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사랑하는 아들 이든에게 / Run to you - Whitney Houston




사랑하는 아들아, 아빠는 오랫동안 너를 기다리며, 너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늘 상상해왔단다. 그리고 언젠가 너를 위해서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이 아빠의 인생에서 가장 떨리고 행복한 순간이 될거라고 기대했단다. 그리고 오늘 바로 지금, 그 행복한 순간이 찾아왔음에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너의 할아버지는 늘 가정을 위해서 헌신하셨단다. 그래서 아빠는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넓은 바다에서 배를 타셨기 때문에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지는 못하셨어. 그리고 아쉽게도 아빠가 태어날 때에도 함께 하시지 못하셨지.

그러나 아들아, 아빠는 네가 태어날 때에 처음부터 끝까지 너와 사랑하는 엄마 옆에서 있었단다. 그리고 아빠는 그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아빠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힘들때 곁에 있었고, 네가 세상과 처음 만나는 그 엄청난 순간에 너를 지켜보고 함께 했다는 것은 아마 앞으로도 아빠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자부심이 될꺼야.

사랑하는 이든아, 아빠는 그리고 엄마는 네가 우리 가정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너무 기쁘단다. 그리고 네가 우리 가정에 온 이 기적과 같은 일들에 대해서 꼭 기록해 놓고 싶었단다. 아빠는 기억력이 약해서 비록 너의 할아버지와의 어린 시절 기억이 적지만, 지금 아빠가 느끼는 감격, 그리고 감사함을 꼭 글로 기록해 놓고, 언젠가 네가 지금보다 훌쩍 자라서 아빠의 글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아빠가 엄마가 너를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리고 네가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인지 꼭 알려주고 싶단다.

사랑하는 이든아, 아빠는 먼저,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네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아들아, 이것이 정말 너에게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이란다. 아빠는 배가 아파서 너를 낳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너를 10개월 동안이나 품고 있었단다. 가장 힘든 순간에조차 너를 위해서 기도하고, 가장 슬픈 순간에도 너를 위해서 견디고, 엄마가 하고 싶은 그 어떤 것이라도 너를 위해서 참았단다.

아빠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엄마의 너를 향한 사랑은,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강력하고도 숭고한 것이란 점이란다. 그래서 아빠는 네가 태어나는 모든 과정 속에서, 어쩌면 엄마가 아빠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느꼈단다. 왜냐하면 엄마에게 너는, 엄마 자신이자 몸의 일부분이고 또한 생명의 연장이기 때문이야. 너의 탄생을 기다리며 너의 이름도 엄마가 직접 지었단다. 에덴 동산과 같은 풍성한 삶을 살도록, 그리고 많은 이들이 너를 통해서 그런 삶을 누리도록 엄마가 고심해서 지었단다. 물론 아빠도 너의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단다. 사랑하는 아들아, 아빠는 네가 평생동안 엄마를 아끼고 보살피고 존경하기를 바란다. 엄마는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며, 그러한 너의 태도와 삶을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큰 상을 주실꺼야.

사랑하는 아들아, 며칠동안 아빠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면, 그리고 그것이 네가 볼 수 있는 첫번째 편지라면, 어떤 내용을 쓸까 많이 고민했단다. 너를 위한 아빠의 수많은 바램을 적는다면, 언젠가 이 글을 읽을 때에 많이 부담을 느낄 것 같고, 또 너의 자유로운 생각을 아빠가 너무 일방적으로 가로막을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있단다. 하지만 아빠 마음에 꼭 한가지가 생각이 났고 또 그것이 더 분명해 져서 너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단다.

사랑하는 아들아, 아빠는 네가 '착한 사람' 이 되었으면 좋겠다. 네가 건강하길 바라고, 네가 공부를 썩 잘하기도 바라고, 네가 여러가지 재능을 가지고 또 그것을 사용하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설령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빠는 네가 착한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단다.

아마 네가 철이 들고 세상을 알아갈 때에, 세상에는 악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꺼야. 그러나 아들아, 결코 놀라거나 당황하지 마렴. 네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은 절대 이상한 것이 아니란다. 그것은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시기전에 세상이 점점 악해지는 당연한 모습이고,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한 이후에 악해져버린 성품의 당연한 결과란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아, 앞으로 네가 자랄 때에, 악하고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너의 주변에 많이 보인다 하더라도 결코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말기를 바란다. 숭고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탁월하고 빛나는 보석같은 사람은 그렇게 자주 보이지 않는단다. 

