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Possible Vs Impossible / 이미 넌 고마운 사람 - 김연우



사랑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너의 소중한 편지를 받은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는구나. 유독 이곳 먼곳에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다만 네가 그곳에서 그런 것 처럼, 이곳에서도 아름다운 가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어. 

돌이켜 보면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다시 너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니 또 많은 하고 싶은 말들이 생각이나. 내 마음 안에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작게나마 너에게 도움이 되고 또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오늘도 글을 적어 본다. 너의 진지한 편지 앞에서, 나 역시 또한 굉장히 신중하게 되고, 한글자 한글자가 더욱 정성이 들어가게 되. 너의 질문들을 통해서 어쩌면 내 마음 속에만 묻어두고 고민했던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오늘 답장은 조금 더 길어질 지도 모르겠어. 며칠 전,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동네 골목을 걸으면서 너에 대해서 생각했어. 하늘의 구름은 마치 흩날리는 하얀 눈 같았고, 길가의 나무들의 단풍 잎은 자신들을 뽐내며 손을 흔들고 있었어. 이미 그것들은 정말 진지하게 나에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평생 주를 부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는지도 몰라. 

네가 나에게 책을 요약하는 법을 다시 한번 물은 것은 좋다고 생각해.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핵심 단어와 저자의 성찰, 그리고 자신의 언어로 바꾸는' 너의 방법이 너무 좋다고 생각하고, 나도 그런 방식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꺼야. 오히려 나는 너보다 더 요약을 잘 못한다고 생각이 들기도 해. 나는 다만 그냥 내용을 압축하겠다는 일념 하나만 마음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돌이켜 보면, 사실 나에게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그 책을 읽고 요약할 때에 느꼈던 나의 감정, 기쁨, 환희, 그리고 이 요약이 반드시 나와 누군가에게 유익을 줄거라고 생각했던 그때 그 마음인 것 같아. 그런 마음이 들 때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몇시간이고 꼼짝않고 책과 씨름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으니까. '산이 올라서 거기 올라간다' 라고 말했던 누군가의 말 처럼, 소중하고 의미있는 책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 그 자체가 너무 좋았고, 언제나 책이, 그리고 저자가 나를 손짓하며 부른다고 느꼈어. 가장 최근(그래도 벌써 3년은 넘은 것 같지만)에 정리한 것이, '완전한 진리' 에서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의 흐름을 보여준 부분이었는데, 한번 정리하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던 것을 기억해. 

너에게 썼던 답장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너와 내가 사용했던 '도전' 이라는 단어가 조금 다른 맥락으로 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리더쉽에 대해서 늘 고민하는 너에게 '도전'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나태한 생활에, 나의 무지함에, 도전이된다 라는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사실 나에게 '도전' 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신적인 지혜 혹은 복음이 나에게 다가온다' 는 의미에서 도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아마도 호튼의 '복음이 이끄는 기독교'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 같아.(책을 한국에 놓고 와서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이해해주렴) 거기에서 호튼은 복음을,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우리에게 설명해. '복음 이라는 것' 은, 언제나 우리에게 '낯선 것' 이라고 말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복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것은 우리에게 정말 '낯선 것' 이라는 것이지. 내가 말한 도전이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도전이야. 난 언제나 도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이러한 복음을 전제하고 있어. 

너에게 쓰는 답장은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아주 정밀한 글은 아니야. 하지만 너에게 내가 얻은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꼭 알려주고 싶어. 그리고 너에게 그것이 도움이 되기를 바래. 그것은, 연약하고 부족한 내가 이해하기로는, 설교는, 책은, 생각은, 철학은, 대화는, 단 두가지의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는 거야. 그것은 'possible' 그리고 'impossible'이야. 

모든 사람은 이 두가지의 큰 틀을 기반으로 해서 움직이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어. 예를 들어 우리가 드러커와 같은 경영에 관련된 책을 읽을 때에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조직 이론에 근거하고, 행동과 감정을 조절하고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 간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의 'possibility'를 전제로 하고 읽는다고 말할 수 있을꺼야. 사실 그런 맥락은 어떤 의미에서 소위 기독교의 진리에 근간했다고 말하는 리더쉽과 관련된 책도 마찬가지일꺼야. 그것도 우리가 노력하고 도전한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의 'possibility'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너도 알꺼야.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물어보고 싶어.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부합하는 것인가?' 네가 아는 것처럼 비록 너보다는 부족하지만 경영에 관련된 책들도 어느 정도 보았고,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도 즐거워해.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에서 '주도적이 되라' 라는 내용을 보고, 처음으로 만들어진 모임 속에서 그 룰을 따라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에, 그 모임이 순식간에 살아나는 것을 보고 참 감동을 받은 기억이 있어. 그리고 네가 아는 것처럼, 적어도 내가 맡은 일에 있어서는 조직 이론을 이용하고, 그래도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을 해. 

그러나 다시 한번 나와 그리고 너에게 물어보고 싶어. '우리는 정말 완전한 사람일까? 우리는 정말 진정한 possibility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노력하고, 도전하고, 힘을 쓰고, 갈고 닦고, 결심을 하고 연습을 하면, 정말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그것이 신앙이든 기도이든 지혜이든 영성이든 그 어떤 것이든 이루어지는 것일까? 

