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31일 일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47장 / 세상에서 가장 뿌듯한 바로 그 순간

 

요셉은 좋은 의미로 굉장히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집트의 실질적인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바로 앞에서 자신을 낮춥니다. 자신의 가족이 머무르고자하는 그 모든 결정을 바로가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짜고 진행합니다. 

요셉이 야곱을 바로 앞에 서게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바로를 보자 마자 축복을 합니다. 다짜고짜 하는 야곱의 축복에 바로가 당황을 한 듯 합니다. 그의 나이를 묻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할 말은 그가 자신의 나이가 얼마 되지 못하고, 또 험악한 세월을, 영어 번역들은 hard한 세월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축복을 하고 나옵니다. 

일반적인 이 부분에 대한 이해는,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축복하시겠다는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서 바로조차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충분히 이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회의 연륜이 쌓였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의 식사 모임에 가면, 대화의 주제는 거의 "자녀" 이야기입니다. :) 우리 아들이 어디에 취직했어, 어느 정도 회사야, 어느 정도 연봉이야, 이것이 그분들의 이야기의 가장 핵심 주제입니다. 

처음에는 어르신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해가 됩니다 자녀들이 너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분들은 자녀들을 그 자리까지 키우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그렇게 성공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 그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한 것입니다. 

야곱은 가진 것이 없습니다. 바로 앞에서 야곱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야곱이 감히 바로를 축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아들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을 통틀어서 가장 지혜롭고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 자신의 아들, 바로가 그 위에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로 인해서 야곱은 그렇게 당당하게 바로를 축복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요셉을 통하여서, 얼마나 바로 자신이 그리고 이집트가 그리고 가나안 땅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복을 얻게 되는가가 계속 반복되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 야곱이라면, 찬란한 이집트의 영광에 주눅들지 않고 정말 어깨 펴고 걸었을 것 같습니다. :)

저는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는 말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말,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훔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일로 인해서 이십년 동안 고생에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조금은 상황이 좋아질 줄 알았더니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왔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그의 아들 요셉을 통해 세상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야곱 자신은, 그 결과를 보기 위해서 험악한 세월을 살아내야만 했습니다. 

저는 창세기 47장을 통해서, 종말의 때를 바라봅니다. 저를 포함하여 모든 성도들은 평안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넉넉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야곱처럼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피하고 싶지만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뿌듯한 바로 그 순간"이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그 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위대함을 인해서 기뻐하지 않고, 진정한 왕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며 재림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기뻐할 것입니다. 세상 앞에 당당하게 가슴을 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자꾸 비교가 됩니다. 지금이 힘이 드니 지금이 더 커보입니다. 지금 살아가는 험악한 세월,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반드시 다가 올 마지막 기쁨의 때를 비교하자면, 당장은 지금의 상황이 더 커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 험악한 세월을 살더라도, 하나님이 이루실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야겠습니다. 마치 요셉을 통하여 이집트와 온 세상이 구원을 얻는 것 처럼, 그리하여 야곱이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고 자신감이 넘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볼 것이며,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기쁨을 누리게 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When I have a meeting with elders, the subject that they want to talk about is the success of their sons and daughters. I realized that this is a natural situation because they devoted themselves to bringing up their children. Consequently, their son and daughter made a success in society. So their parents are so proud of them. However, for this, the parents should have a hard time. 

Jacob confessed that his life was painful. However, I assume that Jacob could bless the Pharaoh with great confidence and pride due to his son Joseph. Of course, Jacob had a conviction of God's covenant which God will bless through Jacob and his offspring. 

I see the second coming of Lord Jesus Christ through this chapter. We know that our life is so hard. It is not the easy way. So, we are distressed by the reality of our life. However, we will see the final victory through Jesus Christ. Every believer will enter the kingdom of God before all sinners. That moment will be the best one in our lifetime. I want to live today with this belief and hope for the future.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3강 설교란 무엇인가?(Lecture 3: What is Preaching?) / 출애굽기 39장 22-43절 설교

 


* 이전 글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 _1강 설교자 만들기
(Lecture 1: The Making of a Preacher)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0/1.html

저는 제가 생각해도 철이 늦게 들었습니다. :)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서야 조금은 철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좀 더 젊었을 때에 철이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귀한 분들과의 만남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분들에게 좀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지금 저의 인생의 이 시기에,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강의를 듣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로 설교자로서 고민하던 부분들이 드디어 하나로 종합이 되고, 그 안에서 인생의 후반전을 달려갈 가장 중요한 방향성과 힘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수업은 시리즈 강의입니다. 그런데 Lecture 2: The Divine Call to Preaching은 이미 설교자의 길을 들어선 저에게는 급한 내용은 아니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Lecture 3로 넘어갔습니다. 

이번 강의는, 시리즈 강의의 기초를 놓는 강의입니다. 그러므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의 정의(definition)를 내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추구하고 훈련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설교의 정의를 정립하기 위해서, 세 군데의 성경 본문을 살펴보겠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디모데후서 3장 16절부터 4장 2절까지입니다. 여기서 목사님이 주목하는 것은 그 맥락입니다. "모든 성경"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그들을 구비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3:16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3:17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4:1 In the presence of God and of Christ Jesus, who will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in view of his appearing and his kingdom, I give you this charge: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4:2 Preach the Word; be prepared in season and out of season; correct, rebuke and encourage--with great patience and careful instruction.

그리고 바로 "이런 말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어서 4장 1절과 2절이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컨텍스트의 중요성입니다. 바로 "이러한 말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설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전파하라"라는 것은 원어적으로 케루소인데, 이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보도(herald)"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왕의 명령을 받은 그 마을의 소식을 알리는 자 혹은 전령이, 왕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알리는 것이고, 자신을 돌이키고 은혜를 구하라 라고 외치는 것임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거리의 모퉁이에서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는 방법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전령에게는 새로운 소식(news)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로, 로마서 10장 14-15절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10장 14절에 "전파하는 자가"에서 동일한 원어가 사용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전파하는 자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로마서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0:14 How, then, can they call on the one they have not believed in? And how can they believe in the one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can they hear without someone preaching to them?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0:15 And how can they preach unless they are sent? As it is written,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여기에서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자에게는 기록된 말씀이 있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인 것을 강조합니다. 전령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왕의 대리자로서 왕이 싸인한 서류를 들고 마을에 가는 것입니다. 설교자도, 마치 그와 같은 것입니다. 설교는 자신의 권위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임무를 준 분의 권위에 의거해서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골로새서 1장 28절입니다. 여기서 "전파하여"라는 것은 원어적으로는 카탕겔레오이며, 이것은 케루소는 아니지만, 그것과 매우 비슷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카탕겔레오는 일종의 알리는 것이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개역개정) 1:28 We proclaim him, admonishing and teaching everyone with all wisdom, so that we may present everyone perfect in Christ. (NIV)