마치 하루의 긴 시간 가운데 눈부시고 가슴저린 저녁놀은 아주 잠깐 보이는 것 처럼, 우리 인생 가운데 아름다운 사람들은 정말 몇명 되지 않는단다. 그러나 아들아,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렇게 적은 사람들이 결국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리고 어두운 세상에 빛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네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아들아, 아빠는 네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가졌던 '착한 마음' 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단순히 네가 친절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마음' 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란다.

아쉽게도 세상은 구조적으로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단다. 그것은 한사람 한사람이 홀로 바꿀 수 없는 거대한 힘과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단다. 가진자들은 없는 자들의 것을 이용해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슬픈 세상이 아빠와 네가 살아가는 세상이란다.

그래서 아들아, 아빠는 진심으로 이것을 바란다. 너의 마음이, 가난하고 굶주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하기를 바란다. 너의 재능이 너의 꿈이 그 어떤 것이든지, 세상에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이 사용될 수 있기를 바란단다. 네가 넉넉한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너의 가진 것의 많은 부분을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나누는 삶을 살기를 바란단다. 

아빠는 비록 스무살이 넘어서 그런 것을 알았고, 또 서른살이 넘어서 겨우 세상에 눈을 떴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이 너는 어렸을 때 부터 그러한 착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와 방향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너의 마음을 더욱 기쁘게 여기시고 또 너의 인생을 더욱 값지게 만들어주실꺼라고 아빠는 믿는다.

아마도 너의 주변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너의 지능, 너의 성적, 네가 가진 외모 등으로 너를 판단하겠지만, 아들아 기억하렴. 그러한 것들은 너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절대 될 수 없단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너의 진정한 판단자가 되신다는 것을 기억하렴. 설령 너의 지능이 부족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너의 최선을 다한 그 과정을 평가하시고, 설령 너의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너의 성실함을 평가하시고, 설령 너의 외모가 남들보다 좀 좋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너의 마음을 평가하신단다.

오히려 하나님의 칭찬은 사람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늘 기억하렴. 그래 아들아, 이것이야 말로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비밀이란다. 네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한 친구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에, 너보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너의 가진 것을 나누어주었을 때에, 너의 가진 작은 재능들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사용했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것임을, 그리고 바로 천국의 보물을 가지는 것임을 꼭 기억할 수 있기를 아빠는 바란단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 너를 설령 사람들이 무시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너를 격려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렴. 하늘의 수 많은 천사들이 너를 바라보고 격려하고 있고, 너를 위해서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렴.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놀라운 영적인 존재들이 너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렴.

그래서 아들아, 너의 인생이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기준을 쫓아가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너의 인생은 하나님의 기준을 쫓아감으로 너의 행복이 완성되면 좋겠다.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아들아 기억하렴.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이 너의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좋은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지만,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 안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은 수 많은 믿음의 위대한 사람들이 고백했던 내용이며, 그리고 바로 너의 엄마 아빠가 고백하는 내용이란다. 아빠와 엄마와 너의 마음 가운데 언제나 확고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고, 설령 우리에게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바로 그 한가지를 위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아들아, 너를 위해서 준비한 노래는 아빠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란다. 지금은 세상에서 만날 수 없지만, 휘트니휴스턴은 아빠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사람이란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아마도 지금은 천국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노래하고 있을꺼야.

사랑하는 이든아, 아빠는 세상에 모든 사랑 노래들은,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심어주신 사랑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위한 노래이지만, 사실은 노래하는 사람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란다. 그래서 세상에 모든 사랑 노래들은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답지. 아빠는 네가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아름다운 음악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결국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기를 바란단다. 그리고 언젠가 너 역시 아빠가 엄마를 만난 것 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서, 그렇게 순수한 사랑을, 주님 안에서 할 수 있기를 바란단다.

아들아, 아빠는 네가 더욱 성숙할 날을 기다린다. 엄마와 웃으면서 이야기했단다. 이제 너의 인생은 12일일 뿐이라고. 아직은 네가 목도 가누지 못하고, 아빠가 엄마가 기저귀도 갈아줘야 되고, 스스로 밥도 먹지 못하는 어린 아기지만, 아빠는 네가 당당한 한명의 남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너를 나타내는 순간을 믿음으로 바라본단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아빠가 경험했던 수 많은 것들을, 너에게 나눠주고 싶은 믿음의 이야기들을,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음악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비록 그때가 되면 아빠도 나이가 더 많이 들겠지만, 그리고 몸도 많이 약해지겠지만 그러나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만한, 네 앞에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기를 다짐한다. 네가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아빠 역시 하나님 안에서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되기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 사랑하는 아들 이든이 태어난 2012년에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날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빠가 -

2012년 12월 8일 토요일

가장 작은 것 / God Will Make a Way



아마 한달 전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내와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장을 다 읽을 때도 있지만, 너무 길면 절반 정도를 읽기도 합니다. 기도는 아주 짧은 기도입니다. 지나간 오늘의 하루를 감사하고, 아내의 건강과 열매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의 가정 가운데 평안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그때 마다 중요한 기도 제목을 추가하기도 합니다.

