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라는 것은, 참 신기합니다. :) 사실 음반들을 들어보면, 모든 믹싱이 다 개성이 있습니다. 어떤 곡들은 보컬을 굉장히 크게 부각시킵니다. 어떤 곡들은 보컬보다는 배경 음악에 더 강조합니다. 어떤 곡들은 전반적인 드럼 사운드에 포커스를 두기도 합니다.
그런데 곡들이 믹싱의 결과물들은 다르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노래"가 결국 마음에 남게 됩니다. 곡의 형태나 곡의 분위기는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 음악이라는 것은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메시지로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믹싱은 원리적으로는 아주 간단해 보입니다. 음악과 보컬이 균형이 잡히고, 동시에 보컬이 잘 드들리면 됩니다. :) 그런데 실제로 믹싱을 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목표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만약에 밸런스가 음악쪽으로 조금만 치우치면 노래의 메시지를 잃어버립니다. 만약에 보컬쪽으로 밸런스가 치우치면, 그 곡의 전반적인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보컬만 들리는 굉장히 밋밋한 결과물이 됩니다.
그래서 보컬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들이 쓰입니다. :) 일단 볼륨을 올릴 수 있습니다. 볼륨을 올리면 당연히 보컬이 잘 들립니다. 그런데 금방 촌스러워지고 밸런스가 깨집니다. 그래서 컴프레서를 사용해서 적당히 음압을 올리면, 컴프레서의 색깔이 살짝 들어가면서 뭔가 보컬이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생동감 있게 살아납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세츄레이션을 사용하면, 보컬이 확 앞으로 튀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컴프레서를 사용하고 추가로 세츄레이션을 사용하니 보컬이 너무 앞으로 튀어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 과하게 사용한 듯 합니다. 그래서 차에서 들어보면, 보컬이 너무 음악보다 튀어나오면서 밸런스가 많이 깨어진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츄레이션을 굉장히 절제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보컬의 넓이" 였습니다. :) 무슨 의미냐하면, 여러 음반들을 들어보면, 보컬이 단순히 앞으로 튀어나는 정도가 다를 뿐 아니라, 보컬이 스테레오상의 이미지에서 차지하는 절대 넓이 자체가 굉장히 넓은 음반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제 생각에는 마이크의 차이가 결정적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 마이크의 지향성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소리를 수음할 때에 그 성향이 넓은 마이크가 분명히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마이크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보컬의 넓이를 넓힐 수는 없을까?
제가 현재 사용하는 마이크는 베링거 TM1 마이크입니다. 아마 다섯 곡 정도 녹음해 본 듯 한데, 솔직히 정말 괜찮습니다. :) 제가 당연히 고가 마이크는 써 본 경험이 없지만, 현재 저의 환경에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정도 수준에서 어떻게 좀 더 보컬을 넓게 표현할 수 없을까? 굉장히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플러그인 얼라이언스에서 플러그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름은 Brainworx bx_stereomaker입니다. 흥미롭게도 부제목이 붙어 있네요. From Mono to M/S Stereo With Ease 입니다. 이 플러그인의 이름을 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더군요. 혹시 이 플러그인을 모노 보컬에다가 걸어보면 어떻게 될까?
* Brainworx bx_stereomakerFrom Mono to M/S Stereo With Ease
이 플러그인은, 아주 독특한 플러그인입니다. 물론 스테레오감을 확장하는데 사용되는 플러그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제가 가진 플러그인 중에도, 스테레오 감을 확장하는 기능이 달려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플러그인의 사용기를 보니, 굉장히 평가가 좋더군요. 특히 이 분의 리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At a first sight, what this
plug-in does is very similar to other “stereoidizer” plugins that come for free
with most DAWs. So why to pay for it, I wondered? But it’s when you listen back
to mono a processed track, that the magic of this plugin comes out, and you can
understand the engineering skills beyond its realization. While a track
processed with your stock DAW plugin sounds carved and thin when listened in
mono, with bx_stereomaker you can retain all the original sound features, with
no degradation at all. You just get back to the original unprocessed sound, and
this is actually the most relevant added value of this plugin.
저와 동일한 의구심을 품고 있더군요. 굳이 이런 플러그인을 유료로 사야 하는가? 그런데 이 분이 사용해 보니 이 플러그인의 특징은, 어떤 사운드의 퀄리티 저하 없이, 모든 사운드가 유지되면서 동시에 스테레오 감을 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 끌리더군요, 바로 다운로드 받아서 데모로 사용해 보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적용해 보았습니다. 사실 메뉴얼을 아직 보지 않고 귀로 판단하면서 조절해 보았습니다. Tone 조절을 하면서 소리가 어색하지 않도록 컬러감을 맞추고, 그리고 스테레오는 약 15퍼센트 정도까지만 올려 보았습니다.
메인 보컬에 걸어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 제가 필요한 딱 그 플러그인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을 사운드를 들어보자 마자 깨달았습니다. 물론 과하게 걸면 굉장히 이상해집니다. 모노에 맥시멈으로 걸면, 머리 속에 사운드의 이미지 공간을 완전히 가득 채우면 이상해 집니다.
