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30일 월요일

리디머 처치 (Redeemer Church) 4 - 오직 그분을 예배드리라! / Here I am to Worship - Olso Gospel Choir



당신이 이번주에 참석한 예배는 어떠셨나요? 은혜를 많이 받으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혹은 어느 정도 실망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처럼 모태 신앙인 평범한 성도가 서른셋까지 드리는 예배의 횟수를 대략 계산해 보았습니다. 한주에 두번, 1년에 백번으로 잡아도, 대략 3천번 정도가 됩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많은 예배에 참석했지만, 예배가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고민해 본적은 참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배의 하나하나의 과정을 묵상해보고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은 성도님들에게, 사실은 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미국의 장로교 교회 안에서 인정받는 리디머 처치의 예배를 참석하고 고민해 보는 것은 저의 인생 가운데, 그리고 읽으시는 당신의 인생 가운데도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성경을 통독한 것은 아마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부터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늘 마음에 궁금했던 던 한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우상숭배' 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과연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우상숭배' 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우상 숭배라고 생각하면 금방 구약이 떠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췄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가운데 우상을 만들지 말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상을 섬기지 마라' 라는 당위적인 명령을, 구약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듣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부처상 혹은 사람들이 섬기기 위해서 만든 여러 종류의 우상들 혹은 조상들을 모셨다는 명절의 제사상 앞에 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을 다루는 설교에서 우상 숭배가 중요한 주제가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고 나라가 망하게 만든 결정적 죄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신약은 어떻습니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신약 속에서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혹은 설교를 들을 때 우상숭배가 그렇게 강조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우상 숭배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약을 다루는 설교에서는 흔히 '예수님', '성령님', '교회',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 '선교', '구제' 라는 주제 등을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논리적인 단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구약과 신약의 단절입니다. 구약에서 성도들에게 우상숭배를 금하라 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면, 이제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주제는 아니게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현대 교회에서 저를 포함한 성도님들이 드리는 예배는, 암묵적으로 우리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몇가지 분명한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즉 그 예배를 드린 이후에, 우리의 마음이 성령님으로 뜨거워지며, 교회가 흥황하며, 공동체가 든든해지며, 선교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고, 구제에 더 힘을 쏟게 되는 것들이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렸는가에 대한 아주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설명하지만, 구약은 구약일 뿐입니다. 그 시대에는 우상 숭배가 가장 큰 주제였다면, 이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결코 선교나 구제나 공동체 등등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님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팀캘러 목사님이 그의 글 가운데 바로 이 부분을 지적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설교의 적용의 부분에서 구약의 역사를 '우상숭배' 라는 관점으로 정리한 이후에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 Sum : So, the OT is understood grid of idolatry. God is king, but we tried to keep control and power worshiping and serving created things. They in turn, set up a kingdom of darkness that blinds and enslaves. The prophets say that someday, the King will return and free us. But we can't read the NT through the grid of idolatry, can we? It is seldom mentioned. And moreover, idolatry is not relevant at all for us today, is it? - 'getting down to earth 3' of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 Modern World / Edmund P. Clowney, Timothy J. Keller

- 요약 : 즉 구약은 우상숭배로 점철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에 불과한 것들을 섬기거나 경배하는데 힘을 쏟거나 조작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그것들은(우상들은) 교대로, 사람들을 노예로 삼거나 눈을 멀게 만드는 어둠의 왕국을 세웠습니다. 선지자들은 언젠가, 진정한 왕이 돌아오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실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속한) 우리는 우상 숭배의 만연이라는 관점으로 신약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방식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상숭배라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전혀 적절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하 정목사 해석)

이것이 바로 팀캘러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 입니다. '구약에서 우상 숭배는 그토록 절대적이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하는 적이었는데, 이제 신약에 있어서 그것은 어디로 갔습니까?' 라고 우리에게 진지하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탁월한 점입니다. 그는 신약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 역시, 구약과 동일하게 '우상숭배' 임을 논증합니다. 그리고 그는, 제가 이해하기로 사실상, 복음을 인생에 적용하는 그의 탁월한 설교 가운데 우상숭배라는 주제를 가장 '핵심적인 도구' 로 사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글에서 요약하여 좀더 인용해봅니다.

- It is typical to think that “idolatry” is mainly an Old Testament phenomenon, but closer examination shows that it is not. A couple of texts provide clues to the fact that pervasive human idolatry was assumed by the New Testament writers.

- 우상숭배가, 주로 구약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 전형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면밀한 관찰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몇개의 성경 구절들은, 만연한 인간의 우상숭배가 신약의 저자들에 의해서 이미 가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 1. Idolatry is at the root of all sin--in fact, it is the only way to understand sin.
우상숭배는 모든 죄들에 근원입니다. 사실 그것은 죄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 2. Idolatry is at the root of every heart--it is the only way to understand motivation
우상숭배는 사람의 모든 마음의 근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사람들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입니다.

- Sum:  This means then, that idolatry is always the reason we ever do anything wrong. Why do we ever lie, or fail to love or keep promises or live unselfishly? Of course, the general answer is “because we are weak and sinful”, but the specific answer is always that there is something besides Jesus Christ that you feel you must have to be happy, something that is more important to your heart than God, something that is spinning out a delusional field and enslaving the heart through inordinate desires. So the secret to change (and even to self-understanding) is always to identify the idols of the heart.

- 요약 : 그러므로 이것은, 우상숭배는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바로 그 이유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우리가 거짓말하고 혹은 사랑하는데 실패할까요? 또한 약속을 지키는데 그리고 이기적이지 않게 살아가는데 실패할까요? 물론, 일반적인 대답은 우리가 연약하고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대답은 항상 이것입니다. 즉 당신에게, 당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느끼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당신의 마음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그것입니다. 그것은 지나친 탐욕들을 통해 당신을 현혹시키는 영역을 유지하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노예처럼 만들어버리는 어떤 것입니다.

- 3. Idolatry is at the root of all unbelief and, to some degree, every culture.

- 우상숭배는 모든 불신앙과 어느 정도에서는 모든 문화의 뿌리입니다.

- Sum: At the root of all problems (personal or social), and of all non-Christian philosophies and ideologies is the elevation of some created thing to the place of ultimate worship and ultimate arbiter of truth and meaning.

- 모든 문제들 (개인적인 것이든, 혹은 사회적인 것이든) 의 뿌리는, 그리고 모든 불신자들의 철학들과 사상들의 뿌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들을 궁극적인 예배의 자리에 그리고 진리와 의미에 대하여 궁극적인 조정자의 자리에 올려 놓는 것입니다.

자, 이제 팀캘러의 생각이 어느 정도 갈피가 잡힙니다. 그는 인간의 삶과 철학과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그것의 어그러진 그 근본에 우상숭배가 있음을 간파합니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어떤 형상 앞에 절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의 그 어떤 것에 대하여 탐욕을 부림으로 가장 큰 가치를 두는 것, 그리고 바로 그것에 의하여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판단되고 움직이는 것, 바로 그것이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행하고 있는 '예배' 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는 두가지 예배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상숭배' 그리고 '참된 예배' 입니다.

그렇다면, 리디머 처치의 예배는 어떻게 다를까요? 예배가 시작되기 전 울려퍼지던 모든 아름다운 음악이 끝났을 때, 예배를 진행하는 목회자가 소박한 보면대 앞에 서서 했던 멘트가, 바로 위의 그 내용을 압축한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오전 예배와 오후 예배 진행자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멘트는 아주 유사했습니다. 즉석에서 단순히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멘트가 아니라, 리디머 교회가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깊은 생각의 결과를 짧은 몇 문장 안에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지난 글에 설명해 드린 주보의 Reflection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대충 기억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당신이 만약에 다른 어떤 것들,  당신의 젊음이나 지성이나 다른 어떤 것들을 예배한다면, 당신은 언제나 실망하고 공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자리에서 우리는 유일한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섬깁니다. 예배란, 하나님 당신만이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당신 안에서는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예배 드리러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다 같이 일어설까요?'

정신이 번쩍들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였구나! 단순히 뜨거운 열정을 드리는 자리도 아닙니다. 그저 종교적인 의식 중 하나도 아닙니다. 그저 내 감정을 고양시키는 자리도 아닙니다. 무작정 공동체성을 기르거나 선교를 다짐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의 행위를 변화시키기 위한 자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나타나는, 타락한 인간과 사회의 자연적인 예배를 거절하고 그것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섬기는 타락한 예배를 회개하고 통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직 예배 받기 합당한 한분에게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 십년 동안의 어려움과 고민들이 이제서야 많은 답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참된 예배'가 있습니다. 당신은 어떠신지요? 저와 당신은 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우리의 예배가 조금은 더 달라질 것 같습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

2012년 7월 28일 토요일

리디머 처치 (Redeemer Church) 3 - 찬양 인도자의 숙명? / New York Bossa - Kenny Drew & Hank Jones Great Jazz Trio




경험적으로 보면 많은 현대적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그 예배가 찬양으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준비찬양' 혹은 그냥 '찬양 시간' 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찬양 자체를 넓은 의미에서 예배라고 부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찬양 인도의 주도적인 역할은 찬양 인도자(혹은 예배 인도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가 담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선곡을 하고 그 곡을 통해 찬양 시간을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보통 공식적인 예배가 시작하기 15분 정도 전 부터, 혹은 공식적인 예배 선포가 있고나서 15분 정도를 찬양의 시간을 가집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단 시간적으로 상당한 비율을 차지합니다. 보통 설교가 25분-30분 정도라고 가정할 때에, 설교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단독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기능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담당합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시작하기 바로 전, 혹은 예배의 초반 부에 위치 하기 때문입니다.