며칠 전, 동일하게 성경을 읽고 기도하려고 하는데, 마음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보면 이게 참 유치한 행동일 수도 있겠다" 성도가 아닌 사람이, 혹은 성도라 하더라도, 사실 굉장히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굉장히 작은 것입니다. 그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잊지 않고 성경을 읽고, 아내와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전부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를 같이 읽었습니다. 7장에 멜기세덱이 등장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사랑이 넘치는 분 정도로 이해하는 현대적인 분위기에서, 오늘 말씀은 저에게도 그리고 아내에게도 더욱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읽는 성경을 들으며,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그 짧은 몇구절이, 충분히 중요하고 놀랍다는 것을 저도 아내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아내가 진지하게 말합니다. "오빠, 이 부분 내일 한번 더 읽어줘"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동안, 제가 그리고 우리 가정이 극적으로 변했다 라는 말은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혹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정죄하려고 글을 쓴 것도 아닙니다. 다만, 가장 작은 것에서 신앙은 시작하고, 그리고 그것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참 신비롭게도, 아내도 저도, 이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실 유치해보이기도 하고, 십분 남짓한 시간을 그렇게 가진다고 뭐가 그렇게 변하겠냐 라고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결국 신앙은 육적인 관점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현대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늘 우리의 삶 속에서 크고 대단한 것,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것, 남들 보기에 모양이 좋아보이는 것에 길들여 져 있는 듯 합니다. 끊임 없이 만들어지는 특별한 기도회나, 특별한 예배나, 특별한 종교적인 헌신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우리는, 가장 작은 것 속에서 신앙의 유익을 발견하고, 천국에서 임하는 평안과 기쁨을 맛보는 것 같습니다. 과연 정말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요즘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목회자로서 무거운 혹은 무서운 권면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한명의 성도로서, 지금 글을 읽으시는 믿음의 성도님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오늘부터 짧게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해보지 않겠냐고, 하루를 마감하며 사랑하는 가족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손을 잡고 기도해보지 않겠냐고, 우리의 힘든 인생을 주님께 아뢰며, 그분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해 보지 않겠냐고...

그래서 오늘도
행복,:)

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역지사지(易地思之) / If I Were Enveloped in Tenderness - Piano de Ghibli



한참 저도 아내도 교회일로 바쁠 때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누가 주일에 더 힘든가? 저는 주일에 부서를 챙기고 설교를 하는 내가 제일 힘들다고 강력하게주장했습니다. 워낙 무대뽀로 제 주장만 했기에 아내가 그때는 저에게 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한참 지나서 제가 너무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 아내가 저보다 훨씬 힘들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거의 5년의 시간을 매 주일마다, 각기 다른 부서와 자리에서, 다섯시간 이상을 피아노를 쳤기 때문입니다. 초인적인 열심과 인내와 실력을 지닌 아내를, 저는 정말 존경합니다. 

요즘 저의 역할은 '주방 보조' 입니다. 아내가 몸이 많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쉐프의 지령을 받아, 콩나물국을 끓였습니다. 평소에 아내의 손길을 통해서 그렇게 쉽게 먹던 국이, 상당한 예술적인 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콩나물국의 맛이, 콩나물이 아니라 멸치의 '뜨거운 헌신' 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그렇게 어려워보이지 않는, 식사를 거르지 않고 먹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요즘에 깨닫고 있습니다. 아마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아내의 몫으로 남겨두고서는, 또 제가 가장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감사한 것은, 아내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를, 요즘 조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인간은 연약하기에, 저를 포함하여 누구나 자기 자신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위해서 정말 모두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마음을 넓혀 보고 싶습니다. 아직도 자기만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측은한 마음을, 자신의 세계 속에서 빠져버려 유아독존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긍휼의 마음을 조금더 가지고 싶습니다.