하지만 딱 15퍼센트 정도만 스테레오감을 확장하니, 기존의 모노 사운드에 양쪽으로 살짝 사운드가 추가됩니다. 마치 리버브의 느낌이 추가되는 것 처럼, 원래의 사운드가 넓이가 넓어지면서 좀 더 풍성한 사운드로 바뀝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걸어서 더블링 효과를 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처음으로 메인 보컬의 모노 사운드를 조금 더 넓히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딱 이정도가 좋습니다. 가장 큰 강점은, 위에 리뷰의 이야기처럼 굉장히 자연스러워서, 플러그인을 걸어도 소리가 착색된 듯한 느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플러그인을 처음 사용해 본 곡이 바로 아래 곡입니다. 메인 보컬에 집중해서 들어보세요.
어떻게 들으셨나요? :) 저는 사실 메인 보컬이 너무 크지 않은 믹싱을 정말 좋아합니다. 약간 안 들릴 듯 말듯 한 그런 믹싱을 좋아합니다. :) 그래서 이 플러그인이 더 소중하네요. 위에 이미지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마지막 옵티컬 컴프인 LALA 바로 앞에다가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운드를 최종적으로 거의 정리한 상태에서 이 플러그인을 사용한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는 Brainworx bx_stereomaker 입힌 메인 보컬이 볼륨이 너무 크지 않으면서도, 그리고 너무 심하게 세츄레이션으로 튀어나오지 않으면서도, 곡 안에서 자리를 잘 잡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 코러스까지 강조할 필요가 없으니, 코러스 쪽의 더블링은 기존에 사용하던 ADT를 사용하였습니다. 결과물을 평가해 볼 때에 제 개인적으로는, 이번 시도는 큰 성공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마침 블랙 프라이데이라서 저렴하게 바로 구입했습니다.
요즘에 음악을 만들면서 느끼는 것은, 정말 충분히 상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운드를 구현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 낼지를 고민하는 것이 참 중요하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플러그인은 정말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메인 보컬을 좀 더 넓게 표현하면서 곡 안에서 표현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면, 꼭 한번 사용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제가 찬양팀을 처음 시작한 것이 스무살 때입니다. 형들과 누나들 틈에 끼어서 마이크를 잡고 찬양하는 것이 너무 좋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감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이십년을 찬양팀 싱어로, 그리고 리더로 지역 교회를 섬겨왔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계획하면서 첫 출발을 CFNI로 잡았던 것도, 찬양을 더 잘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저의 삶에 있어서 찬양은 중요한 가치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작곡들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레코딩 실력이 향상된 이후에는 실제로 제 곡들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주어진 목회를 감당하고, 그리고 기독교 방송에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기 때문입니다.
두 주 전에 추수 감사주일 예배 사회를 준비하면서, 시편 147편을 읽게 되었습니다. 감사의 시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음에 너무 뭉클했습니다. "찬양함은 마땅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 마음 가운데 들어오면서, 전적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토요일 늦은 저녁 피아노 앞에 앉아서 곡을 만들었습니다. 이미 가사가 충분히 성경을 통해서 준비되었기 때문에 곡을 완성하는데에 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일까지 마무리해서 곡을 완성하였습니다.
시편의 핵심 주제를 살려서, 곡의 제목은 "감사하며 노래하라"로 지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노래해야 할 수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감사의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고, 그분의 자비하심을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곡의 구성과 레코딩 수준은 너무 마음에 듭니다. 저는 자존감이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결과물에 만족을 잘 하는 편입니다. 물론, 세계적인 명반들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너무 많지만, 현재 저의 수준에서, 그리고 저의 모니터링 환경에서는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홈레코딩을 공부한지 오래되었지만, 특히 최근에 2년 동안 제가 고민했던 모든 것을, 이 한곡에 쏟아 부었습니다. 음악적으로는 멜로디를 아름답지만 식상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코러스는 세 파트의 화음으로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곡의 후반부 쪽에는 멜로디를 더블링으로 처리해서 곡의 풍성함을 더했습니다.
사실 다른 분들의 곡으로 찬양 음원을 만드는 것은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 처럼 불편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제가 만든 곡이기 때문에, 음악적인 부분도 마음껏 상상하고 마음껏 구성하여서 완성하였습니다.
악기들은 기본적으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스트링 바이올린 1,2 비올라, 첼로, 드럼, 드럼 루프, 신스 패드, 베이스 기타 한 대, 일렉기타 세대 정도를 사용했습니다. 평소보다 베이스 톤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케스트라 스트링에서는 빠르게 강조해서 연주하는 패턴을 브릿지에 사용했는데, 처음으로 시도했지만 정말 결과물이 잘 나왔습니다.
음향적으로도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전체적인 다이나믹적인 부분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드라마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플러그인을 목적을 가지고 다양하게 사용했고 마스터링까지 놀랄 정도로 아주 깨끗하게 나왔습니다.
