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8일 토요일

성도는 끊임 없이 격려 되어야 한다 / 사무엘상 25장 23-44절 설교

 


저는 학부 전공이 행정학입니다. 행정학은 조직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학부 시절에 가장 좋았던 것은, "흥황하는 조직"과 "망하는 조직"의 특징을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흥황하는 조직은 반드시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잘한 것과 못한 것에 대한 피드백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특히 조직 구성원의 탁월하게 이룬 부분에 있어서 강력한 칭찬과 격려를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여서 조직 자체와 구성원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킵니다. 

반면에 망하는 조직은, 그 안에서 커뮤니케이션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심이 없고, 조직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조직원이 따르던지 말던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평소에는 아무런 평가도 없다가, 단지 그 사람이 어떤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면, 그제서야 그 사람을 비난하기 바쁩니다. 물론 외부의 환경에 전혀 예민하지 않고 그저 행동하던 과거의 방식을 고수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조직은 망하고 사라집니다. 섬뜩한 결과입니다.

저는 교회를 볼 때에, 늘 이러한 조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는 다른 차원의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로 연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직의 특징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고, 그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평가를 받고 격려 받고 칭찬 받고 교정되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많은 부분에서 그렇지 못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성도가 얼마나 격려가 필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신앙적으로 잘하고 못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 삶에 바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족으로 우리를 만드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로 만난 사람처럼", "일"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하는 찬양 사역도, 서로를 향한 사랑과 격려가 없다면 그것은 그저 "일"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가장 완벽한 천상의 찬양의 주인이십니다. 그런 면에서 이 땅에서의 찬양은 보잘것 없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관점에서 아름다운 찬양을 드려도,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상입니다.  

무관심은 결국,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상은 절대로 교회를 격려하거나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칭찬은 결국 우리 스스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을 굉장히 낯설고 이상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결단하고 선택하고 도전하였을 때에, 그것은 마땅히 그리고 충분히 격려 받고 칭찬 받아야 합니다. 마치 아비가일의 탁월한 영적인 안목과 선택을 다윗이 칭찬한 것 처럼 말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그 부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를 세워갈 수 있을까요? 

* 사무엘상 25장 23-44절 설교 

사무엘상 25장의 앞 부분에서는, 다윗이 바란 광야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나발이라는 한 사람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매우 인색하고 교만하고 무례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그의 많은 양떼를 지켜주었고 다윗은 그에 합당한 호의를 정중하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오히려 다윗을 심하게 모욕하였습니다. 다윗을 취급하기를, 주인으로 부터 도망한 근본 없는 종으로 취급하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모욕적인 상황입니까? 다윗은 이미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고, 그는 골리앗을 쳐서 넘어 뜨린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수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다윗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모욕을 참지 못하고 부하들과 함께 칼을 차고 나발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소식을 들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많은 음식을 싣고서 다윗을 찾아가서 그들이 서로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3절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너무나 겸손한으로 모습으로,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이 다윗을 응대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무례한 나발의 아내였지만, 놀랍게도 나발과는 전혀 다른 성품과 전혀 다른 안목을 가진 아주 지혜롭고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25절에 보니 아비가일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발에게로 달려오는 다윗의 마음 가운데에는, 나발의 모욕이 아주 깊숙히 들어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나발이 자신에게 준 상처로 분노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말라고 아비가일이 부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나발은 미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나발과 같은 사람은 누구에게라도 그렇게 모욕을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언행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다윗에게 오히려 손해라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지금 아비가일의 말을 들어보면, 다윗을 매우 높이면서 그에게 합당한 표현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다윗을 부를 때에 "내 주여, 내 주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을 높이고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비가일 자신은 이 상황을 알지 못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허물을 용서하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말씀에서 아주 놀라운 것은, 아비가일이 바라보는 다윗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28절 부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아비가일이 하고 있는 이 모든 행동과 말이, 단순히 자신의 남편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 일을 무마하기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서 달려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아비가일은, 이스라엘 나라의 중요한 영적인 흐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사울이 이 땅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오히려 다윗의 편에 계시다는 그 영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단순히 인간의 왕이 아니라,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는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지금은 비록 다윗이 사울로부터 끊임없이 쫓기는 위기의 상황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생명으로 싸고 계시기 때문에 감히 그 누구도 다윗을 해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우시고 그의 편에 서셨고 그를 지지하시고 도우신다는 확신을 말하면서, 바로 그것 때문에 다윗의 미래는 든든할 것이라고 연약한 여인이 너무나 담대하게 그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30절 중간에,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라는 것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실 때에도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단순히 다윗이 리더 중에 한명이 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의 최고 통치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자 마자, 다윗의 현재의 위치와 그의 놀라운 가치와 엄청난 미래에 대해서, 너무나 정확하고 탁월하게 그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비가일이 이야기했을 때에, 드디어 다윗의 마음이 완전히 누그러지고 풀어졌습니다. 다윗이 분노하여 살인하려던 것을 그녀가 지혜롭게 막은 것입니다. 32절에서 다윗은 그녀를 보내서 자신을 영접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그리고 33절에서는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라는 것은 "판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라고 다윗이 그녀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 또 아비가일의 지혜를 칭찬하는 것, 그리고 아비가일에게 복이 있을 지로다 라는 말씀에서 “찬송, 칭찬, 복이 있을 지로다” 라는 모든 동사가 같은 단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다윗이 아비가일을 칭찬하는 것이, 단순히 그녀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좋은 말을 해 주어서 아비가일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아비가일의 영적인 분별력과 지혜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누구인지를, 그리고 그의 참된 가치를,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어떻게 자신의 나라를 세울 것인지를 미리 바라보는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다윗이 기뻐하며 그녀를 인정하며 크게 칭찬하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여호와의 나라와 그가 세우신 자를 분별하고 그것을 택한 것에 대하여, 너무나 크게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나발이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그는 왕과 같은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크게 취하였습니다. 마음이 너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는 마땅히 베풀어야 하는 것 조차 너무나 아까워했지만,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서는 흥청망청 돈을 쓰는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정신이 들고나서, 아비가일이 다윗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발은, 자신이 죽은 목숨이었는데 아내의 지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것과,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가를 깨닫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거두셨습니다. 

