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7일 월요일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다 / 사도행전 11장 19-26절 주일 설교 (설교문)

 


- 기도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아름다운 주님의 날에 주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반석이시며 산성이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위로이시며 소망이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만날 때에, 우리의 영혼이 뜨거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로 오늘의 시간이 우리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되도록,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 한국에서의 만남 

한국에서의 여정 이번에 11년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방문했기 때문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미션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나야 하는 분들과 미리 약속을 잡았습니다. 중에 한분이 '광주 교회' 섬기고 있는 전의진 목사님 입니다

제가 사우스웨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분입니다. 저와 동갑이고 믿음과 설교가 탁월한 분인데 미국에서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코로나가 터진 것입니다. 중간에 전화 통화를 몇번 했는데 마음이 많이 무거웠습니다. 얼마나 어려움이 있을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목사님, 제가 광주에 한번 내려가겠습니다 이렇게 연락을 나누었습니다.


-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들어가니까 쉽지가 않았습니다. 일단 해야 일이 너무 많고 만나야 하는 분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반드시 광주를 가야 한다 라는 생각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방문이 그분에게 의미하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분은 정말 저의 격려가 필요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하루를 남기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들어오기 한주 금요일에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서에서 SRT 열차를 예약을 했는데 새벽 첫차였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버스가 없었는데 택시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걸어갈 생각을 하고 새벽 네시쯤 일어났습니다. 장모님 댁에서 40 정도 수서역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2시간 정도 걸려서 드디어 광주송정역에 도착을 했습니다.

거의 6 만에 만났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니다. 바로 어제 만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저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하게 인도하셨는지를 들었습니다. 사실은 당연히 제가 식사를 대접하려고 내려갔는데, 자기 나와바리에 왔으니까 자기가 대접해야 한다고 주장하셔서 혹시라도 개척교회 하시는 목사님 마음에 상처가 될까봐 그냥 감사하다고 밥을 얻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헤어지는데 마음이 너무 뭉클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가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을 후회했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

오늘 말씀에 보니 여러 사람들의 여행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11 19절에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성도님들께서는 스데반 집사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믿음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장 탁월한 사람 한명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진정한 구원자이시고 왕이시라고 설교했을 때에, 메시지에 분노한 유대인들이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죽였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고 교회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의 사건 이후에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 결국 성도들이 흩어지게 것입니다.


도망자

혹시 성도님들은 도망자의 위치에 처해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흩어지는 성도들의 마음을 능히 짐작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아마도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것조차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흩어진 이들이 무엇을 하였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19 하반절과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19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11:20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예수를 전파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안디옥이라는 곳은 굉장히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에서 세번째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국제적인 무역 도시였고 정치의 중심지였고 핫플레이스였습니다. 유대인들을 포함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었고 그래서 도덕적으로 방탕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서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단순히 유대인들 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만 전한 것이 아니라, 헬라 사람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그리고 주의 손이 함께 하셨다

그런데 2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누가는 지금 로마의 중심 도시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 하셨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떠날 밖에 없었던 이들의 상황을 돌이켜 보시길 바랍니다. 이들은 고향을 강제로 떠났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생명을 염려해야 했습니다. 교회가 무너지고 성도가 흩어지고 서로의 생사도 확인할 없는 절박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 일이 제대로 풀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극심한 고난 속에서 보여주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의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혹은 옳은 자체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인종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었겠는가

그런데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바로 일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도 일어날 결과에 대해서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의 열심과 그들의 도전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 바나바를 보내다

안디옥에서 일어난 엄청난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까지 퍼졌습니다. 사도들은 소문을 파악하기 위해서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냈습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바나바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는 초대 교회에서 좋은 소문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넉넉히 베풀었던 사람입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인데 그가 워낙 탁월하게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라는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24절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착하다 라는 말은 딱히 정의하기가 어렵지만, 분명히 있는 것은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보면 어떤 느낌이라는 것이 있는 같습니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자꾸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내가 힘을 얻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부분이 저의 마음에 깊이 닿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에서 착한 사람이라는 것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것을 하나로 연결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령이 충만하다 믿음이 충만하다라는 것을, 우리의 성품과 태도와 분리시켜서 자주 생각하는 같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성품이 매우 좋고 자신을 희생할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를 파송해서 상황을 살피도록 하는 것입니다