그분을 어떻게 선포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문법의 구조상, 사람들에게 경고하고(개역개정은 권하고로 번역),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그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이 모든 것을 결합해서, 설교의 정의를 이끌어냅니다. 그것은, 보냄을 받은 자로써,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을 보도(herald) 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안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herald하는 것이며, news quality를 가져야 하는 것이며, best news in all the world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은, 설교 중에서 굉장히 실제적인 것들(practical)을 언급할 때에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말씀으로 부터 명백하게 흘러나와야 하는 것이고, 그 안에 충분한 가르침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to make the message plain)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전령의 입장에서 어떤 말을 할 때에, 마을의 사람들이 그 의미를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령의 입장에서는 설명을 추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파이퍼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에 대한 정의를 두가지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것은 "Expository Exultation"입니다. 그리고 다음 강의에서 이 두가지를 좀 더 이야기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다룬 세 본문에 바로 이 내용이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제가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설교자의 정체성과 컨텐츠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권위로 서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의 권위에 입각해서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가장 저에게 좋았던 부분은, 가장 실천적인 내용 조차 뉴스의 수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에게 가장 경계하고 주의하는 부분은, 대면대면하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다 이거 아시는 내용이죠?"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떨어트리며, 설교자 스스로 말씀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매우 악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번 설교 때 마다, 오늘 내가 말씀을 대할 때 경험하는, 가장 새로운, 가장 경이로운 수준의 말씀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를 통해서 설교에 대한 태도, 저의 정체성, 그리고 말씀에 대한 감각 등을 완전히 새롭게 다시 한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크게 배운 것은, "설교자가 어느 정도까지 말씀을 설명해야 하는가?" 의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때에, 모든 설교자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자칫 강해 설교라는 것을, "마치 말씀의 가진 모든 단어의 의미와 문법 구조까지 다 설명하는 것"으로 동일시 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성도들이 듣다가 지쳐서 잠들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파이퍼 목사님의 지혜가 오늘 강의 안에 들어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 강의를 들어보아야하겠지만, "성도들이 말씀을 이해했다고 생각되는 수준까지"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자가 가진 설교의 내용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지만, 성도와 말씀 사이에 서 있는 설교자가 어느 수준까지 말씀을 설명하고 가르쳐야 하는 부분에서 아주 지혜로워야 함을 보여줍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청중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얕거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설명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내용들을 들으면서, 지난 주 새벽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내세울 것 없는 제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권위자로서,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시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말씀의 모든 내용들이 가장 새로운 뉴스의 퀄리티를 가지며 새롭게 다가오기를 기도하고 준비하면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가장 중요한 이해를 붙들고 설교하였습니다. 


제 삶을 통틀어 앞으로의 여정이 가장 중요한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다음 강의는 아직 듣지 않았지만, 벌써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삶을 허락하신다면, 제 나의가 칠십이 가까워 올 그때 즈음에는, 파이퍼 목사님처럼 빛나는 눈과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싶습니다.

잘 이해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 열번 이상을 반복해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설교자로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고 싶고, 그리고 가장 풍성한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삼위 하나님을 이해하고 바라보고 강조하고 높이면서 그렇게 목회하고 싶습니다. :)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클리닉에 대한 분석과 적용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 4강 강해란 무엇인가?
(Lecture 4: What Is Expository?) / 사사기 2장 11-23절 설교

* 존 파이퍼 "설교 클리닉" 전체 글 모음 / "설교의 대가"에게 설교를 배우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9.html

2021년 10월 30일 토요일

홈 레코딩, 어디까지 해 봤니? 49 - 너는 내 운명일까? 베링거 Behringer TM1 컨덴서 마이크 언박싱 과 첫 녹음 (2)

 


새롭게 어떤 물건을 산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 하물며 노래하는 사람에게 10년만에 새 마이크라뇨? 이거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거의 비슷한 가격대에서 아주 약간의 업그레이드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베링거 TM1에 대한 엄청난 기대는 없었습니다. :) 그래도 지명도 있는 로데의 카피 모델이고, 그리고 테스트 영상이 굉장히 좋아보여서 기대감이 어느 정도는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박스를 열어보니, 이런.. 고급감이 상당합니다. :) 

무엇이든지 간에, 제 역할을 해 줄 때 가장 좋은 듯 합니다. 그런면에서 마이크는 소리를 잘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리를 잘 받아준다는 것은, 제가 생각할 때에는 "자연스러움"이 그 핵심인 듯 합니다. 

물론 저가형 마이크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움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도 하지만, 이큐와 모든 방법을 써서라도 자연스러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저는 그 마이크가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래 곡은, 베링거 TM1으로 녹음한 첫 곡입니다. 과연 이 마이크는 저의 운명이 될 수 있을까요? :)


어떻게 들으셨나요? :) 사실 이 정도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족히 평소보다 두배의 시간은 걸린 듯 합니다. 

일단 지난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 놓은 AT2020에 맞춰놓은 모든 셋팅값이 전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 저의 보컬 플러그인 체인에서 가장 중요한 다이나믹 이큐값이 완전 느낌이 달라져서 새롭게 느낌을 찾아야했습니다. 세개의 TDR NOVA를 사용해서 제가 생각할 때에 가장 괜찮은 느낌을 찾아보았습니다. 




요즘에 고민하는 것은, 마이크를 어느 정도까지 가까이대고 불러야 하는가 입니다. :) 저는 지금까지 상당히 가까이 대고 불렀기 때문에, 오리지널로 녹음된 소리는 굉장히 뭔가 굉장히 텁텁하고 라디오스러운 느낌이 납니다. 

그래서 NOVA를 첫번째 처럼 셋팅 값을 잡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치찰음 대역대를 정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제 목소리가 저음에서 굉장히 답답한 부분들이 있어서 최대한 눌렀습니다.

혹시 눈치 채셨는지도 모르겠지만, TDR NOVA의 좌측 하단에 보시면 WIDEBAND라고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NOVA를 사용할 때에는, 특정한 주파수 대역을 제가 지정하고 그것에 맞춰서 그 대역만 셋팅된 게인 값으로 컴프레서처럼 누르는 형식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도저히 소리를 잡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처음으로 WIDEBAND 형식으로 노바를 모두 사용했습니다. NOVA의 메뉴얼까지는 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래프로 셋팅값을 넣으면 그것을 기준으로 넓은 대역을 한꺼번에 컨트롤 하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어렵게 음색은 어느 정도 잡았는데, 사실 마음에 드는 소리가 안나왔습니다. :) 그리고 결정적으로 숨소리가 너무 많이 들어갔습니다. 베링거 TM1은 AT2020으로 녹음하던 것과 비교할 때에 엄청 예민한 마이크입니다.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베링거 TM1을 써보고 딱 느낀 것은, AT2020보다 훨씬 소리에 예민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고음역이 강하다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뭔가 예민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특히 제가 팝필터를 하나 더 씌웠음에도 불구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치찰음이 들어갔습니다. 이 마이크는 절대로 너무 가까이 대고 불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

녹음을 다시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디에서로 누르고 이큐로 깍고, 그리고 숨소리조차 전부 잘라낸 것이 위에 음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이큐 값들을 조절해도 어떤 "느낌"이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이런 부분을 언어로 표현하기는 참 어려운 듯 합니다.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에, 아, 이건 정말 소리가 좋은데? 보컬이 참 좋은데? 이런 느낌이 도저히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믹싱을 새롭게 하고 리버브 딜레이 등을 써도, 제가 지금까지 보컬에 사용하던 플러그인들과 마스터링의 체인으로는 도저히 안되더군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세츄레이션 두가지를 추가로 사용했습니다. 

