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exultation?) / 사사기 6장 1-10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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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파이퍼 목사님은, "무엇이 설교가 아닌가"에서 강의를 열기 시작합니다. 설교는 단순히 기독교의 절기 예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설교"가 바로 "예배"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본격적으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본인이 정의했던 설교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갑니다. 그것은 Expository Exultation 입니다. Expository는 성경의 실재를 명백하게 드러내어서 그것을 청중들에게 분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Exultation은 그 실재가 가지고 있는 그 가치에 대하여서 적절한 감정을 경험하며 구체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과연 예배는 무엇이며, 이러한 파이퍼 목사님이 정의한 설교의 정의와 예배가 실제로 어떻게 겹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것은, 파이퍼 목사님이 "설교는 예배이다" 라는 의미는 결국 "예배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요소를 설교가 동일하게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럼 계속 갑니다.
먼저 파이퍼 목사님은, "예배가 무엇인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가지신 그 가치를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이 세가지 단어를 통해서, 예배와 설교가 어떤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함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첫째로, 예배 가운데 본다는 것은, 영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성경에 신실하게 근거한 설교를 들을 때에, 거기에는 어떤 "분명하고도 구분되는 스스로 그것이 진정한 것임을 보여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영적인 통찰력"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파이퍼 목사님은 요한복음 1장 14절을 인용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영광이라는 것은, 오직 "은혜와 진리로 가득찬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광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지만 어떤 영광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는 것"에 근거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고린도후서 4장 4절과 6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파이퍼 목사님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영어로는 "cannot see"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4:4 The god of this age has blinded the minds of
unbelievers, so that they cannot see the light of the gospel of the glory of
Christ, who is the image of God.
파이퍼 목사님은, 마귀가 한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동요시킬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볼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움직이시고 그의 보지 못하는 것을 열어주실 때에, 바로 그 때에 설교 중에 빛이 비취는 것인데, 예수님이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나 혹은 신화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스스로를 증명하시는 신적인 영광으로써 그분을 보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가치를 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둘째로 예배 가운데 맛본다 라는 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부터 설명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15:8
"'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할 때에, 우리가 주일 예배 시간에 그 자리에 참석하면서도, 찬양하면서도, 그 마음 안에서 그 진리를 맛보고 음미하는 것에서는 얼마든지 멀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합니다.
잘못된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이런 일은 청중들이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청중은 설교자 자신, 설교의 태도, 설교의 예화, 설교의 논리 등에 매료되거나 좋아할 수 있겠지만,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맛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은, 단순히 청중이 노래하거나, 기도하거나, 손을 들거나, 무릎 꿇거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영적인 실체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보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세번째로 예배는 표현이다 라는 것은, 우리는 예배로 모여서 찬양하고, 서거나 무릎 꿇음으로써, 그리고 손을 들고, 그리고 성경을 읽음으로써, 죄를 회개함으로써, 혹은 눈물을 흘리면서, 혹은 경외감 속에서 침묵으로 표현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두가지,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보는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을 맛보는 것이 이루어질 때에, 그제서야 우리가 예배 중에 표현하는 모든 것들이 놀랍고 또 달콤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배란 이렇게 세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고 파이퍼 목사님은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에서, 설교가 어떻게 이러한 예배에 대한 이해에 상응하는지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설교는 영적으로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들을 청중들에게 먹이며, 또한 합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의 강해의 영역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알고 보는 것을 영적으로 결합하여서 청중들에게 공급하고 먹이는 것입니다. 설교의 희열의 영역 역시,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보는 것 그리고 맛보는 것을을 결합하고 그리고 그것을 더 벅차오르게 만들어서 청중들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로 예배에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 예배에 오는데, 영적인 실재를 보고, 맛보고 그리고 표현하기 위해서 옵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 중에 찬양은 영적인 각성 그리고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 음미하는 것, 그리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찬양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 처럼, 설교도 동일하게 영적으로 보는 것, 음미하는 것, 그리고 표현하는 것을 영적으로 깨닫게 하고 일어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설교는 예배 이후에 등장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혹은 단순히 예배의 목적도 아니고, 설교 자체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놀라운 사건이며, 이것은 초자연적인 것이고 기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존파이퍼 자신, 그리고 설교자가 어떻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설교의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이퍼 목사님은 이것을 다음 강의 때에 다루겠다고 말합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다소 복잡한 이야기였다고 느꼈습니다. 특별히 예배의 세번째 요소인 "표현"이라는 측면과, 좋은 설교의 연결성은 거의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선명한 호소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파이퍼 목사님이 강조하고 싶은 핵심은, "설교는 결국에는 예배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목적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인데, 설교가 바로 그런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설교가 바로 예배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강의를 들으면서,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장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배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고, 그것을 맛보고, 그것을 표현한다라는 이 정의는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칼빈에서 예배학 수업을 들으면서 예배학에 대한 전문적인 아티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정말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학적인 예배학은 어쩌면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과 많이 멀어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배의 형태, 예배의 순서, 예배의 중요성 등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정작 예배가 정말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 예배 가운데 우리의 영혼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선명하게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서, 예배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설교를 예배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하여 정말 탁월한 정의와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번 강의는, 정말 설교는 무엇인가를 보여준 탁월한 강의였습니다. 특별히 예배 속에서 존재하는 설교라는 측면에서, 저는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파이퍼 목사님의 말씀처럼 본문의 실재를 보고, 맛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에서 이것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쉬운 것은, 보통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얼마나 매력적인 예화를 사용했는가? 혹은 얼마나 논리 구조가 탁월한가? 혹은 얼마나 충실하게 본문을 주해했는가? 등이 더 중요한 주제처럼 다뤄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번 강의가 설교자로서는 크게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저는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가 이렇게 이해되었습니다. "설교자가 그리스도의 영광, 말씀의 실재를 보고, 맛보고, 표현할 수 없다면, 당연히 예배는 실패입니다!"
보통 공예배의 시간이 한시간 정도입니다. 그 중에 설교는 삼십분 정도를 차지합니다. 만약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실제로 보고, 영적으로 충분히 맛보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면, 도대체 우리는 예배의 성공을 어디에서 찾아야할까요? 그리고 설교자가 그것을 본 적도 누린 적도 표현한 적도 없는데, 과연 성도들에게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향한 비난이 아니라, 제 자신을 향한 무거운 도전이자 질문입니다.
이 강의를 듣고 설교를 준비하고 실제로 설교하는데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정말 할 수 있는 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설교하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것을 담아서, 그리고 제가 영적으로 보고 맛보고 표현하고자 했던 그 내용을 담아서 설교했습니다.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님이 이야기한 바로 그 부분이, 파이퍼 목사님이 설교를 통해서 달성해야만 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성도는 영적인 실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진심의 호소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저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알게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바로 이런 일이 저의 설교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회중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의 속성을 그대로 가진 성경적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를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클리닉에 대한 분석과 적용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릭닉_7강 기적을 행하기
(Acting the Miracle) / 사사기 16장 15-31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2/7-lecture-7-acting-miracle.html
* 존 파이퍼 "설교 클리닉" 전체 글 모음 / "설교의 대가"에게 설교를 배우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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