- 바나바의 태도 : 은혜를 기뻐하다

그리고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안디옥에 도착하자 마자 바나바가 보인 첫번째 반응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말씀이 마음에 깊이 닿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생각하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똑같은 상황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길을 걷는데 내가 지금 집을 구입하거나 렌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길을 가면서 주변에 있는 집들만 사람의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도착하자 마자 무엇을 보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나바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넘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완전히 반대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곳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가 라는 하나님 중심적인 갈망으로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도착하자 마자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순수한 이방인들을 그렇게 혐오했는데,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된 것을 보면서 크게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태도 2 : 겸손하게 권면하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이야기했는가? 모든 사람에게 말하기를,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권위적인 사람을 만나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위적인 사람은 굉장히 대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과 권위적인 사람은 다른 것입니다. 권위적인 사람은 힘으로 누군가를 억누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상대방 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이나 연륜이나 학력이나 지식을 은근히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대하면 굉장히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나바의 모습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위치와 역할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의 신앙의 수준이나 평판이나 모든 것이, 얼마든지 그가 거들먹거리거나 혹은 교만하게 혹은 권위적으로 대할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한가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라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성도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조언을 있었습니다. 화려한 도시의 거친 환경 속에서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오직 주님을 소중히 여기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간곡히 간구하는 것입니다


- 바나바의 결과

그래서 결과는 무엇인가? 24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성도님들께서 바나바의 사역을 평가하신다면 어떻게 평가하실 있을까요

저는 바나바야 말로 위대한 사역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성품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 가운데 엄청난 영적인 동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도착한 이후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나바를 통해서 무리가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충분히 성공한 사역이라고 부를 있는 것입니다. 


- 사울을 찾으라 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25절에 정말 뜻밖의 말씀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부흥하고 있는 안디옥 교회 가운데 전혀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사울이 누구인지 기억하십니까? 사울은 스데반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할 때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7 5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58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앞에 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8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리고 3절에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초대 교회를 핍박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7장과 8장의 말씀을 읽으면서 굉장히 소름 돋는 부분은, 그렇게 잔인하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장면에서 그리고 교회가 핍박을 당하는 슬프고 아픈 장면에서 사람의 실명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다

그러나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어느 그를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성도들을 잡아 들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늘로 부터 홀연히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져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9 4 말씀입니다. “4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그를 향한 사랑과 책망을 담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며 돌이키시는 음성을 들은 이후에 사울이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기 시작하였어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사울이 변한 것을 놀라워하면서도 아무도 그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교인들을 잡아 가두던 사람이 바뀌었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이 과연 그를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사울을 도와주었던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려다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같이 갔습니다.그리고 바울의 회심과 그의 진심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회심한 사울에게 다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살해의 위협을 당하면서 고향인 다소로 피신할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다시 사울을 부르다 

그리고 나서 오늘 말씀까지 대략 8 정도가 흐른 것입니다. 학자들은 동안의 사울의 행적에 대해서 여러가지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도행전은 그것에 대해서 전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19 말씀에 이렇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스데반 하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저는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사울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아마 말씀을 기록한 누가도 마찬가지이지 않았을까요? 지금 안디옥에 복음을 전하러 사람들이 거기까지 떠밀려 갔는가? 원흉은 사실상 사울이라는 것입니다. 사울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향을 등졌습니다. 사울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들의 삶은 완전히 망가진 것입니다. 성도님들 같으면 괴로움과 아픔을 잊을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나바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사울을 데려오겠다고 다소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다소는 안디옥에서 100마일이 넘는 거리에 있습니다. 혹시 성도님께서 바나바의 입장이라면 굳이 거리를 여행하면서 사울을 찾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깊이 들어가서 사울을 자신의 사역 속에 끌어들이고 싶겠습니까? 이미 충분히 성공적이고 이미 많은 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는데, 물론 사울이 능력이 탁월하고 주님께로 확실히 회심했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를 안디옥의 새로운 공동체로 데리고 오는 것이 공동체에 정말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사울의 입장에서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이 바나바를 만났을 때에 그가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사울은 아마도 자신의 삶에서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회심한 사울을 믿는 사람은 처음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가 열심으로 사역하고 복음을 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향으로 도망갔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났습니다.

사울이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마도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느끼지는 않았을까요? 아마 자신에게는 이상 어떤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거기다가 안디옥에 같이 가야한다는 바나바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 때문에 도망가야 했던 사람들이 거기 있다면 그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은 아니었을까요?