* SPL TwinTube



일단 메인 보컬과 코러스 보컬에 추가적으로 SPL의 TwinTube를 처음 사용해 보았습니다. 원래는 자주 사용하던 테잎 머신 플러그인을 사용해 보았는데, 고음까지 너무 세츄레이션을 시키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베링거 TM1이 하이가 강해서 괴로운데 도대체 상성이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모닉스를 따로 분리시키고 세츄레이션만 먹일 수 있는 TwinTube가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걸어 보았습니다. 위에 보시면 HARMONICS는 꺼져있는 상태입니다. 세츄레이션 노브를 보시면 레벨을 12까지 올렸는데 이미 절반 이상을 올렸네요. :) 평소 같으면 절대 이렇게 하지 않을텐데 일단 좋다고 느껴질 때까지 충분히 올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마스터단에는 BLACK BOX를 사용해 보았습니다. 원래 디자인이 마음에 안들어서 전혀 관심이 없던 플러그인인데 이번에 처음으로 시도해 보았습니다. 유투브 영상을 보니, 사운드는 정말 좋은데 사용법이 너무 까다롭다는 평이 많더군요. 일단 편견 없이 노브들을 조절하면서 전반적으로 소리가 좋아질때까지 움직여 보았습니다. 

사실 베링거 TM1도 중요한 포인트였지만, 이 BLACK BOX가 정말 물건이라고 느껴졌습니다. :) 기존의 음원에다가 어떤 색깔을 확 부여하는데 그것인 전혀 기분이 나쁘지가 않습니다. 진짜 뭔가 사운드의 선명도와 생동감을 확 살려냅니다. 

이렇게 최종적인 마스터링 과정에서 블랙 박스의 셋팅 값을 조절하다가 딱! 어떤 지점에서 느낌이 왔습니다. :) 그 느낌은, 헤드폰으로 들을 때에 보컬이 딱 머리 안으로 들어오는 타이밍이었습니다. 과하지 않지만 충분할 정도로 보컬이 존재감을 부각하는 딱 그 느낌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으로 최종 EXPORT를 했습니다. 

최종 결과물을 한참을 믹싱하면서 듣고 느낀 것은, 베링거 TM1이 AT2020보다는 그래도 "훨씬 낫다" 입니다. :) 사실 저가형 마이크에서 AT2020은 절대 강자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비록 카피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베링거는 꽤 괜찮은 마이크를 만들어냈습니다. 

제가 느끼는 차이점은 어떤 "고급감"입니다. 사실 AT2020을 사용하면서 원하는 느낌을 만들기 위해서 이큐를 특히 dyneq를 무지무지하게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베링거 TM1은 와이드 밴드로 적당하게 눌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컬의 자연스러운 느낌을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리의 질감"이라는 측면에서도 훨씬 좋다고 느꼈습니다. :) AT2020으로 녹음한 제 목소리를 들어보면, 뭔가 약간 싸구려 같은, 뭔가 저질의 소리가 살짝 살짝 섞여 있습니다. :) 아무리 이큐로 감출려고 노력해도, 오리지널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 그 뉘앙스까지는 바꿀수가 없습니다. 물론 세츄레이션을 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TM1은 좀 다릅니다. 상업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어떤 아주 고급스러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 싸구려는 아니야" 라는 TM1의 항변은 충분히 들을 수 있습니다. :) 

그런 맥락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세츄레이션을 더 강하게 먹였을 때에 소리가 변질된다기 보다는, 기분 좋게 살아나는 방향으로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원래 오리지널 사운드가 그만큼 받쳐주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베링거 TM1으로 첫 곡을 녹음해 보면서, 앞으로의 방향성을 한번 가늠해 보았습니다. 일단 소문대로, 마이크 자체 노이즈가 엄청 낮습니다. 가장 큰 메리트입니다. 대만족입니다. :) RX의 디노이즈를 조금만 사용해도 거의 완벽하게 잡음이 제거 됩니다. 

그래서 일단 다음 녹음에서는, 충분히 마이크와의 거리를 두고 노래를 부를 예정입니다. 지금까지는 마이크 자체 노이즈 때문에 마이크 입력 게인을 올리는 것을 많이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외장 프리 역할로 사용하고 있는 402VLZ4의 입력 게인을 충분히 올려서, 치찰음을 방지하면서도 어떤 느낌으로 녹음이 되는지 계속 테스트를 해 볼 예정입니다. 

결론적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 너무 저가형이고 또 베링거이기 때문에, 적어도 한국 시장에서는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것 같아서, 사족처럼 제 느낌을 최대한 정리해서 적어 보았습니다. "가격대 성능의 기적"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의 운명"으로 함께 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혹시라도 저가형 컨덴서 마이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시도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 "홈 레코딩 어디까지 해봤니?" 전체 글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0/blog-post_31.html

홈 레코딩, 어디까지 해 봤니? 48 - 너는 내 운명일까? 베링거 Behringer TM1 컨덴서 마이크 언박싱 과 첫 녹음 (1)

 

처음에 유학을 나와서 홈 레코딩에 관심을 가지면서 마이크를 무엇을 살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 사실 초바자 입장에서 예산의 한정 안에서 선택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가장 많이 팔리고 인기가 있다는 오디오테크니카의 AT2020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딱 10년을 사용했습니다. 

10년동안 사용하면서 제가 생각한 것은, 이 마이크를 통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도해보자 였습니다. 다양한 플러그인들을 걸어보고 또 시험해 보면서, 많은 소리들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아마 제가 구입할 때에 100불 정도로 구입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10년이 지났지만 놀랍게도 가격은 그대로네요. :)

요즘에 찬양 커버곡들을 계속 만들면서 마이크에 대한 갈망이 점점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AT2020 이외의 것을 써본적이 없으니 다른 마이크가 어떤지에 대한 감도 없었습니다. :) 다만, 무언가 약간은 달라지고 싶다, 조금은 좋아지고 싶다라는 열망이 생겨서 많이 검색을 했습니다. 

요즘에 홈레코딩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말이 홈레코딩이지 실제로는 거의 스튜디오를 방불하는 장비들을 갖추고 있는 것을 봅니다. :) 하지만 저의 경우는 아직 홈레코딩의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사용하는 장비를 다 합쳐도 500불이 넘어가지 않네요. 

적당한 수준의 마이크는 사실 최소 300불 이상으로 예산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에 부담이 되더군요. 그래서 AT2020을 아주 약간 업그레이드 하는 수준으로 결정을 했습니다. 

우연히 검색하다가 베링거의 TM1의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저가형 마이크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RØDE NT1-A의 카피 모델이었습니다. 원래는Tannoy TM1이 이 마이크의 전신인데, 아마도 베링거에서 약간의 수정을 한 듯 합니다. 우연히 어디에서 본 것은, 베링거 TM1이 셀프 노이즈가 훨씬 적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결국 베링거의 TM1은 카피의, 카피의, 카피 모델이 되겠네요. :)

검색을 해 보면 베링거 TM1과 로데 NT1-A 혹은 탄노이의 TM1과의 비교 영상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제일 인상적이었던 영상은 아래 영상입니다. 