이 작은 글을 읽으시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지 않는다면, 역지사지의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어두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이 조금 더 넓어지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폭이 조금만 더 넓어진다면, 아마 오늘보다는 훨씬 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2012년 11월 14일 수요일

네잎 클로버 - 아내의 선물



오늘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저를 위해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그려놓았습니다. 정말 이렇게 놀라운 선물은 처음입니다!!!! 
찐희야 사랑해.. ^0^

또 한번의 결승점을 지나며 / I Lift My Hands - Chris Tomlin


너무 어리버리한 저였기에, 군생활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느린 행동과 부족한 암기력, 배울 것도 그리고 해야할 것도 너무 많았습니다.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더 이상 들을 말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대 부엌일을 하면서 열심히 바닥을 걸래로 닦는 저를 보고, 지나가던 고참이 한마디 했습니다. '진부는 머리는 참 나쁜데 그래도 부지런한 구석인 있네.' 저의 지나간 군생활을 돌이켜 볼 때, 그때 그 한마디가 가장 소중합니다. 

오늘 공식적인 학기의 클래스 수업을 마무리하며, Paper Presentation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학기동안 열심히 공부한 내용을, 최선을 다해서 발표 준비를 하고, 15분 동안 교수님과 동료들 앞에서 소신있게 발표하였습니다. 발표하면서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이 paper는 더 이상 논리가 아니라 이제 저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논리적인 허점도 많이 있었고, 언어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큰 무리없이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적어도 교수님의 마음 가운데 저의 생각을 공감시킬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If we can not understand contents, it is vain in reality." "Sure!"

서른 번쯤, 그만 포기할까 생각했습니다. 칼빈에 입학한 것만으로 충분힌 것 아닌가 생각도 했습니다. 학구적인 논리적인 글을 쓴다는 것은, 저의 상상이상의 것이었고, 주제를 잡는 것 조차 너무 버거웠습니다. 좀더 쉬워보이는 내용을 좀더 편하게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습니다. 사실 졸업에 필요한 평균 학점 이상을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도 너무 컸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에게 발표 잘 하고 왔다고 말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습니다. 마음에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하철에서 바보처럼 단어를 외우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어떻게든 물러서지 않고 영어에 도전했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에 격려해 주었던 아내가 생각났습니다. 저자들의 마음과 논리를 헤아리기 위해서 고민했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냥, 많은 생각이 났습니다.

아직 4주 간의 페이퍼 마무리 하는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첫 학기의 성적은 전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오늘까지의 시간 속에서, 저 자신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의미있고 부끄럽지 않은 시간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믿음이 비록 반드시 성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적인 끈기와 열심을 가져다 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선이 비록 반드시 성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지만, 자신을 향한 자랑스러움과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내면의 견고함을 가져다 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너무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또 다시 한걸음 더, 내딛고자하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2012년 11월 5일 월요일

