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7일 금요일

완전한 아버지, 그분의 품에 거하라 / 사무엘하 12장 15-23절 설교

 

저는 원래 감동을 잘 받는 스타일입니다. :) 저의 이러한 성향이 성경적인 것인지는 깊게 고민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작은 것 안에서라도 큰 행복을 느끼고, 그 안에서 감사를 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팀켈러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 받고 혼자서 눈물을 종종 흘리고 있습니다. 혼자 차를 타고 오고가는 길이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내용을 이렇게 충실하게 설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떨립니다. 아, 은혜 받음의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마 평생 이 부분을 놓고 고민할 것입니다.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자신이 감동을 받아보는 경험은 너무나 중요한 듯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이 감동을 받지 못했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내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으라고 강요한다는 것은 명백한 논리적인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설교는 평소보다 짧았습니다. 새벽이라 길게하지는 않지만 조금 짧았습니다. 그래도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고심해서 준비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한주 내내 머리 속에 본문을 넣고 씨름했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스타일은, 주해적이지만 동시에 철학적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붙들고 있지만 그 본문의 지평을 넓혀주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엄격하게 말하자면, 신하들이 놀란 다윗의 태도가 더 핵심에 가야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설교에서, 죄에 대하여 싸우는 것 그리고 인간 아버지의 역설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해서 준비했고 마음에 흡족했습니다. 

이번 본문을 묵상하면서 다양한 스터디 바이블을 참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Faithlife Study Bible 에 대한 짧은 리뷰도 작성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 "갈수록 그 가치를 드러내다" - Faithlife Study Bible을 봐야만 하는 "네 가지 이유"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0/faithlife-study-bible.html

왜 신하들이 다윗에게 아들의 죽음을 말하기를 두려워했는가에 대한 설명들도 보았지만, 특별히 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설교는 주해를 가지고 와서 설명하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맥상 살짝 언급하고 지나갔을 분입니다. 다른 자료도 신하들의 염려를 언급 하지만기본적으로  바이블의 각주를 참조하였습니다.

tn Heb “he will do harm.” The object is not stated in the Hebrew text. The statement may be intentionally vague, meaning that he might harm himself or them!

Biblical Studies Press, The NET Bible, Second Edition. (Denmark: Thomas Nelson, 2019).

그리고 역시나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설교의  부분에 있어서 중요한 논리를 이끌어가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말도 안되는 방종과 은혜의 남용으로 흐를  있는 잘못된 태도를 막아주는 역할입니다.

The death of the child indicates that consequences for sin are necessary parts of God’s discipline (Ps. 94:12; Prov. 3:11–12; Heb. 12:5–11; Rev. 3:19). Even sorrow over sin and the resolution to turn from it do not exempt us from all its consequences. Sometimes erring children assume that simply telling their parents they are sorry for a bad behavior will excuse them from any disciplinary action. But learning that sin has consequences and then experiencing those consequences is itself a sanctifying process (Prov. 20:30). The best way to avoid sin’s consequences is to avoid sin. Why is it a mercy that God disciplines His people?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447–448.

설교의 후반부는, 최근에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개인적으로 공부했던 부분을 적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설명과 강조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도대체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마침 오늘 설교 주제와 완전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호칭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셨다라는 것은 거의 직접적으로 인용하였습니다. 아래의 글이 이 설교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 팀켈러에게 배우다 (1) -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0/blog-post_4.html

설교의 전반적인 흐름과 느낌도 팀켈러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가장 작은 것 부터는, 설교 할 때에 상당히 빠르게 발음을 하지만 중요한 문장 혹은 문단 이후에는 충분히 쉬는 것도 그분의 영향입니다. 평소에 저 같으면 중요한 문장 후에 혹은 문단 사이에 약 1초 정도만 쉬었겠지만 이번에는 거의 3초 가까이 pause를 가졌습니다. 성도님들이 그 의미를 음미할 여유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문장 안에서 수식어를 연달아서 설명하면서 감정의 고조를 더하는 것도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 스타일입니다. 저는 수식어를 그렇게 많이 사용해서 연결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거의 처음으로, 완전한 아버지, 거룩하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 등등으로 수식어를 연결하고 빠르게 진행함으로써 강조의 느낌을 더 해 보았습니다. 처음이었지만 좋았습니다. 