한국어나 영어가 아니기 때문에 단 한마디도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베링거 TM1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헤드폰으로 들으면 그 차이가 많이 느껴집니다. 로데는 뭔가 귀 안쪽으로 깊이 들어오는 그런 깊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탄노이는 좀 약합니다. 그리고 탄노이 쪽이 고음이 더 강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그래도 이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어짜피 크게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아주 약간 업그레이드라면, 로데의 마이크의 느낌을 살릴 수 있을 정도라면, 베링거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최근 가격인 120불에서 많은 스토어들이 가격을 크게 올렸습니다. 더 늦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윗워터에서 120불을 주고 구입을 했습니다. 그리도 드디어 이틀만에 도착했습니다.


박스를 열었더니 스윗워터에서 넣어준 사탕 봉지가 보입니다. :) 아... 이래서 스윗인가? 감사를 표현하는 스윗한 방식이라고 적어 놓았네요. 일단 사탕 하나를 입에 넣고 기분 좋게 박스를 열어 봅니다. 


처음 박스를 열고 느낀 딱 받은 느낌은, 고급스러움 입니다. :) 마이크 자체 박스는 들어있지 않지만 꽤 단단하게 포장이 잘 되어 있습니다. 왼쪽에는 팝필터가 비닐에 잘 포장이 되어 있고 오른쪽은 마이크 쇼크 마운트네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이크 쇼크마운트를 직접 쓸 생각을 하니, 마구 감동이 밀려옵니다. :)




일단 감동을 받은 것이, 구성품이 아주 깔끔합니다. :) 요즘에는 마이크 사면 선도 넣어주나? 마이크 라인을 꽤 긴 것을 하나 넣어 주었습니다. 갑자기 부자가 된 듯 한 기분이 듭니다. 풀어보진 않아서 실제 길이는 모르겠지만 홈레코딩에서 가까이 놓고 연결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길이입니다. 그리고 팝필터가 아주 깔끔하게 들어있고 쇼크마운트도 실제로 만져보면 아주 견고해 보입니다.


이제 주인공의 등장입니다. :) 비닐에 아주 잘 쌓여져 있습니다. 베링거 로고가 너무 커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묵직하니 뭔가 좋은 것을 산 듯한 느낌이 듭니다. :) 그리고 색깔 자체가 참 이쁩니다. 베이지색 계열의 실버 느낌입니다. 촉감도 싸구려 같지 않고 꽤 중후한 느낌을 줍니다. 





마이크를 꺼내서 이리 저리 돌려보면서 찍어 보았습니다. 저가형 마이크라고 해서 특별히 외관상으로 문제되어 보이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어딘가에 유격이 있다는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자도 금도금으로 되어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 외관에서 벌써 큰 만족감이 찾아오네요. 

이제 실제로 장착을 해보았습니다. 쇼크 마운트 설치도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보나 모양새가 꽤 그럴 듯 합니다. :) 물론, 약간의 실망은 했습니다. 옆에서 보면 괜찮아 보이는데 딱 정면에서 보면 쇼크 마운트 자체가 우측으로 약 5도 정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 이런, 쇠로 만들어져서 손으로 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쇼크 마운트 자체 고무줄로 밸런스를 맞출려니 엄두가 안납니다. 그냥 참고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어디선가보니, 베링거 TM1의 팝필터가 로데 모델보다 훨씬 얇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준에 제가 사용하던 팝필터를 베링거 TM1에다가 하나 더 부착을 했습니다. :) 원래 고음이 좀 더 강한 모델이니 이렇게 해 주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의 10년을 함께 해줄 AT2020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


이렇게 보니, 확실히 베링거 모델보다 사이즈가 작은 것이 느껴집니다. 약간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그래도 10년을 함께 하니 마치 친한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베링거 박스에 고이 담아서 넣었습니다. 아주 오랜 후에 다시 꺼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박싱 글을 다 써 보네요. :) 그만큼 제 개인적으로는 참 고민을 많이했고 어려운 결정을 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사실 가격이 너무 저렴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분들에게는 고려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그런 마이크입니다. :) 그리고 이정도 가격대에서 뭔가 좋은 사운드를 기대하기도 사실은 상당히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새로운 마이크를 구입을 하고, 기존의 마이크보다는 아주 약간의 업그레이드를 기대하면서 언박싱을 해보는 것은 참 기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 전반적으로 외관이 아주 고급스럽고 훌륭합니다. 그리고 좋은 사운드를 내 줄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운드는 어떨까요?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홈 레코딩 어디까지 해봤니?" 전체 글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0/blog-post_31.html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46장 /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그리고 그 안에서의 감격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고 이집트로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야곱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납니다. 하지만 야곱의 마음에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기 26장에서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라고 야곱에게 말씀하신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의 최 남단의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야곱의 이름을 두번 부르십니다.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겠다고 하시며 다시 너를 인도하여 올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의 긴 족보가 등장합니다. 놀라운 것은, 가장 심각한 기근의 시간 동안에 이들이 살아 남았고 또한 번성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리고 27절에 등장하는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명이었더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들의 번성의 완전함을 보여줍니다. 흥미롭게도, 스터디 바이블은 창세기 10장에서 70개의 족속들의 수를 창세기 46장의 70명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믿음의 눈에서 볼 때에 새로운 인류가 등장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결국, 야곱은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끌어 안고 웁니다. 성경에 있어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에 하나입니다. 야곱의 마음 속에 실질적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던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요셉의 모든 고난의 시간은 바로 이 장면을 위해서 존재했던 것입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감격적인 그리고 감정적인 재회(emotional reunions)가 이곳이 마지막이 아님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말라기 4장은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와 연합의 중요성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저는 항상 언약 신학 혹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내용이 언급될 때 마다, 굉장히 차가운 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시고 성취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그것이 저의 감정까지 연결되는 것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창세기 46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어가지는 그 과정 속에서, 그 최종적인 목적이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이라는 것을 깨닫고 크게 감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감정적인 연합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놀라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구원을 계획하시며 이루시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히 "논리"로만 받아들입니다. 식어진 마음으로 믿음을 "논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구원의 논리"를 가지고 있으나, 그 최종적인 결과와 목적은 "구원의 감격"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은 너무 감정적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감정에만 매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그러나,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기다렸던 주인이 돌아오면 기쁨에 춤을 추면서 좋아하고 품에 안깁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원을 세우시고 이루시고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데, 우리가 그저 그것을 논리로만 여기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충분히 감정적이지 못하다면, 오히려 그분을 향한 우리의 뜨거운 마음을 죄악시 한다면, 우리의 신앙에 대한 태도가 무엇인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In this chapter, we see the most emotional reunion in the Bible. Joseph and his father finally met. They hugged and wept. How can we describe this scene with some words? 

For a long time, as the pastor, whenever I heard that God's plan and his sovereignty, I felt it is so cold logic. I know the God of Trinity is love. They made the plan of redemption for sinners with their love. However, I felt the word of the plan itself is so cold. 

However, I found the ultimate goal of God's great plan. It is the emotional reunion. There is indescribable joy and gratitude in our spiritual union with God. Our salvation is not the logic itself. The understanding of the logic of salvation is not our gold. I know that it is a critical one but it is not the final goal. 

the grace and truth study bible shows that this emotional reunion is the main theme in the bible. Jesus Christ himself showed that the great father and the prodigal son's emotional reunion. We should have an experience emotional relationship with God who is our father and lord. 

