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7일 월요일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 There You Were - Jessica Simpson ft Marc Anthony


두달만에 아내가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이틀째 입니다. 두주 정도 전 부터는 정신적으로 버티기가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행복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끊임 없는 아내의 재미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아내가 비행기에서 보았다는 '벅스 라이프' 의 스토리를 들으며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요즈음 제가 고민하는 핵심이 그 만화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꼭 볼 예정입니다. 

인간은 비록,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절망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언제나 희망은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그 사람의 얼굴 속에서, 함께 부대끼는 인생의 소소한 부분에서 언제나 기쁨은 존재합니다. 어쩌면 신자의 가장 큰 능력이자 영광은, 낙망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들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는 바로 그것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것이 느린 저이기 때문에, 깨닫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도 느립니다. 아내가 혹 저에게 짜증을 내거나 감정이 힘들 경우에,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몸과 마음에 익히고 연습하는데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잠시 헤어져 있던 두달 동안 제가 마음에 생각한 것은,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조금더 아내를 이해하지 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쉽게 화를 내는 습관도, 쉽게 짜증을 내는 습관도, 이제는 좀더 바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하는 아내의 삶이, 좀더 행복하고 좀더 편안한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정 생활이라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극도의 자기 수양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속에서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세상이 알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행복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께 감사합니다. 아내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열매에 대해서..

그래서 오늘도 행복, :)

2012년 8월 21일 화요일

기도 / Because of Who you Are - Vicki Yohe


- 기도

주님, 
오늘 하루를 지나가며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의 하루를 돌이켜 봅니다. 

저는 누구입니까?
오늘도 질문을 던져 봅니다.
하나님 앞에 저의 삶과,
저의 선함과 또한 저의 악함을 돌이켜봅니다.

어쩌면 주님은 여전히 저에게 신비로운 분이십니다.
저에게 이렇게 주를 향한 갈망을 주시고,
또 이렇게 주를 향한 절망을 주시니,
저는 아직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
언제나 저의 믿음을 붙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저의 영혼 속에 거의 전부가,
제 자신의 욕심을 쫓아갈 할 때에,
아주 작은 겨자씨 같은,
주께서 주신 믿음이 발휘되게 하시고,
제 안에 성령께서 저를 붙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주님,
언제나 주를 변호하는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진실로 언제나,
저의 자리가 바로 그 자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잠시의 투털거림과 원망이 나올 때에,
주께서 용납해 주시기 원합니다.
저의 절망과 낙망과 상황이 저를 주관치 못하게 하시고,
주께서 여전히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 믿음의 깊은 경지로 저를 인도해주시기 원합니다.

주님, 알고 있습니다.
주의 길은 눈물의 길이라는 것을,
그러나 저에게 그 눈물 뒤에 있는 행복을 보게 하시고,
주께서 저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본향을 보게 하시고,
고통스러운 과거가 아닌,
영원한 미래를 보게 해 주시기 원합니다.

주를 예배하기 원합니다.
아니주님, 주님이 제 전부가 되기 원합니다.
다른 그 어떤 이유가 아니라,
주님의 주님 되심의 그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욥과 같은 믿음으로,
저의 온 존재와 마음과 성품과 생각과 영혼과 몸이
주님 앞에 엎드리도록,
제 인생 가운데 한걸음이라도 나아가게 하시고,
혹시 그러지 못하더라도, 주를 의지하도록,
그리고 결국 주님 안에만 소망이 있음을,
하나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고백하도록
저를 붙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주님,
잠들기 전 주님 앞에 잠시 무릎을 꿇고,
오늘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주님을 갈망합니다. 주께서 이땅에 오시기를,
눈물과 한숨의 세상이 이제는 끝이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그리고 제가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주께서 구름 타시고 오는 그날,
환한 웃음으로 눈물 뿌리며
주께 달려가겠습니다.
두팔 벌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2년 8월 19일 일요일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내가 사랑했던 이름 - SHINee Onew


분노하는 것은 고통이다 - 브레히트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 - 사회계약론, 장 자크 루소

가끔씩 인터넷 포털 뉴스에 유명인들의 소식이 들립니다. 주식을 상장해서 몇천억을 벌었다느니, 몇백억 저택을 마련 했다니, 혹은 수십억 빌딩을 구입했다느니 하는 소식입니다.