자, 당신이 한번 찬양 인도자라고 생각해 봅시다. 당신은 어떤 생각으로 찬양 인도를 하게 될까요? 먼저, 자리에는 앉아 있지만, 아직 예배를 드리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안되있는 성도님들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됩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뭔가 좋은 일을 해야하는 것을 압니다. 게다가, 예배에 집중하기를 원하는 성도님들은 오히려 더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더 큰 기대감을 가지고 당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이들(설교자, 대표기도자, 예배 순서 진행자) 보다 상당한 심적 부담감을 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어떻게 그 시간을 진행하는가가, 그 뒤에 모든 순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시간들을 위해서, 당신 자신이 따뜻하고 푸근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적절하게 해소하기 위해서 드디어 찬양을 시작합니다. 물론 당신은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주어진 여러 도구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최소한 건반 혹은 피아노 반주자가 함께 하고 있고, 당신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기타를 메고 있습니다. 드럼과 베이스 기타 연주자까지 있다면 더 좋습니다. 게다가 얼마든지 청중의 목소리 크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음향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볼륨만 적절히 올려준다면, 공간을 찬양으로 그리고 좋은 분위기로 채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일반적으로 경쾌한 빠른 곡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혹은 느린곡에서 빠른 곡으로 다시 느린곡으로 들어갑니다. 15분 정도라면 많게는 3-4곡을 다양한 반복의 틀 안에서 적절한 코드 연결로 구사할 수 있습니다. (후렴을 두번 정도씩 하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최종적인 목표는 물론, 아직 굳어있는 성도님들의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풀어지도록, 그리고 찬양을 통해서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높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엄청난 시간입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 경험있고 유능한 찬양 인도자라면 그 시간의 소중함과 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열정을 쏟아내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성령님이 지배하고 계시다는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씩 뜨겁게 경험합니다. 모두가 손을 들고 경배하는 그 감격, 그리고 그 자리를 인도함에서 오는 짜릿함은, 다른 어떤 예배 속 역할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큰 약점들이 있습니다. 일단은 찬양 인도자 개인이 가지는 부담입니다. 만약, 예배에 대한 공식적인 선포 없이 찬양의 시간이 들어간다고 해 봅시다. 그는 정말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는 예배라는 틀 밖에 존재하기에, 마치 심하게 이야기하면 고아와 같은 기분이 됩니다. 그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공식적인 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그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비공식적인 순전히 개인기적인 멘트와 영성과 음향에 의존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자신이 담당하는 찬양 시간이, 이미 구조적으로 성도님들이 예배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그 가교에 존재하기 때문에, 뭔가 그들의 감정을 끌어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뜨거운 혹은 감동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물론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언제나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좀더 감정에 치우친 혹은 호소하는, 성도님들이 쉽게 공감하고 빠져들 수 있는 자기 고백적인 찬양을 중심으로 선곡하게 됩니다.

만약, 예배에 대한 공식적인 선포안에 찬양의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어려움은 남습니다. 주어진 시간 15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의 그 어떤 시간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입니다. 당신이 정성스럽게 코드가 다른 4곡 정도를 끊어서 부른다면, 그것이야 말로 당신은 아마추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일반적인 성도님들의 마음 가운데 진정한 프로는, 마음의 감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즉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성도님들 입장에서는, 예배 밖에 있든지 안에 있든지 찬양 인도자가 예배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당황스럽게 그를 예배 인도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는 이미 소위 예배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가사를 보기 위해 앞을 쳐다볼 때에 찬양 인도자는 항상 같이 보입니다. 여러 곡들의 연결과 진행 속에서 그는 언제나 돋보입니다. 음향 시스템을 통하여 그의 목소리가 청중들의 목소리를 압도적으로 지배합니다. 또한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그는 다양한 멘트들을 중간 중간 함으로써, 본인이 찬양의 부분에 있어서는 충분한 인도의 자격 혹은 영적 리더의 자격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자, 만약에 그가 마음이 대범하고 도전적인 사람이라고 해 봅시다. 그의 마음 가운데 우쭐함이 생길 것입니다. 모든 청중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곡을 따라하고, 자신의 싸인과 멘트에 따라서 행동을 취합니다. 자신이 극적인 연주와 곡 진행을 사용할 수록 성도님들은 칭찬합니다. 그의 멘트 하나하나에 성도님들이 반응을 합니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이야 말로 예배의 핵심이며, 자신에게 예배의 승패가 달려 있음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마음이 소심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라고 해 봅시다. 지금 뭔가 지나친 부담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예배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초반 15분을 담당함으로써 그 역할을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을 우러러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견디기 힘듭니다. 그래서 무언가 은혜로운 멋있는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 압박감이 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이 모든 것을 컨트롤 하기에는 음악과 그것을 증폭시키는 음향의 힘은 너무나 거대합니다.

누구를 비난하거나 곤란에 처할 생각으로 적은 내용은 아닙니다. 그저 지난 10년 정도를 돌이켜 보면서, 청년부 청년으로, 그리고 시간이 지나 목회자로서 찬양 인도를 하면서 느꼈던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조금 적어 보았습니다. 잘 읽어보시면, 저의 마음 가운데 찬양 인도자들에 대한 연민이 있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분한 요구를 감당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찬양 인도자,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리디머처치에서 어떻게 찬양을 하는지, classical 예배와 contemporary 예배에서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예배를 열어가는지 모든 것들이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좀더 재미있어집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

2012년 7월 27일 금요일

전자책 한번 빌려볼까요? / Every Breath You Take - Karen Souza




나는 한권의 책을 책꽂이에서 뽑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꽂아 놓았다.
그러나 이미 나는 조금 전의 내가 아니다.

- 앙드레지드(프랑스 소설가, 1947년 노벨 문학상)-

도저히 옮길 자신이 없어,
대부분의 책을 한국에 두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도 한국 책이 보고 싶을까요? ㅡ.ㅡ;;
거기다가 미국에서 주문하면 배송비가!!

한동안 고민하다가,
책을 '빌려'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 이라는 점이지요.
무료에다가, 밖에 나갈 필요 없이 안방에서 빌릴 수 있다는 것!!
정말 놀라운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좋은 것을 왜 이제 알았을까? ㅡ.ㅡ;;)

우리나라 도서관들 중에,
전자책을 대여해 주는 도서관들이 있습니다.
물론 해당 지역 주민들만 가입 가능한 곳도 있지만,
홈페이지 가입만으로 책을 빌려주는 도서관도 있습니다.

전자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네이버 까페 '디지털 감성 e북 까페' 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까페 가입하시고 공지사항에서
'전자도서관 목록 정리' 를 보시면
우리나라에서 전자책 서비스해 주는 도서관과
가입만으로 책을 대여해주는 도서관에 대해
정리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전자책 서비스에 대해서 설명드리면,
각 도서관마다 서비스하는 스타일이 다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틀을 헤맸다는)

즉 도서관이 전자책을 독자에게 서비스할 때에
그 서비스를 가능하게 해 주는 회사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보통 '북큐브', '교보도서관', '메키아(mekia)', 'yes24 도서관' 입니다.

이틀 동안 까페 리스트에 있는 도서관 중
서른 군데 정도를 시도해서
결국 제가 정착하게 된 리스트는
=>교보도서관은 '의왕시 중앙 도서관'
=>메키아 '경기도사이버도서관' 입니다.

전자책 대여를 위해서는,

1. 까페에 들어가 리스트를 살펴보고
홈페이지 통해 도서관 회원가입을 한다.
(우선적으로 위에 두군데를 해 보세요.)

2. 안드로이드 단말기 (스마트폰 혹은 테블릿)로 어플을 받는다.
(ex) 안드로이드 마켓 => 검색 '메키아')
(저는 갤럭시탭 초기 버전으로만 시도해서 봐서,
컴퓨터나 아이폰 계열은 잘 모르겠습니다. ^-^;;)

3. 어플에서 홈페이지 가입시 사용했던
아이디와 비밀번호로 로그인
(조금 다른 경우도 있음)

4. 검색해서 책을 다운 받는다.
(보통 대여기간 5일, 이후 자동 반납, 연장 혹은 재대여도 가능)

예상하시는 것처럼,
전자책이기 때문에, 소위 내가 보고 싶었던 책은 많이 없습니다.
그러나 잘 사용한다면, 상상하지도 못했던 유익이 있습니다. ^-^;

오늘도 책과 함께 행복한 하루 되세요.