2021년 10월 29일 금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45장 / Too Good to be True & 복음을 누린다는 것

 

유다의 진심어린 호소까지 본 요셉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형제들 앞에 서 있는 이집트의 총리가, 바로 그들의 형제 요셉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형제들은 너무 놀라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놀라운 것은, 요셉이 형제들을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가장 극적인 자리에서 요셉은 매우 격정적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논리는 매우 차분하며 또 성경적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셨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자신을 이집트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무려 두번이나 강조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모든 계획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냅니다. 

요셉은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뜻을 고민했고, 그 안에서 답을 찾았으며, 그리고 이제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형제들에게 알려줍니다. 형제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오기를, 그리고 이집트에서 같이 이 흉년을 이겨낼 것을 제안합니다. 

이 장면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마이클 호튼의 책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Too Good to be True!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것이 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좋은! 그런 뜻입니다. 자신들이 팔았던 요셉이 살아있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으며, 그들이 비웃던 하나님의 꿈은 이루어졌으며, 이제 요셉이 자신들을 초청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좋은 일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요셉은 베냐민의 목을 안고 웁니다.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입니다. 요셉이 형제들과 입맞추며 웁니다. 그런데 형들은 울지 않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주목합니다. 요셉이 믿기 어려울 만큼의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이야기하고 강조하고 그 안에 들어오라고 하는데, 형들은 선뜻 그 속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5절에 보니 요셉은 형들에게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고 말합니다. 넷 바이블은 "do not be upset and do not be angry with yourselves because you sold me here"이렇게 번역합니다. 

요셉의 염려는, 형들이 스스로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과거에 대한 진실한 회개가 있는 것은 좋지만, 그 안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을 요셉이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요셉의 당부입니다. 24절에 보니 아버지에게 보내면서 "길에서 다투지 말라"라고 당부합니다.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것을 염려하지 않았을까요? 요셉을 팔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인가를 확실하게 하려고 하는 것을 막은 것은 아닐까요? 요셉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형제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이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성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도의 심리는 어떠해야할까요? 저는 심리 전공이 아닙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한국 성도님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해결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평생 죄인"입니다. 

물론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그래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이미 들어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평생동안 분노하고 한탄합니다. 회개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친, 혹은 도를 넘어선 자기 비난과 한탄은 결국 복음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복음을 누리라는 말이 너무나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목회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설교의 최종적인 목적은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를 비난하고 정죄하며 평생 괴로워하도록 만드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결국 설교의 목적은 한 사람이 은혜 가운데 들어오도록, 그리고 은혜를 누리도록, 그리고 은혜 안에서 끊임 없이 돌이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창세기 45장은 설교자에게도 또 성도님들에게도 신앙의 태도에 대한 결정적인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I think this chapter is very critical to understanding the attitude of God's people. I was surprised by Joseph's confession about his situation. Even he said twice that God sent him to Egypt. He doesn't blame his brothers. Rather, he insists that there has been God's providence in him and his brothers. So he stresses that his brothers should not be angry about themselves. However, his brothers can't do that. They did not weep with Joseph.

I think that Some Korean Christians blame themselves severely. I know that we need sincere repentance before God. We should mourn for our sins. But, the final goal of our mind and attitude is not mourning. It is the joy and satisfaction with God's grace and Jesus Christ. 

2021년 10월 27일 수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44장 / 타인을 위한 순수한 희생의 가치

 

아마도 요셉은 형들을 계속 믿지 못한 듯 합니다. 그는 형들에게 은혜의 잔치를 베풀었지만 여전히 형들의 진심에 대해서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함정을 팝니다. 자신의 청지기를 시켜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몰래 넣습니다. 그리고 떠나던 그들을 덮쳐 다시 그들이 요셉에게 돌아오게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에게 있어서 모든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 갑니다. 아버지가 목숨처럼 아끼는 베냐민이 이집트에 남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막내 동생이 영원히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 누구도 감히 요셉 앞에서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하여서 요셉에게 호소합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베냐민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유다는 차라리 자신이 이곳에 남아서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던지고 희생하는 엄청난 결단입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집트의 총리가 요셉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요셉의 형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의 요셉을 향한 호소는, 자신의 생명과 인생을 건 진심인 것입니다. 

요셉이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요? 사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계속 시험을 해야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요셉은, 자신들의 이익과 입지를 위해서 동생을 팔아버린 잔혹한 악인들이 이제는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기적이고 악한 자들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이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에게 "완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간의 숭고한 결심이라도 그것은 죄로 오염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구하기 위한 유다의 순수한 사랑과 결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강하게 떠오르게 합니다. 

기독교는 너무나 심플한 것입니다.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적인 신적인 사랑으로 출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를 통해 세상으로 흘러갑니다. 

유다가 아버지를 너무나 염려하여서, 동생 대신에 종이 되기로 선택하였던 것 처럼,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을 위하여 기꺼이 인간을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이집트라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 가운데에서도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찬양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Joseph made tricks to discover what is inside of his brothers. In a dead-end situation of Benjamin, Judah persuaded Joseph that he will remain as a slave in Egypt. Joseph finally sees his brother's changed attitude. They sold Joseph to gain their profit from their father. However, they finally show a sacrificial attitude. This story strongly evokes Jesus Christ. He came to this world to save the sinner according to the fathers' will. There is no reason from us. Only God's will and love made it.

삶으로 드리는 찬양 (53) - 예수 하나님의 공의

 

1. 가사 살펴보기

(1) 예수 하나님의 공의 주 독생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예수 재물이 되신 주 영광 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

(2) 예수 하나님의 사랑 주 은혜와 말씀으로 나타났네
예수 거룩한 하나님 영광 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

(후렴) 주의 나라 영원하며 주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
주의 주권과 주의 통치와 주의 나라 힘과 권세 임하리
예수 하나님의 공의


2. 곡 소개

곡은, 원곡의 제목은 This Kingdom이라는 곡으로, 전하세 예수 12집에 번안 곡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 교회에 처음 소개된 것이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많은 성도님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이 곡은, 죄악으로 소망이 없던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셨다는 복음의 핵심적인 고백을 담고 있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마태복음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4:17 From that time on Jesus began to preach,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예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박한 도래와 그 나라가 요구하는 회개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Study Bible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Publishers, Inc., 2008), 4:17.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개역개정1:17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NIV)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의 핵심 구문입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의 것으로 여겨지는, 또는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가리킵니다. 공정하고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아들의 순종과 죽음의 공로에 따라 죄인을 의롭다 칭하시거나 또는 선언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행했거나 행하고 있거나 행할 그 어떤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을 통해 주시는 것입니다.. 