너의 경우는 잘 모르겠어. 그러나 나는 너무 많이 실패했어. 수 많은 규율들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글쎄, 그것 중에 절반 정도를 성공했을까? 하나님의 뜻을 살려고 했지만, 글쎄, 그 결심의 절반을 살았을까? 그것이 나의 현실이야.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현실일꺼야.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impossible'이야. 

사랑하는 친구야, 내가 저번 편지에 '그릇'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 기억할꺼야. 나는 나에게도, 그리고 너에게도, 그 그릇을 만드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그릇의 이름은 'possible' 혹은 'impossible'이야. 

만약에 우리가 'possible' 이라는 그릇을 만들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우리를 흥분되게 할꺼야.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내가 훈련하고 규율을 지키고 성실히만 한다면,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possible'의 그릇은 우리를 기쁘게할꺼야.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어. 그 끝에는 절망만이 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완전한 승리와 성공을 얻을 수 없는 'impossible'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설교이든, 책이든, 리더쉽이든, 우리를 힘들게해. 

그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큰 고통이 되고 말꺼야. 왜냐하면 우리는, 결승점이 없는 마라톤을 달리는 사람들과 같으니까. 'possible'이라는 그릇 속에서 우리는, 그 누구도 온전한 자존감 혹은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할꺼야. 우리의 인생이 잘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자존감이 낮은 이유는,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부족한 이유는, 우리가 노력이 부족해서이든, 우리가 기도를 적게 해서이든, 우리가 성경을 적게 읽어서이든, 혹은 우리가 무엇인가 하지 않아서 이기 때문이니까.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고, 그 결과는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비참한 감정, 좌절, 슬픔, 절망, 비교 의식 이런 것들이야. 

그런데 난 생각해. 언제나 이 'possible'의 그릇은 세상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그릇이야. 노력한대로 이루고, 노력하지 않은 자는 얻을 것이 없고, 성공한 사람들은 칭찬받고, 실패한 사람은 좌절하고, 넉넉한 자는 인정받고, 가난한자는 무능한자로 취급받는 그 'possible' 의 그릇은 언제나 익숙해. 그러나, 'impossible'의 그릇이야 말로, 나에게 가장 '도전적인' 그릇이야.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나에게, 많은 독서 끝에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리고 책들을 요약하고 설명하고 이야기하는 그 끝이 한마디로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impossible'의 그릇, 곧 '복음' 의 발견이라고 말하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이야기하지. 복음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대부분의 경우 언제나 복음을 'possible'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으로 만들어갈 뿐이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행하는 것들이 넉넉히 승리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 세상 속에서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삶이 정렬되고 지혜를 얻게 되는 그런 어떤 것이지.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는 것 역시, 그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야.

물론, 그런 면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야. 우리의 삶 속에는 엄연히 'possibility' 가 존재해.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예전보다 훨씬더 시간을 잘 활용하고, 예전보다 훨씬 집중해서 공부하고, 예전보다 훨씬 따뜻한 마음이 생겼어. 그러나 돌이켜 보면, 참 우스운 일이야. 정말 내가 변했을까? 아니,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여전히 시간을 활용하지 못하고, 여전히 놀기를 좋아하고, 여전히 잔인하고 악하니까. 어쩌면 나는 예전보다 결코 낳아진 것이 전혀 없는지도 몰라. 

나 역시 언제나 자존감이 낮아지고, 스스로에게 절망하고, 희망이 없어보이고, 어쩌면 네가 너 스스로에게 느끼는 그 이상으로 낙심하고 슬픔에 젖어. 나 자신에 대한 그 어떤 희망도 볼 수 없을만큼 절망하고 괴로워해. 하지만 그럴 때 마다 난, 'impossible' 그리고 '복음' 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돌이켜봐. 그것은 언제나 나 자신 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 어떤 절대적인 신적인 내용이야. 

우리는 'impossible'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행하셨어. 우리는 제대로 이룬 것이 없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셔. 나는 내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존감을 제대로 가져본적 없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모든 일하심이 나의 것이 되었어. 우리의 'impossible'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분은, 그리스도 한분이야. 

'possible'의 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야. 그러나 'impossible'의 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그리스도, 삼위 하나님'이야. 'possible'안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은,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계발할 것인가, 어떻게 인생을 지혜롭게 살 것인가, 어떻게 승리를 만들어 낼 것인가 바로 그것이지만, 'impossible'안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과 관심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그분의 복음에 더욱 다가가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 복음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이해하는데 있다고 생각해. 

아마도 맥그라스 책 에서 보았던 내용인 것 같아. '종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 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칭의, 복음 이런 것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논리 정도로 이해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우리의 자존감, 인생에 대한 의미, 좌절과 절망 뿐인 현실 속에서의 안정감,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유일한 희망 등으로 마치 거미줄 처럼 연결되어 있어. 