이 곡은 의도적으로 곡을 너무 어렵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이 곡이 회중 찬양으로도 사용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한번 시도해 볼 예정입니다. 제가 만든 곡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찬양할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떨리고 흥분이 되네요. :)
이 시편과 찬양의 고백이, 평생의 저의 소원과 고백이 되기 원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주님을 바라고 간구하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가 되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 곡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에,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가 예배"라고 말합니다. 일단 강의를 듣기 전에 질문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설교가 예배라는 것이 무슨 뜻이지? 혹시 설교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 높아지셔야 한다는 의미인가? 그런 질문 의식을 가지고 강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파이퍼 목사님은, "무엇이 설교가 아닌가"에서 강의를 열기 시작합니다. 설교는 단순히 기독교의 절기 예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설교"가 바로 "예배"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본격적으로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본인이 정의했던 설교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갑니다. 그것은 Expository Exultation 입니다. Expository는 성경의 실재를 명백하게 드러내어서 그것을 청중들에게 분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Exultation은 그 실재가 가지고 있는 그 가치에 대하여서 적절한 감정을 경험하며 구체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과연 예배는 무엇이며, 이러한 파이퍼 목사님이 정의한 설교의 정의와 예배가 실제로 어떻게 겹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것은, 파이퍼 목사님이 "설교는 예배이다" 라는 의미는 결국 "예배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요소를 설교가 동일하게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럼 계속 갑니다.
먼저 파이퍼 목사님은, "예배가 무엇인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가지신 그 가치를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이 세가지 단어를 통해서, 예배와 설교가 어떤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함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첫째로, 예배 가운데 본다는 것은, 영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성경에 신실하게 근거한 설교를 들을 때에, 거기에는 어떤 "분명하고도 구분되는 스스로 그것이 진정한 것임을 보여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영적인 통찰력"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파이퍼 목사님은 요한복음 1장 14절을 인용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영광이라는 것은, 오직 "은혜와 진리로 가득찬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광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지만 어떤 영광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는 것"에 근거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고린도후서 4장 4절과 6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파이퍼 목사님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영어로는 "cannot see"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4:4 The god of this age has blinded the minds of
unbelievers, so that they cannot see the light of the gospel of the glory of
Christ, who is the image of God.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4:6 For God, who said, "Let light shine out of
darkness," made his light shine in our hearts to give us the light of the
knowledge of the glory of God in the face of Christ.
파이퍼 목사님은, 마귀가 한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동요시킬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볼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움직이시고 그의 보지 못하는 것을 열어주실 때에, 바로 그 때에 설교 중에 빛이 비취는 것인데, 예수님이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나 혹은 신화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스스로를 증명하시는 신적인 영광으로써 그분을 보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가치를 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둘째로 예배 가운데 맛본다 라는 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부터 설명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15:8
"'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할 때에, 우리가 주일 예배 시간에 그 자리에 참석하면서도, 찬양하면서도, 그 마음 안에서 그 진리를 맛보고 음미하는 것에서는 얼마든지 멀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합니다.
잘못된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이런 일은 청중들이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청중은 설교자 자신, 설교의 태도, 설교의 예화, 설교의 논리 등에 매료되거나 좋아할 수 있겠지만,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맛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은, 단순히 청중이 노래하거나, 기도하거나, 손을 들거나, 무릎 꿇거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영적인 실체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보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세번째로 예배는 표현이다 라는 것은, 우리는 예배로 모여서 찬양하고, 서거나 무릎 꿇음으로써, 그리고 손을 들고, 그리고 성경을 읽음으로써, 죄를 회개함으로써, 혹은 눈물을 흘리면서, 혹은 경외감 속에서 침묵으로 표현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두가지,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보는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을 맛보는 것이 이루어질 때에, 그제서야 우리가 예배 중에 표현하는 모든 것들이 놀랍고 또 달콤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배란 이렇게 세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고 파이퍼 목사님은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에서, 설교가 어떻게 이러한 예배에 대한 이해에 상응하는지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설교는 영적으로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들을 청중들에게 먹이며, 또한 합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의 강해의 영역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알고 보는 것을 영적으로 결합하여서 청중들에게 공급하고 먹이는 것입니다. 설교의 희열의 영역 역시,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보는 것 그리고 맛보는 것을을 결합하고 그리고 그것을 더 벅차오르게 만들어서 청중들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로 예배에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 예배에 오는데, 영적인 실재를 보고, 맛보고 그리고 표현하기 위해서 옵니다.