일상으로의 초대 / 일상으로의 초대 - 신해철





사실 유학에 대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탁월하게 공부를 잘해본 적이 없는 저이기에, 누군가 주변에서 유학을 권유해 준 적도 없습니다. 집안 친척 중에서 유학을 나온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막연하게 그것이 매우 특별한 일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미국이란, 정말 멀고도 험한 마치 동화 속에서 존재하는 유토피아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기적과 같은 은혜로, 이곳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요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믿음의 성도님들과 나눌 평범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아마 2년이라는 시간이 금세 지나갈 듯 합니다. 아직도 영어를 쓴다는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분명히 영어가 많이 늘었지만, 그러나 가장 미묘한 뉘앙스를 파악한다는 것은 여전히 요원한 일입니다. 책을 읽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지만, 영어로 책을 본다는 것은 고역이라는 것도 절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좀더 깊은 공부를 위해서는, 영어만으로는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독일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깨달아졌습니다. 아내가 인정할 만큼 열심히는 하지만, 그러나 제가 제 수준을 알기 때문에 현재 쓰고 있는 페이퍼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에게 가장 어렵게 다가오는 것은, 이곳에서 '삶의 의미' 입니다. 그 누구도 저에게, '유학의 본질' 에 대해서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일년이 넘어가고 이곳에서 살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유학이라는 것도 '일상' 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곳에 있든지, 제가 무엇을 하든지, 저라는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남편으로, 학생으로, 아빠로, 아들로 할 몫은 언제든지 저와 함께 합니다. 유학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고 소중한 과정이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을 헤쳐나가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제 자신' 입니다.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갑니다. 요리하는 아내 옆에서 어설프게 설거지를 합니다. 함께 병원에 갑니다. 함께 TV 프로그램을 봅니다. 같이 저녁을 준비하고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일주일에 한번 청소기를 돌리고, 학교에 가서 책을 찾고 빌립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책과 씨름합니다. 가습기를 청소하고 집안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신경을 씁니다. 가끔씩 밥을 하고,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건조대에 넙니다. 아내가 자기 전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를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일상'이 남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일상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을 강조하는 듯 합니다. 그것을 어렵게는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일상이 아닌 특별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듯 합니다. 일년 중에 휴가가 그렇고, 주말에 여행이 그렇고, 인생 가운데 유학이 그렇고,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그렇습니다.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모습을 가지는 것은 물론 어렵지만, 실상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주일의 예배 시간에, 신앙인의 모습으로 손을 들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형태'를 가지는 것은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이지만, 어쩌면 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휴가 중에 휴양지에서 유쾌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말들을 나누는 것은 소중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습니다. 유학생으로서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것은 아주 고된 일이지만, 오히려 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일상을 벗어나는 특별한 것들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회복시키는 휴식과 충전 혹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이 우리에게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라면, 그리고 '그것 자체' 만 추구하고 살아간다면, 어쩌면 우리는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마치 우리의 일상에서의 도피가 되어버려, 평범한 우리의 삶이 가지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채, 끊없는 강렬한 자극만 쫓아다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일상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있어 인생의 대부분은, 결국 일상임을 절실히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주님께서 저에게, 일상 속에서의 무엇인가를 요구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당신의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게 하라' 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조금 쉬운 말로 바꾸면 '당신의 삶의 일상을 주님과 함께 하라' 라는 말인 듯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고민입니다. 무엇이 일상 속으로 주님을 초대하는 것일까요? 물론, 당위적인 이야기는 많이 들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지금 제 자신이, 일상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라 라는 당위적인 요구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문턱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저도 답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아주 작은 단서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일상이 다른 어떤 것'만큼'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일상 속에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하고 싶습니다. 주의 복음의 역사가, 그리고 복음의 의미가, 단순히 예배 시간에만, 주일에만, 그리고 어떤 특별한 장소 시간에만 한정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소에서 모든 순간에, 저의 일상 속에서, 저의 태도와 말과 행동과 반응과 생각과 영혼 속에 존재하고 동시에 흘러나오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저의 일상이, 단순히 형태나 표면으로 한정되는 '신앙인' 혹은 '목사' 정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 평범한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는 '인간' 정진부로서, 이곳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제서야 조금은, 주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마음에 와 닿는 듯 합니다.

"내게로 와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함께라면 모든게 달라질꺼야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 신해철, 일상으로의 초대 중

그래서 오늘도
행복, :)

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Possible Vs Impossible / 이미 넌 고마운 사람 - 김연우



사랑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너의 소중한 편지를 받은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는구나. 유독 이곳 먼곳에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다만 네가 그곳에서 그런 것 처럼, 이곳에서도 아름다운 가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어. 

돌이켜 보면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다시 너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니 또 많은 하고 싶은 말들이 생각이나. 내 마음 안에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작게나마 너에게 도움이 되고 또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오늘도 글을 적어 본다. 너의 진지한 편지 앞에서, 나 역시 또한 굉장히 신중하게 되고, 한글자 한글자가 더욱 정성이 들어가게 되. 너의 질문들을 통해서 어쩌면 내 마음 속에만 묻어두고 고민했던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오늘 답장은 조금 더 길어질 지도 모르겠어. 며칠 전,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동네 골목을 걸으면서 너에 대해서 생각했어. 하늘의 구름은 마치 흩날리는 하얀 눈 같았고, 길가의 나무들의 단풍 잎은 자신들을 뽐내며 손을 흔들고 있었어. 이미 그것들은 정말 진지하게 나에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평생 주를 부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는지도 몰라. 

네가 나에게 책을 요약하는 법을 다시 한번 물은 것은 좋다고 생각해.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핵심 단어와 저자의 성찰, 그리고 자신의 언어로 바꾸는' 너의 방법이 너무 좋다고 생각하고, 나도 그런 방식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꺼야. 오히려 나는 너보다 더 요약을 잘 못한다고 생각이 들기도 해. 나는 다만 그냥 내용을 압축하겠다는 일념 하나만 마음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돌이켜 보면, 사실 나에게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그 책을 읽고 요약할 때에 느꼈던 나의 감정, 기쁨, 환희, 그리고 이 요약이 반드시 나와 누군가에게 유익을 줄거라고 생각했던 그때 그 마음인 것 같아. 그런 마음이 들 때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몇시간이고 꼼짝않고 책과 씨름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으니까. '산이 올라서 거기 올라간다' 라고 말했던 누군가의 말 처럼, 소중하고 의미있는 책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 그 자체가 너무 좋았고, 언제나 책이, 그리고 저자가 나를 손짓하며 부른다고 느꼈어. 가장 최근(그래도 벌써 3년은 넘은 것 같지만)에 정리한 것이, '완전한 진리' 에서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의 흐름을 보여준 부분이었는데, 한번 정리하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던 것을 기억해. 