R. C. Sproul, ed., The Reformation Stud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2015 Edition) (Orlando, FL: Reformation Trust, 2015), 1979.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노래하는 곡이다. 죄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반응하는 자들, 그리고 자신의 죄가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음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인 것 혹은 죽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분의 통치와 주권과 힘을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인간의 나라들은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다르심을 받으며,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할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그 나라에서 삼위 하나님 안에서 영생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질 그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고난 가운데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2021년 10월 25일 월요일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설교는 위대한 일입니다 (Lecture Introduction: Preaching Is a Great Thing) / 출애굽기 35장 20-29절 설교

 


설교를 잘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모든 목회자들의 바램일 것입니다. 좋은 설교를 듣고 싶은 것은, 아마도 모든 성도의 바램일 것입니다. 설교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수업을 듣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허술한지, 지난 번 글의 주제였던 존파이퍼 목사님의 간증이 설교 수업의 서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서론 강의는 따로 있었네요. 서론 강의를 몇번에 걸쳐서 내용을 듣고 숙지하면서 느낀 점들을 적어 봅니다. 

사실 영어라는 언어는, 한글 보다 훨씬 의미가 함축적입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영어 한 문장 안에 한글로 풀어내면 세 문장 정도의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10분 남짓의 영상이지만, 실제로 이것을 신학교의 컨텍스트 안에서 풀어낸다면 세시간 정도의 클래스는 너끈히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기록하고 남길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 이렇게 이해되었습니다. 설교란 무엇인가? Worship 그리고 Expository Exultantion 입니다. 

이 두 가지에 집중하면서, 먼저 존파이퍼 목사님은 고린도전서 1장 21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설교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preaching is a great thing)를 설득력있게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개역개정) 1:21 For since in the wisdom of God the world through its wisdom did not know him, God was pleased through the foolishness of what was preached to save those who believe. (NIV)

위 말씀에 따르면, 설교야 말로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멸망하는 죄인을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구(instrument)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너무나 위대한 것입니다.

저는 사실 고전 1:21의 "전도"라는 부분을, 개역 개정의 번역에 따라서 보통 생각하는 전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의 큰 오해였네요. :) 이것은 다른 영어 번역본들이 모두 preach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해하는 설교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이해입니다.

그리고 파이퍼 목사님은, 에베소서 3장 8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입니다. 

에베소서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개역개정) 3:8 Although I am less than the least of all God's people, this grace was given me: to preach to the Gentiles the unsearchable riches of Christ, (NIV)

도대체 어떤 사람이, 평생동안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을 다룰 수 있는가? 라고 파이퍼 목사님이 반문합니다. 이것은 저에게 있어서는 획기적인 설명입니다. :) 설교자는 삶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묵상하고 공부해야 할 주제가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평생동안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2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말씀의 논리 구조에 주목합니다. 1절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는 전제를 강조한 다음에 이제 그 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2절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라는 명령이 등장한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디모데후서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4:1 In the presence of God and of Christ Jesus, who will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in view of his appearing and his kingdom, I give you this charge: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개역개정) 4:2 Preach the Word; be prepared in season and out of season; correct, rebuke and encourage--with great patience and careful instruction. (NIV)

이것보다 더 설교를 명령하는데 있어 "위대한 서론"은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설교의 궁극적인 중요성(ultimtate seriousness)"를 보여준다고 말씀합니다. 저 역시 너무나 동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앞에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설교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너무나 위대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이퍼 목사님에 따르면, 설교는 필수적이며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설교는, 가르침도, 나눔도, 토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며, 다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영상의 후반전에서는, 아주 복합적인 논리로 들어갑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바로 그 본성에 뿌리박고 있는 것입니다(it is rooted in the nature of the very being of God).

존파이퍼 목사님은 먼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언급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한분이시지만 그러나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서로는 서로를 향하여 영원히 완벽하게 알고, 영원히 완벽하게 사랑하시며, 영원히 완벽하게 기뻐하시며, 영원히 완벽하게 이해하십니다. 성령님이 삼위 간에 교통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이런 방식으로 혹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만드셨습니다. 여기에서 논리적인 연결 고리는 매우 함축적입니다. 아마도 파이퍼 목사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해야 하는 것 처럼, 설교를 듣는 인간의 고귀함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적인 의도를 생각해야 함을 의도하신 듯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위대하심을 보고, 우리의 마음은 그분의 가치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는, 하나님께서 소통의 도구로서 주신 것인데, 다른 어떤 것과 다르게 하나님의 계시와 그분의 백성을 연합시키시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expository는 진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며 그분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설교라는 expository와 exultation 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으로 그분에게 영광을 돌릴뿐 아니라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exultation을 exaltation으로 알아들었습니다. :) 발음은 비슷하지만 뜻은 완전히 다르네요. exultation은 무척 기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중에 강의를 들으면서 파이퍼 목사님 본인이 스펠링을 정확하게 말해주시면서 의도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이어서 설교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영상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Exposition bringing out reality that is in the text and verbalizing it for the understanding of those created in the image of God and exulting over what we have seen and what we have said so that our hearts are appropriately responding to the beauty of what's there. They can come awake with us to that truth and that worth. 

어떻게 보면 평범한 설교의 정의라고 볼 수 있지만, 저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설교라고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저의 이해는 이렇습니다. 설교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회복해야 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회복할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 있는 인간을 향해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교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설교 자체에 대해서는 고민했지만, 설교를 듣는 청중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순히 청중의 문화적인 맥락에 대해서는 고려해본 적이 있지만, 정말 "청중"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인간은 설교를 반드시 필요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 설교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가지고 언제나 설교에 임할 수 있겠다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에게, 이 강의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저는 설교는 Worship이다 라는 정의에서부터 턱 하고 숨이 막혔습니다. 보통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초점은, "어떻게 설교를 잘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말씀을 잘 풀어낼 것인가" 혹은 "어떻게 통찰력 있게 이야기할 것인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이퍼 목사님에게 설교는 그 무엇보다 먼저 Worship입니다. 그것은 강해이기도 하고, 말씀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설교자 자신의 예배가 바로 설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설교자인 저 자신이며,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라고 말하기 이전에, 제 자신의 하나님 앞에서의 성찰과 엎드림이 바로 설교라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는, 이 강의를 통해서 설교자로서의 제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목표를 정히 보았습니다. 한주에 하나 영상을 보고, 제 설교에 실제로 적용해 보는 것입니다. 이번 강의를 듣고서, 설교는 worship이다 라는 이해,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설교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인간을 향한 선포라는 이해를 가지고 한 설교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고, 최선을 다해서 말씀의 의미를 드러내고, 최선을 다해서 핵심 내용을 강조했습니다.


저는 사실 굉장히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설교 단에 올라가면 저도 모르게 부끄러움이 몰려오고, 왠지 뭔가 말하기가 민망하고 그런 느낌을 많이 가집니다. 언젠가 존파이퍼 목사님의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저 스쳐지나갔던 그 설교 영상 속에서, 팔을 한 없이 높이 치켜 올려들었던 존 파이퍼 목사님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한 없이 부족한 저를 설교자로 세우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설교가 저의 개인적인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앞으로도 한 없이 부끄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설교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길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행해져야 하는 유일 무일한 어떤 것이라면, 이제는 부끄러움 없이 설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위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클리닉에 대한 분석과 적용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 _1강 설교자 만들기
(Lecture 1: The Making of a Preacher)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0/1.html

* 존 파이퍼 "설교 클리닉" 전체 글 모음 / "설교의 대가"에게 설교를 배우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9.html

뜨겁지 않은 사람이, 따뜻한 사람이 되기까지 / 김동률 - 내 마음은

 

어떤 노래를 들을 때에, 마음에 완전히 들어와서 남는 가사가 있습니다. 김동률님의 "내 마음은"이라는 곡을 처음 들었을 때가 그랬습니다. "뜨겁지 않은 사람이 됬어" 제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가사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목회를 오랫동안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뜨겁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뜨겁지 않은 것은, 모든 일에 대면 대면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기대와 비전보다는, 그저 아무런 희망 없이 감정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다가서지 않는 것이며, 마음에 있는 따뜻한 말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되려 삼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뜨겁지 않은 사람"입니다. 