만약에 우리가 'impossible'의 그릇을 만들지 못한다면, 다른말로 하면, 참된 복음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쉽게 절망하고 말꺼야. 내가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에, 'possible'의 입장에 있는 누군가가, 우리가 기도를 몇시간 했느냐고 묻고, 성경을 몇장 읽었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의 온 마음은 정죄감에 가득찰꺼야. 모든 인생에 대한 절망과 슬픔에 대한 원인을 나 자신에게 향할 것이고, 결국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고사(枯死)' 시키고 말꺼야. 

네가 인용한 얀시의 글은, 'possible'의 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이야기한 내용이라고 생각해. 그 그릇은 네가 인용한대로, 미움과 죄책감, 갈등으로 뒤범벅인 곳이고, 모든 것이 다 엉망인 곳이지. 결국 그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포용하고, 설명하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그 어떤 또 다른 관점, 세상이 제공하지 않는 또 다른 특별한 틀을 발견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 

참 이상하지, 'possible'의 그릇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마음이 뜨거워지지가 않아. 그저 죄책감에 눌릴 뿐이야. 인생을 이렇게 해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들, 성경을 몇독했고, 기도를 몇시간 했고, 그랬더니 병이 치유되었고, 이런 이야기들은 오히려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할 뿐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참 자신은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 하지만 역시 그들도 연약한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결국 'impossible'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그 말을 하는 자기 자신도, 그리고 듣는 나 자신도 쉽게 잊어버리지. 

그런데 이상해. 'impossible'의 그릇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겁고 눈물이 흘러. 하나님 이야기만 하는데, 예수님이 다 해주셨다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신다고 말하는데, 인생이 마음대로 안되도, 주님 뜻 안에 있는 것이니 힘내라고 하는데, 주님을 더 알아야 하는데 라고 말하는데, 설교와 책과 모든 논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한 없이 높아지시는데,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힘이되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결심을 하게 되고, 그것이 유일한 소망임을 알게 되.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 그리고 리디머 처치에 가서 설교를 들을 때 그랬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 그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다고 느꼈어. 호튼이 이것을 고민한 사람이고, 루이스가 이것을 고민한 사람이야. 나는 설교자이든, 작가이든,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해. 'impossible'의 인생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서 고민한 그 사람이야 말로, 바로 진정한 '복음'을 발견한 사람이고 희망을 찾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박영선 목사님 설교를 가끔 들으면 느껴. 그분이 얼마나 지독스럽게 그리스도를 인생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의절대적인 관계성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를 하는지, 왜그럴까? 왜냐하면 우리의 'impossible' 인생 속에서 그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좋은 그릇을 만들어가기를 바래. 네가 추구했던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내가 다 알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의 작은 글이 너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래. 어쩌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너무나 당황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의 글이 너의 생각에 작은 단서라도 되면 좋겠어. 

외국인 아저씨들과 하는 QT모임에서,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를 물어봤을 때, 그분중 한분이 이렇게 대답했어 '그것이 의미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meaning for)'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 '아니요,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성도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작은 것이라도 해야한다는, 그리고 끊임 없이 그것으로 압박하고 정죄받는, 내가 이루어내는 performance 혹은 conclusion으로 판단받는 'possible'의 그릇 안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한, 타락한 세상의 사랑일 뿐이야.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한(얼마나 많은 이들이 완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불완전을 설명하고 주장하는지) 사랑을 전제로 한 'impossible'의 그릇 안에서만, 우리의 모든 삶이, 좌절이, 슬픔이, 고통이, 열심이, 눈물이, 승리가, 실패가,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될꺼야. 그분의 완전하고 흠 없는, 조건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기반으로 한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부으시는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발견해나가고 다가갈 때에,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치더라도 헛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용납하고 기꺼히 그 길을 갈꺼야. 그리고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열정과 힘이 우리 안에서 솟아 나올꺼야. 

역설적이게도, 이 결론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지나야 했어. 오히려 더 많은 성경을 읽어야 했고, 기도해야 했고, 책을 읽어야 했어. 외로웠고 힘들었어. 그러나 주님께서 그 시간들을 은혜로, 홀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하고 감사해.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거쳤던 길들을 거쳤다고 생각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작은 실질적인 조언은, 'possible'과 'impossible'의 틀로 나눠서, 생각하는 연습을 해 보길 바래. 다른 이들과 대화하면서, 책을 보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그들을 분류하고 분석하고 적용해보길 바래. 어떤 이들의 말이 정말 진리인가? 과연 어떤 이들의 말이 우리의 인생을 제대로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 그 어떤 훌륭한 이들에 관한 것이라도, 모든 것들을 부지런히, 겸손히 그리고 진지하게 판단해 보길 바래. 그럼 너에게 좋은 생각의 훈련이 될꺼야.

네가 얀시를 인용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염치가 없는 사람' 이야.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이 이야기를 더 좋아해. 왜냐하면 네가 적은 이야기는 우리 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이야기지만, 이제 네가 적을 이야기는 우리 속에 없는 이야기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야. 그렇게 기억력이 약한 나이지만, 얀시를 통해 평생에 마음에 새긴 한마디야.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언제나 너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너의 마음이 늘 주님 안에서 강건하기를,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주님 뜻안에서 해결되기를,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기를,


너를 주안에서 사랑하는 진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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