사실 그런 뉴스를 읽을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쓰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어떤 롤 모델을 제시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뭔가 투자를 해야 할 때이며, 지금이 적기이다.' 혹은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라는 것을 강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열심히 산다면 당신에게도 희망이 있다' 아니면 그들을 부러워하도록 우리에게 독려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 이 사람 참 부럽지?' 우리는 정말,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돈' 은 우리의 '신(god)' 입니다. 제가 언제나 물어보고 싶은 말은 이것 한가지 입니다. '당신의 그 넘치는 돈이, 당신 자신에게 진실로 합당한 것입니까?'

극도로 분노한 사람은, 실상 화를 내지 않습니다. 겉보기에 오히려 평상시 보다 훨씬 차분해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그 사람이 정말 분노했다는 증거입니다. 장 지글러의 글을 며칠간 보며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분노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위스의 사회학자이며 교수로, 그리고 유엔 인권위원회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그는 세상의 구조적인 불평등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소중한 생명의 죽음으로 인해서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짧은 문장들로 그의 글을 엮어 갑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세계의 6분의 1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열살 미만 아이가 기아로 인해 7초에 한명씩 목숨을 잃고, 6분에 한명씩 시력을 잃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지구상에 있는 음식은, 인류가 함께 먹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회적인 강자의 억압으로 이루어진 구조 속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발판삼아 누군가는 부자가 되어 갑니다. 제 3 세계의 그리고 우리 주변의 열심히 일하는 누군가는, 저 임금과 가난과 기아 속에서 고통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전혀 개선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들의 피와 땀 속에서 부를 쌓아 갑니다.

사실상 가장 큰 문제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지 못하는 왜곡된 시각' 이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교육을 받고 자란 저와 같은 사람들은, 기아라는 것은 개인의 문제라고 배웁니다. 가난은 나랏 님도 해결할 수 없다고 듣습니다. 구제라는 것은 그저 개인의 연민에서 나오는 개인의 행위에 국한시켜야 한다고 압니다. 우리는 평등한 기회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보장 된다고 믿습니다. 너의 경제적인 문제는 너가 노력을 덜 해서 그런 결과를 맞이한다고 학습됩니다. 사회와 인류에 대한 고민은 사치라고 듣습니다. 정당한 논리를 권위에 대한 반항이라고 면박을 받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경제적인 부분, 즉 돈의 흐름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는 자유만이 최고의 길이라고 배웁니다. 사회와 자본과 억압에 대하여 고민하는 사람들은, '파란색'이 아니라 '빨간색' 이라고 불립니다. 놀랍습니다. 누가 우리의 눈을 가렸습니까? 누가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켰습니까? 진실로 대중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만' 을 보고, 오직 그것을 끊임 없이 '재생산' 할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 천국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옥에 살고 있습니까? 굳이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다만 이 세상 속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를 통한 억압받고 가난한 자들을 향한 평등과 행복과 구원의 메시지가, 얼마나 소중하고 놀랍고 기적적인 것인가를 다시 한번 절절히 생각하게 됩니다. 어둠 그 자체인 어두움 가운데, 빛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자본주의는 이제 거의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10년 20년의 끝은 아니나, 이제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진자들의 수탈이 거의 끝을 향해 가고 있고, 점점 그들이 약자들로 부터 가져가고 있는 몫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탐욕스러운 자들의 억압이 극에 달한 그때, 고통받고 억압받는 자들의 신원이 하늘에 닿은 그 때, 그리고 주의 천국이, 가난한자들의 진실한 마지막 소망이 되었을 때에, 어쩌면 그 때가, 우리 주님의 재림의 때인지도 모릅니다.

