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해하기로는 목회자들 가운데, QT(quiet time)에 대한 두가지 입장이 있는 듯 합니다. 조금 의외이시겠지만, 하나는 유용론(有用論) 이라면 하나는 해악론(害惡論) 입니다. 유용론에 선 분들은, 성도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에, 비록 개인적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QT를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보통 유용의 반대는 무용이지만, 그러나 적어도 QT에 있어서는 무용론의 반대는 해악론의 입장입니다. 그분들의 주장은, QT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해석 그리고 지나친 적용 중심의 방법이기 때문에 무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두 가지의 조금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좋을 듯 합니다. 첫째로는, 수동적인 입장에서 QT는 그렇게 나쁜 방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완벽한' 성경 해석은 없다는 점에서 말하고 싶습니다.(이 부분에서 제 의도가 오해될까 두렵지만) 물론 '이론적'으로는, 특정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본문의 의도를 찾아내는 것이, 개혁주의 설교 안에서 핵심이며 저 역시 그 방향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목회자가 동일 본문에서 동일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그의 책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에서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그 오직 성경이라는 것이 성경 해석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생각에는, 큐티하는 사람의 자의적인 해석 때문에 QT를 막아야만 한다면 그것은 이유가 부족하다고 봅니다.
둘째로, 적극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도의 신앙 성숙을 위해서 QT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개혁주의 교회의 롤모델로 알려진 뉴욕 리디머 처치((Redeemer Church)의 팀 켈러 목사님의 글을 인용해 봅니다.
This definition assumes that every text has both a 'micro' and a 'macro' context, To understand any particular text of the Bible, we must fist put it into the 'micro' context--its historical and linguistic setting, in order to discern the immediate intent of the human author. But every Biblical text also has a 'macro' context--its place in the entire Bible which has as its purpose the revelation of Christ as the climax of all God's redeeming activity in history. We must not only ask : 'what did the human author intend to say to his historical audience?' but also 'why did God inscipturate his as a way of pointing to the salvation of his Son?' -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modern world 중에서
팀켈러 목사님이 설교에 있어서 주장하는 핵심은(저는 이것을 저를 포함한 모든 성도에게 동일한 원리로 이해합니다) 성경에 접근하는데 있어 두가지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미시적 관점(micro)이고 하나는 거시적 관점(macro)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두가지 관점이 적절하게 갖춰져야만, 좋은 설교 (성도에게 적용하자면 본문에 대한 접근 혹은 묵상) 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를 포함한 많은 성도님들은 실제로 성경을 거의 보지 않습니다.(어쩌면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스스로 아주 작은 크기의 본문에 대해서도 읽어본 적도 고민해본적이 없는데, 수동적으로 교회에 앉아, 단순히 구속사적 관점, 혹은 개혁주의적 설교를 듣기만 한다고 성도가 성숙해지고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정말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짓는 화려한 집과 같습니다. 나는 그래도 안전하다는 일종의 자기 최면과 같습니다.
오히려 성도 스스로 미시적 관점의 본문 접근을 훈련하고 쌓아 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큐티를 권장하되, 오류가 일어날 수 있는 부분은 거시적 관점 안에서 잡아주고 도와주는 것 (좋은 책에 대한 소개와 함께 공부하는 것) 이 목회자의 역할이라 생각됩니다.(물론 모든 목회자가 염려하듯이, 제가 이해할 때 대부분 이단에 빠지는 분들은, 미시적 관점에 집착한체 거시적 관점을 배우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인 듯 합니다)
영화 '루터' 에서, 루터를 향한 추기경의 분노에 찬 말 속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건 불법이다! 여느 사제가 읽기에도 성서는 너무 난해하다.
That is outrageous! The Scriptures are too complex for even the average priest to understand
하물며 일반 대중이라니!"
much less the common man!
현실에 대한 분노와 답답한 마음을 늘어 놓자면 끝이 없지만, 그러나 저의 인생을 분노로 낭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묵묵히 미래를 준비하는 것만이, 저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인 듯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씁니다. '자립하는 신앙인으로서 사회 속에 세워지는 교회'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 주님께서 은혜와 지혜를 주시기를.. 그래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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