저는 칭찬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격려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가 뜨겁지 않은 사람이 되었구나..." 누군가를 향한 깊은 벽이 느껴졌습니다. 

상대방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이 만든 벽이었습니다. 마음을 담아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 사라지고, 그저 형식과 듣기 좋은 내용이 남은 말들이 저로부터 나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참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어느새 제 자신이 뜨겁지 않게 되었음을 것을 깨달은 순간, 다른 사람을 향하여 내 자신을 향하여 뜨겁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참 낙심이 되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저의 삶을,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주시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따라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뜨거운 사람으로 남자, 뜨거운 사람으로 살아가자, 혹시 그렇게까지 뜨겁지 못하더라도,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가자, 그것이 저의 새로운 마음입니다. 

삶이 단조롭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자신이 나 스스로를 실망시킨다 하더라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어도, 힘이 사라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을 때에도, 차가워 마음이 식어버린 사람과 세상을 향하여, 따뜻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마음으로 새롭게 다짐해봅니다. 

신앙은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행정이 아닙니다. 신앙은 조직이 아닙니다. 신앙은 직분이 아닙니다. 신앙은 형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모임이 아닙니다. 신앙은 어떤 보이는 것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뜨거운 사람, 그리고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곳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출발하는 것이고, 우리가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을 감싸는 것이 바로 따뜻함입니다. 

이제 겨우 차가운 사람에게 벗어나서, 앞으로 조금은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시카고는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얇은 옷을 입고서는 견딜수가 없을 정도의 추위입니다. 세상이 차갑다고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너무 차가워서 웅크리고 있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따뜻한 온기로 나의 옆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삶을 충분히 이루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살아가겠습니다.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43장 / 공감, 과정, 그리고 회복

 


우리의 삶은 매우 짧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기가 참 쉽지가 않습니다. 자라온 환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처한 누군가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의 힘든 점을 공감해주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면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읽고 있어도 전혀 아무것도 안 읽는 것과 동일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한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을 해 본적 없는 사람이라면, 요셉의 스토리를 보면서도 대면대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평소에 누군가에게 공감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이야기가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을 때에 당혹스럽습니다. 청소년 시절에 가족과 강제로 헤어진 한 사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배신 속에서 몸부림쳐야했던 시간들, 그리고 이제 성인이 되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막내 동생을 만난 그 순간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결국 야곱의 형제들이 다시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야곱이 허락을 합니다.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들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도합니다. 

요셉의 집에 일하는 자들은, 청지기까지라도 지혜로운 대답을 합니다. 돈이 왜 자신에게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요셉의 형들에게 "너의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방의 나라 속에 요셉을 통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들어갔음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베냐민을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요셉의 울음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그는 기적처럼 사랑하는 동생을 만나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요셉은 형들을 나이에 따라 앉히고 잔치를 베풉니다. 형들의 목숨은 요셉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혜를 베풉니다. 모든 근심을 잊고 형들과 베냐민은 요셉과 즐거운 시간을 가집니다. 

성경은 과정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가장 어려운 시간들을 경험하고 또 그 어려움들을 풀어갈 때에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요셉이 한번에 형들을 죽이든지, 혹은 용서하든지 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요셉과 형들의 회복의 과정을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우리에게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Sometimes, I read Bible without some emotions. It is not easy for me to read the Bible having full of emotion. Surely, I don't have the same situation with Joshep. So, I need more focus on the Bible through the storyline. 

Bible doesn't suggest us the conclusion. It needs time and progress. Joseph had a power to kill or save his brother. But he chooses to have recovery progress with his brothers. We need time to progress and we should have one step for that. 

2021년 10월 23일 토요일

페이스 피아노를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

 

아내와 저는 오랫동안 함께 찬양팀으로 섬겨왔습니다. :) 처음에 아내를 만난 것도 찬양팀 리더로 그리고 반주자로 만났습니다. 갓 대학부에 올라온 아내가 저의 콘티를 보고 연결이 하나도 안된다고 바꿔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굉장히 당황했지만 일리 있는 조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콘티를 전반적으로 수정하였습니다. :) 아마 그때부터 아내는 저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는 피아노를 참 잘 칩니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온 저는, 아내가 얼마나 정성으로 피아노를 대하는지 그리고 열심히 준비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위해서, 그리고 함께 찬양을 나누고 싶어서 페이스 피아노 채널을 시작한 지 어느덧 1년 5개월이 지났습니다. 

* FAITH PIANO

처음에는 찬송가 연주로, 그리고 찬송가 중심의 ccm으로, 그리고 지금은 제가 추가로 작업을 더하여서 피아노를 바탕으로 밴드 중심의 곡들을 녹음하고 있습니다. 이 채널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시작한 부분도 있었지만, 팬데믹 기간 중에 교회를 섬겨야 하는 실제적인 필요성도 컸습니다. 

만든 곡들이 꽤 많이 쌓였습니다. :) 그만큼 저에게도 아내에게도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곧 잘 아내가 피아노를 치고 제가 찬양을 합니다. 저의 가족에게는 그것이 생활합니다. 하지만 녹음을 통해서 찬양을 다른 분들에게 들려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고, 어떤 녹음들은 참 아쉽고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모든 부모에게 자신의 자녀가 너무나 소중한 것 처럼, 저와 아내에게는 지금까지 작업한 곡들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곡들을 다시 들어보니 녹음했던 시간들과 마음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이번에, 새롭게 모든 곡들의 커버를 곡만의 감성을 담아서 교체했습니다. :) 이제는 조금은 더 보기 좋은 채널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아내에게 음악적인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피아노를 칠 수 있을 때 까지 평생을 찬양하는 사람들로 남고 싶습니다. 

요즘에 인생이 정말 짧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천을 앞두신 성도님을 뵙고 왔습니다. 마지막 인사일지도 모르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안들었습니다. 유투브로 찬양을 듣고 계셨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을만큼 몸은 연약해졌지만, 그 영혼은 반석과 같은 하나님을 만나고 계셨습니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표정이 너무나 평온한 성도님의 얼굴에서, 그분은 이미 천국에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저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그리고 소리가 존재하는 곳임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모든 음악과 소리는, 그것의 창조자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용될 것입니다. 수 많은 천사들과 성도들 사이에 서서,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할 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기 전이 이 땅에서, 제 목소리와 삶을 다하여 여호와를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

2021년 10월 22일 금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42장 / 요셉의 형들의 회개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만약에 성경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요셉의 성공" 그 자체였다면, 창세기 41장에서 스토리가 끝이 나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통해서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 뿐만 아니라, 잔인한 요셉의 형들에게까지도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성경은 여전히 야곱의 아들들을 "요셉의 형"이라고 부릅니다. 혈연 관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내가 원한다고 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고대 세계 전체에 기근이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이집트에 찾아와 요셉의 눈 앞에서 엎드려 그에게 절을 합니다. 