생각이 차분해 집니다. 제가 해야할,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준비해야 할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바래봅니다. 내가 오늘 한끼를 먹었다고 해서, 굶주려 배를 붙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내가 조금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해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영혼들을 망각하지 않기를,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마땅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끊어지지 않기를, 내 영혼이 탐욕의 짐승이 되어 버리지 않기를, 나의 지식과 노력과 인생이, 하나님의 의와 공평과 자유와 사랑이 이 땅에 실현되는 그것에 사용될 수 있기를.. (시편 72편 4절 -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그래서 오늘도..

p.s. 책의 인상적인 부분 따로 발췌했습니다. 검색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테그 '독서 발췌'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 내용 발췌



오늘날 두 개의 발전모델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워싱턴 합의' 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권이다. '워싱턴 합의' 는 1970~1990년에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과 미 재무부 및 국제 금융조직 상에 맺어진 비공식적 신사협정이다. 이 합의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네 가지 원칙을 내용으로 한다. 바로 민영화, 규제철폐, 거시 경제 안정, 예산 감축이 그것이다. '합의' 자본시장의 완전한 자유화를 방해하는 모든 규범적, 국가적, 혹은 비국가적 장애물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에 이 네 가지 원칙은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모든 경제 행위의 법칙이자 예언자이다. 이 네가지 원칙은 머니터리즘의 독트린이다. 자율적으로 통제되고, 전능한 시장에 대한 신봉과 제임스 울펀슨(세계은행 총재)의 '국가를 초월한 글로벌 거버넌스' 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권사상에 위배된다. 지구상의 모든 문명생활의 토대가 되는 1948년 12월 10일의 인권선언(세계인권선언)은 시급히 보완되어야 한다. - 후기 중

혁명적인 행동은 인도적인 구호를 뛰어넘는다. 모든 혁명의 목표는 희생자를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자로, 역사의식을 가진 주체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 에필로그 중

1919년 막스 베버는 "부란 일하는 사람들이 산출한 가치가 이어진 것이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오늘날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부, 즉 경제력은 다혈질적인 투기꾼들이 벌이는 카지노 게임의 산물이다. - 에필로그 중

서구의 부자 나라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신화가 있어. 그것은 바로 자연도태설이지. 이것은 정말 가혹한 신화가 아닐 수 없어. 이성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류의 6분의 1이 기아에 희생당하는 것을 너무 안타까워해. 하지만 일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불행에 장점도 있다고 믿고 있단다. 그러니까 점점 높아지는 지구의 인구밀도를 기근이 적당히 조절하고 있다고 보는 거야. 너무 많은 인구가 살아가고 소비하고 활동하다 보면 지구는 점차 질식사의 길을 걷게 될 텐데, 기근으로 인해 인구가 적당하게 조절되고 있다는 얘기지. 그런 사람들은 기아를 자연이 고안해 낸 지혜로 여긴단다. 산소부족과 과잉인구에 따른 치명적인 영향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죽지 않도록 자연 스스로 주기적으로 과잉의 생물을 제거한다는 거야. 설마 자연이 그런 일을? 이런 설명은 전형적인 유럽적, 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 란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논리지. 자신들은 절대로 굶어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영양실조로 팔다리가 비쩍 마른 아이를 안고 있는 벵골이나 소말리아, 수단의 엄마들이 그 아이들의 죽음과의 싸움이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니? 그런데도 많은 지식인이나 정치가, 국제기구 책임자들은 엉터리 신화, 즉 기근이 지구의 과잉인구를 조절하는 작용을 한다고 믿고 있단다. - 기아는 자연도태?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운명? 중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그럼 무슨 일을 해야 하나요?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 진정한 활로를 찾아서 중

