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3일 월요일

이제 신학교로 들어가는 당신에게 / 블로그 글 500을 기념하며

 

블로그 글을 쓴지가 꽤 되었습니다. 대략 10년 정도 된 듯 합니다. 글을 쓰려고 하니 글이 500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쓰다가, 글이 사라지는 곳이 아닌 존재할 수 있는 곳에 삶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구글 블로그가 벌써 500개의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또 부끄럽기도 합니다. 

한분의 성도님이, 제 글 중에 하나를 출력해서 여러번 읽었다는 말씀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얼굴이 빨개 졌습니다. 제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그것이 생각보다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은 사실 기쁨보다는 두려움을 주는 듯 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쓴다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삶의 방향을 잡아가는데 있어서 글을 쓰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탁월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던 분들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글을 썼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글을 쓰는 존재입니다. 

네이버의 로고스 까페에서 한 분의 질문을 보았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늦게 신학을 시작하시고 고민하시는 부분이 참 마음에 와 닿아서 짧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어떤 의미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겠다 싶어서 블로그 500개의 글을 기념하며 저의 블로그에 좀 더 자세하게 정리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어떤 분야에 논문을 쓰게 되면, 자신이 세상의 모든 분야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글이든지 결국 한정된 주제를 한정된 영역 안에서 다루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보편성을 가지기를 바라고 적어 봅니다. 

처음에 합신을 들어갔을 때가 기억납니다. 벌써 15년도 더 된 일입니다. 참 좋았던 것은, 좋은 학교에 좋은 동기들과 교수님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진실한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대원 때에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성경에 대한 기본지식과 개요 정도는 가지고 있었고, 나름 다양한 신학 책을 읽은 상태였지만, 실제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수업 시간에 따라가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는 심화 과정까지 해야 졸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눈물을 흘리며 그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신대원 시절 참 어려웠던 것은, 모든 교수님들이 훌륭한 분들이셨지만, 각자 본인의 관점 혹은 전공에서 모든 것들을 강조하셨기 때문이었다고 조심스럽게 돌이켜봅니다. 예를 들어서 조직 신학 교수님은 조직신학기 없으면 절대로 제대로 된 신학을 이룰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경 신학 교수님도, 실천신학 교수님도 모두 동일하게 자신의 관점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를 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는 관점에서, 단순히 어떤 한가지 영역만을 가지고 그 분야만을 붙들고서 목회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목회는 종합 예술입니다. 설교, 상담, 심방, 행정, 인간 관계, 사회성 혹은 눈치 등등이 종합된 것입니다. 단순히 한가지 영역에 올인해서만 목회를 잘 할 수는 없는 듯 합니다. 

목회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야에 몸을 담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정진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도 안됩니다. 저는 한 사람이 이루었다는 성공 신화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의 컨텍스트가 모두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하지만 신앙이 좋은 가정에서 자란 저는, 부모님의 많은 지원 속에서 유학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사역을 통해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지만 초반의 유학 기간은 부모님이 도와주셨습니다. 과연 이렇게 환경이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그래서 제가 공부를 마친 것을 제 자신의 노력도 중요했지만,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목사 안수를 받고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곰곰히 돌이켜보니 제가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을, 신대원의 기간을 "신학의 방향을 잡아가는 기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방향이라는 것은 어떤 관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경과 신학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만들어가는 시간이 저에게 신대원의 기간이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두분이 박영선 목사님과 마이클 호튼입니다. 물론 저는 이 두분이 저의 완벽한 롤 모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박영선 목사님처럼 탁월하게 설교를 하지 못할 뿐더러, 그분의 설교 스타일이 제가 섬기는 현재의 컨텍스트와도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호튼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호튼의 모든 논리를 한국 교회에 적용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분이 참 좋았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은, 그분들의 신학과 성경, 그리고 삶을 읽어내는 그 방향성을 좋아하고 또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이며,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결국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하나님의 주권에 더 강조를 둘 것이나 혹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더 강점을 둘 것인가의 근본적인 질문에 다다른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한 없이 자유롭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자유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뜻을 반드시 이뤄내십니다. 심지어 인간의 구원과 자녀됨은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졌다고 성경은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내가 읽는 성경, 모든 신학책, 그리고 모든 상황 속에 개입을 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글의 의미 혹은 삶의 컨텍스트에 노출되는 그 순간 이 모든 관점은 발동되게 됩니다. 그 순간마다 우리는 어디에 더 강조점을 둘 것인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인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인가? 그리고 저는 오랫동안 씨름한 끝에,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더 강조점을 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이러한 저의 결론은, 절대로 인간의 열심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자 하고, 또한 누구보다 성도의 성화에 긍정적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또 도전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주도성과 능동성을 잃어버린 것은, 교회의 큰 아픔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인간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그것이 저를 지금까지 버티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든 부분에 적용됩니다. 제가 말씀을 묵상할 때에, 누군가를 만나서 상담을 할 때에, 교회 안에서 행정을 할 때에, 모든 영역에 이러한 큰 기초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큰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영혼의 무게를 젤 수 있는 저울이 없기 때문에 목회자의 역할은 너무나 버겁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는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신학과 성경과 삶에 대한 일관성입니다. 주권적인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간에 대하여, 나 자신과 성도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일관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오랜 시간 호수를 걸었습니다. 한 손에는 늘 박영선 목사님 그리고 호튼의 책이 있었습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읽으면서 묵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신대원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들은, 교수님들께 배우고 숙제를 하던 시간을 뛰어넘어, 저라는 목회자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CFNI에서 Worship and Technical Arts 를 공부할 때에도 학장이었던 조나단은 늘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으로 워십을 인도하였습니다. 교육학 Th.M.과 D.Min.을 할 떄에도 제 마음 속에 늘 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포기하지 않는 일하심 그리고 죄인에 대한 그분의 열심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가 어떤 학위 과정에 들어가서 만들어졌다라기 보다는, 이미 신대원 시절에 흔들릴 수 없이 만들어진 신학적인 방향이며 관점이었습니다. 