예를 들어서 예배 중에 찬양은 영적인 각성 그리고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보는 것, 음미하는 것, 그리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찬양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 처럼, 설교도 동일하게 영적으로 보는 것, 음미하는 것, 그리고 표현하는 것을 영적으로 깨닫게 하고 일어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설교는 예배 이후에 등장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혹은 단순히 예배의 목적도 아니고, 설교 자체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놀라운 사건이며, 이것은 초자연적인 것이고 기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존파이퍼 자신, 그리고 설교자가 어떻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설교의 기적을 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이퍼 목사님은 이것을 다음 강의 때에 다루겠다고 말합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다소 복잡한 이야기였다고 느꼈습니다. 특별히 예배의 세번째 요소인 "표현"이라는 측면과, 좋은 설교의 연결성은 거의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선명한 호소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파이퍼 목사님이 강조하고 싶은 핵심은, "설교는 결국에는 예배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목적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맛보고, 표현하는 것인데, 설교가 바로 그런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설교가 바로 예배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강의를 들으면서,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장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배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보고, 그것을 맛보고, 그것을 표현한다라는 이 정의는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칼빈에서 예배학 수업을 들으면서 예배학에 대한 전문적인 아티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정말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학적인 예배학은 어쩌면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과 많이 멀어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배의 형태, 예배의 순서, 예배의 중요성 등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정작 예배가 정말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 예배 가운데 우리의 영혼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선명하게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를 통해서, 예배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설교를 예배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하여 정말 탁월한 정의와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번 강의는, 정말 설교는 무엇인가를 보여준 탁월한 강의였습니다. 특별히 예배 속에서 존재하는 설교라는 측면에서, 저는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파이퍼 목사님의 말씀처럼 본문의 실재를 보고, 맛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에서 이것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쉬운 것은, 보통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얼마나 매력적인 예화를 사용했는가? 혹은 얼마나 논리 구조가 탁월한가? 혹은 얼마나 충실하게 본문을 주해했는가? 등이 더 중요한 주제처럼 다뤄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번 강의가 설교자로서는 크게 마음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저는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가 이렇게 이해되었습니다. "설교자가 그리스도의 영광, 말씀의 실재를 보고, 맛보고, 표현할 수 없다면, 당연히 예배는 실패입니다!"
보통 공예배의 시간이 한시간 정도입니다. 그 중에 설교는 삼십분 정도를 차지합니다. 만약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실제로 보고, 영적으로 충분히 맛보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면, 도대체 우리는 예배의 성공을 어디에서 찾아야할까요? 그리고 설교자가 그것을 본 적도 누린 적도 표현한 적도 없는데, 과연 성도들에게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향한 비난이 아니라, 제 자신을 향한 무거운 도전이자 질문입니다.
이 강의를 듣고 설교를 준비하고 실제로 설교하는데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정말 할 수 있는 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설교하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것을 담아서, 그리고 제가 영적으로 보고 맛보고 표현하고자 했던 그 내용을 담아서 설교했습니다.
설교 단을 내려오는데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본문 자체가 너무나 무거운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뉴스에서 이 본문과 유사한 내용이 나왔다면 아마도 저는 채널을 돌렸을 것입니다.
인간의 야망과 광인과 같은 집단 살인, 그리고 그러한 일이 일어난 세겜이라는 지역의 과거의 영광을 보면서,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나태함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보여주는 지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새벽 설교 후에 한 성도님으로 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카톡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교만하여져서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제가 설교하는 날이라 설교를 들었다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악한 모습을 깨닫게 하셨다는 카톡이었습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앙 생활 하라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님이 이야기한 바로 그 부분이, 파이퍼 목사님이 설교를 통해서 달성해야만 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성도는 영적인 실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진심의 호소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저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알게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바로 이런 일이 저의 설교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회중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의 속성을 그대로 가진 성경적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를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미국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 운전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제가 워낙 방향치이기 때문에 GPS를 좋은 것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글맵이 가장 좋은 GPS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빨리 변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도퇴되는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무겁습니다.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의 아들들이 온 땅에 흩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은, 함은 막내가 분명하지만, 셈과 야벳 중에 누가 장자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창세기 10장을 읽으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미국에 산지 10년이 되었지만 미국 주 위치도 다 모릅니다. 하물며, 세상의 모든 곳으로 흩어진 이들의 이야기는 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립니다.
하지만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분명 10장에 등장한 흩어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적으로는 11장의 바벨탑 사건 이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함의 손자인 니므롯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세상의 첫 용사라고 소개됩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그의 이름이 "반역"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그를 이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니므롯은 사냥꾼이며 동시에 도시를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고대 사회에 있어서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에서 시작되었는데, 아마도 니므롯이 바벨탑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의 지도자였을 수도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 당시에 인류의 총 숫자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의 자녀들과 민족들이 등장합니다. 모두가 다양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 속에서,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모델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사람,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 자신의 제국을 이룬 사람, 그리고 사람들 위에 리더가 되는 사람, 모두가 이런 삶을 꿈 꿉니다.
미국에 오니 사람들이 더 다양하게 살아갑니다. 심각하게 잘못된 모습이 아니라면 상대방을 충분히 존중하는 것이 교회에서 조차 미덕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마치 삶의 다양성이야 말로 우리가 지켜야할 마지막 보루인 것 처럼 여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삶은 두 가지 방향 중에 하나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순종하자라는 표현은 참으로 단순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정말 엄청난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천국의 환희가 숨어 있습니다. 과연 저와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In Genesis 10, we see the offspring of Noah's family. The grandson of Ham was Nimrod. Nimrod was a valiant warrior on the earth. Grace and Truth study bible suggests that Nimrod's meaning of the name is "rebellion". The study bible suggests that he was the leader of Babel. Maybe, he was the role model of the ancient world.