그 이후 지배적인 세계 질서는 더 불합리해지고 더 전도되었다. 2001년 9월 17일 독일 <슈피겔지>에는 "글로벌화는 매일의 테러다"라는 글이 실렸다. FAO 통계에 따르면 2000년 8억 5,000만 명 이상이 만성적이고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1999년에는 8억 2,800만 명만이 영양실조였다). 열 살 미만의 아이가 7초마다 1명씩 기아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으며 6분에 1명씩 비타민 A의 부족 혹은 썩은 물과 접촉함으로써 시력을 잃고 있다. 부자들의 부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이 작은 행성에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해 상품, 자본, 서비스 특허의 세계 무역량은 12.5 퍼센트 증가했지만, 경제력의 소수 집중 현상은 더욱 심해졌으며, 다수의 소외와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도 더욱 악화되었다. 세계 무역의 규모는 지난 해 6조 달러를 넘어섰다. 그중 3분의 1이 각각 다국적기업들 내부에서 이루어진 무역이었다. 세계 무역의 또 다른 3분의 1은 다국적기업 상호간에 행해졌다. 그리고 3분의 1, 그러니까 2조 달러 정도만이 전통적인 무역 거래에 해당 되었다. 세계의 지배자들은 점점 높아가는 황금산 위에 앉아 있다. 그들의 발치에는 굶어죽은 자들과 전염병과 전쟁, 경제적인 궁핍으로 죽은 자들의 무덤이 놓여 있다. 국제 연합의 경제사회 이사회에 따르면(2001년 보고) 2000년 5,200만 명이 경제적.사회적 저개발(영양, 음료, 의학적 기본 치료 등등의 부족)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로 죽음을 맞이했다.  - 후기 중

그들은 모든 꽃들을 꺽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파블로 네루다 - 에필로그 중

2012년 8월 18일 토요일

지성과 감성이 결합되는 독서를 위해 / 출발 - 김동률




독서에 관련된 글들을 읽으면서 늘 마음에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 어느 정도의 과학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독서의 중요성과 그 효과는 이미 대중적으로 공감을 이루고 있지만, 독서라는 행동이 실제로 우리의 뇌와 인지 능력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늘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늘 걸렸던 것은, 독서라는 것이 지나치게 편향된 교육은 아닌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인류 역사에 기억되는 사람들 모두가 탁월한 독서가이고, 가장 높은 수준의 텍스트들을 읽고 소화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은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우리 뇌의 좌뇌 기능 즉, 언어 구사, 기호의 이해, 논리, 사고력 등등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이들은, 소위 우뇌의 영역 즉 음악, 미술, 감성, 공간 지각 등의 능력이 좌뇌의 기능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런 분들에게는 좌뇌를 주로 이용하는 독서라는 것이 꼭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독서라는 것이 탁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혹은 우리의 인생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면, 과연 이러한 분들도 독서라는 학습의 도구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저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면에서 이러한 질문들은 의미가 있고 고민해 볼만한 내용입니다. '독서가 정말 뇌 발달에 관련이 있을까? 그리고 우뇌가 좌뇌보다 발달된 경우, 그들의 독서를 돕기 위한 좋은 전략이 있을까?' 예전에 찾아놓은 논문을 읽어보다가, 이런 부분에 대하여 좋은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좌뇌와 우뇌를 균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독서 전략을 연구하고 결과를 끌어낸 논문입니다. 물론 박사학위 논문이라 결과 분석은 통계적이고 복잡한 내용이 들어 있지만, 그 논문의 문제의식과 목적과 전략이 아주 좋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하 인용문은 모두 아래의 논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각 부분에 대해 짧은 저의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언제나 발췌는 해석의 오류를 불러올 가능성이 큽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꼭 원문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 대학 모교 도서관 홈페이지에 제 학번으로 로그인 후, 그 웹사이트를 통해 RISS로 접속해서 논문을 봅니다. 아마 대부분의 대학이 이런 방식의 접속을 지원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자라나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읽어보시고 고민한다면 좋은 열매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양인렬. [초등학생의 뇌 양식과 독서능력 수준에 따른 뇌 기반 독서활동의 효과 = Effects of Brain-based Reading Activities of Elementary School Children according to Brain Dominance Styles and Levels of Reading Skills]. 계명대학교 대학원:박사논문, 2011.

