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 첫번째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퍼시픽 림이었습니다. 영화 예고편을 보고 흥분을 이기지 못해서, 돌도 지나지 않은 첫째를 돌보는 아내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여보, 너무 미안한데 나 영화 한편만 보고와도 될까?"
그리고 거의 10년만에 두번째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탑건 메버릭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저는 흠 잡을데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영화의 ost가 흘러나는 바로 그 첫 순간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영화 속에 푹 젖어 들어갔습니다.
제가 이 영화가 좋았던 것은, "낭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장군이 되어 마땅한 사람이지만 여전히 캡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비행의 현장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미 인간의 능력을 압도하는 최신의 전투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 순간에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은 인간인 파일럿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또 낭만적입니다.
주인공은 중요한 미션 앞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한 길을 걸어갑니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비행을 스스로 도전하며, 더 나아가 자신이 가르치는 다른 이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합니다. 무모함에 대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숭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하는 맥락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팀과 함께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그 목표를 결국 이루게 됩니다. 이것 역시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또 이상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삶이 게속 오버랩 되었습니다. 어쩌면, 마치 주인공이 그렇게 살아간 것 처럼, 성도의 삶 역시 낭만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낭만입니다. 낭만을 빼고서는 단 하나도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애시당초, 신이 자신을 배신하여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인간을 위하여 구원을 약속하고, 아들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낭만적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댓가를 신의 아들이 대신 지고, 오히려 그 아들의 의로움을 죄인이 댓가 없이 받아서 신의 아들의 형제가 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이상적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 일이 역사 가운데 흔들릴 수 없는 너무나 견고한 것임을 피에 젖은 십자가의 낭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잔인한 죽음이, 성도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또 지나치게 원칙주의입니다. 기독교 그리고 그것의 낭만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을 아득히 뛰어넘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진리라고 부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상식적인 종교가 아니라, 상식을 압도하는 종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신앙의 삶 역시 "낭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랑도, 용서도, 원칙도, 목회도, 관계도, 도전도, 실패도, 모든 것이 충분히 낭만적이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낭만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왜 신앙 생활이 힘들까요? 어쩌면 우리는, 내 상식 선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용기를 가져야할 바로 그 순간에, 아무런 도전 없이 주저함으로 앉아버립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혹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그것을 전혀 어색해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모순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낭만을 가진 기독교 안에 은혜로 들어와 있지만, 나의 삶은 여전히 낭만적이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낭만을 통해서 나를 빚어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어떤 것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에는, 현재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요원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할 때 그래서 내가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잠이 오지 않을 때에, 용서라는 낭만이 있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저하고 있을 때에,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낭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할 수 있는 바를 다 했지만, 그것이 현재로서는 실패라고 판단될 때에, 나보다 높으신 존재에게 기도함으로 이 모든 것을 맡기는 낭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원칙을 포기하고 그저 사람들이 보기 좋은대로 삶을 흘러가게 하고 싶을 때에, 어처구니 없이 원칙을 지키는 낭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의 혹은 신앙의 진정한 회복은, 낭만의 회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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