In this society, the variety of our life is a kind of value we should keep. Even in the church, we say that this is my privacy. Actually, our lifestyle should be respected. However, in our life, we have only two ways spiritually. The one is the rebellion. And the other one is obedience. What are the attitude of me and you?
홍수가 그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을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인간과 창조 세계와의 관계 안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동물들은 인간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을 먹을 것입니다.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살인을 금하십니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어떤 존재에서 진화되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가 존귀한 존재입니다. 만약, 냉혹한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살인하는 것이 동물을 죽이는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면, 성경적인 확고한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는 강력하고 진실하게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모든 피조물과 맺으신 언약이, 완전히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창세 때부터 깨어진 언약을 다시 세우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완전하게 맺으시기 위해서 무지개를 보이십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는 것과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맺으시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충만하게 보여줍니다.
무지개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보는 사람들은 항상 탄성을 지릅니다. 어쩌면 모든 인류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는 것 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이들은 무지개를 그저 우연히 만들어진 것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하늘에 띄우실 때 마다, 자신의 은혜의 약속을 기억하십니다.
장면이 급격히 바뀝니다. 성경은 노아의 아들들을 소개하면서, 함이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 이 소개를 본다면, 이스라엘의 대적 그리고 타락한 가나안이 도대체 어떤 조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확 궁금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벌거 벗었습니다. 성경은 노아의 잘함 혹은 잘못함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아버지의 벌거벗음에 대하여서 그의 아들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주목합니다. 다른 두 아들과 다르게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봅니다.
노아는 함을 저주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서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예언합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신명기 22장 30절과의 연관성을 고려하여서, 단순히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정도가 아니라, 어머니와의 성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혹은 단순히 함이 겸손한 태도가 없었음을 보여줄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저주만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셈에 대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셈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셈의 축복은 야벳을 포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셈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 년을 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노아의 삶에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그의 믿음, 그의 순종, 그리고 그를 통한 후손들의 축복을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삶의 많은 일들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제대로 붙들고 있는가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온 힘을 집중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눈여겨 보실만한 것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After the flood, God made the covenant again with Noah and every living creature. It is very similar to Genesis 1 and was renewing of that. In this chapter, fear appeared. It is very curious for me. The fear is in the relationship between humans and animals.
When we see the rainbow, we exclaim that it is beautiful. It is not made by chance. It is the proof of God's grace. God promised not to destroy humans with the flood as before he did.
The bible focuses on Ham who was the father of Canaan. He had sinned to his father so he was cursed. On the other hand, Shem and Japheth were blessed. Especially, through Shem, Jesus Christ will be born.
미국에는 노아의 방주를 실제로 재현해 놓은 전시관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꽤 달려가야 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방문해 보았습니다. 성경의 사건을 실제로 더 실감나게 경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방주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눈으로 볼 때에 그 사이즈는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노아는 결국 방주를 완성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갑니다. 비도 오기 전에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은, 히브리어의 서술 스타일이 종종 반복을 특징으로 한다고 설명합니다. 반복을 통해서 어떤 강한 이미지가 말씀을 읽는 우리 가운데 만들어집니다. 노아의 나이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반복되어 강조됩니다. 가슴 뭉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문을 닫으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서 실제로 비가 오기까지의 그 기간을, 현재의 크리스천들이 살아가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아직 최후 심판의 때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더 깊이 믿음을 가져야 하고, 또한 동시에 세상의 비웃음을 이겨내야 합니다.
가끔씩 홍수에 대한 소식이 들립니다. 평안한 곳에 살다가 홍수 경보라도 나면 심하게 긴장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하물며 사십일 동안 깊음의 샘이 터지고 물이 쏟아지는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성경과 대등하며, 자신의 지적인 수준에서 얼마든지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람, 혹은 국지적인 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노아의 나이를 언급하며,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성경을 말씀대로 믿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할까요? 아니면 사람을 믿어야 할까요?
끔찍한 심판이 일어났습니다. 비가 오기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심판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 그대로 땅위의 모든 생물들을 쓸어버리십니다. 심지어 새까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오직"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극적인 대조 그 자체입니다.
심지어 지옥이 있는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자가 이렇게 대조될 것입니다. 한 부류는 주님을 향한 찬양 속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부류는 이를갈며 한탄하며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This chapter shows that it is real history because we see the exact age of Noah and his behavior. Noah, his family, and living creatures entered before the flood according to God's command. I see the identity of Christian through this scene. We entered in Jesus Christ. And we should endure the insult from people of this world.
The judgment came to this world. It was the tremendous and overwhelming one. Everything on the earth was destroyed and wiped by the flood. It was not nature's coincidence but God's judgment for their sin. Only Noah and his company were saved by God's grace.
세상을 뒤 엎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한 모든 들짐승들을 기억하십니다. 성경에서 "기억하다"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입니다. 사람도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 주면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해 주신다면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창세기 8장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은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명령하시지 않았지만, 노아는 물이 줄어들고 있는지를 계속 확인합니다. 성경은 노아가 물의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의도적으로 길게 적어 놓은 듯 합니다. 노아는 수동적으로 방주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히브리어의 특징을 살려서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돌아오는 비둘기를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올리브 잎을 물고 있는 기독교의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눈여겨 보지 않았던 부분인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노아는 땅이 완전히 마른 후에라도, 결코 경고망동하지 않습니다. 하난미의 명령이 떨어진 이후에야, 그때서야 방주에서 나옵니다. 새로운 창조라는 맥락에 따라서, 생륙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등장합니다.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나옵니다.