인용 구절도 최소화 시켰습니다. 저는 항상 성도의 인지적인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짧은 40분 정도의 설교 안에서 인용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인지적인 한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아주 흥미로웠던 것은, 성경 구절의 직접 인용을 최소화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설교 중에 설교 본문을 다시 언급하면서 읽어야 할 때에는, 빠르게 약간 대충 읽는 느낌도 납니다. 그래서 저도 인용 구절을 최소화하면서 설교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큰 구조와 흐름에서도, 팀켈러 목사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불완전한 아버지에서 완전한 아버지로 논리적인 흐름을 전개하는 것"도 팀켈러 목사님의 스타일을 차용한 것입니다. 구조에 대한 접근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약간 뜬금 없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정말 괜찮은 논리적인 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파악한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의 특징은, 본문 전체를 한 구절 한 구절 다 붙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들을 압축적으로 타이트하게 전개한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시키는 것이 이분의 특징인데 그것이 너무나 저의 마음에 매력적으로 들렸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저 역시 예전에 종종 시도했었는데, 오늘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제 스스로 평가할 때에, 과거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약간 김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논리를 전개할 때에 오히려 더 폭발적인 어떤 감동을 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쩌면 설교자 자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큰 영향을 끼치는 듯 합니다. 

한편의 설교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가장 피곤한 새벽 시간에 두눈이 초롱초롱하게 저를 쳐다보시는 성도님들의 모습이 너무 좋았고 저도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뿐입니다.