다윗은 나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모욕을 갚기 위해 살인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신 여호와를 찬양하였습니다. 다윗은 비록 자신이 도망자의 신세였지만,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윗을 처음 만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요나단이 자신을 잘 알고 사랑한 것 처럼 다윗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윗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인이었고, 분명한 영적인 판단력을 가진 탁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녀에게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42절에 보니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부름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현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의 편에 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비가일이 드디어 다윗의 아내가 되면서 그리고 사울의 딸인 다윗의 첫째 아내 미갈은 아마도 사울에 의해서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다시 결혼을 하면서 오늘 말씀이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과연 참된 영적인 지혜와 분별력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은 결단코 재산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발은 굉장히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부유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나발 자신이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25장 11절에 보면넷 바이블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입니다. 다윗이 종들을 보내어서 자신에게 합당한 호의를 부탁 하였을 때에, 나발은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나의 떡과 나의 물과 나의 고기를 줄 수 없다”라고 나발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발이 왜 어리석은 사람인가?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발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부터 나온 것이며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너무나 이상한 것은, 왜 아비가일이 이런 사람과 결혼했는가입니다. 우리는 그 뒷 이야기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비가일은 분명한 지혜와 분별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발은 “나”라는 자기 중심의 인물이지만, 아비가일은 “하나님” 중심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소문으로 다윗에 대해서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편에 있기 때문에 그에게 극도로 공손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윗의 현재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장차 하나님을 섬기는 왕으로 온전히 세워질 것임을 믿음의 눈으로 분명히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비가일이야 말로 너무나 지혜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시편 111편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근본이라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원리”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세상적으로 부유하다 하더라도, 여호와가 그 사람에게 없다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는 의미있고 가치 있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을 절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는,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선택만이, 지혜로운 선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깊이 혹은 흥미롭게 다가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사실 가장 놀랍고도 흥미로웠던 부분이,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비가일이 나발과 억지로 결혼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나발이 처음부터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남편이 죽었다면 그 아내가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은 자칫하면 자신의 남편의 죽음에 대하여 슬픔 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런 이상한 아내에 대한 이야기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관통하는 그 핵심을 붙들고 있다면, 이러한 아비가일의 행동이 이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관통하는 핵심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 그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나 신비한 것인데, 보물이지만 밭에 감추어진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선택을 내렸는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이 보물이라는 것을 인지한 이후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즉시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선택은 너무나 즉각적이었고 너무나 큰 결단이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히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한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을 통해서 기꺼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에게, 빌립보서 3장 19절과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아비가일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미래를 확신하고 그에게 자신을 드리고 함께 하기로 결단한 것 처럼, 우리는 장차 오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엄청난 영적인 깨달음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하나님께 함께 하시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어떤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인 안목과 지혜가 있는가를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이 다윗의 부름을 받고 달려간 것 처럼,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서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달려갈 수 있는지를 물으며 강력하게 우리에게 변화를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분의 일하심과 그분의 마음을 깨달아 아는, 그분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영적인 지혜와 분별력이 넘치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모든 선택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서 기꺼이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영적인 안목과 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사람과 상황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어떻게 판단하시는 가를 주목하게 하시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영적인 판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분이 주실 칭찬과 기쁨을 기대하며, 주님의 뜻을 지금 저의 속에서 기꺼이 이루어 나가는 복된 성도 복된 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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