너에게 썼던 답장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너와 내가 사용했던 '도전' 이라는 단어가 조금 다른 맥락으로 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리더쉽에 대해서 늘 고민하는 너에게 '도전'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나태한 생활에, 나의 무지함에, 도전이된다 라는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사실 나에게 '도전' 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신적인 지혜 혹은 복음이 나에게 다가온다' 는 의미에서 도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아마도 호튼의 '복음이 이끄는 기독교'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 같아.(책을 한국에 놓고 와서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이해해주렴) 거기에서 호튼은 복음을,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우리에게 설명해. '복음 이라는 것' 은, 언제나 우리에게 '낯선 것' 이라고 말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복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것은 우리에게 정말 '낯선 것' 이라는 것이지. 내가 말한 도전이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도전이야. 난 언제나 도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이러한 복음을 전제하고 있어. 

너에게 쓰는 답장은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아주 정밀한 글은 아니야. 하지만 너에게 내가 얻은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꼭 알려주고 싶어. 그리고 너에게 그것이 도움이 되기를 바래. 그것은, 연약하고 부족한 내가 이해하기로는, 설교는, 책은, 생각은, 철학은, 대화는, 단 두가지의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는 거야. 그것은 'possible' 그리고 'impossible'이야. 

모든 사람은 이 두가지의 큰 틀을 기반으로 해서 움직이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어. 예를 들어 우리가 드러커와 같은 경영에 관련된 책을 읽을 때에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조직 이론에 근거하고, 행동과 감정을 조절하고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 간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의 'possibility'를 전제로 하고 읽는다고 말할 수 있을꺼야. 사실 그런 맥락은 어떤 의미에서 소위 기독교의 진리에 근간했다고 말하는 리더쉽과 관련된 책도 마찬가지일꺼야. 그것도 우리가 노력하고 도전한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의 'possibility'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너도 알꺼야.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물어보고 싶어.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부합하는 것인가?' 네가 아는 것처럼 비록 너보다는 부족하지만 경영에 관련된 책들도 어느 정도 보았고,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도 즐거워해.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에서 '주도적이 되라' 라는 내용을 보고, 처음으로 만들어진 모임 속에서 그 룰을 따라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에, 그 모임이 순식간에 살아나는 것을 보고 참 감동을 받은 기억이 있어. 그리고 네가 아는 것처럼, 적어도 내가 맡은 일에 있어서는 조직 이론을 이용하고, 그래도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을 해. 

그러나 다시 한번 나와 그리고 너에게 물어보고 싶어. '우리는 정말 완전한 사람일까? 우리는 정말 진정한 possibility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노력하고, 도전하고, 힘을 쓰고, 갈고 닦고, 결심을 하고 연습을 하면, 정말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그것이 신앙이든 기도이든 지혜이든 영성이든 그 어떤 것이든 이루어지는 것일까? 

너의 경우는 잘 모르겠어. 그러나 나는 너무 많이 실패했어. 수 많은 규율들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글쎄, 그것 중에 절반 정도를 성공했을까? 하나님의 뜻을 살려고 했지만, 글쎄, 그 결심의 절반을 살았을까? 그것이 나의 현실이야.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현실일꺼야.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impossible'이야. 

사랑하는 친구야, 내가 저번 편지에 '그릇'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 기억할꺼야. 나는 나에게도, 그리고 너에게도, 그 그릇을 만드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그릇의 이름은 'possible' 혹은 'impossible'이야. 

만약에 우리가 'possible' 이라는 그릇을 만들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우리를 흥분되게 할꺼야.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내가 훈련하고 규율을 지키고 성실히만 한다면,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possible'의 그릇은 우리를 기쁘게할꺼야.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어. 그 끝에는 절망만이 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완전한 승리와 성공을 얻을 수 없는 'impossible'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설교이든, 책이든, 리더쉽이든, 우리를 힘들게해. 