* 사무엘하 12장 15-23절 설교

성도님들께서는 다윗의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시는지 모르겠습니다저는 오늘 말씀 근처의 본문들을 읽을 때 마다 참 마음이 비통하고 너무나 슬프다 라는 생각을 자주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탁월한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그 한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그 연약함을 성경은 너무나 가감없이 드러내기 때문에 읽으면서 함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겉으로 보기에는 간음이라는 그리고 살인 교사라는 끔찍한 형태로 나타났지만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다윗의 마음 중심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12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라고 말씀하십니다그리고 10절에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의 문제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모든 죄악의 가장 그 근본에 있는 것은 감히 인간이 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그 끔찍한 태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인류 역사의 초기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에도 마찬가지였고지금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을 높이는 마음이여호와를 업신여기는 그 마음으로 변질되고 타락하여서믿음의 영웅은 가정 파괴범 그리고 살인자로 추락한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다윗은 바로 사형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그러나 그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할 때에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다윗의 진실한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반드시 치뤄야할 댓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말씀 가운데 등장하는데나단은 다윗에게 말할 때에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라고 말하며 왕궁을 떠난 것입니다그리고 나단이 떠나자 마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그 아이를 치셨다 그래서 심히 앓게 되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여호와의 분명한 뜻이 다윗의 아이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아마 다윗 성은 그 분위기가 최악이었을 것입니다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어서 함부러 이야기할 수 없는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였을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자 만약에 내가 지금 다윗의 입장에 선다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하나님의 분명한 진노를 받아서 아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비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어쩌면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모든 것을 포기하고 넋을 놓아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어떻게 보면 정말 이상한 모습이 아닌가하나님의 분명한 진노를 입어서 아기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아기를 살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참으로 안타깝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다윗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아들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그는 충분히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다윗이 얼마나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기도를 했는지 그가 무려 칠일 동안 금식하면서 맨 땅에 누워서 지냈습니다그는 왕의 자리에 올라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정도의 다윗의 모습을 보면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살려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이 정도 정성을 드렸다면 그래도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아이가 결국 죽은 것입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의 그 댓가는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물론 그는 자신의 죄의 댓가의 전부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그 죄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온 몸으로 경험하면서 고통을 받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기 합리화가 무엇일까요그것은 “여호와께서는 무조건 용서하신다” 라는 것입니다물론 그 말은 백퍼센트 맞는 것입니다다윗은 극적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죄의 댓가를 경험한 것입니다물론 그 댓가는 그의 죄의 무게의 비하면 비교할 없을 만큼 작은 것이었지만그는 그 댓가를 어느 정도는 치러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죄를 짓고 나서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실 것이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죄는 우리의 삶을 망치고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망치며 우리의 삶을 망가지게 하는 무서운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2 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부각되는 두가지 단어가 있습니다“피 흘리기까지” 그리고 “대항하다” 라는 두 단어입니다죄와 싸우는 것은 영적인 것이지만 피가 튀는 것입니다내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나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릴만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대항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어떤 것을 향해서 힘을 다해서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그것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대하는 성도의 태도는마치 전쟁에 나간 전사처럼 피를 흘리며 대항하는 최선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를 원합니다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그런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죄의 무서움과 그 영향의 비참함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죄와 싸워 나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다윗의 그 간절한 기도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아이가 죽은 것을 신하들이 먼저 알았습니다그리고 차마 그 이야기를 다윗에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얼마나 다윗이 그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고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심지어 충격을 받고 낙심한 다윗이 무슨 행동을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그런데 신하들이 수근거리는 것을 보고 다윗이 깨달았습니다“아이가 죽었구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만약에 우리가 다윗의 입장이라면 어떠했겠습니까너무나 낙심하고 분노하고 슬퍼했을 것입니다그렇게 간절하게 생명을 걸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기도가 간절할 수록 그 낙심이라는 것은 너무나 큰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다윗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그가 그 이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성경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니다윗이 자신이 지내던 땅에서 일어났습니다그리고 씻고 기름을 발랐습니다그리고 왕의 새로운 옷을 입은 다음에 어디로 갔는가여호와의 전으로 간 것입니다그리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구약 성경 전체에서 직접적으로 다윗이 경배한다는 표현이 딱 두번 등장하는데그중에 한번이 바로 이 구절이라는 것입니다다윗은 삶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 심지어 자신의 마음에 가장 낙심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실망한 그 순간에그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 순간에여호와를 찾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사실 기도라는 것의 평범한 정의는 무엇입니까그것은 자신의 뜻과 소원을 이루는 것이 기도입니다그래서 기독교와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도 기도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신이라는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를 통하여서 혹은 우주의 어떤 힘을 이용해서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는 전혀 다른 기도였다는 것입니다그가 간절히 자신의 소원을 아뢴 것은 사실이지만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너무나 바랬지만그의 기도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다윗은 참된 기도가 혹은 참된 성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자신의 아들이 죽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자신의 가장 소중한 그 소원조차도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다윗의 삶의 궁극적인 소원이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한 아버지의 깊은 후회와 슬픔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성경의 어느 장면에서 다윗이 칠일을 금식한 적이 있습니까다윗은 틀림 없이 그 금식과 통곡의 기도의 시간 속에서자신의 죄의 결과와 그리고 아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 틀림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그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고 그는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었지만자신의 아들 한 명을 위하여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 아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한다는정말 어떤 의미에서 너무나 비참한 운명에 다윗이 던져진 것입니다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인간 아버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이것은 단순히 다윗만이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세상에 모든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오늘 말씀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던 아담조차 그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의 말씀을 업신 여겼을 때에자신의 아들이 또 다른 아들을 살해하는 것 조차 막지 못하는 가장 무력한 아버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그의 후손들은 본질상 죄인이 되었습니다하나님을 멀리하고 업신여기는 자로 태어났습니다그것이 마치 삶의 당연한 방향인 것 처럼 살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영적인 죽음 속에서 지옥을 향해서 걸어가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가장 완벽한 아버지를 꿈꾸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연약하고 죄로 인해서 무너지는 그 아버지가 아니라가장 완전하며 가장 완벽하며 가장 거룩하시며 가장 온전하신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03 13절과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정말 놀라운 표현이 아닙니까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지임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우리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서 우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 같은 그런 여호와께서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이해한다고 말씀하십니다구약 안에 이미 복음이 나타나 있으며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여호와 하나님 진정한 아버지 되신 그분의 은혜가 풍성하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표현이 아닙니까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왜 이 땅에 오셨는가그분의 고난 그분의 죽으심 그분의 부활 그 모든 것들은 구약에서부터 꿈꿔 오던 진정한 아버지 되심여호와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바로 그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들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자신을 붙드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을 부를 때에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부르는 많은 호칭들이 있지만가장 앞서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로마서 8 15절에 말씀하십니다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갈라디아서 4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강조하시는 것이 무엇인가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그 사랑의 관계 그 은혜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이 시간에 우리를 안아주시고 돌봐주시고 그분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이 여기 모인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원합니다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돌보시며 지금도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며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변치 않는 사랑으로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며 담대하게 걸어가시는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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