그래서 행복,

2012년 7월 25일 수요일

리디머 처치 (Redeemer Church) 2 - 당신은 '왜' 이곳에 있습니까? / Knowing You - Graham Kendrick



(리디머 처치는, 오전은 classical 즉 전통적인 스타일의 예배로, 오후는 contemporary / jazz 즉 현대적인 재즈 분위기의 예배로 나뉘어집니다. 주목사님의 지혜 가운데, 감사하게도 두 번 다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오후 예배 시작전에는, 지금 들으시는 이 곡을 재즈 분위기로 편곡해서 밴드가 아름답게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저처럼 평범하게 꾸준히 교회를 다닌 신자라면 한번쯤,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언뜻 기억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worship 은 원래 worth(가치) 와 ship(신분) 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예배란 존경 받을 대상을 향해서 그 신분에 합당한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모였다' 이러한 설명이 일반적으로 들을 수 있는 예배에 대한 정의 입니다. 저 역시 동감하고 좋은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리디머 처치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앉아 있던 저에게, 한가지 흥미로운 것이 보였습니다. 주보의 맨 앞면을 넘기자 짧은 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 아름다운 음악이 공간을 채우고 있던 바로 그 때에, 'reflection' (반성 혹은 숙고 라고 번역할 수 있을까요?) 이라는 제목으로, 성도가 예배를 준비하며 읽어 보도록 준비된 글이었습니다.

잠깐 내용을 살펴보자면,

- Reflection

- If you worship money and things-if they are where you tap real meaning in life-then you will never have enough... Worship your own body and beauty and sexual allure and you will always feel ugly, and when time and age start showing, you will die a million deaths before they finally plant you... Worship power-you will feel weak and afraid, and you will need ever more power over others to keep the fear at bay. Worship your intellect, being seen as smart-you will end up feeling stupid, a fraud, always on the verge of being found out.

- 만약 당신이 돈이나 물건들을 섬기고 있었다면 (예배하고 있었다면), 만약 그것들이 당신이 삶의 참된 의미들을 찾아가는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면, 당신은 결코 그것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몸이나 아름다움이나 성적인 매력을 섬겨보세요. 오히려 당신은 항상 추악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나이가 당신을 보여주기를 시작할 때에, 당신은 결국 그것들이 당신을 충분히 채워주기 전에 죽을 것입니다. 권력을 섬겨보세요. 당신은 오히려 약하고 두렵게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궁지에 몰렸을 때에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들보다 강한 힘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지혜롭게 보이기 위해서 당신의 지성을 섬기세요. 결국 당신은 어리석다고 그리고 당신에 의해 발견되는 것들의 변두리에서 사기꾼 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정목사 해석-이해를 돕기 위해, 부끄럽습니다)

- Look, the insidious thing about these forms of worship is not that they're evil or sinful; it is that they are unconscious. They are default-settings. They're the kind of worship you just gradually slip into... And the world will not discourage you from operating on your default-settings, because the world of men and money and power hums along quite nicely on the fuel of fear and contempt and frustration and craving and the worship of self. - David Foster Wallace, Kenyon College commencement address. - David Foster Wallace, Kenyon College commencement address.

- 보세요, 이러한 형태의 예배가 교활한 점은 그것들 자체가 악하거나 죄악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기본적인 본성입니다. 그것들은 당신이 점차 빠져들고야 마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당신의 기본적인 성품들이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당신을 낙담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돈과 권력의 세상은,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과 경멸과 좌절과 갈망의 공급에 대하여, 꽤 잘 콧노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짧은 글 속에서, 리디머 처치가 추구하는 예배에 대한 의미가 잘 함축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예배 혹은 성도의 삶에 대한 통념들과는 큰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무엇인가를' 예배하는 존재라는 점입니다.(오직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서 예배 드릴 뿐이다라는 통념에 반하여, 인간은 '하나님 외'에는 예배 하지 않는다는 통념에 반하여) 둘째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한 것들을 '그릇되게 예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자신이 즐겨하는 어떤 행위를 설명하며 '취미'라고 부르는 통념에 반하여, 자신의 삶은 '선을 행하는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이라고 여기는 통념에 반하여) 그리고 셋째로, 이제부터 시작되는 예배는, 바로 그런 그릇된 예배에서 벗어나, 마땅히 예배 해야 하는 유일한 대상,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고 주인이신 한 분만 예배하는 것입니다. '인생과 삶 전체'에 제대로 된 '질서'를 잡는 것을 목적을 가집니다. (예배란 단지 주일에 일어나는 '종교적인 헌신에 불과'하다는 통념에 반하여, 예배는 '그저 참석' 하는 것이지 삶 속에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통념에 반하여)

이제 서론에 불과합니다. 아직 예배는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음악이 울려퍼지고, 겨우 주보의 짧은 글 한 단락을 살펴보았을 뿐입니다. 하루 이틀은 더 묵상해볼만한, 아주 좋은 주제입니다. 그래서 더 기대가 됩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

2012년 7월 24일 화요일

리디머 처치 (Redeemer Church) 1 - 그날을 기억한다. / Romance, Op.23 - Amy Beach


뉴욕에서의 이틑날, 날은 흐렸습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뉴욕 외곽에 숙소를 잡았기에 시간을 넉넉히 출발했습니다. 복잡한 뉴욕의 길은 휴일을 맞이해 한가했습니다. 높이 솟아 올라간 빌딩들은 마치 서울의 한강변을 보는 듯 했지만, 건물들은 더 개성있고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풍경을 지나, 드디어 리디머 처치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예전에 온 경험이 있는 주재형 목사님이, 교회 위치가 달라진 것 같다고 합니다. 아마도 드디어 새로운 건물을 구입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교회 근처에 운 좋게 무료로 주차를 하고, 걸음을 옮겨 교회를 찾아 나섭니다. 드디어 찾은 그곳은, 외관이 전체적으로 흰색과 부드러운 밝은 갈색이고, 1층 외벽은 거의 유리로 이루어진 모던한 디자인의 5층 건물이었습니다. 교회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고, 독특한 교회의 로고가 그려진 포스터 들이 외관 유리에 붙여져 있습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좁은 로비를 가로질러, 주보를 받고, 드디어 예배실로 들어갑니다. 

메인 예배실은, 일종의 홀과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홀 앞쪽에는, 공연 혹은 예배를 위한 넓은 무대가 전면에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한 내부 장식은 없습니다. 오직 전면에 거대하게, 그러나 아주 은밀하게 음각으로 새겨진 십자가가 눈에 들어옵니다. 소박한 흰색으로 전체가 꾸며진 예배실은, 어떤 이의 마음이라도 깨끗하게 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예배 시작 15분 정도 전에 이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자리에 앉아 주변을 설레는 마음으로 둘러 봅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흥분이, 그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배를 기다리며 기대하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마치 새들의 지저귐과 같이 묘한 하모니를 이룹니다.

예배를 섬기는 목사님 두분은 무대 오른쪽 상단에 심플한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엄숙함은 찾아볼 수 없었고, 행복으로 얼굴이 가득했습니다. 서로 담소를 나누며 때론 즐거운 듯이 웃으며, 예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배가 시작하기 전 그 공간을 지배하던 것은, 사실상 '음악' 이었습니다. 그것이 모든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무대 위에는 그랜드 피아노 한대가 놓여있었고,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 두분의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 들으시는 이 음악입니다.)

회중의 '준비 찬양' 같은 것은 없어 보입니다. 그저 사람들의 기대와 흥분 그리고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 만이 있을 뿐입니다. 클래식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그 음악이 종교적인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확인해보고 일반적인 클래식 곡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매력적' 이었습니다. 연주하는 분들이 탁월한 분들임은, 부족한 제 눈에도 분명해 보였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표정은 황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피아노 연주는 자연스럽고 또 힘이 있었습니다. 언뜻 둘러봐도 특별히 건물 내부에 큰 스피커 등이 보이지 않았고, 악기에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연주는 너무나 풍성합니다. 그 자리에 모인 누구라도 감동 줄 만큼의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이야 말로 편안하고 행복한 곳, 뭔가 특별한 곳에 와 있다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음악의 힘'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탁월한' 음악의 힘이었습니다. 단지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그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것 같은 그런 연주였습니다. 잘 준비된, 흠잡을 곳이 없는, 마음을 쏟아 놓은 그 음악이 퍼지는 순간은, 마치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의 영광을 잠시 맛보는 듯 했습니다.

음악이 서서히 끝나자, 예배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자연스럽게 무대 중앙 앞쪽으로 걸아나와 섭니다. 놀랍게도 그가 선 곳은 화려한 크리스탈 강대상이 아니라, 그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단촐한 검은색 악보대(혹은 보면대) 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

2012년 7월 20일 금요일

아내와 열매를 위해 부르는 노래 / 오늘도 굿나잇 - 커피소년 COVER



세상의 부귀 영화가 목표라면,
목회자는 그리 적절한 직업은 아닙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소명을 받는 것이 그저 나 혼자만의 일이었지만,
이제 나이가 들고나니 가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별로 해준 것이 없어서 늘 미안하고,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에 불러봅니다.

