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으로, 이런 경험이 기독교 세계관을 개발하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상을 공부하고 그것에 관해 논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죽고 다시 부활하기 위함이다. 이 같은 내면의 영적 실재가 없으면, 우리가 세계관과 관련하여 이제까지 말한 모든 것이 하나의 정신적 운동에 불과할 것이다. 기껏해야 지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이거나, 더 나쁘게는 똑똑하고 아는 것 많은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비치는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교양 있고 세련된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기 위해 미사여구를 늘어 놓고 특별한 언어를 구사하며, 몇 개의 인상적인 인용구를 반복하는 것은 사실 누구든지 배우기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세계관 연구마저도 우리의 지성을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복종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자만심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이 구체적인 삶과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지 않고 순전히 추상적 개념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타당성 구조' (plausibility structure)라 부르는데, 이는 사상이 구체화되는 실질적인 맥락을 가리킨다. 교회가 바로 복음이 구현되는 '타당성 구조' 인 셈이다. 사람들이 눈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 사랑과 능력과 선과 같은 초자연적 차원을 목격할 경우에,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우리의 메시지가 비로소 타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중략...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데리고 가야 할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그것이 신체적 고통이든 심리적 고통이든, 우리가 진정 무엇을 우리 인생의 토대로 삼고 있는지를 보게 하는 방법은, 그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이나 가족, 일이나 평판을 잃을 경우, 우리의 삶은 무너지고 극도의 상실감과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목적의식과 정체감이 얼마나 깊이 그런 것과 연관되어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앗아가시도록 기꺼이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죽고 싶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원리가 너무 부정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기독교 내에는 거룩함이 마치 재미와 즐거움을 거부하는 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아주 엄격한 금욕주의의 흐름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죽음은 그와 같은 금욕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으로 도피하는 수도원주의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비록 고통이나 값비싼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배신이나 억압으로 우리의 마음이 찢어질 때 그분께 울부짖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품게 하거나 혹은 타인을 공격하게 한다면, 꽉 움켜쥔 손을 펴서 내놓는 것이다. 불가항력의 악을 직면해서도 순전희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본 - 배척받고, 죽임 당하고, 살아나는 것- 에 스스로를 굴복시킬 때, 그분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리라고 속삭이는 조용한 기도다. - 완전한 진리, 낸시 피어시 651p-663p 발췌
화려하고 정교한 지식 자체에 대한 탐욕이
나를 사로잡지 못하기를,
그 지식과 이성의 길 끝에서
결국 하나님께 무릎 꿇는 삶이 되기를,
십자가와 연합하여 고난 받는 인생이 되기를,
결국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 드러나는 인생 되기를,
그래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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