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목회자로서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은 바로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 설교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배우고 익히고 연습하는 것은,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처음에 팀켈러의 설교에 관한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기술적인 부분(예를 들어 특정 시점에 그리스도를 강조하라)을 설명하는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 처럼, 설교란 역시 복음에 대한 이해이고, 그것을 우리의 마음과 삶에 실제적으로 깊이 적용해 나가는 매우 복합적인 과정에 대한 논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반적인 대부분의 설교는, 소위 말해 행위 중심적인 설교입니다. 즉 '이 본문을 살펴보니, 당신이 이렇게 해야 한다' 는 틀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고민해 본다면, 결국 그러한 틀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팀켈러의 글을 인용해서 적어보려 합니다. 가장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결국 누구도 율법 앞에 완전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에 행위 중심적 설교는 한계를 가집니다)
또 다른 틀은 이보다 더 진일보 한 것인데, '소위'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입니다. 즉 '이 본문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드러내는가 혹은 설명하는 가'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그러한 틀 역시 한계를 갖고 있는데, 쉽게 이야기해서 너무나 '지루'합니다.(표현이 과격하다면 너그러히 용서해 주시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지루함이라는 것은 '그렇게 설명되는 그리스도가 도대체 나의 실제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전혀 답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적어도 저의 경우에 있어서, 행위 중심적인 설교에서 갈등하다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또 공감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민 끝에 저의 심중에 있는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과연 복음을 설명한다는 것이 인생에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행위 중심적 설교' 를 하는 분들은 그것이 인간에게 행동의 변화를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그것이 아니라는 확신은 있었으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 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주저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제가 이해하기로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복음 중심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하고 싶어하는데, 그것이 '실제 행동의 변화'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논리'인가 하는 것에 큰 고민을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익히고 배운 것들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오늘도 글로 정리해 보지만, 그러나 이 글을 통해 누군가 급격히 변화 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행위 중심적인 설교 혹은 신앙을 가진 분들의 변화를 위해서는, 정말 세심하고 헌신적이고 성실한 신앙의 지도와 동행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성경과 신앙의 모든 것에 대하여, 처음부터 벽돌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물론 안타깝게도 대부분 그것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작은 도움이 될까 해 오늘 글을 읽으며 생각한 부분을 정리해 봅니다. (밑에 인용하는 모든 글은 팀켈러,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 modern world 'getting down to earth 2' 에서 발췌 한 내용입니다)
Since a) we can't really even psychologically admit the magnitude of our sin if we don't know there is hope of salvation, and since b) self-hatred is basically a form of self-righteousness--how does that effect preaching? When we preach, we need to challenge with the comfort of the gospel. Put another way--the thing that most comforts us (the free, unconditional, sacrificial love of Jesus) should be the thing that most convict us. The language of preaching should not be: "unless you clean up your act, you will never get the love of God" but "how on earth can you treat this loving God like this?" The first approach is: "repent or God will drop you!" The second approach is: "repent for spurning the God whose Son died so you would never lose him!"
