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31일 화요일

The Giver / 마태복음 5장 43-48절 주일 설교 (준비 과정)

 


* 좋은 설교를 꿈꾸며

좋은 설교는 어떤 것일까요? 항상 설교에 대해서 고민하지만, 여전히 그 답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분명히 “전통적인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질은 항상, “새로운 옷”을 입게 됩니다. 저는 항상 꿈을 꿉니다. 충분히 성경적이면서, 충분히 적용적이고 시대에 걸 맞는 설교에 대한 꿈입니다.

지난 번 The Healer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좋아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반면에 비판적인 분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책을 많이 인용한 것에 대하여 부작용이 있었던 듯 합니다. 책 인용으로 인해서, 설교에 대한 집중력이 오히려 약해졌고 또 산만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설교자로서 제가 발전하는 과정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것이지만, 비판의 이야기는 결코 달콤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는 성숙해져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다양한 이야기들을 듣고 단점을 계속 보완해나가야 합니다.

* 책을 인용하는 것의 의미

독서를 오래하면, 마치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수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십대 중반부터 그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한 없이 혼자 길을 걸으며 책을 읽고 줄을 치고, 잠시 벤치에 앉아서 독서를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는 그 행위 자체가 좋았습니다. 책을 읽고 마음에 담은 순간 만큼은,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저라는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목회자가 되고 나서도,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의 본질에 대한 소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잃어버린 시대에, 누군가의 깊은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의 생각을 파악하고, 또 그 사람에게 나의 마음을 털어 놓으며 길을 찾아가는 것은 "성숙한 성도의 태도"라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저는 저의 설교도 그렇기를 바랍니다. 설교자와 성경과 책들이 대화를 나누고, 성도는 그 자리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책을 인용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일반 은총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일반 은총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일반 은총을 통해서도 주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반 은총이야 말로 “현실의 컨텍스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현실을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만 인용하고, 성경만 이야기하고, 성경에서만 모든 설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탁월한 세상의 진리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결국에는 성경의 진리가 가장 탁월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 항상 저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야 말로, 성도에게 가장 좋은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 설교의 구성 

이번 설교는, 산상 수훈의 일부분입니다. 보통의 주석들과 스터디 바이블들은 그렇게 특별한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을 다각도로 오래 묵상하고 생각하고 자료들을 찾으면서, 제 마음에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두가지는 이것입니다. 

첫째로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원수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접근할 때에, "원수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그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 보통의 접근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원수 뿐만 아니라, "나와 가장 친한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까지 한꺼번에 언급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친근한 관계에서 원수까지 나아가는 "인간 관계의 넓은 스펙트럼"이라는 관점으로 본문을 접근하였습니다. 이번에 처음 시도한 접근인데, 저는 이러한 이해가 성도의 현실에 훨씬 부합된다고 느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완전하시다 라고 부른 적이 없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다라는 Carson의 주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verse does justice to the word teleios but also notes that the form of the verse is exactly like Leviticus 19:2, with “holy” displaced by “perfect,” possibly due to the influence of Deuteronomy 18:13 (where the NIV renders LXX teleios by “blameless”; cf. Gundry, Use of the Old Testament, 73–74). Nowhere is God directly and absolutely called “perfect” in the OT: he is perfect in knowledge (Job 37:16) or in his way (Ps 18:30), and a man’s name may be “Yahweh is perfect” (so yôtām [Jotham], Jdg 9:5; 2 Ki 15:32). But here for the first time perfection is predicated of God (cf. L. Sabourin, “Why Is God Called ‘Perfect’ in Matthew 5:48?” BZ 24 [1980]: 266–68).

D. A. Carson, “Matthew,”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Matthew–Mark (Revised Edition), ed. Tremper Longman III and David E. Garland, vol. 9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0), 194.

그렇다면, 결국에는 “우리의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드러나야 하며, “성숙의 차원”에서 우리는 그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며, 그리고 “성숙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까지 설교자는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 라고 설교에 대한 논지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략은 결국 “가장 작은 수준에서 습관을 만들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책들과 성경을 통해서 논증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작게 시작한 사랑의 습관으로부터 관계의 폭을 넓혀서, "결국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고 상을 주신다라는 구조로 마무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설교의 자료 준비 

설교가 단순히 “주해의 모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팀캘러 목사님의 설교들을 공부하면서 경험한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적이고 적용적인" 설교의 이상향은, 주해 이상의 것을 목회자에게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자료들을 폭 넓게 찾고 다루는 것이 항상 필요합니다.