사랑하는 진희와 열매가 늘 행복하기를,
우리 가정에 늘 평화와 기쁨이 넘치기를,
언제나 내 인생에 가족이 최우선이 되기를,
남편으로 또 아빠로,
가족을 위해 좀더 인생에 충실하고
그리고 더 열심히 살 수 있기를,

그래서 오늘도 행복,

오늘도 굿나잇 - 커피소년




찐희에게 바치는 노래..
그래서 오늘도 행복,

2012년 7월 19일 목요일

십자가 앞에서 나를 발견하다 / Amazing Grace - Celtic Woman



일주일이란 짧은 기간,
아주 한정된 예산 안에서 진행된 여행이었지만
결국 뉴욕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한번 가보기를 바랬던
리디머 처치(Redeemer Church)에서 예배를 드리게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신학적으로 매우 잘 짜여진 예배,
그 예배를 섬기는 탁월한 연주자들,
그리고 그 중심을 이루는 놀라운 설교까지,
그곳까지의 고된 여정이 전혀 힘들지 않게 느껴질 만큼
너무 행복했습니다.

우연히 예배 중간에
옆에 앉은 동양인 여성 한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Are you Japanese (당신 일본인입니까?)'

아마도 먼 이국 땅에서
고국의 사람 일본인을 만난것으로 생각하여
반갑게 물어본 것 같았습니다.

물론 'No'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 얼굴은
크게 일그러진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일본인으로 오해받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일본을 싫어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제 마음에도 숨겨진 분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큰 것이 바로
일본을 향한 분노입니다.

추악한 탐욕으로 인하여 나의 나라를 점령하고,
수 많은 우리의 선조들과 국토를 유린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우리에게 사죄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짓밟힌 불쌍한 우리의 어머니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울부짓고 있습니다.

그런 일본의 국민이 저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불타는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일본인이 내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마음의 모든 평정을 깨트릴 만큼 제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그분을 향한 어색한 웃음으로 헤어질 때에,
본당 앞 벽 속에 조각된
아름다운 십자가가 제 눈에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그토록 원하던 예배를 드렸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정직하게 추악한 제 자신을 보게 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평생 노력해야겠지요,
그리고 주의 사랑이 저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눈물..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마태복음 5장 44절-48절

주님만이 나의 영광입니다 / On Bended Knee - Boyz II Men



뉴욕 맨하탄의 타임 스퀘어에 발을 들였을 때,
온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습니다.
뉴욕 지하철의 생각보다 낙후된 시설은
저를 지치게 만들었고,
벌써 4시간 이상을 걸어다녔기에
체력은 어느 정도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습니다.

날은 흐리고 비도 간간히 오는 하늘,
그리고 어두워져 가는 시간 속에서
밤의 거리는 하나 둘 그 벗은 몸을 화려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광경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드디어 세상의 중심에 서 보았다는 감격으로
환호하고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참으로 위용있는 건물들은
하늘을 향해 힘있게 뻗어 있었습니다.
화려하게 어둠을 적셔가는 전광판들을 통해,
세계의 유명한 회사들은 자신들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건축술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아름다움의 극치에 선 듯 했습니다.
획일적이지 않으나 통일성을 지닌 건물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래로 온갖 휘황찬란한 가게들이,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다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짓하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신전과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의 신전,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종교의 장소,
이곳에 오는 자들에게 어떤 기쁨이라도 주겠다는,
그리고 그런 약속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기를 요구하는
그런 종교적인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한가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장 29절)

세상의 어떤 화려한 것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게 되기를,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의 아름다움만이 나를 사로잡기를,
그리고
오직 그 안에서 모든 세상의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그 본연의 가치를 가질 수 있기를,

그래서 오늘도 행복,

설교에 있어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나의 죄 / Water Music - George Frideric Handel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목회자로서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은 바로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배우고 익히고 연습하는 것은,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처음에 팀켈러의 설교에 관한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기술적인 부분(예를 들어 특정 시점에 그리스도를 강조하라)을 설명하는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 처럼, 설교란 역시 복음에 대한 이해이고, 그것을 우리의 마음과 삶에 실제적으로 깊이 적용해 나가는 매우 복합적인 과정에 대한 논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반적인 대부분의 설교는, 소위 말해 행위 중심적인 설교입니다. 즉 '이 본문을 살펴보니, 당신이 이렇게 해야 한다' 는 틀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고민해 본다면, 결국 그러한 틀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팀켈러의 글을 인용해서 적어보려 합니다. 가장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결국 누구도 율법 앞에 완전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에 행위 중심적 설교는 한계를 가집니다)

또 다른 틀은 이보다 더 진일보 한 것인데, '소위'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입니다. 즉 '이 본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드러내는가 혹은 설명하는 가'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그러한 틀 역시 한계를 갖고 있는데, 쉽게 이야기해서 너무나 '지루'합니다.(표현이 과격하다면 너그러히 용서해 주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지루함이라는 것은 '그렇게 설명되는 그리스도가 도대체 나의 실제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전혀 답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적어도 저의 경우에 있어서, 행위 중심적인 설교에서 갈등하다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또 공감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민 끝에 저의 심중에 있는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과연 복음을 설명한다는 것이 인생에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행위 중심적 설교' 를 하는 분들은 그것이 인간에게 행동의 변화를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그것이 아니라는 확신은 있었으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 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주저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제가 이해하기로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복음 중심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하고 싶어하는데, 그것이 '실제 행동의 변화'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논리'인가 하는 것에 큰 고민을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익히고 배운 것들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오늘도 글로 정리해 보지만, 그러나 이 글을 통해 누군가 급격히 변화 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행위 중심적인 설교 혹은 신앙을 가진 분들의 변화를 위해서는, 정말 세심하고 헌신적이고 성실한 신앙의 지도와 동행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성경과 신앙의 모든 것에 대하여, 처음부터 벽돌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물론 안타깝게도 대부분 그것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작은 도움이 될까 해 오늘 글을 읽으며 생각한 부분을 정리해 봅니다. (밑에 인용하는 모든 글은 팀켈러,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 modern world 'getting down to earth 2' 에서 발췌 한 내용입니다)

Since a) we can't really even psychologically admit the magnitude of our sin if we don't know there is hope of salvation, and since b) self-hatred is basically a form of self-righteousness--how does that effect preaching? When we preach, we need to challenge with the comfort of the gospel. Put another way--the thing that most comforts us (the free, unconditional, sacrificial love of Jesus) should be the thing that most convict us. The language of preaching should not be: "unless you clean up your act, you will never get the love of God" but "how on earth can you treat this loving God like this?" The first approach is: "repent or God will drop you!" The second approach is: "repent for spurning the God whose Son died so you would never lose him!"

제가 이해할 때에, 그래도 한국에서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설교는 꼭 이러한 논리가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도 깊이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당신이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이 논리가 팀켈러가 본문에서 설명하는 지지하는 논리 1 입니다. 켈러의 설명처럼, 이 논리는 적어도 '당신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 라는 논리 2 보다는 훨씬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래도 훌륭한 일반적인 설교에서 한가지 놓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셨는데' 라는 파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논리 1이 그 논리 안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셨다 라는 파트가 정말 '완전한 사랑'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켈러는 이 부분을 본문에서 the free, unconditional, sacrificial love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살펴본 바로는, 소위 일반적 설교에서는, 이 부분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습니다.(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혀 설명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앞에 부분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한히 크며,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며, 신적인 무조건적인 사랑(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예정을 포함하여)이 충분히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에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생각할 때는 이렇습니다. 설교자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즉 설교의 내용 그 배경과 사상의 근본이 당신이 하나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대부분의 행위 중심적 설교자들의 특징) 결국 그러한 설교 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을 사랑한다' 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뒷 부분, '당신이 그렇게 살면 되겠는가'가 현실적으로 전혀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팀켈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에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죄의 심각함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통찰력이 있을까요?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했고, 그 사람이 용서해 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진다면, 누가 그 사람에게 진실한 용서를 구하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이미 나를 조건적으로 사랑한다면,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께 죄를 더욱 진실하게 고백하겠습니까? 오히려 어떻게든 나의 죄를 축소시키고, 조금이라도 형벌을 덜 받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The first approach actually encourages self-righteousness. (첫번째 접근은 실제로 자기 의를 더욱 강화시킵니다) It tries to convict us by increasing self-centeredness, by saying, "the sinfulness of your sin is that it is going to make you unhappy! Better get rid of it or you won't be blessed." Ironically, this only gets you to hate yourself (for being a failure) and to hate the consequences of the sin ("this is going to ruin me!") rather than the sin itself for what it is in itself, a violation of God.