우리는 쉽게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호되게 누군가에게 당해본 사람은 용서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인지 압니다. 화병이나 우울증이 괜히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제가 요셉이었다면 당장 복수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시원했을까요? 그러나 요셉은 복수의 마음을 억누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형들에게 접근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스파이로 몰아 붙입니다. 요셉의 도발에 형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열두 형제이며 그 중에 하나는 "없어졌다"라고 말합니다.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고 스스로도 속이고 죄를 감추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요셉은 막내 베냐민의 생사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형들이 베냐민을 데려올 것을 요구합니다. 형들은 그의 아버지가 너무나 아끼는 베냐민을 이집트로 데려온다면 자신들의 아버지가 견디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을 이미 한번 아버지께로부터 빼았았던 그들이기 때문에, 요셉의 이런 요구는 자신들의 과거를 집요하게 생각나게 했을 것입니다. 

형들이 자신들의 죄를 기억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요셉은 웁니다. 요셉은 시므온을 이집트에 붙들어 놓고 자신의 형들을 다시 돌려보냅니다. 놀랍게도 자신들의 곡식 자루 안에서 각 사람의 돈 뭉치가 다시 나옵니다. 

뭔가 크게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아마도 형들은 그 돈을 보면서, 요셉을 팔아넘기고 받았던 돈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그들의 죄를 들추며 지적하며 상기시킵니다. 리우벤은 자신이 베냐민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시므온까지 찾아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아들을 잃었던 야곱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삶에서 많은 것들을 잊고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과거의 잘못은 덮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과거를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시고 그러한 잘못의 결과를 해결하도록 계속 마음에 부담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용서와 회복의 과정은 길고 고통스러운 것이며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Certainly, God used Joseph and make him the chief officer in Egypt finally. However, this is not the end of God's plan. God has another important plan for Joseph's brother. Because the famine was so severe in all of the ancient worlds, the brothers should come to Egypyt to seek food. They came to Joseph and bow down to him. 

Joseph did not revenge on them. Maybe, God's grace suppresses his mind. Rather, Joseph used some tricks to evoke his brother's sin to themselves. Joseph's brothers start to walk on a repent through this story. God forgives our sins and gives grace to us. However, the process of repentance is not easy. First of all, the sinners should look in the face their sin and its seriousness.

2021년 10월 21일 목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41장 / 하나님의 지혜 그리고 성도의 지혜

 


요셉이 감옥에 있는 동안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무려 이 년 후에 요셉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의 꿈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이집트의 최고 지도자인 파라오도 꿈의 영역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꿈을 꾸고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없어 번민합니다. 그 누구도 도울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때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바로는 요셉을 급히 부릅니다. 

파라오는 요셉이 꿈을 푸는 능력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요셉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스터디바이블은 히브리어로 "나는 아니다"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으며, 오직 요셉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여줍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꿈을 단순히 해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흉년의 어려움이 닥칠 것을 대비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담대하게 제시합니다. 바로는 그의 지혜에 감동하여서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웁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지혜라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의 꿈에 대한 해석을 수동적으로 받은 수준이 아니라, 요셉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품고 자신의 상황 가운데 적용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바탕으로 하여서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행할지를 풀어내는 것, 그것까지 성경은 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단순히 성경을 이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하고 세상을 향하여 사용해 나가는가에 대한 방향까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 사람들과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교류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북클럽을 포함한 바람직한 기독교 교육의 방향성을 이 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나이가 서른입니다. 그가 이집트로 팔려오고 13년이 지났습니다. 성경에서 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정말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13일도 아니고 13개월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조급하게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루실 아름다운 미래를 바라보며 "신앙으로 버티는 것"이 아닐까요?

일곱 해의 흉년은 단순히 이집트 뿐 아니라 온 세상에 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양식을 구할 때에 바로 조차 요셉에게 가라고 합니다. 온 세상에 요셉을 통해서 생명을 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히 바라보게 합니다. 하루만 굶어보면 음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이 되십니다.

I discovered that Christians need a long time to be mature in the faith. God uses time to make us his good children. Finally, even 13 years later, God made Joseph as a minister who reigns Egypt. Joseph only glorifies God when he interprets Paraho's dream. The interesting point is this. Of course, God gave the interpretation to Joseph. However, Joseph adds his strategy to overcome the coming famine. This is the Christian's wisdom. We should accept God's revelation through the Bible. But, we should think and adapt it to our real life to make it possible. We should understand the philosophy of this age and overcome it and suggest what God wants to them. 

2021년 10월 20일 수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52) - 소원

 



1. 가사 살펴보기

삶의 작은 일에도 맘을 알기 원하네
그길 좁은 길로 가기원해
나의 작음을 알고 분의 크심을 알며
소망 깊은 길로 가기원하네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가는 길만 비추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삶의 절이라도 분을 닮기 원하네
사랑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좁은 길로 가기원하네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2.  소개

 곡은남성 CCM 듀오인 꿈이 있는 자유의 3집에 수록된 곡이다 곡은성도의 가장 깊은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소원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곡이다하나님을 알고 가까이하며그분처럼 은혜를 베풀며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사랑의 길로 걸어가고자 하는 내용을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로 표현한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12 Therefore, my dear friends, as you have always obeyed--not only in my presence,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2:13 for it is God who works in you to will and to act according to his good purpose.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개역개정2:15 so that you may become blameless and pure, children of God without fault in a crooked and depraved generation, in which you shine like stars in the universe (NIV)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중생이나 칭의를 이루어 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것들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순종 안에서 자라기 위해서 그들의 성화의 역사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두렵고 떨림으로 라는 말은 신자가 순종에 대해 가져야하는 주의와 진지함을 보여줍니다신자들은 이기심 없는 겸손함 안에서 일치에 대한 중요성을 주의하고 인식하면서 순종을 실천하고 나타내야 합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719.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하나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결정을 내릴 때에 하나님을 존중해야 하며그리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Tony Evans, The Tony Eva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 2019), 1407.

 

4. 찬양에 대한 묵상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다하나님은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살리시며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 하신다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간다.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의 겉모습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내면이 변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새로운 소원을 주신다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높이며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은혜로 받는 구원을 오해한 사람들은마치 이상 우리는 아무런 삶의 목표가 없는 사람들처럼 생각하며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하게 살아가는 경우도 많이 있다그러나 바울 사도는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진지하여 여기고 그것을 우리 가운데 이루는데 있어서 더욱 힘써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상황들은하나님의 구원을 우리 속에서 적용하고 풀어낼 있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회들이라는 것이다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선택들 속에서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조건 없는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그것은 좁고 고된 길이 틀림없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순간에도 자신의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살아간다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부귀 영화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지만그것이 우리의 삶의 우선 목표는 아니다우리의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우선 순위에 있는 목표는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의 구원을 우리 속에서 풀어내며 순종하며 그분을 높이는 것이다 아름다운 찬양을 통해서 그러한 성경적인 소원이 더욱 풍성해지고 실현될 있기를 원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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