이번 설교는 의도적으로 "기브앤테이크"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설교자의 대화 상대”로 삼았습니다. 이 책은 제목이 너무 좋아서 우연히 읽기 시작했는데, 책 자체가 워낙 탁월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설교 본문과 잘 연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애덤 그랜트는 “인간 관계에서 주고 받는 사람의 본질”에 대하여서 굉장히 잘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설교 제목인 The Giver 역시 이 책에서 따 온 것입니다. 

"진정한 기버이신 하나님" 이라는 논지까지 내용을 끌고가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설교 처음부터 애덤 그랜트의 용어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설교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보니, 설교 전체에서 Giver라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어색했다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한글 설교를 하면서, 주로 사용된 용어는 정작 R발음이 계속 들어가서 어색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떤 용어라도 “좀 더 한글 자체로 풀어서” 설교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친밀한 관계에서만” 기버가 되는 것은, "성경의 문맥상"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임을, 기브앤테이크와 루터 저작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저는 루터 전집을 로고스로 가지고 있지 않지만, 루터란 스터디 바이블이 루터 전집에서 인용하고 있어서 그것을 사용하였습니다. 스터디 바이블 하나로 primary source까지 바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특권입니다.

Luth “Do you see now how pious you are if you are friendly and kind only to your friends? You are just about as pious as the thieves and the scoundrels, as the whores and the criminals, or as the devil himself” (AE 21:127).

AE Luther, Martin. Luther’s Works. American Edition. General editors Jaroslav Pelikan and Helmut T. Lehmann. 56 vols. St. Louis: Concordia, and Philadelphia: Muhlenberg and Fortress, 1955–86.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1589.


그리고 "최종적인 적용 부분"을 끌어내기 위해서, 진정한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실천을 통한 우리의 습관의 변화"가 필요하며, 그리고 그 습관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반복"부터 필요하다는 것을 책 두권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논증하였습니다. 

실천과 습관에 대한 신학적 의미에서 가장 앞서가는 사람은, 제가 이해하기로는 제임스 스미스입니다. 제임스 스미스는, “지성 중심의 인간관”에 도전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 필요한데, 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덕에 대한 실천 그 자체"가 필요하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반드시 "사랑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내용을 압축하여서 이번 설교에 인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덕을 실천함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 어떤 전략을 가지고 습관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을 인용하였습니다. 실질적인 임상 결과도 그렇고, 저에게 스스로 적용할 때에도 성도의 변화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 이 설교가 저에게 주는 의미, 그리고 반응

이 설교는, 저에게 있어서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지는 설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변화에 대한 지금까지 저의 모든 고민과 답”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디민 논문을 쓰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해 본 결과, 한 사람의 세계관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식으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반드시 실천을 필요”로하고, 또한 “실천은 습관”을 만들어야 하며, 그렇게 “평생”을 달려가는 것이 성도의 삶 입니다.

설교에 대한 반응은 이번에도 다양했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따로 연락 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쉽게도, 들으시는 분들 중에 지루해 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이번 설교 때에는 유독 세분 정도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중에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좀 더 잘 준비했으면 좋았을텐데, 혹시 너무 지루했던 것일까?"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도 가졌습니다. 

사실 설교자로서 이번에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현재로서는 주일 설교 세번이 저에게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서적으로 잘 제 자신을 다스리고 충전하려고 해도, 이미 두번의 설교를 하면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거의 소진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번의 설교 모두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담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설교에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전체 설교라는 관점에서는 제 자신의 힘을 더 잘 안배해야 할 듯 합니다. 

* 여전히 끝나지 않은 길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길은, “한걸음 전진”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모든 고민과 연구를 담아서 The Healer, 그리고 The Giver 라는 두번의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은 전통적인 설교의 형식에서 벗어나서 탁월한 책들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성도님들의 마음과 현실의 삶 가운데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의 최선을 다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이제 주일 설교자로서 저의 상황은, 좀 더 전통적인 설교 형식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저의 생각을 뛰어넘으시고, 또 제가 알 수 없는 어떤 길로 인도하시며, 저는 그 길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은 성도님들을 향하기 전에 언제나 제 자신을 향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저에게 요구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계속, 한걸음 그리고 한걸음 더 전진할 수 있을까요?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이 모든 것이, 혹시 헛된 것은 아닐까요? 제가 꿈꾸는 설교의 이상향으로 더 나아가고, 주일 예배 이후에 활짝 웃으며 집으로 향하시는 성도님들의 행복을 계속 지켜볼 수 있을까요?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고, 진실한 설교자의 길을 계속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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