창세기 8장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아십니다. 그 악함을 이해하시고, 다시는 전에 행한 것 처럼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언약이 있기 전에 노아의 제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깨끗한 동물 중에 일부를 번제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완전하 태워서 하나님 앞에서 헌신을 보입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이 제사가 하나님의 약속의 기초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홍수 이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근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노아의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 향기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그분을 향한 예배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속죄 제물이 되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모든 것이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하기로는 바로 이것이 중요한 단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대로 신실함으로 세상을 유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땅이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들이 모두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가, 여호와의 완전한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그날 입니다.
In this chapter, God remembered Noah and all the animals. We thank that someone remembers me. When God remembers his children, this is the tremendous rejoice.
Noah offered burnt offerings on the altar with clean animals. This was the foundation for God's promise never to destroy the world again in such a manner. In the past, people make God grieve and angry with their sins, however, through the worship of Noah, God pleased and make a covenant with Noah.
This story is the new beginning of human history. However, we can see the last day through this chapter. Suddenly, someday, the earth will be shaken by God's power. The son of God will come to the earth according to his promise. We will see the final judgment and redemption.
창세기 22:13 아브라함이눈을들어살펴본즉한숫양이뒤에있는데뿔이수풀에걸려있는지라아브라함이가서그숫양을가져다가아들을대신하여번제로드렸더라22:13 Abraham looked up and
there in a thicket he saw a ram caught by its horns. He went over and took the
ram and sacrificed it as a burnt offering instead of his son. 22:14 아브라함이그땅이름을여호와이레라하였으므로오늘날까지사람들이이르기를여호와의산에서준비되리라하더라22:14 So Abraham called that
place The LORD Will Provide. And to this day it is said, "On the mountain
of the LORD it will be provided."
요한복음 6:9 여기한아이가있어보리떡다섯개와물고기두마리를가지고있나이다그러나그것이이많은사람에게얼마나되겠사옵나이까6:9 "Here is a boy with
five small barley loaves and two small fish, but how far will they go among so
many?" 6:11 예수께서떡을가져축사하신후에앉아있는자들에게나눠주시고물고기도그렇게그들의원대로주시니라 (개역개정)6:11 Jesus then took the loaves,
gave thanks, and distributed to those who were seated as much as they wanted.
He did the same with the fish. (NIV)
성경은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매우 매력적이며 매우 아름답습니다. 일관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기 보다는, 잠시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그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성경을 읽는 우리의 관심을 다시 한번 이끌어냅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창세기 6장은 설명합니다. 우리는 모두 번성함을 원합니다. 풍성하게 잘 살게 되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선한 결과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도대체 누구인가는 난제로 남아 있는 듯 합니다. 욥기에서 등장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창세기 문맥 안에서도 사람의 딸들과 대조되는 천상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보통의 경우에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해석은, 셋의 후손이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가인의 후손이 사람의 딸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이들이 누구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서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오직 자신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인격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장 깊은 관계를 맺는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으로 인해서 그들의 수명을 하나님께서 제한하십니다. 그리고 네피림이 언급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각자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이해를 따라서 네피림을 이해합니다. 중요한 것은, 네피림 굉장힌 용사이며 명성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사건 속에서, 어떤 중요한 연속성을 봅니다. 인간의 번성, 어떤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 혹은 천사적인 존재들과 이루어지지 말았어야 하는 결혼, 그리고 그것을 통한 매우 위대한 사람들의 출현입니다. 어쩌면 노아의 이 시대는,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이 마치 거의 신처럼 실제로 위대하여져서 그 위세를 떨치며 군림하는 시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에 최고의 번성의 시기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악한 시기였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인간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했습니다. 인간의 부패는 폭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땅에 있는 것들을 진멸하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패한 세상 속에서 당대에 완전하던 자 노아를 기억하십니다. 노아가 의로운 자였음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경은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임을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던 자였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심한 세상 전체의 타락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은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방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명령하십니다. 구체적이며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까다로운 명령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쩌면 노아가 가졌을지도 모르는 노아의 의구심, 노아의 혼란, 노아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다 준행했다" 라고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노아에게는 온전한 순종만이 존재합니다.
인간이 가장 번성한 시대, 심지어 신적인 존재로 칭송받을 만큼 놀랍게 발전했던 바로 그 시대는, 역설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폭력적이며 가장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누구였습니까? 혈통적으로 탁월하여 시대의 용사가 되었던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저와 당신에게 과연 무엇에 대하여 강력하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Genesis 6 shows that the relationship God displease ruined human history. We do not know who the sons of God are. However, we see the marriage according to their lust was the main reason for God's judgment.
The time of Noah was a terrific time in human history. We see the Nephilim who was the mighty heroes. I just assume that they were almost like God. However, that time was the most sinful period. There were full of violence. It makes God angry to decide to destroy the entire world.