계속 이어지는 글입니다. 눈여겨 볼 부분은, 켈러는 계속적으로 복음에 대한 청중의 생각과, 그 영혼의 태도를 끊임 없이 연결 짓고 적용적인 논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박영선 목사님도 동일합니다. 결국 인간의 이기심, 자기 중심성, 인과 응보의 논리 등등이 이 분들이 인간을 파악하는 중요한 틀 중에 하나이며, 설교 전체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논점들입니다. (이어지는 두 문장은 뭔가 엄청난 것을 담고 있는데, 아직 제 수준으로는 따라가지 못해 아직 무엇인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켈러의 통찰력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 싶다면 너의 행위를 깨끗이 하라는 논리는, 역설적으로, 끊임 없이 목표 달성(하나님을 만족시키라)에 실패하는 청중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만든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죄의 실체인 하나님에 대한 훼방 보다는 오히려 죄의 결과 자체를 싫어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왜냐하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됨과 그리고 그 자녀됨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현실적으로 죄를 짓는 죄인인데(이 부분이 교회에서조차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죄인은 공통적으로 죄책감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비하에 빠집니다.(예를 들어, 그래 나는 이것 밖에 안되는 사람이야.. 누구나 경험해 본 자기 인식일 것입니다)

The second approach increases Christ-centeredness, saying, "the sinfulness of your sin is that it rejects the sacrificial love of Christ. He died so you wouldn't do this sin!" While the first approach tends toward hating myself rather than the sin, this approach tends to help be hate the sin rather than myself. If the focus is on the death of Christ for me, and of his unconditional commitment to me, then I see my own value to him, and that makes the sin far worse! It is trampling on his unconditional love. It is savaging the heart of the one who loved me unconditionally.

놀라운 것은, 이것과 반대되는 논리 가운데, 팀켈러는 개인과 죄를 분리합니다. 즉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고, 설교, 적용은, 나 자신을 혐오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어쩌면 이것을 로마서 7장에 적용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우리는 내가 받은 진정한 가치를 보게 되며 (즉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계속적으로 변함없이 받는 자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혐오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죄라는 것을 내가 생각하던 것 (그저 나를 불행하게 하는 어떤 행위)보다 훨씬 더 악한 것으로, 즉 하나님 무조건적 사랑을 짓밟고 하나님을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써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나 자신과 분리된 죄를 극도로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만이 그토록 모든 설교자와 성도들이 원하는 변화의 길 즉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원동력이 된다고 이해하고 있는 듯 합니다.

오늘도 작은 부분들을 정리해 봅니다.

제 영혼이 복음에 깊이 들어가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참된 복음의 감격 속에 들어가 설교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것이 내 삶 속에 열매로 나타날 수 있기를,
오늘도 바래 봅니다.

그래서 행복,

2012년 7월 18일 수요일

독서의 힘 - Tsuki - Annekei




안철수의 서재(이채윤, 푸른 영토)를 읽다가,
그가 좋아하는 구절을 인용해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 만들어 진다(마르틴 발저 Martin Walser, 1927년 3월 24일~)

2012년 7월 17일 화요일

'비교' 하는 세상 / Close To You - Tommy Emmanuel



며칠전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했습니다. '참 나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 남들은 아침 먹는게 고역이라는데,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밥 맛도 좋다니! ㅋㅋㅋ' 평상시 같으면 쉽게 넘어갔을 생각이, 이상하게도 머리에 계속 남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제 내면을 좀더 살펴보면서, 한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신앙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거룩'한 모습으로 치장한 어떤 것인 듯 합니다. '감사..' 어느 누가 나쁘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자고 주문하고 격려합니다. 그러나 그 감사 조차도 제 안에서는 죄로 작용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겉으로는 '감사'라는 것으로 포장했지만 그러나 그 내면에는, '남들과 나 자신을 은근히 비교하며, 나는 적어도 내 옆에 사람이 없는 어떤 것을 받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은, '감사' 가 아닐 것입니다. 그저 '자기 자랑' 에 불과할 뿐이겠지요. '내가 잘나서 받을 만한 마땅한 것을 남들보다 훨씬 더 받았다' 라는 것을 '감사' 라고 치장하여 표현할 뿐입니다. 많은 것을 가진 듯 하나, 결국 복음의 신비와 정수를 모르는 자의 불쌍하고도 연약한 모습일 뿐입니다.

세상은 끊임 없이 남들과 나를 비교합니다.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진실한 핵심' 입니다. 돈으로 스펙으로 외모로 심지어 신앙으로, 모든 이들을 서열을 세웁니다. 그러나 참 신앙인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을 뿐입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그분으로 만족할 것인가, 신자는 언제나 바로 그것을 가지고 씨름합니다.

언제나 비교와 자랑과 그리고 그것의 반대 쪽 극단에 있는 절망 속에서 헤매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자기보다 못난 사람 앞에서는 자랑과 교만이, 그리고 자기보다 연약한 자 앞에서는 절망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는 결국 남들과 비교 속에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분을 사랑함으로 열심히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생의 태도 속에서만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세상의 탐욕으로 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 한분, 그분으로 만족하는 것,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분의 성실하심을 믿는 것. 바로 그 믿음이 조금더 제 안에서 자라나기를 바래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자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완벽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일하심에 실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한 삶 속에서 세상으로 부터 자유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8절)

그래서 오늘도 행복,

2012년 7월 7일 토요일

교육은 세대를 통해 이어진다 / More of You - Ron Kenoly



우리는 각 세대가 그 이전 세대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학교를 갓 졸업한 소년들이 지금 갖고 있는 신념은 주로 1920년대의 신념입니다. 1960년대에 학교를 졸업하는 소년들이 갖게 될 신념은 주로 오늘날 학부생들의 신념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교육에 대한 허튼소리를 늘어놓기 시작 합니다. 우리는 현대 청소년들의 견해들을 논하면서 그것들이 마치 현대 청소년들만의 어떤 특이성에서 저절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은 이제 중년이 된 지난 세대의 청소년들이 교실을 장악하면서 뒤늦게 남긴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많은 교육 계획들이 실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세대가 갖지 못한 것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각기 원하는 대로 교과 과정을 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겹도록 계획을 세우고 보고서를 작성해도, 우리가 회의적이면 학생들에게 회의주의를 가르칠 것이고, 우리가 바보라면 어리석음만을, 저속한 사람들이라면 저속함만을, 성자들이라면 거룩함을, 영웅들이라면 영웅적인 태도를 가르칠 것입니다. 교육은 각 세대가 다음 세대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통로 중에서 가장 의식적으로 사용되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것은 닫힌 체계가 아닙니다. 교사들에게 없는 것은 학생들에게 흘러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어를 모르는 사람이 학생들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냉소주의와 환멸의 시기에 정신이 형성된 사람이, 희망이나 불굴의 정신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역시 이와 똑같이 분명합니다. (중략...)

사람들은 교육이 핵심 거점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 말은 완전히 틀리기도 하고 더없이 옳기도 합니다. 그것이 기존 학교의 운영에 간섭하고 교과 과정을 바꾸는 식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라면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 교사들은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게 가르칠 것입니다. .그런식의 교육 '개혁' 은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업무량을 늘려 줄지는 몰라도, 그들의 총체적인 영향력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교육 계획은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포도나무에서 떫은 배를 불러내는 마법의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풍성하고 물기가 많고 열매가 많이 달린 나무는 달콤함과 힘과 영적 건강을 낳겠지만, 메마른 가시투성이의 시든 나무는 증오, 질투, 의심, 열등의식을 가르칠 것입니다. 가르쳐야 할 내용을 아무리 일러 줘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의식도 못한 채 하루 종일 생긴 대로 가르칠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의 핵심 거점이라는 말이 지금의 성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그들 주변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직접적인 하위 기독교적 견해와 덕목,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플라톤이나 베르길리우스 같은 풍성한 고전 사상을 보급시켜 장래에 교사가 될 사람들의 유형을 바꿔 놓는 일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 후손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주는 일이라는 뜻이라면, 그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 피고석의 하나님, C. S. 루이스 144p-147p



13년 전, 갖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에게, 성가대 혹은 교육 부서라는 교회를 섬기는 두가지 선택이 주어졌습니다. 원래 찬양을 좋아했기에 성가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기특하게도 제 마음에 한가지 중요한 생각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이만큼 자란데에는 교회 선생님들의 큰 수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이라도 그분처럼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처음에 들어간 곳은, 지금의 장인어른이 부장선생님으로 계셨던 초등부였습니다. 아직도 분반공부 시간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다섯 명의 너무나 귀엽고 소중한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과 작은 방에 함께 모였습니다. 아이들은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다섯 명이 동시에 저에게 말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어설프고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시작했던 제가, 교사로 그리고 이 후에는 교육 전도사로 강도사로 목사로 거의 10년 이상을 교육 부서에 속해 있습니다.

조금씩 나이가 들 수록 드는 생각은, 교육은 절대로 단순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이라는 존재가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마치 초등학교 백과사전식으로 이것저것 수 많은 과목을 정해놓고 균형있게 가르치기만 하면 교육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다만 저 역시 자라고 있기에 또한 이곳에 배우러 왔기에,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책을 보고 조금씩 정리해 가고 있는 수준입니다.

