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8일 화요일

골든아워 - 이국종 / 목사로서의 삶과 다짐



괴이한 일이었다. 우리는 '의료진'으로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살려야 했고 '조직원'으로서 병원의 이윤을 도모해야 했으나,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상 '외상외과'에 적을 두고서는 그 둘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나를 향한 따가운 눈초리와 뒷말은 여전히 무성했다. 팀원들이 있어서 혼자 버티던 날보다는 나았으나 여전히 무참한 날들이었다. 팀원들마저 나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굽히고 사정하며 버텼다. 일상이 핏물과 비난의 파도 속에 있었다...

한 번의 수술로 기적같이 환자를 살려내고 보호자들의 찬사를 받는 모습은 영화에서나 존재한다. 실상은 답답하고 지루한 긴 호흡으로 환자를 살펴야 하고, 그런 중에 더없이 비루한 현실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이 외상외과의 일이다...

사회가 의사에게 기대하는 바는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의사가 방대한 의학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이 남의 생사에 깊숙이 관여하는 자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속에서 자주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새벽녘에 간신히 잠들 것 같으면 여지없이 악몽에 시달렸다. 꿈을 꾸며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그때마다 벽을 치거나 침대 난간을 후려치다 통증에 깼다. 부딪혀 얼얼한 팔과 다리를 붙들고 어둠 속에서 멀거니 앉아 있는 때가 많았다. 윤태일이 내 증상을 듣고는 렘 수면 행동장애라고 했고, 이런 증상을 보이는 환자의 3분의 2가 치매로 발전한다며 걱정했다. 치매라...

육군 보병사단의 대위라고 했다. 선한 인상에 눈빛이 맑았다.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보아온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목소리는 크지 않아도 울림이 있어 그 음성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정경원을 보면서 욕심이 동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았으나 그런 마음을 애써 눌렀다. 좋은 사람은 더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정경원에게 그간의 내 경험과 암흑 같은 미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는 조용히 들었다. 내가 두서없는 말들을 끝냈을 때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거면 됩니다. 큰 욕심 없습니다." 

예상 밖의 말이었다. 나는 내 업을 부끄럽지 않게 하고 싶을 뿐 내가 하는 일에 '소명' 이나 '사명' 같은 단어를 대입해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게 월급을 주는 것은 신이 아니라 병원이다. 신의 존재는 나에게 멀었고 그리스도적인 삶이 외상외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경원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곧은 심지는 충분히 느껴졌다. 그럴수록 그를 이 사지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거듭 설득했으나 그의 답은 하나였다. 

"저는 외상외과 수련을 마치고 난 뒤 직장에 대한 보장이나 윤택한 삶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어디에서든 사람을 살리는 외과 의사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심도 있는 수련을 받기를 바랍니다." 

나는 말없이 정경원을 보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이 수렁을 함께 헤쳐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솟았다...

그는 수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겸손하고 성실했다. 환자를 수술하고 진료하는 시간 외에는 공부에 힘을 쏟았다. 정경원의 책상에는 언제나 반쯤 열린 교과서와 주요 논문집들이 놓여 있었고 한쪽에는 늘 성경이 독서대에 반듯이 펼쳐 있었다. 

내가 정경원의 거처조차 마련해주지 못했을 때 김지영이 나섰다. 중환자실 옆 회의실 한쪽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2층 침대와 책상을 들였다. 회의실에는 화장실은 물론 세면대 조차 없었으나 정경원은 묵묵히 버텼다. 이른 새벽에 그 앞을 지날 때면 정경원의 나지막한 통성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하루도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이 환자들에게 잘 전달 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고, 제가 하는 일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한다. 가는 데까지 간다. 나는 정경원이 서 있는 한 버텨갈 것이다. '정경원이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 이라는 생각을 나는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때를 위해서 하는 데까지는 해보아야 한다.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한다. 거기가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 골든 아워 중에서


이국종 교수는 크리스천이 아니지만, 누구보다 더 생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는 생명이 꺼져가는 마지막 그 자리에서, 다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 책은 단순히 외상외과 교수로서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 일 뿐 아니라, 가장 숭고한 가치의 일을 추구해 나갈 때에, 사회적으로 혹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지원이 뒷받침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으며, 또 그 어려움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를 보여주는 인생의 청사진과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이교수의 독백으로 채워져있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살려내지만, 그러나 현실이 너무 힘든 이교수는 하루하루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릴수록 병원에 적자가 쌓여가고, 자신을 둘러싼 소문들은 더 커져갑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이 이교수에게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이국종 교수는 지나친 업무로 인하여 한쪽 눈까지 거의 실명하게 됩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또 높지만, 현실은 그것을 뒷받침 해 주지 못합니다. 현실은 지나치게 처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서까지, 끝까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그와 함께 하는 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정경원이라는 의사는, 이국종 교수의 끔찍한 병원의 현실 안으로 들어오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으로서 소명을 가지고 그 일을 해나갑니다. 이국종 교수에게 그는 참으로 신비로운 사람으로 비춰집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책은, 앞으로 자신의 일을 정경원이 해내리라는 이교수의 큰 기대감으로 끝을 맺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아마 누구나 그런 것 처럼, 현실은 생각보다 너무 녹녹하지 않고, 힘이 들고, 이상을 붙들고 가기에는 암흑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조직이라도 완벽한 곳은 없기 때문에, 지원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국종 교수의 인생을 아주 가까이 들여다 보면서, 조직의 부족함과 현실의 절망은 모두가 경험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현실이며,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비록 무모해 보이더라도, 그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가지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영혼의 의사"라고 부릅니다. 그 말을 생각할 때 마다, 참으로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목사 안수 받은 것이 10년이 되어가는데, 저는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얼만큼 발전하고 또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가? 그리고 이국종 교수만큼 가장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제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좋은 신학책도 많이 있지만, 이 책을 읽는 것이, 평생을 목사로 섬기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책 보다 큰 유익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책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찌르고, 또 여러번 벅차서 눈물을 훔칩니다. 이제 저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요? 정경원 교수의 기도처럼, "오늘 하루도 제가 하는 일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그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뿐입니다. 

댓글 2개:

  1. 목사님, 깊은 공감을 표합니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갈 수도 흉내낼 수도 버틸 수도 없는 길이기에, 이런 글들을 마주할 때면 가슴 한 가득 벅차고 도전입니다. 서로가 완벽할 순 없을 지라도 함께 올바른 방향을 고민할 수 있는 목사님을 알게 되어 너무 감사하네요. 목사님 글 마주하니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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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목사님, 격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 쓴 이후에, 현실이 힘들어도 하나님 뜻 붙들고 걸어가야겠구나 매일 새롭게 다짐을 합니다. 목사님이 걸어오신 길 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더욱 온전히 이루어지시길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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