을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무엘이 자신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이 부분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사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셨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무엘은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시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나서서 아들들을 사사로 세운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사무엘조차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람이었습니다. 브엘세바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남쪽 지역에서 자신의 아들들이 사사로 일하도록 세운 것입니다. 

성경은 사무엘의 행동에 대해서 평가하지는 않지만, 그 결과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서 그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무엘이 원하는대로 자신 아들을 사사로 세웠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지 않으심으로 허락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3절에 보니 “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직책과 권력을 사용하는 불량배들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아주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4절에 보니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리고 5절에 보니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뭔가 굉장히 이상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의 아들들은 브엘세바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무엘 앞에는 온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인 것입니다. 사무엘을 압박하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타락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말씀만 보았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온 장로들이 매우 지혜롭고 또 이스라엘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놀라운 이야기가 이어서 나옵니다. 5절 하반절입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지금 사무엘과 아들들이 보여준 상황과 이 장로들의 요구가 제대로 연결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 그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사실 자연스러운 반응은 이런 것입니다. “사무엘이여, 안타깝게도 당신이 늙고 아들들은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함께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장로들은 금식하면서 당신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혹은 “사무엘이여, 아무래도 당신의 아들들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족을 세운 것은 성급한 결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서 새로운 사사를 세우는 것이 이스라엘을 다시 한번 영적으로 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도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로들의 대사가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들의 교묘함과 교활함이 아주 놀랍지 않습니까? 이들은 사무엘의 약점과 부끄러움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전혀 이 일과 상관 없는 주장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마치 짜여진 각본대로 행동하는 범죄자처럼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어떤 사람을 대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 마음이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 참 대하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과 그 마음이 전혀 다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할 때에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교활하여서 자신의 말 속에 자신의 마음을 감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장로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감추고 있습니다. 사실 이 왕정 제도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언젠가 세워질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자기 왕을 세우라고 하는 것인가? 도대체 이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길래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는가 바로 그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할 것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자신의 말로 마음을 감추며 상대방을 기만할 수 있지만, 살아계신 여호와 앞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크게 마음이 상해서 여호와께 기도할 때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장로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들의 악한 본심을 낱낱이 알려 주셨습니다. 7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지금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온 것은, 결국 그들이 그럴 듯한 말을 하면서 사무엘에게 나온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고 하나님 대신에 인간 왕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마음 깊숙한 본심을 완전히 꽤 뚫어보셨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과 백성들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께 반역을 꾀하며 그분을 버리겠다고 공공연하게 선포를 한 것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이 정말 놀라운 것은, 오늘 사무엘상 8장 앞에 있는 7장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7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회개의 운동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오직 여호와께 돌아오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서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친히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7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있었고 그들은 우상을 버렸고 하나님께 돌아왔으며, 그들은 오늘 말씀의 이 시점에서 놀라운 평화의 시기를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안타깝게도 과거의 악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겉으로 보이는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은 버렸는지 몰라도, 마음 안에서 새로운 우상을 다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왕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나라처럼 왕만 있다면 그들의 나라가 더 부강해 질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과 때는 전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칠 것을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왕정 제도를 택하지 않도록 이스라엘 백성이 정신차리고 다시 하나님을 찾도록 그렇게 설득하고 있는 것을 말씀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11절 부터 인간 왕정 제도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정 제도의 부정적인 부분을 아주 적나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왕은 어떤 존재인가? 백성의 어떤 것을 다 가져가는 존재이다 라는 것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절에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13절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14절에 “너희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15절에 “소산의 십일주를 거두어”, 16절에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17절에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왕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가져가고 자기를 위하여 백성과 재산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해도, 장로들과 온 백성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입니다. 19절과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온 백성이 자신의 욕심으로 인하여 눈이 완전 멀어버렸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평화의 시기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을 위하여 싸워줄 왕이 필요하다 다른 나라처럼 우리도 왕이 있어야겠다 라면서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고 여호와의 다스림을 거절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이 아닌 또 다른 왕이라는 우상을 섬기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무엘의 호소와 조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모든 상황을 다시 한번 하나님께 고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왕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악 된 본질은, 참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끊임없이 우상을 찾아나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7장에서 참된 회개와 영광스러운 부흥이 기록된 이후에,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은 안심 했는지도 모릅니다. “자 우리를 한번 보라 너무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는 바알과 아스다롯의 모든 우상을 버렸고 부흥을 맛보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드디어 