그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큰 고통이 되고 말꺼야. 왜냐하면 우리는, 결승점이 없는 마라톤을 달리는 사람들과 같으니까. 'possible'이라는 그릇 속에서 우리는, 그 누구도 온전한 자존감 혹은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할꺼야. 우리의 인생이 잘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자존감이 낮은 이유는,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부족한 이유는, 우리가 노력이 부족해서이든, 우리가 기도를 적게 해서이든, 우리가 성경을 적게 읽어서이든, 혹은 우리가 무엇인가 하지 않아서 이기 때문이니까.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고, 그 결과는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비참한 감정, 좌절, 슬픔, 절망, 비교 의식 이런 것들이야. 

그런데 난 생각해. 언제나 이 'possible'의 그릇은 세상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그릇이야. 노력한대로 이루고, 노력하지 않은 자는 얻을 것이 없고, 성공한 사람들은 칭찬받고, 실패한 사람은 좌절하고, 넉넉한 자는 인정받고, 가난한자는 무능한자로 취급받는 그 'possible' 의 그릇은 언제나 익숙해. 그러나, 'impossible'의 그릇이야 말로, 나에게 가장 '도전적인' 그릇이야.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나에게, 많은 독서 끝에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리고 책들을 요약하고 설명하고 이야기하는 그 끝이 한마디로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impossible'의 그릇, 곧 '복음' 의 발견이라고 말하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이야기하지. 복음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대부분의 경우 언제나 복음을 'possible'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으로 만들어갈 뿐이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행하는 것들이 넉넉히 승리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 세상 속에서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삶이 정렬되고 지혜를 얻게 되는 그런 어떤 것이지.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는 것 역시, 그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야.

물론, 그런 면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야. 우리의 삶 속에는 엄연히 'possibility' 가 존재해.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예전보다 훨씬더 시간을 잘 활용하고, 예전보다 훨씬 집중해서 공부하고, 예전보다 훨씬 따뜻한 마음이 생겼어. 그러나 돌이켜 보면, 참 우스운 일이야. 정말 내가 변했을까? 아니,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여전히 시간을 활용하지 못하고, 여전히 놀기를 좋아하고, 여전히 잔인하고 악하니까. 어쩌면 나는 예전보다 결코 낳아진 것이 전혀 없는지도 몰라. 

나 역시 언제나 자존감이 낮아지고, 스스로에게 절망하고, 희망이 없어보이고, 어쩌면 네가 너 스스로에게 느끼는 그 이상으로 낙심하고 슬픔에 젖어. 나 자신에 대한 그 어떤 희망도 볼 수 없을만큼 절망하고 괴로워해. 하지만 그럴 때 마다 난, 'impossible' 그리고 '복음' 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돌이켜봐. 그것은 언제나 나 자신 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 어떤 절대적인 신적인 내용이야. 

우리는 'impossible'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행하셨어. 우리는 제대로 이룬 것이 없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셔. 나는 내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존감을 제대로 가져본적 없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모든 일하심이 나의 것이 되었어. 우리의 'impossible'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분은, 그리스도 한분이야. 

'possible'의 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야. 그러나 'impossible'의 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그리스도, 삼위 하나님'이야. 'possible'안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은,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계발할 것인가, 어떻게 인생을 지혜롭게 살 것인가, 어떻게 승리를 만들어 낼 것인가 바로 그것이지만, 'impossible'안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과 관심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그분의 복음에 더욱 다가가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 복음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이해하는데 있다고 생각해. 

아마도 맥그라스 책 에서 보았던 내용인 것 같아. '종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 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칭의, 복음 이런 것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논리 정도로 이해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우리의 자존감, 인생에 대한 의미, 좌절과 절망 뿐인 현실 속에서의 안정감,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유일한 희망 등으로 마치 거미줄 처럼 연결되어 있어. 

만약에 우리가 'impossible'의 그릇을 만들지 못한다면, 다른말로 하면, 참된 복음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쉽게 절망하고 말꺼야. 내가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에, 'possible'의 입장에 있는 누군가가, 우리가 기도를 몇시간 했느냐고 묻고, 성경을 몇장 읽었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의 온 마음은 정죄감에 가득찰꺼야. 모든 인생에 대한 절망과 슬픔에 대한 원인을 나 자신에게 향할 것이고, 결국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고사(枯死)' 시키고 말꺼야. 