제가 루이스의 이 글을 읽으며 무릎을 쳤던 부분은, '교육의 유전' 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이 '유전' 이라는 부분은 단순히 교육의 영역에 한정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대부분의 현대적인 교회는, 마치 자신이 역사 가운데서 동떨어진 것 처럼, 좀더 쉽게 말하면 자신의 교회가 역사상 유일한 교회인 것처럼 기독교의 역사와 유전 안에서 분리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육부서를 섬기면서 늘 속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대부분 자신의 자녀들의 문제를 마치 '남의 문제' 처럼 여기는 부분이었습니다. 차마 말은 하지 못했으나 제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것은, 부모님의 성격 태도 그리고 신앙이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수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새침하고 못된 성격이라면, 아이 역시 그러한 성격을 교회에서 나타내는 것을 여러번 목격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책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느새 교육이라는 것이 세대간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고, 유산적인 성격이 굉장히 강한데, 그것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는 해결책은 '교회가 그들에게 바른 것을 가르치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일주일에 겨우 두시간이라는 최소한의 시간에,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물론 이러한 상황은 대부분의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의 생활, 아이들은 이미 사교육을 받고 저녁 늦게 들어옵니다.)

이제 첫 아기를 기다리는 제가, 부모가 아이들의 교육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상투적인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의식만은 꼭 함께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은 '우리'로부터 '영향' 을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부모 혹은 어른으로부터 '분리'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은 루이스가 이야기하는 것 처럼 '사실' 부모의 문제, 혹은 그 세대의 문제가 틀림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문제 의식을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녀들의 교육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는 부모를 제외해 버린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지성씨의 '리딩으로 리드' 하라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부모님들이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고전 독서를 하라고 강요를 할 경우, 아이들은 거부감을 느끼고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늘 성경을 목숨걸고 보시고 기도하시는 그리고 눈물로 남을 사랑하는 어머니, 이것이 어쩌면 지금의 제가 배운 신앙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태도와 신앙의 모든 모습들은 언제나 우리의 후세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부모로서, 우리가 언제나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힘든가요? 너무 바쁘고 힘들고 할 일이 많아 잠시 뒤로 물러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영향력이 그대로 그들에게 간다는 문제 의식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진정 다음 세대에 좋은 영향력을 남기고 있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갈고 닦아야 합니다. 가장 단순한 이야기지만,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안일하게 교회에 위탁하거나 학원에 위탁해서는 안되며, 우리 자신이 먼저 앞장서야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자라나는 세대와 함께 성경을 읽고, 위대한 책들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고, 모여 손을 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모두가 함께 사는 유일한 길이기 떄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행복, :)

2012년 7월 5일 목요일

참된 설교를 찾아서 / Celine Dion- Because You Loved Me





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의 자율학습 시간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 자율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가지로 곤욕이었습니다. 역시나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더위' 였습니다. 혈기 왕성한 남자 학생들이, 겨우 몇대의 선풍기가 돌아가는 좁은 교실과 책상 속 (왜 그렇게 학교 책상은 사이즈가 작을까요?) 에서 공부하라는 것은, 뜨겁운 형벌이 영원히 지속되는 지옥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 인생과 실제로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희망은 있었습니다. 뜨거운 여름의 시원한 수박 한입처럼, 언제나 고급 수준의 독서를 지향하는 제 친구가, 동네 서점에서 '무협지'를 빌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때,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무협지를 읽었습니다. 다소 변명처럼 느껴지시겠지만, 그때의 더위는 하물며 무협지를 읽기에도 무리였습니다. :)

흥미로운 것은, 하루만에 한 시리즈를 다 봐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는지 몰라도, 늘 제 친구는 3권이 완결인 무협지를 빌려왔습니다. 아침 1교시에 첫권을 시작하여 기승전결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짜릿함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가 기억하는 무협지의 일반적인 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등장 => 재난 => 원수가 생김 => 원수에 대한 1차 도전 => 처절한 실패 => 큰 상처를 입고 깊은 계곡 등지에 떨어짐 => 동시대가 아닌 최소 200년 이상 전에 이름을 날렸으나 놀랍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무림의 '기인' 을 만남 => 기인의 무공 전수 => 원수에 대한 2차 도전 => 승리

어쩌면 이 때부터 제 머리 속에, 아니 제 영혼 속에 새겨진 단어는 '기인' 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탁월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혹 주변에 그런 책이나 사람이 있다면 절대 놓치지 마시길) 답답한 나의 재능의 수준에서 한단계 도약할 수 있는 가르침과 지도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기독교를 '배움'의 차원으로 접근한다면, 저는 모든 이들에게 '기인' 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결코! 배움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 부분에서 한가지, 오늘 작은 나눔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설교에서의 적용' 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모든 목회자에게 있어 '적용' 이라는 것은, 가장 큰 골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목회자의 설교라는 틀은 이렇게 구성 됩니다. 성경 해석 혹은 주해 =>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원리 발견(대부분 law의 관점에서 접근) => 그 원리를 적용할 영역(field) 찾음 => 우리는 그렇게 해야한다 라는 주장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식적인 틀은 말 그대로 식상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식상하다고 해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좀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런 방식의 설교와 적용은, 제 소견으로는,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에서 팀 켈러는, 어떤 의미에서 식상한 틀 안에 갖혀 있는 저와 같은 목회자에게 좋은 통찰력을 줍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팀 켈러는, '서양의 박영선'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글을 먼저 인용해 봅니다.

The main problem, then, in the Christian life is that we have not thought out the deep implications of the gospel, we have not "used" the gospel in and on all parts of our life. Richard Lovelace says that most people's problems are just a failure to be oriented to the gospel--a failure to grasp and believe it through and through. Luther says, "the truth of the Gospel is the principle article of all Christian doctrine... Most necessary is it that we know this article well, teach it to others, and beat it into their heads continually." -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modern world.

핵심은, '복음을 모든 영역 속에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 입니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모든 영역' 과 '철저' 입니다. 그래서 팀켈러가 사용한 think out 이란 숙어가 굉장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고안해 내다, 궁리해 내다, 숙고하여 해결하다' 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요. '복음을 모든 곳에 철저하게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부터 팀켈러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의 접근, 복음을 적용하는 관점에 있어서 예를 들어 봅니다.

Approach to one's family. - Moralism can make you a slave to parental expectations, while pragmatism sees no need for family loyalty or the keeping of promises and covenants if they do not "meet my need" The gospel frees you from making parental approval an absolute or psychological salvation, pointing how God becomes the ultimate father. Then you will neither be too dependent or too hostile to your parents. -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modern world.

그의 설교의 적용까지 가는 관점을, 그의 글을 통해 제 나름대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이 어떤 철학 혹은 생각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지에 대한 분석 (위의 글에서는 도덕주의와 실용주의를 사용했습니다) => 그것이 성도에게 혹은 사회에 어떻게 악하게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 (위의 글에서는, 도덕주의 안에서 사람은, 부모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생기며, 실용주의 안에서 사람은, 가족이 나에게 가치가 없다면 가족을 버린다는 관점으로 파악했습니다) => 복음은 왜 그것에 대해서 대안이 되는지에 대한 대안 제시 (위의 글에서는 하나님께서 완벽한 아버지가 되시기에, 우리 자신의 부모의 허락만 절대적으로 여기던 연약한 인생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설명합니다) => 실제적 삶에서 복음의 적용점 정리 (결국 복음 안에서 크리스천은 부모에게 너무 의존적이지도 혹은 적대적이지 않게 된다.)

팀켈러의 통찰이 너무 놀라워 어안이 약간 벙벙한 상태이지만, 제 개인적으로 이러한 '적용의 방식'에 대한 관점에 대해 생각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세상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흐름과 인생의 흐름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행동들에 대해서, 엄청난 분석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을 보며 행동을 고치라 라는 접근이 아니라, 그 행동의 내면의 동기와 살핀다는 것입니다!(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물론 그것이 결론적으로는 어떠한 주의(ism)으로 분석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우선적인 문제는, 목회자의 영혼과 마음 안에,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단 하나의 사실도 놓치지 않는 예리한 관찰이, 그리고 그것의 원인을 밝히고자 하는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복음이 실제로(혹은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현재 속에서) 그러한 행동 혹은 문제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이 단순히라는 표현이 오해되지 않기를 바라며) 복음이라는 것이 죄 사함이다 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혹은 아쉽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팀켈러의 이 말은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All of life is repentance--not just for sins, but also for our false "righteousness(es)"
- any failure of actual righteousness is always a failure to live in accordance with our imputed righteousness. We make something besides Jesus our real hope and life. So believing the gospel means to repent, not just of our sins, but of the particular (self) righteousness(es) underlying our behavior. That is the secret of change. -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modern world.