평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정말 우리는 대단한 사람이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 땅의 부흥이라는 것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인간은 얼마든지 옛날의 습관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명백한 우상은 버렸을런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거절하고 그분을 멀리하는 마음이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왕을 찾는 그들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이 땅에서 경험하는 영적인 부흥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죄인은 끊임없이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을 멀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은 그럴 듯 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무엘이 늙었습니다 큰일입니다, 지금 사무엘의 아들들이 타락했습니다 큰일입니다, 온 나라가 너무나 걱정이 됩니다 라고 청산유수처럼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을 멀리하고자하는 자신의 탐욕을 은근 슬쩍 들이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타락한 마음과 이중성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사무엘을 찾아갔던 장로들이 집으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속으로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자신들도 왕을 가지게 되었다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더 이상 하나님께 얽매일 필요 없다고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의 운명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많은 왕들이 세워질 것인데 그들 중에 정말 백성을 아끼고 위하는 왕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무엘의 경고처럼 백성을 자신을 위하여 부려먹고 사용하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는 아주 강권적으로 우리의 삶의 앞길을 인도하시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을 사용하십니다.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인생이 술술 풀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축복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 하십니까? 시편 106편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라고 말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다 이루어졌다고 그것 자체만 가지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정말 내 영혼의 갈망과 삶의 선택들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를 말씀에 비추어 깊이 고민하고 그것을 위하여 힘써 노력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 속에서 크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갈망하게 합니까?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다스림과 그 가치를 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착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하나님이 계획하셨던 왕의 모습과 그들이 주장하던 다른 나라의 왕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왕은 본질적으로 백성의 것을 가져가고, 인간의 왕은 그 백성을 궁극적으로 책임져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왕이신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시며, 그 아들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 완전한 다스림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 안에서, 인간 역사상 그 누구도 이룬 적 없는 가장 완벽한 왕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영광 중에 거하시며 모든 것을 다 가지신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삶 전체와 피 한방울 아끼지 않으시고 죄인을 대신하여서 다 쏟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되신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10절과 11절입니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누구이며 교회는 무엇입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신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하며 무릎을 꿇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요구는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공허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왕이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가며 그분을 섬기는 자를 주님께서 귀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명예롭게 여기시며 존중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왜 감히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그분을 따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다른 왕과 전혀 다르게 친히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진정한 왕으로 자신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한 없는 사랑으로 참된 샘명의 길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오직 우리가 섬길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고 침범하는 우상을 다시 한번 물리치고,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을 섬기며 그분과 힘써 동행하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시간에 말씀을 놓고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의 입술과 저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셔서 거짓과 기만을 버리게 하여주시옵소서. 여호와를 멀리하려는 온갖 그럴듯한 변명을 버리게 하시고 저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을 돌이켜서 오직 되신 주님 앞에 나오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 희생하시며 아낌없이 사랑을 부어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은혜의 깊이를 회복하며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 놓기를 원합니다. 적극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복된 성도 복된 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2021년 12월 12일 일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시편 2편 / 떨며 즐거워함으로,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시편 2편에서는, 악한 통치자와 그의 나라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로 병든 세상의 기본적인 태도는, 유일한 참된 통치자이신 여호와께 대적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인간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며 여호와를 대적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고 있다는 표현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기름 부음은 왕, 제사장, 선지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맥락에서는 세상의 통치자를 향하여 진정한 왕이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주는 그리스도, 메시야이시다 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무게감은 쉽게 지나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이러한 인간의 대항에 웃으시며 비웃으십니다. 그리고 분노를 발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분노를 발하시기 전까지는 인간은 여호와를 향하여 헛된 일을 꾸몄지만, 이제 모든 세상은 하나님께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정한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십니다. 시온이라는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 GT 스터디 바이블이 잘 설명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의 이상적인 비전의 형태입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7-9절까지를 구속사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다윗의 가문에 속한 왕들조차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최종적인 다윗의 왕가에 속한 진정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다스림은 세상 끝까지 이루어질 것입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시편 2편을 보면서 풍성하게 신약과 연결 짓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직접 아들이라고 선포하신 분이시며, 다윗의 궁극적인 자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며 GT 바이블 저자의 탁월한 성경 이해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고 섬기지 않는 것은 멸망의 길입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지혜를 얻어야 하고 교훈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참된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그분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1절이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경외하고 섬기고, "떨며 즐거워해야"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 떨어여 합니다. 진정한 경외감이 없는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참된 기쁨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말씀합니다. 시편에 두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이 땅에 진정한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가장 가깝게 인격적으로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은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논리 자체는 아닙니다. 