누가가 강조하는

이러한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년간 모여 있어 무리를 가르쳤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시고 싶으십니까? 언뜻 보면 우리는 무리를 가르쳤다 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르침이야 말로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런데 흥미로운 것은, 무리를 가르쳤는데 중요한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친 내용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르침의 내용은 분명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5 42절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5:42 ...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는 여러 곳에서 사도행전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쳤다는 것을 확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루어 짐작할 있는 것은, 분명히 안디옥 교회에서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하여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는 뭔가 다른 맥락으로 일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한번 기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는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과정 자체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여행과 사람들의 움직임과 사람들의 선택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바나바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과연 그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가? 심지어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소까지 가서 누구를 데려왔는가?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이 어떻게 마음이 합쳐져서 사역했는지를 의도적으로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 안디옥 교회의 분위기 

그런 면에서 한번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안디옥 교회의 분위기가 어떠했을까요? 정확하게 말하면 함께 한몸처럼 사역하는 바나바와 사울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것을 그들의 영혼 속에 경험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바나바를 통해서 어떤 따스함을 지속적으로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는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라 섬김의 사람이었고 마음이 진실하고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울은 어떠한가? 사실상 안디옥 교회 성도들 앞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자체가 마치 소설과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어떤 의미에서 원수 중에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원수가 자신들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기적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바나바가 그런 사울을 데리고 왔다는 또한 기적입니다. 만약에 바나바가 사울을 돌보지 않았다면, 교회의 가장 핍박자요 죄인이었던 그에게 친절과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면 과연 사울이 자리에 있을 수나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만나고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의 무엇인가에 대해서 깊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설명하는 복음을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나갈 있는가를 실제로 눈으로 보고 경험하면서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안디옥까지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신 목적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속에서 안디옥 교회를 생각할 때에, 사람들이 단순히 가르침만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어떤 창을 통해서 복음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사람의 인격과 삶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바나바와 사울이라는 사람 자체가 바로 복음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정말 흥미로운 것은, 바로 여기 안디옥의 믿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 이라고 처음으로 불림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무리이다 라는 이야기를 교회 밖에서 부터 듣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읽을 마다 부분이 제일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도대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았을까 그것이 마음에 있던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설교가 중요한 질문을 향한 답변이며, 바로 내용을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 북클럽의 시작

작년 정도에 갑자기 마음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양육 프로그램을 하지 말고, 혹시 교회 밖에서도 북클럽을 한번 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지역 커뮤니티를 연결할 어떤 연결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성도가 그렇게 많다고 하는데, 신앙이 없거나 혹은 교회를 떠나버린 누군가를 만날 있는 그런 기회가 있다면 정말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연말에 교회가 얼마나 많이 바쁩니까? 저에게 맡겨진 감당하는 것도 벅차던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켠에는 뭔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자꾸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께 상의를 드렸습니다. 함께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때에는 선교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모임이 필요해 보입니다, 제가 목사라는 것을 밝히지만 부담 없는 일반 소설로 모임을 이끌면서 일반적인 북클럽 형태로 교회 밖에 사람들을 만날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고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공감하시고 한번 해보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때 부터 저의 다른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책으로 하면 좋을까 굉장히 고심을 했는데, 기독교적인 색체를 가지고 있지만 일반 소설인 불편한 편의점으로 책을 잡았습니다. 사람들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제가 직접 광고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있도록 리브인 시카고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광고지를 출력해서 H마트에도 직접 가져다가 붙였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양육 프로그램을 성도님들에게, 혹시 이런 필요가 있는 분이 있다면 연결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열심히 준비를 하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 안에 여전히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과연 이것이 어떻게 것인가? 과연 목사가 하는 일반 북클럽에 교회 밖의 사람이 것인가그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의 소개를 받고, 그리고 광고를 보고 모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1 중순에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분으로 시작했는데 그중에 한분만 제가 아는 분이고 세분은 저도 완전 처음 만나는 분들이었습니다.  모임은 일반 북클럽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앙적인 배경 같은 것은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야 어떤 분들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한분은 기초적인 신앙은 있지만 교회에 안나가는 분, 두분은 그래도 기독교 신앙이 어느 정도 있는 분, 한분은 카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주 가끔씩 성당을 나가시는 분이셨습니다. 