다시 풀어서 그의 말을 적어보자면, 실제의 인생에 있어서 실패는, 참 소망되시는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의로움들을 의지하게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의 근본 혹은 기초가 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의 회개란 단순히 우리의 죄 (예를 들어 십계명을 범한 죄) 에 대한 회개만이 아니라, 우리의 깊은 내면 속에 있는 나의 우상들 (예를 들어 자기 확신, 돈과 명예를 의지함 등등) 을 회개하는 것 까지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결국 성도의 그 행동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그의 설교를 이끌어가는 논리는 이러한 식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정리(심리적이고 사회학적인 틀을 자유자재로 사용) => 충분히 확장된 복음을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적용 => 결국 인간의 내면과 사회의 밑바닥의 숨겨진 곳에서 부터 변화를 꾀함

결론적으로, 제 스스로를 위해서 정리하며 다시 한번 반복한면 이렇습니다. 결국 팀켈러처럼 폭 넓고 적실(適實)한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와 인간의 내면까지 분석할 수 있는 엄청난 분석력과 지혜가 필요하고, 그리고 단순히 다음 세상을 향하는 복음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현재적으로 활동하는 복음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이만큼 정리했으니 이제 한숨 돌립니다.
그리고 이제 기도하며 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봅니다.

'주님, 그렇다면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합니다.

언제나 목회와 설교는,
제가 상상하던 그 이상의 어려움이고,
완전히, 제 능력의 바깥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경험합니다.
혼란, 당황, 절망 이것이 저의 솔직한 내면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영원한 소망과 지혜 되시는
나의 주님 안에서
오늘도 행복,

QT? 해봐야 별거 있겠어? / Beauty And The Beast - Celine Dion & Peabo Bryson



제가 이해하기로는 목회자들 가운데, QT(quiet time)에 대한 두가지 입장이 있는 듯 합니다. 조금 의외이시겠지만, 하나는 유용론(有用論) 이라면 하나는 해악론(害惡論) 입니다. 유용론에 선 분들은, 성도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에, 비록 개인적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QT를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보통 유용의 반대는 무용이지만, 그러나 적어도 QT에 있어서는 무용론의 반대는 해악론의 입장입니다. 그분들의 주장은, QT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해석 그리고 지나친 적용 중심의 방법이기 때문에 무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두 가지의 조금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좋을 듯 합니다. 첫째로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QT는 그렇게 나쁜 방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완벽한' 성경 해석은 없다는 점에서 말하고 싶습니다.(이 부분에서 제 의도가 오해될까 두렵지만) 물론 '이론적'으로는, 특정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본문의 의도를 찾아내는 것이, 개혁주의 설교 안에서 핵심이며 저 역시 그 방향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목회자가 동일 본문에서 동일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그의 책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에서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그 오직 성경이라는 것이 성경 해석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생각에는, 큐티하는 사람의 자의적인 해석 때문에 QT를 막아야만 한다면 그것은 이유가 부족하다고 봅니다.

둘째로, 적극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도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 QT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개혁주의 교회의 롤모델로 알려진 뉴욕 리디머 처치((Redeemer Church)의 팀 켈러 목사님의 글을 인용해 봅니다.

This definition assumes that every text has both a 'micro' and a 'macro' context, To understand any particular text of the Bible, we must fist put it into the 'micro' context--its historical and linguistic setting, in order to discern the immediate intent of the human author. But every Biblical text also has a 'macro' context--its place in the entire Bible which has as its purpose the revelation of Christ as the climax of all God's redeeming activity in history. We must not only ask : 'what did the human author intend to say to his historical audience?' but also 'why did God inscipturate his as a way of pointing to the salvation of his Son?' -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modern world 중에서

팀켈러 목사님이 설교에 있어서 주장하는 핵심은(저는 이것을 저를 포함한 모든 성도에게 동일한 원리로 이해합니다) 성경에 접근하는데 있어 두가지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미시적 관점(micro)이고 하나는 거시적 관점(macro)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두가지 관점이 적절하게 갖춰져야만, 좋은 설교 (성도에게 적용하자면 본문에 대한 접근 혹은 묵상) 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를 포함한 많은 성도님들은 실제로 성경을 거의 보지 않습니다.(어쩌면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스스로 아주 작은 크기의 본문에 대해서도 읽어본 적도 고민해본적이 없는데, 수동적으로 교회에 앉아, 단순히 구속사적 관점, 혹은 개혁주의적 설교를 듣기만 한다고 성도가 성숙해지고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정말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짓는 화려한 집과 같습니다. 나는 그래도 안전하다는 일종의 자기 최면과 같습니다.

오히려 성도 스스로 미시적 관점의 본문 접근을 훈련하고 쌓아 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큐티를 권장하되, 오류가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은 거시적 관점 안에서 잡아주고 도와주는 것 (좋은 책에 대한 소개와 함께 공부하는 것) 이 목회자의 역할이라 생각됩니다.(물론 모든 목회자가 염려하듯이, 제가 이해할 때 대부분 이단에 빠지는 분들은, 미시적 관점에 집착한체 거시적 관점을 배우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인 듯 합니다)

영화 '루터' 에서, 루터를 향한 추기경의 분노에 찬 말 속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건 불법이다! 여느 사제가 읽기에도 성서는 너무 난해하다.
That is outrageous! The Scriptures are too complex for even the average priest to understand

하물며 일반 대중이라니!"
much less the common man!

현실에 대한 분노와 답답한 마음을 늘어 놓자면 끝이 없지만, 그러나 저의 인생을 분노로 낭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묵묵히 미래를 준비하는 것만이, 저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인 듯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씁니다. '자립하는 신앙인으로서 사회 속에 세워지는 교회'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 주님께서 은혜와 지혜를 주시기를.. 그래서 행복,

2012년 7월 2일 월요일

참된 남자다움을 찾아서 / Just The Way You Are - Billy Joel



그러면 일과 삶이 통합되었던 (미국의) 식민지 시대에 가족간의 관계는 어떠 했을까? 우선 남편과 아내가 날마다 나란히 함께 일했으며 동일한 경제적 기업을 공유하고 있었다. 한 역사가는, 식민지 시대 여성의 경우 결혼은 '남편 옆에서 동역자가 되어 ... 도살, 은세공 작업, 인쇄, 의자의 천 갈이 등 남편의 일에 필요한 기술이면 무엇이든 배우는 것을 의미했다' 고 말한다. 중략...

식민지 시대에는 남편과 아버지가 집안의 머리로 간주되었는데, 여기서 머리됨의 의미도 매우 구체적으로 정의되었다. 즉 그것은 자기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집안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의무를 부여하는, 신적으로 재가된 직분으로서 정의되었다. 중략... 그는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도록 요구받았다. 남편과 아버지는 개인적 야망이나 자기 이익에 좌우되어서는 안되고 온 집안의 공동선을 위해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중략...

일상 생활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일과 자녀 양육의 책임에 통합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가정을 중심으로 생산적인 일이 수행되고,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일하는 법을 훈련했기 때문에, 그는 '하루하루, 해마다 눈에 보이는 존재' 였다. 아버지의 역할은 직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시작되는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 하루 일과에 속한 불가결한 일부였다. 역사 기록을 보면, 자녀 양육에 관한 식민지 시대의 문헌 - 설교와 자녀 양육 지침서 같은 - 이 요즈음과는 달리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주로 아버지를 대상으로 했다. 아버지가 일차적인 부모로 간주되었으며, 자녀의 종교적 지적 훈련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중략...

'남자들은... 부엌에서 일하는 것을 여성만큼이나 편하게 느꼈는데, 집안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살림살이를 꾸릴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요리와 가사에 관한 책들이 일차적으로 남자들을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들은 손대접에 신경 쓰는 만큼이나 실내 장식에도 열심이었다.' 중략...

이 모든 것이 산업 혁명과 함께 바뀌었다. 중략...

가장 자명한 변화는 남자들이 거의 선택의 여지없이 가정과 들판을 떠나 일을 좇아 공장과 사무실로 가야 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집안에 늘 있던 남자들이 급속히 사라져 버렸다. 중략...

그 결과, 19세기 중반에 출간된 자녀 양육 지침서에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자녀 양육에 관한 설교와 소책자가 처음으로 아버지나 양친 부모가 아니라 순전히 어머니만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다. 이제 남자는 일차적으로 아내를 통해서 자녀들과 연결된다고 느꼈다. 중략...

자녀 양육에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은 과거에 집안의 다른 어른들 - 조부모, 독신인 친척, 나이 많은 형제, 하인, 특히 아버지 - 과 함께 그 과업을 나누던 때보다 더 두드러진 양상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어른들이 집을 떠나 일터로 가게 되자,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 순전히 어머니의 책임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여성은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급격히 감소하는 것을 경험하는 한편, 동시에 여전히 남아 있는 소수의 일에 대한 책임은 극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경험했다. 중략...

새로 등장한 산업 자본주의 세계는 덕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보급시켰다. 자본주의 세계는 각 사람이 개인 대 개인으로서 다른 이들과 경쟁할 것을 요구하는 듯 보였다.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는 자기 이익과 개인적 야망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이 적절하고, 심지어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중략...