"Wittrock(1978/1986)은 언어와 시각의 통합활동에 대한 효과 연구에서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자극하는 학습 활동이 교육적 효과가 높다는 결과를 보고하였다. 우미라(2007)는 언어적, 분석적, 논리적 역할을 강조하는 좌뇌 위주의 독서교육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우뇌 활동을 강화해 학습자의 배경지식이나 경험, 상상력에 의해 의미를 재구성하는 독서활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은 학습과제와 활동의 특성이 아동의 뇌 양식에 부합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언어활동인 독서는 의도적으로 우뇌 활동을 강화시키지 않으면 우뇌형 아동들에게 많이 불리할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육에서 우뇌를 활성화하여 전뇌를 사용할 수 있는 교수전략이 필요하다 - 4p"

=>독서라는 것이 단순히 강의가 아닌, 자신의 능동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 듯 합니다. 그것은 필자가 강조하는 것 처럼, 책의 텍스트를 자신의 언어로 재 구성해보고, 자신의 감성을 표현해 보는 것은 좋은 전략이라 생각합니다.

"황수연(1987)은 초등학교 5학년 아동 100명을 대상으로 양쪽 뇌 기능을 측정하는 지능검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좌뇌 기능검사는 추리력, 수리력, 기억력, 언어에서 높은 점수가 나왔다. 또한 우뇌 기능검사는 공간 지각, 추리력, 판단력 등에서 높은 점수가 나왔다. 그리고 좌·우뇌 집단은 지능 점수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어느 한쪽 뇌가 더 뛰어나다고 볼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좌뇌와 우뇌가 균형 있게 발달하면 지적이면서도 종합적으로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다. 또 좌뇌와 우뇌는 완전히 독립해 움직이지 않으며, 마치 한 팀처럼 서로가 정보를 나눈다. 그러므로 뇌가 성공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 팀워크가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관건이다(정종진, 2006). -14p"

=>필자는 현재의 학교 교육은 주로 좌뇌 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러한 커리큘럼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학습 부진으로 고통 받고 있음을 말합니다. 혹시 교회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지적인 엘리트' 만 교회에서 인정받는 분위기 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만이라도, 우뇌를 동시에 자극하고, 그리고 그들의 감성과 특징을 존중해주고 격려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아울러 뇌 생리학적으로 6∼8세가 되면 시각령, 언어령, 운동령 간의 연결 향상 및 뇌 영역이 급성장하여 읽기 공부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다(Brewer & Campbell, 1991). 또한 뇌 기능 특성에 기초한 학습이 독서 능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Gilbert, 1977; Palmer, 1980; Hannaford, 1995; Jensen, 1998/2000)는 결과들을 종합해 볼 때 아동의 독서능력 향상은 학업성취에 영향을 미치며, 독서지도가 뇌 기능 특성에 맞게 이루어질 때 효과가 높음을 알 수 있다. - 19p"

"Blackslee(1980/1997)는 좌·우뇌가 서로 다른 것을 교육 과정에서 다른 사고 처리 방법에 길들게 된 것으로 보고 환경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에 의하면, 뇌는 놀랄 만한 유연성이 있으므로 정규 교육 과정이 좋고 나쁨 에 따라 양쪽 뇌의 발달에 큰 영향을 준다고 하였다. 그런데 현대 교육은 아무리 보아도 언어 중추의 발달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더 나아가 언어를 사용한 교육이 언어 중추의 능력을 높이는 만큼 우뇌의 능력도 교육에 의해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21p"