Comparing the warrior Nephilim, Noah was the man who walked with God. God gave the complicated and hard commend to him for making ark and gathering living creatures. There was only one response from Noah. It was the entire obedience.
처음에 홈레코딩을 시작할 때만 해도, 마스터링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습니다. :) 단순히 곡을 만들고 믹싱을 한 결과물이 소리가 너무 작아서 당황했던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마스터링은 곡이 완성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최종적인 결과물입니다.
구글링을 해보면, 마스터링에 대한 전문적인 자료들이 정말 많습니다. 심지어 "절대 마스터링을 독학으로 하지마라"라는 그런 영상 제목도 보았습니다. 충분히 공감은 되는 말이지만, 굳이 하지 말아라고 하는 이유까지는 모르겠네요. :)
세상이 너무 좋아졌습니다. 홈레코딩을 처음 시작하던 10년전만 하더라도, 스튜디오에서 사용하는 전문 플러그인들은 너무 고가이기 때문에 감히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플러그인들조차 매우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홈레코딩을 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또 퀄리티가 올라간 듯 합니다.
저 같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좋은 마스터링의 개념은 "볼륨이 크고 선명하게 확 들리도록 만드는 것"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 믹스본에서 부족했던 사운드와 느낌을 채우면서 음압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믹싱보다 마스터링이 더 어려운 것이 아닌가 라고 종종 생각합니다.
단순히 플러그인만 저렴해진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전문 마스터링 스튜디오에서만 할 수 있던 작업들을, 온라인에서 저렴하게 해주는 서비스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서비스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겠죠.
전문 스튜디오에서 하는 것과 온라인 마스터링은 분명히 퀄리티에서 차이가 날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본인이 취미 생활로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나는 그렇게 최고의 퀄리티가 필요 없이 나의 만족이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면, 온라인 마스터링도 아주 훌륭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몇군데 온라인 마스터링 서비스가 있지만, 제가 실제로 사용해본 것은 프러그인 얼라이언스사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mastering.studio 서비스입니다. https://www.mastering.studio/ 실제로 사용해보고, 제가 홈마스터링으로 했던 결과물과 비교해보면서 간단한 리뷰를 적었습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음향쪽으로는 꽤 관심을 가지고 사는 편인데도, 처음 이런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상당히 놀랍기는 했습니다. :) 물론 밴드랩이라는 회사는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때 잠깐 사용했던 케이크워크를 인수한 회사입니다. 케이크워크는 윈도우 전용 DAW로서 여전히 많은 사용자 층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DAW 입니다. 그리고 밴드랩은 케이크워크를 인수한 이후에 완전 무료 DAW로 풀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밴드랩이라는 이 회사는 어떤 종합 음악 사이트를 표방하는 듯 합니다. 케이크워크 외에도 간단하지만 온라인으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DAW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만들기 원하는 수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 툴을 이용해서 음악을 만들고 발매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단순히 DAW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음원이 만들어지는 최종적인 과정인 마스터링조차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네요. :) 밴드랩의 다른 서비스가 그런 것 처럼, 이것도 완전히 무료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하고 어떻게 회사가 유지되는지 알 수가 없네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퀄리티입니다. 웹페이지 상단에 보니 저에게 눈에 띄는 것은 "free artist-driven Mastering tool"이라는 문구입니다.
저는 모든 온라인 마스터링 서비스에는 당연히 아티스트들이 참여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테스트 과정 속에서 아티스트들에게 협조를 받아서 곡을 분석하고 테스트를 당연히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 밴드랩 마스터링 서비스는, 아티스트들이 주축이 되어서 만든 마스터링 툴이라고 선전을 하네요. :) 바로 사용해 보았습니다.
사용법은 너무 간단합니다. :) Import Your Track이라고 된 곳에, 마스터링 전의 믹스 단계의 웨이브 파일을 업로드 하면 됩니다. :) 생각보다 금방 업로드가 되고, 정말 빠르게 변환이 됩니다. mastering.studio도 10초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밴드랩의 마스터링 서비스도 마찬가지로 초고속 변환을 거칩니다. 그리고 이렇게 화면이 나옵니다.
제가 만든 곡이 마스터링 과정을 거쳐서 어느 정도의 음압을 확보했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보라색 색깔은 별로 마음에 안드네요. :) 중요한 것은 사운드겠죠. 밴드랩은 4가지 스타일로 동시에 만들어줍니다. Universal, Fire, Clarity, Tape 입니다.
제가 원래 믹싱하면서 만든 곡은, 전형적인 보통의 팝스타일입니다. 들어보니 Universal이 가장 어울리더군요. 저의 믹싱본을 기준으로 해서 Fire의 경우에는, 굉장히 심하게 컴프레서가 걸리고 로우가 정말 터질듯한 그런 사운드가 나옵니다. :) Clarity는 너무 소리가 얇아지는 느낌이라 별로였습니다. Tape의 경우에는 세츄레이션이 굉장히 강하게 들어가는데, 사실 저는 Warm saturation이라기 보다는 너무 심한 세츄레이션이라고 느꼈습니다.