요즘에 깊게 묵상하는 것은,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시며, 그것을 가장 실재적으로 느끼며, 예수님을 가장 친근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당신은, 떨며 즐거워함으로, 나의 구주 그리고 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입맞추고 있습니까?

In Psalm 2, we see clearly Jesus Christ who is the ultimate anointed one of God. He is the son of God, the true ruler, and savior. Apparently, the ruler of the world rejects and opposes Jesus Christ. However, the heavenly God installed his king on Zion, his holy hill. 

The core of Christianity is not logic. Of course, the Bible tells the truth logically. However, the fruit of our faith is the intimacy with Jesus Christ who is our true Lord, king, and savior. Therefore, the Bible commands us to kiss him. God installed his son on the Zion, and we will see Jesus will reign the whole world forever.

2021년 12월 5일 일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마태복음 2장 / 진짜 왕을 경배하라

 


GT 스터디 바이블은, 마태복음 1장과 2 사이에 대략 2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물론 2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호하시는 아버지의 주권적인 사랑이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언의 성취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저는 또 한편으로는 동방에서부터 온 박사들과 헤롯의 대조가 가장 크게 보입니다. 동방으로 부터 온 박사들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약의 가장 처음부터 성경은 예수님이야 말로 "경배" 받기 합당하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경배라는 말이 처음 등장할 때 부터, 예수님은 경배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경배를 거절하는 자들을 등장시킵니다. 헤롯은 말로는 경배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속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겉모습과 말 만으로는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박사들의 말을 듣고,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했다고 말씀합니다. NLT와 NirV가 번역이 너무 마음에 와 닿습니다. disturbed, very upset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진짜 왕이 나타난 것에 괴로워하고 분노하며 몸부림쳤습니다. 

결국 진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을 통해서, 우리는 진짜 믿음을 보게 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이 멈추었을 때에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어떤 분들은, 우리가 너무 감정에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완전히 동의합니다. 신앙은 감정에 취해서 분별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뻐할 때에 기뻐하는 것, 기뻐해야 하는 대상을 통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의 예배의 모든 순간이, 그리고 찬양의 순간이 기쁨으로 가득 차기를 진심으로 늘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짜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태어나시자 마자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역사적인 배경을 정말 놀랄만큼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이 정도로 글 쓰기를 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공부를 하고 연습을 해야 할까요? 크게 감탄합니다. 그 중에 설명하기를 헤롯도 그리고 그의 아들 아켈레오도 굉장히 잔인한 성격으로 유명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유대 땅의 분위기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폭정과 너무나 크게 대조되는 것이 예수님의 평화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었지만, 어린 아기와 아내를 데리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도망쳐야했던 요셉의 고난이 느껴집니다. 왕이시지만 동시에 고난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마치 축소하여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서 우리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  

I saw the big contrast between the wise men and King Herod. We see that they both want to worship Jesus who was born king of the Jews. The wise men did it. However, King Herod wanted to kill the real king. 