- 북클럽의 추억

모임을 시작하려고 파네라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얼마나 마음이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과연 모임이 도대체 어떻게 진행이 것인가? 같이 하겠다고 오시는 분들은 도대체 어떤 분들일까? 목사라는 밝히고 모이는데 혹시 모임이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처음에 한분이 카페에 들어오실 때에, 그분이 주저하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사실 그분은 자신은 이런 모임 안할꺼라고 이야기 하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얼굴이나 한번 보고 말해야겠다 라는 심정으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분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눈빛이 범상치가 않았습니다. 목사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오신 것입니다. 처음에 그분의 눈빛을 보는데 저도 마음이 얼어붙는 같았습니다. 그저 마음으로 속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해주시기만 바라면서, 가급적 밝게 활짝 웃으면서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하나님께서 정말 놀랍게 인도하셨습니다. 북클럽 샘플을 진행하기 위해서 제가 준비해간 자료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사실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일반 심리학 책에서 준비해간 짧은 아티클이 그날 히트를 쳤습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는데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에 시간을 예상하고 갔는데 모임을 거의 두시간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기뻤던 것은, 처음에 목사를 향한 의심으로 가득했던 그분의 눈이 모임을 마칠 때에는 너무나 따뜻한 눈빛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모임을 여덟번 정도 모이면서 한국 가기 전에 한권을 끝냈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소감문을 적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처음에 의심의 눈으로 참여하셨던 그분께서 이렇게 소감문을 적어주셨습니다 “목사님만이 가지고 계신 남의 말을 경청해주시고 호응하시는 추임새는 정말 따뜻했습니다. 움추려든 마음에 힘이 실리고 저도 배울점이 많아 너무 좋았어요” 라고 적어주셨습니다.

글을 읽는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따라서 모임을 시작했을 뿐인데, 역시 마치 천국을 경험하는 같은 아름다운 시간들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상처 받아서 교회를 나가지 않는 그분이 적어도 목사에 대한 좋은 마음을 가질 있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저에게는 감사와 기쁨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안디옥 교인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도시 사람들이 성도들을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안디옥 사람들은 복음의 선명한 메시지를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창조주이신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신한 죄인들을 위하여 기꺼이 땅에 오셨다는 복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오직 그분 자신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하여서 죄인을 대신하여서 잔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분은 놀랍게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영원히 사랑하시고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며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복음의 복된 소식은 단순히 논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가장 착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격려의 사람으로, 그리고 사울을 안디옥 교회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사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흉악한 죄인이었는데, 자신의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로 인해 세워진 바로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들은 거기에 있는 사울이라는 존재가 지금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복음 자체라는 것을 몸으로 전율 가운데 매일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을 이끌고 은혜가 그들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때에, 안디옥의 시민들은 그들을 기꺼이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부르게 것입니다. 


- 작은 그리스도 

작년 말에 개인적으로 하나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읽은 책이지만 아주 천천히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거기에서 정말 감동 깊게 읽은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교회는 오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 작은 그리스도로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 건물도, 성직자도, 선교도, 설교도, 심지어 성경 자체도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목적은 하나뿐입니다. 우주 역시 다른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라고 루이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저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나의 설교는 사람들을 작은 그리스도로 만드는 설교인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과연 작은 그리스도로 자라가고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시간에 성도님들께 이렇게 여쭙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는 과연 한번의 예배를 통해서, 그리고 삶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바로 그것을 여쭤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리라

요한복음 13 34절과 3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제자인 알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다시 말해서 단순히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있을 때가 아니라 주님의 베풀어주신 은혜가 우리의 가운데 살아 있을 때에, 세상 사람들은 기꺼이 우리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은혜를 경험한 바울 사도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아마도 자기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신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상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향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 시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짓밟히고 있는 시대 속에서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과 주권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살리시고 인도하심으로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는 은혜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세상은 당한 것을 갚고야 마는 세상이고, 끝까지 찾아가 잔인하게 복수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기를 원합니다.  험악하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에, 특히 교회 밖에서, 나의 직장에서, 나의 비지니스에서, 나의 인간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나의 삶으로 증명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마지막 때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지만 기꺼이 누군가가 우리를 보았을 때에, 사람은 정말 예수에게 속한 사람이구나 라는 가장 값진 명예로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기도 

시간에 말씀을 가지고 같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는, 아버지 하나님 저의 삶에 일어나는 많은 고난의 의미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바라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지혜롭게 걸어갈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친절하고 따뜻하고 은혜가 넘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써 오직 주님의 아름다움을 세상 속에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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