그러한 경향은 가정에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었다. 결국에는 식민지 시기의 가치관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졌다. 청교도들은 '정열' 을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것이므로 공공선을 위해 통제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이르면, 남자의 '정열' 과 자기이익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고 평등과 경제적 번영의 근원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중략...

그리하여 공 / 사 의 분리는 남녀 간의 뚜렷한 대비로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MIT 대학의 케네스 케니스턴은 이렇게 쓰고 있다. '가정은 특별히 보호된 장소요, 부드럽고 순수하며 관대한 정서(어머니 안에 구현된)의 저장소이며, 노골적이고 경쟁적이며 공격적이고 이기적인 상업의 세계(아버지로 구현된)를 막는 요새요 보루가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역전이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남편과 아버지가 가정의 도덕적,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도록 권유받았다. 그러나 이제 남성은 선천적으로 거칠고 잔인하며 아내에게서 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한다. 중략...

이것은 이중 잣대의 기원인데, 겉으로는 여성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어쨌든 그들에게 덕의 집행자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저변에 깔린 역학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로툰도가 설명하듯이, 본질적으로 미국은 남성을 덕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할 의무에서 풀어 주었던 셈이다 .처음으로 도덕적, 영적 지도력을 더 이상 남성적 특질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여성의 일이 되어 버렸다. 중략...

미국 교회는 대체로 남성다움이 재정의되는 것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수세기 동안 남편과 아버지가 가정의 머리된 직분으로 신적 소명을 받았다고 가르쳐 온 교회가, 이제는 대상을 바꾸어 주로 여성에서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중략...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2대 1의 비율인 경우도 많았다. 중략...

많은 성직자가 공적 영역에서 변호될 수 있다는, 종교에 대한 인지적 주장을 펴는 데서 후퇴하고 말았다. 그 대신, 그들은 신앙을 경험과 감정이 속한 사적 영역으로 옮겼으며, 따라서 그것은 여성의 관할구역 아래로 들어갔다. 중략...

요컨데, 교회는 남자들 사이에 퍼져 가던 세속주의 풍조에 도전하기보다 대체로 그것을 묵과하고 여성을 향해 돌아섰던 것이다. 성직자들은 종교가 여전히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는 영역이 하나라도 남은 것에 안심하는 것 같았다. 가정이 바로 그런 영역이었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은 아버지가 자녀교육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던 데 비해, 1800년대 초 '뉴잉글랜드 목사들은 '어린이의 취향과 정서와 습관' 을 형성하는 데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자신들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열렬히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 결과 '어머니들이 예전에는 아버지들의 일이었던 가정기도 인도를 점차 떠맡게 되었다.' 중략...

하지만 궁극적으로, 여성을 남성의 도덕적 개혁자로 만들려는 시도는 자기 파괴적인 것이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덕이라는 것이 인간의 자질이 아니라 여성의 자질로 정의될 경우, 남자에게 덕스럽게 되라는 것은 결국 여성적 표준을 강요하는 셈이며, 그런 표준은 남자의 본성에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덕스럽다는 것은 남자답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으로 되는 것을 의미했다. 중략...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근대성의 풍조를 먼저 흡수한 데 비해, 사회적 개혁운동은 대체로 여성의 주도하에 (성직자의 후원을 받으면서) 이뤄졌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공적 영역을 도덕으로 재무장시키고 남성을 전통적 가치관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노력이 여성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남자들은 재도덕화의 시도를 '여성적' 가치관의 강요로 인식했으며, 그것에 정하아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성이 종교와 가정에 반항했고, 그로 인해 종교와 가정은 모두 평가절하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되었음에도 일부 사회비평가들이 남성을 고분고분하게 '길들일'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중략...

그러나 미국의 역사 기록은 이런 접근이 실효가 없음을 보여준다. 오직 남성들 스스로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는 것이 남자다운 모습이라고 확신할 때에만 남성들이 가정 생활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이 사실이다. 즉 부모로서의 의무와 희생이 남성적인 가치라는 것, 부부 간의 사랑과 정절이 바깥에서 남성에게 강요된 여성적 표준이 아니라 남성적 성품의 불가결한 측면 -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그 무엇 - 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 완전한 진리, 낸시 피어시 601-631p 발췌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 녹녹한 일은 아닙니다. 어떤 단편적인 것들을 들어 하나하나 열거하여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어떤 역사적인 흐름 안에서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끈질기게 추적하여 알아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훌륭한 책을 읽고 배우는 것은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이제 거의 마무리해가는(어쩌면 이제 새롭게 다시 읽어야 하는) 완전한 진리를 들춰보면서, 미국의 역사 가운데 가정 속에 일어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의 변화에 대해, 소중한 관점을 배웁니다. 물론 산업 혁명의 부작용 (남편을 가정에서 빼앗아 가 버린) 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이 책에 나와있지 않습니다.(저자는 그 영역은 이 책에서 다룰 부분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록 미국의 역사적인 맥락을 조명했지만, 한국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권위와 책임을 잃어버린 가장, 모든 가정의 책임을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방관해 버린 채, 외부적인 생업에만 몰두할 수 밖에 없는 서글프고도 악한 남편의 모습이 사실은 저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제가 이해할 때에는, 한국 교회의 부흥은 여성들의 헌신과 노력 (저의 어머니와 장모님을 포함하여) 에 뿌리박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 그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낸시 피어시가 주장하는, 결국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가 도망하여, 가정이라는, 그리고 여성이라는 영역안에만 존재하고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는 가슴이 덜컥합니다.

세상에 쉬운 것은 하나도 없는 듯 합니다. 그래서 고민해야겠지요. 저는 목회자이기 이전에, 남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입니다. 요즘에 정말 많이 언급되는 '가장됨' 의 진정한 회복은, 단순히 가정을 사랑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끝날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언제나 그 최종적인 목표는, 참되고 성숙한 기독교인 남성을 양육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구체적인 각론들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교회 가운데, 이런 고민과 성찰에 대한 나눔과 도전이 언제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세우고 요구하시는 참된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마땅히 가장이 갖추어야 할 덕과 신앙을 갖춘 가정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

그래서 행복,

그리스도와 죽고 함께 부활하기 / 冬響 - THE GOSPELLERS




궁극적으로, 이런 경험이 기독교 세계관을 개발하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상을 공부하고 그것에 관해 논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죽고 다시 부활하기 위함이다. 이 같은 내면의 영적 실재가 없으면, 우리가 세계관과 관련하여 이제까지 말한 모든 것이 하나의 정신적 운동에 불과할 것이다. 기껏해야 지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이거나, 더 나쁘게는 똑똑하고 아는 것 많은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비치는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교양 있고 세련된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기 위해 미사여구를 늘어 놓고 특별한 언어를 구사하며, 몇 개의 인상적인 인용구를 반복하는 것은 사실 누구든지 배우기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세계관 연구마저도 우리의 지성을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복종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자만심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이 구체적인 삶과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지 않고 순전히 추상적 개념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타당성 구조' (plausibility structure)라 부르는데, 이는 사상이 구체화되는 실질적인 맥락을 가리킨다. 교회가 바로 복음이 구현되는 '타당성 구조' 인 셈이다. 사람들이 눈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 사랑과 능력과 선과 같은 초자연적 차원을 목격할 경우에,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우리의 메시지가 비로소 타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중략...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데리고 가야 할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그것이 신체적 고통이든 심리적 고통이든, 우리가 진정 무엇을 우리 인생의 토대로 삼고 있는지를 보게 하는 방법은, 그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이나 가족, 일이나 평판을 잃을 경우, 우리의 삶은 무너지고 극도의 상실감과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목적의식과 정체감이 얼마나 깊이 그런 것과 연관되어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앗아가시도록 기꺼이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죽고 싶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원리가 너무 부정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기독교 내에는 거룩함이 마치 재미와 즐거움을 거부하는 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아주 엄격한 금욕주의의 흐름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죽음은 그와 같은 금욕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으로 도피하는 수도원주의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비록 고통이나 값비싼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배신이나 억압으로 우리의 마음이 찢어질 때 그분께 울부짖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품게 하거나 혹은 타인을 공격하게 한다면, 꽉 움켜쥔 손을 펴서 내놓는 것이다. 불가항력의 악을 직면해서도 순전희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본 - 배척받고, 죽임 당하고, 살아나는 것- 에 스스로를 굴복시킬 때, 그분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리라고 속삭이는 조용한 기도다. - 완전한 진리, 낸시 피어시 651p-663p 발췌


화려하고 정교한 지식 자체에 대한 탐욕이
나를 사로잡지 못하기를,

그 지식과 이성의 길 끝에서
결국 하나님께 무릎 꿇는 삶이 되기를,

십자가와 연합하여 고난 받는 인생이 되기를,
결국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 드러나는 인생 되기를,

그래서 행복,

추천 글

로고스 프로그램으로, 평신도 성경 공부하기 with 스터디 바이블 노트 Study Bible Notes (2023년 9월 업데이트)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누구나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는 말은 듣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꿀보다 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

리딩 크리스천 독서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