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1일 화요일

목사님, 어떻게 이런 블로그를 하는 건가요? / 대답을 위해 나의 마음으로 깊이 들어가 변명하다

 




아끼는 목사님이 물어 보았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런 블로그를 하는 건가요?’ 사실 가볍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 며칠에 하나씩 쓰다보니까 여기까지 왔어요.’ 솔직한 저의 고백입니다. 정말 며칠에 하나 정도씩 글을 쓰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주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스스로 제 마음 속에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삶의 많은 부분은 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표면적으로는, 어떤 의미 있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처음에 CFNI에서 공부할 때에 영어로 부르는 찬양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묵상을 해보면 어떨까 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짧은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이 블로그의 시작입니다. 지금보니 The Rest of You는 문법적으로 틀렸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휴식이 되고 싶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본다면, 저의 발전을 위해서입니다. 저는 어떤 부분에서 탁월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깊은 저의 내면에서 저의 부족함을 항상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 절실함은 아마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가진 책임에 비해서 저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영혼을 가다듬기 위해서입니다. 삶을 조금이라도 더 정돈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맡은 역할을 더 충실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글쓰기야 말로 제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번 더 내면으로 들어가 본다면, 누군가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어느 순간 제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힘들게 정리해 놓은 어떤 것이,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작은 휴식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의 목회와 신학과 사고들을 종합한 그 어떤 것들이 타인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제이든지 글을 쓸만한 것이 있다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저의 글들을 보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해 본다면, 저는 글쓰기를 통해서 저의 존재의 해방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글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습니다. 역사 속에 일어난 수 많은 기적들과 사건들은 그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 글로써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글을 쓰면 시간을 초월하여 나의 손가락으로 감히 영원을 만지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수가? 그래서 글쓰기 자체가 신의 행위임을 의미합니다. 글 쓰기는 우리의 존재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제 자신을 스스로가 추스를 수 없을만큼 아파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저의 내면과 정직하게 만나는 것이 저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쓰는 행위 자체가 위로 이상의 어떤 것을 저에게 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픔을 동일한 크기의 위로로 메꿀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타인에 의해서 할퀴어진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으로 그것보다는 훨씬 큰 어떤 것이 필요했습니다. 

글을 쓸 때에 어떤 황홀함을 느낍니다. 그것이 저를 치유했고 치유하고 있습니다. 가늠하기 어려운 저의 영혼의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이어령 선생님께서, 죽음 조차도 자신의 글로 쓰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없이 작고 비참한 나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느끼고 경험했던 그 수준과 경지를, 어쩌면 저도 아주 조금은 경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라는 질문에는, 왜라는 이유에 대한 대답을 먼저 하는 것이 적절할 듯 합니다. 단순히 글을 쓰라는 말로는 글쓰기의 깊이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악인론의 저자의 말처럼, 글을 쓰면 성공한다는 것에 사실 너무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 말만으로는 글쓰기의 깊이를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는, 내 영혼의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글 쓰기를 통해서 저의 자아를 초월하여 영적인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제가 경험하는 글쓰기의 신비입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글을 쓰는 순간 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저녁입니다. 마치 한 없이 펼쳐진  빛나는 들판에서 두 손으로 풀들을 훑으며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 감각이 저를 감격하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감각이 저를 몰아갑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라는 것에 대답할 차례입니다. 마케팅적인 측면에서는 저의 글의 초점을 더 좁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존재 자체를 완성해가는 측면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곳은 정보적인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 프로그램과 그리고 레코딩, 그리고 독서에 대한 수 많은 이야기들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모아져, 한 인간을 구성합니다. 마치 흩어졌던 작은 혈관들과 미세한 근육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육체에 갇혀 있는 저의 작은 생각과 마음은 글을 통해서 세상을 향해 뻗어 갑니다. 그 과정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놀랍게도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급적 자주 쓰려고 합니다. 쓰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평가나 남의 생각, 저를 향한 비판과 무관심,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저는 글을 씁니다. 글을 쓰면서 저의 존재를 발견하고 완성하고, 그것을 채워가고 다듬어 갑니다. 그래서 생각이 나는 것들은 기록을 합니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가치 있는 것임을 확신한다면 글로 엮어 나갑니다. 그 행위 자체가 나 자신과 세상의 고통을 이기는 저의 대범한 저항입니다. 

저는 가장 깊은 글 쓰기는, 더 이상 그 어떤 사람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를 읽어보니, 그가 바로 그것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루이스의 글쓰기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성향 자체는 니체를 닮은 듯 합니다. 저의 마음 속에 고독한 자로서 홀로 우뚝 서고 싶은 마음, 그러나 오직 하나님 앞에서 저의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싶은 그런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과, 그러나 따뜻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될까요? 가보지 않은 길이라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책이 나오게 되면 어떤 것이 달라지게 될까요? 책을 쓰면서 저의 글 쓰기가 얼마나 부스러기와 같은 가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겸손할 것입니다. 여러가지가 변화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눈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그 날까지, 그리고 더 이상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릴 힘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저는 글을 쓸 것입니다. 

처음에 글 쓰기가 아주 작은 시작이었던 것처럼, 여전히 모든 것은 저의 작은 걸음입니다. 이 글도 그런 맥락에서 아주 작은 글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지나치게 멋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진하지 못할 것 같았던 한 인생이, 단어와 문장과 문단의 기적과 같은 연결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조금 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저의 글을 읽고, 삶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제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하늘의 축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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