일단 예전에 사용해 보았던 mastering.studio의 경우에는 아주 특색있는 사운드보다는, 무난하지만 매우 매력적이고 개성이 드러나는 스타일로 4가지로 변환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밴드랩의 경우에는, 스타일이 너무 심하게 차이가 난다고 느꼈습니다.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까지 개성이 강하게 마스터링을 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사람에 따라 다를 듯 합니다. 왜냐하면 mastering.studio의 경우를 오히려 너무 무난하게만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두가지의 버전을 들어보시죠. 위에 것은 홈 마스터링, 그리고 아래 것은 밴드랩 AI 마스터링의 Universal 버전입니다. 먼저 홈 버전을 들어보시고 그 이후에 AI 버전을 들어보세요. :)
어떻게 들으셨나요? :) 솔직히 한가지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Universal이 너무 괜찮았습니다. :) 깜짝 놀랐습니다. 과거에 mastering.studio에서 AI 결과물로 받은 것은, 제가 만든 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고 느꼈고, 이정도는 더 공부하면 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밴드랩에서 Universal로 마스터링한 것은 딱 듣자마자 한 생각이, "이건 나는 못따라하겠다" 였습니다. :) 저의 결과물과 비교했을 때에, 약간 harsh한 느낌이 들지만, 일단 음압 자체가 상당히 더 올라갔습니다. 그렇다고 눌린 느낌이 심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뭔가 곡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어떤 느낌이 확 올라갔습니다. 일단 보컬이 시작할 때에 귀에 완전히 확 꽂힙니다. 단순히 AIR 영역의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마치 믹싱 전체를 새롭게 한 것처럼 곡이 훨씬 세련되게 들립니다.
제가 모니터링의 환경이 워낙 좋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헤드폰 기준으로 두가지 중에 하나로 발매를 해야 한다면, 저는 밴드랩 버전으로 할 듯 합니다. :) 물론 제가 마스터링한 버전은 부드러운 맛이 있습니다. 원래 그걸 의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래 듣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딱 한번의 기회로 들려질 수 있다면, 아무래도 밴드랩 버전이 더 좋을 듯 합니다.
mastering.studio에서 현재 할인해서 한 곡당 10불을 받습니다. 그런데 밴드랩은 무료입니다. 심지어 몇곡 무료도 아닌 무제한 무료입니다. :)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상황이네요. 제가 만약에 어느 정도 수준의 퀄리티만 필요하다면 저는 아마도 밴드랩을 당연히 사용할 듯 합니다.
적어도 저의 관점에서 밴드랩 마스터링이 굉자히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서비스를 좀 더 파고들어가 보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free artist-driven Mastering tool" 이라는 말이 무엇일까 더 궁금해지더군요. 웹페이지에 들어가시면 하단에 이 서비스를 준비하기 위해서 co-working을 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식견이 좁아서 잘 모르는 분들이지만, 그래미 상을 받는데 참여했던 아티스트와 엔지니어들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분이 Mike-Tucci라는 분이군요. 그런데 이분이 적어 놓은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As an artist centric engineer, my goal is to vibe
and feel the artist's vision, and push it another 20%. My approach is to incite
a reaction– to
make you turn up the volume, to move, to get up and dance. I'm always trying to
tap into that kind of energy." 아티스트 중심의 엔지니어로서 저의 목표는, 아티스트의 비전을 20퍼센트 더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저의 접근은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볼륨을 높이게 하고, 일어나서 춤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에너지를 향해서 언제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내용에 감동 받았습니다. :) 이분은 정말 자신감이 넘치는 분이시네요. 음악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일단 이분이 제일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에, 아마도 이분이 평소에 사용하는 마스터링 기본적인 셋팅값과 철학을 이 밴드랩 마스터링에 녹여내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더 궁금해서 직접 이분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았습니다.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분이 작업한 곡들이 빌보드 1위 곡을 포함해서 여러 곡이 있고, 국제적인 수상 경력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직접 아티스트로서 활동도 하고 있네요. :)
결론적으로 보면, 저는 밴드랩이 마케팅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mastering.studio는 분명히 대단한 AI 마스터링 서비스이지만, 사실상 그 안에서는 전적으로 AI 알고리즘을 통해서 마스터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밴드랩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드랩 무료 마스터링 서비스는, 그 서비스를 준비한 아티스트들과 엔지니어들을 전면에 앞세우고서 홍보를 하고 있네요. 언뜻 보면 두 가지가 거의 동일한 서비스이지만, 밴드랩 마스터링이 훨씬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음악 산업조차 크게 개편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과거에는 전문 스튜디오에서 모든 것을 독점했다면, 이제는 온라인이 그리고 AI가 많은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음악에 관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아마추어로서도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는 놀라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mastering.studio에서 곡당 10불도 비싸다고 느껴지신다면, 밴드랩 마스터링 서비스를 무료로 사용해보시기를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 내가 혼자서 하던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차원의 마스터링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령 이것이 AI를 통한 분석을 가지고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사람의 향기가 충분히 나는 그런 느낌을 결과물 안에서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