신학교를 들어가면 공부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아카데믹한 책들이 쏟아지고, 그 안에서 씨름하며 암기하며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벅찬 일입니다. 힘들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졸업하고 목회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공부는 끝이 아닙니다. 

좋은 설교를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신학교 때에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던 책들을 다시 읽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종종 조직신학 책을 다시 꺼내들고 읽어보곤 합니다. 사실 신학교 다닐 때 보다 학교를 모두 졸업한 지금이 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저 역시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로고스 프로그램은 효율적으로 다양한 책들을 보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방향 혹은 관점"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흔들릴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합니다. 흔들릴 수 없을만큼 견고하게 만들어져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본인이 그것을 붙들고 씨름해야 합니다. 영혼에 새겨질 만큼 그 관점이 성경적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정말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박영선 목사님도 호튼도 젊은 시절의 그 방향 혹은 관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의 젊은 시절의 강의를 들어보면, 목소리가 지금보다 훨씬 힘이 있다는 것이 차이일 뿐, 그 내용적으로는 거의 비슷합니다. 오히려 지금은 더 완숙하게 본인의 신학을 표현하십니다. 

호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호튼의 젊은 시절의 책부터 읽은 저의 입장에서, 요즘에 Core Christianity에서 설명하는 그의 신학과 관점은, 젊은 시절 그 표현과 그 방향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더 따뜻해지고 더 여유가 있어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당신이 신학교에 지금 들어갔다면, 당연히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포커스는, "당신의 신학과 성경과 삶에 대한 그 방향과 관점을 만들어가는 시간"으로 사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신학교의 커리큘럼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은, 결국 그 방향과 관점이, 앞으로의 목회의 내용의 사실상의 대부분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교수님이 추천하는 어떤 신학자의 아카데믹한 네임벨류에 압도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넓고, 탁월한 학자는 너무나 많습니다. 내 교단을 뛰어 넘으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세상의 모든 학자를 다 공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학자도 사람입니다. 교수님이 추천하는 어떤 학자 한명이 나의 목회를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설교 때에 어떤 학자를 인용한다고 해서 성도님들이 크게 감동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딱딱하게 느끼고 더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동안 눈물로 빚어낸 성경과 신학과 삶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설교와 목회 가운데 녹아져 들어갈 때에, 성도들은 당신을 훌륭한 목회자로, 그리고 성도를 이해하는 목회자로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신학은 목회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신학적인 관점과 방향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교단에서 가장 목회를 잘 하시는 혹은 신학적으로 탁월한 분의 책을 붙들고 씨름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가급적, 너무 아카데믹한 분보다는, 평신도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함께 아파하는 분의 책을 읽고 고민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본인의 목표가 신학교 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좀 더 다르겠지만, 적어도 보통의 경우는 보통의 성도님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의 고민과 아픔을, 내가 고민한 성경과 신학 그리고 삶의 방향 속에서 녹여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학 공부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어쩌면 삶의 가장 어려운 시간들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목회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저는 이원론을 극도로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라는 직업 만큼 성도의 직업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에게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혹시라도 삶에 실패한다고 넘어진다고, 혹은 목회를 계속 할 수 있겠는가 고민이 드시겠지만 포기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나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민과 눈물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그 시간까지도 주님의 뜻 안에서 아름답게 만들어가시고 당신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처음에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던 그 시간이 생각이 많이 납니다. 기억력이 안 좋은 저에게 있어서도 신대원 시절은 삶의 황금기였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고, 그만큼 너무 행복했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신대원이라는 삶의 가장 소중한 바로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고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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