I want to focus the emotions in the deep soul of wise men. Bible says that they shouted joyfully. However, King Herod and his people were very upset. We cant to confirm who is the real Christian. We should test our feeling for Jesus Christ. 

King Herod and his son were the brutal kings who made people fear. But, Jesus is the king of peace. Since Jesus was a baby, he should flee from the brutal king and the threat of death. However, through the hardship of Jesus Christ, God will accomplish his will to save the sinners. 

2021년 6월 11일 금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 금요찬양교실 (35) - 겸손의 왕

 



1. 가사 살펴보기

(1) 겸손의 평범한 목수의 아들
종으로 오신 죄인을 섬기신 창조주
주의 거친 못이 찔렀고
주의 갈보리 오르셨네 

모든 내어 주신 주님
우리의 발을 씻겼네
주가 싫어 거역한 우릴 위해 고통 당했네
무엇을 위한 사랑인지 무엇을 바란 희생인지
당신은 사랑에 주님 

(2) 겸손의 머리 곳조차 없으신
종으로 오신 겸손 알기 원하네
허리 거절의 창이 찔렸고
음성 버리셨나요 

인간을 지은 하나님이 인간 손에 죽으셨네
주가 싫어 멸시한 우릴 위해 죽임 당했네
무엇을 위한 사랑인지 무엇을 바란 희생인지
당신은 사랑에 주님

 

2.  소개

 곡은천관웅 목사님의 1 앨범에 포함된 곡이다천관웅 목사님은 본격적으로 솔로로 활동하실 당시부터젊은이들의 마음에 다가갈 있는 파격적인 스타일과 멜로디를 통해 적극적으로 찬양을 만들고 보급하였다.

곡은 거의 20 곡이지만지금 들어도 매우 독특하면서도 세련된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그리고 겸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너무나 깊은 고백을 담고 있는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요한복음 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You call me 'Teacher' and 'Lord,' and rightly so, for that is what I am.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3:14 Now that I, your Lord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also should wash one another's feet.

제자들의 발을 씻는 예수님의 행위는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예수님은 그들의 스승이자 주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보다 높은 지위에 계셨습니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겸손과 봉사의 위치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의 발을 씻기라고 명하셨는데자신이 세운 모범에 따라 서로 사랑으로 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거부하고자신을 낮추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당신의 지위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을 예수님 위에 두는 것입니다그러한 교만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가 아닙니다.

Bruce Barton et al., Life Application New Testament Commentary (Wheaton, IL: Tyndale, 2001), 432.

요한1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4:9 This is how God showed his love among us: He sent his one and only Son into the world that we might live through him.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개역개정4:10 This is love: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n 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 (NIV)

사랑의 기준은 인간이 느끼는 그것이 아니라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그것입니다.

Robert W. Yarbrough, 1 John,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998.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했습니다우리는 우주의 왕에게 반항하는 바보였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그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당신은 친절하게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그들은 당신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Tony Evans, The Tony Eva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 2019), 1498.

 

4. 찬양에 대한 묵상

예수님께서는단순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겸손의 왕으로서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주님은 왕이시지만 겸손하신 분이시다 사실 하나만으로도이미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항복하게 된다가장 높으신 분께서 가장 낮은 곳에 오셨으며죄인을 섬기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너무나 바쁘게 살아가기 때문에우리는 우리의 삶과 기독교의 본질을 놓칠 때가 많이 있다의미 있는 그리고 기독교의 본질은 겸손과 사랑이다내가 어떤 사람인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그저 몸을 낮추어 어려운 이들을 섬기는 것이 참된 겸손이며 사랑이다.

찬양을 통해서 겸손의 왕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으며그리고 역시 나의 왕이 그러하셨 것처럼 그리고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처럼동일하게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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