네가 인용한 얀시의 글은, 'possible'의 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이야기한 내용이라고 생각해. 그 그릇은 네가 인용한대로, 미움과 죄책감, 갈등으로 뒤범벅인 곳이고, 모든 것이 다 엉망인 곳이지. 결국 그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포용하고, 설명하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그 어떤 또 다른 관점, 세상이 제공하지 않는 또 다른 특별한 틀을 발견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 

참 이상하지, 'possible'의 그릇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마음이 뜨거워지지가 않아. 그저 죄책감에 눌릴 뿐이야. 인생을 이렇게 해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들, 성경을 몇독했고, 기도를 몇시간 했고, 그랬더니 병이 치유되었고, 이런 이야기들은 오히려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할 뿐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참 자신은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 하지만 역시 그들도 연약한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결국 'impossible'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그 말을 하는 자기 자신도, 그리고 듣는 나 자신도 쉽게 잊어버리지. 

그런데 이상해. 'impossible'의 그릇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겁고 눈물이 흘러. 하나님 이야기만 하는데, 예수님이 다 해주셨다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신다고 말하는데, 인생이 마음대로 안되도, 주님 뜻 안에 있는 것이니 힘내라고 하는데, 주님을 더 알아야 하는데 라고 말하는데, 설교와 책과 모든 논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한 없이 높아지시는데,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힘이되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결심을 하게 되고, 그것이 유일한 소망임을 알게 되.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 그리고 리디머 처치에 가서 설교를 들을 때 그랬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 그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다고 느꼈어. 호튼이 이것을 고민한 사람이고, 루이스가 이것을 고민한 사람이야. 나는 설교자이든, 작가이든,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해. 'impossible'의 인생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서 고민한 그 사람이야 말로, 바로 진정한 '복음'을 발견한 사람이고 희망을 찾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박영선 목사님 설교를 가끔 들으면 느껴. 그분이 얼마나 지독스럽게 그리스도를 인생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의절대적인 관계성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를 하는지, 왜그럴까? 왜냐하면 우리의 'impossible' 인생 속에서 그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좋은 그릇을 만들어가기를 바래. 네가 추구했던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내가 다 알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의 작은 글이 너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래. 어쩌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너무나 당황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의 글이 너의 생각에 작은 단서라도 되면 좋겠어. 

외국인 아저씨들과 하는 QT모임에서,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를 물어봤을 때, 그분중 한분이 이렇게 대답했어 '그것이 의미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meaning for)'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 '아니요,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성도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작은 것이라도 해야한다는, 그리고 끊임 없이 그것으로 압박하고 정죄받는, 내가 이루어내는 performance 혹은 conclusion으로 판단받는 'possible'의 그릇 안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한, 타락한 세상의 사랑일 뿐이야.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한(얼마나 많은 이들이 완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불완전을 설명하고 주장하는지) 사랑을 전제로 한 'impossible'의 그릇 안에서만, 우리의 모든 삶이, 좌절이, 슬픔이, 고통이, 열심이, 눈물이, 승리가, 실패가,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될꺼야. 그분의 완전하고 흠 없는, 조건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기반으로 한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부으시는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발견해나가고 다가갈 때에,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치더라도 헛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용납하고 기꺼히 그 길을 갈꺼야. 그리고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열정과 힘이 우리 안에서 솟아 나올꺼야. 

역설적이게도, 이 결론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지나야 했어. 오히려 더 많은 성경을 읽어야 했고, 기도해야 했고, 책을 읽어야 했어. 외로웠고 힘들었어. 그러나 주님께서 그 시간들을 은혜로, 홀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하고 감사해.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거쳤던 길들을 거쳤다고 생각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작은 실질적인 조언은, 'possible'과 'impossible'의 틀로 나눠서, 생각하는 연습을 해 보길 바래. 다른 이들과 대화하면서, 책을 보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그들을 분류하고 분석하고 적용해보길 바래. 어떤 이들의 말이 정말 진리인가? 과연 어떤 이들의 말이 우리의 인생을 제대로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 그 어떤 훌륭한 이들에 관한 것이라도, 모든 것들을 부지런히, 겸손히 그리고 진지하게 판단해 보길 바래. 그럼 너에게 좋은 생각의 훈련이 될꺼야.

네가 얀시를 인용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염치가 없는 사람' 이야.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이 이야기를 더 좋아해. 왜냐하면 네가 적은 이야기는 우리 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이야기지만, 이제 네가 적을 이야기는 우리 속에 없는 이야기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야. 그렇게 기억력이 약한 나이지만, 얀시를 통해 평생에 마음에 새긴 한마디야.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언제나 너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너의 마음이 늘 주님 안에서 강건하기를,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주님 뜻안에서 해결되기를,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기를,


너를 주안에서 사랑하는 진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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