제가 이해할 때에, 그래도 한국에서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설교는 꼭 이러한 논리가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도 깊이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당신이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이 논리가 팀켈러가 본문에서 설명하는 지지하는 논리 1 입니다. 켈러의 설명처럼, 이 논리는 적어도 '당신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 라는 논리 2 보다는 훨씬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래도 훌륭한 일반적인 설교에서 한가지 놓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셨는데' 라는 파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논리 1이 그 논리 안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셨다 라는 파트가 정말 '완전한 사랑'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켈러는 이 부분을 본문에서 the free, unconditional, sacrificial love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살펴본 바로는, 소위 일반적 설교에서는, 이 부분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습니다.(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혀 설명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앞에 부분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한히 크며,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며, 신적인 무조건적인 사랑(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예정을 포함하여)이 충분히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에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생각할 때는 이렇습니다. 설교자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즉 설교의 내용 그 배경과 사상의 근본이 당신이 하나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대부분의 행위 중심적 설교자들의 특징) 결국 그러한 설교 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을 사랑한다' 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뒷 부분, '당신이 그렇게 살면 되겠는가'가 현실적으로 전혀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팀켈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에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죄의 심각함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통찰력이 있을까요?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했고, 그 사람이 용서해 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진다면, 누가 그 사람에게 진실한 용서를 구하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이미 나를 조건적으로 사랑한다면,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께 죄를 더욱 진실하게 고백하겠습니까? 오히려 어떻게든 나의 죄를 축소시키고, 조금이라도 형벌을 덜 받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The first approach actually encourages self-righteousness. (첫번째 접근은 실제로 자기 의를 더욱 강화시킵니다) It tries to convict us by increasing self-centeredness, by saying, "the sinfulness of your sin is that it is going to make you unhappy! Better get rid of it or you won't be blessed." Ironically, this only gets you to hate yourself (for being a failure) and to hate the consequences of the sin ("this is going to ruin me!") rather than the sin itself for what it is in itself, a violation of God.
계속 이어지는 글입니다. 눈여겨 볼 부분은, 켈러는 계속적으로 복음에 대한 청중의 생각과, 그 영혼의 태도를 끊임 없이 연결 짓고 적용적인 논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박영선 목사님도 동일합니다. 결국 인간의 이기심, 자기 중심성, 인과 응보의 논리 등등이 이 분들이 인간을 파악하는 중요한 틀 중에 하나이며, 설교 전체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논점들입니다. (이어지는 두 문장은 뭔가 엄청난 것을 담고 있는데, 아직 제 수준으로는 따라가지 못해 아직 무엇인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이어지는 켈러의 통찰력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 싶다면 너의 행위를 깨끗이 하라는 논리는, 역설적으로, 끊임 없이 목표 달성(하나님을 만족시키라)에 실패하는 청중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만든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죄의 실체인 하나님에 대한 훼방 보다는 오히려 죄의 결과 자체를 싫어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왜냐하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됨과 그리고 그 자녀됨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현실적으로 죄를 짓는 죄인인데(이 부분이 교회에서조차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죄인은 공통적으로 죄책감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비하에 빠집니다.(예를 들어, 그래 나는 이것 밖에 안되는 사람이야.. 누구나 경험해 본 자기 인식일 것입니다)
The second approach increases Christ-centeredness, saying, "the sinfulness of your sin is that it rejects the sacrificial love of Christ. He died so you wouldn't do this sin!" While the first approach tends toward hating myself rather than the sin, this approach tends to help be hate the sin rather than myself. If the focus is on the death of Christ for me, and of his unconditional commitment to me, then I see my own value to him, and that makes the sin far worse! It is trampling on his unconditional love. It is savaging the heart of the one who loved me unconditionally.
놀라운 것은, 이것과 반대되는 논리 가운데, 팀켈러는 개인과 죄를 분리합니다. 즉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고, 설교, 적용은, 나 자신을 혐오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어쩌면 이것을 로마서 7장에 적용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우리는 내가 받은 진정한 가치를 보게 되며 (즉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계속적으로 변함없이 받는 자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혐오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죄라는 것을 내가 생각하던 것 (그저 나를 불행하게 하는 어떤 행위)보다 훨씬 더 악한 것으로, 즉 하나님 무조건적 사랑을 짓밟고 하나님을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써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나 자신과 분리된 죄를 극도로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만이 그토록 모든 설교자와 성도들이 원하는 변화의 길 즉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원동력이 된다고 이해하고 있는 듯 합니다.
오늘도 작은 부분들을 정리해 봅니다.
제 영혼이 복음에 깊이 들어가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참된 복음의 감격 속에 들어가 설교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것이 내 삶 속에 열매로 나타날 수 있기를,
오늘도 바래 봅니다.
그래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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