"고영희(1989)는 우리나라와 같은 다 인수 학급의 경우, 어느 한쪽 뇌의 기능만 활용하는 교수전략은 상대적으로 약한 쪽 뇌의 인지 과정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한다고 하였다. 더더욱 한쪽 뇌의 활용도가 떨어지게 되면 양쪽 뇌를 균등하게 발달시킬 수 없기 때문에 통합된 학습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김재영(2000)은 최근에 연구된 여러 가지 뇌기능에 관여된 연구를 종합하여 구체적인 뇌 기능 발달을 고려한 교육 과정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21p"

"뇌는 인체의 생물학적 리듬에 의해 좌·우뇌의 효율성이 주기적으로 교대 되어 좌뇌 기능이 우세하면 우뇌 기능이 낮아지기 때문에 언어 정보나 공간 정보를 교대로 처리했을 때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Klein & Armitage,1979). 또한 좌뇌와 우뇌는 정보를 서로 교환해 하나의 통합된 기능을 수행하므로(Teyler, 1978), 완전한 교육을 위해서 양쪽 뇌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며, 학습과 교수에 좌․우뇌 유형을 모두 표상하는 전뇌 학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Jensen, 1994). Wittrock(1978/1986)은 언어와 시각의 통합활동에 대한 효과 연구에서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자극하는 학습 활동이 교육적 효과가 높다는 결과를 보고하였다.- 23p"

=>아이가 너무 어렸을 때 부터 소위 독서 교육에만 매진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문자와 언어에 대해 인식을 하는 기능 자체가 초등학교 입학 후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좌뇌의 기능이 잘 발달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뇌의 기능 역시 발달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모가 혹은 선생님이 아이와 함께 놀고 사랑을 나누고 안아주고 뺨을 비비고 노래를 부르는 과정이, 책을 보는 것 못지 않게 너무나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지식은 많고 머리는 똑똑하나, 마음은 병들어 있고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것은 우뇌의 발달이 없이 좌뇌만 극도로 자극한 결과로, 결국 균형잡히고 아름다운 인간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다. 독서활동의 뇌 과학적 접근 필요성 : 인간의 뇌는 새로운 자극이나 강도가 높은 외부자극을 받을 경우 혈류량
과 함께 신경전달물질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뇌 신경 세포를 이어 주는 시냅스가 원래보다 더 두꺼워지고 가지의 수도 늘어나게 된다(Sylwester, 1995). 따라서 독서를 통해 신경세포에 자극을 주어 시냅스의연결을 강화시키면 뇌 기능을 강화할 수 있다. - 19p "

=>독서가 결국 뇌를 자극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제 머릿속의 시냅스가 두꺼워지는 것 같습니다. :)

"가. 뇌 기반 독서활동의 구성 원리 : 첫째, 뇌 기반 독서활동은 좌·우뇌를 고루 자극해 전뇌를 활용하는 독서 활동이 되도록 한다. 좌뇌 특성이 강한 독서활동에서 뇌 기능의 편재를 방지하고 효율적인 두뇌 활용을 위해 우뇌 특성이 강한 세부활동을 구성한다. 둘째, 시각적인 우뇌의 특성을 고려해 세부활동 구성에서 시각 자극을 강화 한다. 셋째, 직관적이고 전체를 파악하는 우뇌 특성을 고려해 수업자료를 구성한다. 넷째, 우뇌 활성화를 위해 우뇌 특성을 고려하여 배경 음악과 구령 등의 청각적 자극과 삽화와 지문에서 정서적 자극을 강화한다. 다섯째, 두뇌 자극을 통해 바른 자세와 독서습관을 형성한다. 여섯째, 우뇌 자극을 통해 주의·집중력을 강화하고, 반복을 통해 학습능력을 강화한다.- 33p"

=>예전에 독서 모임을 할 때 늘 잔잔한 음악을 틀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분명히 필요한 자극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읽은 책의 내용 속에서 느낀 점을 꼭 말해보도록 했는데, 그것이 우뇌의 지식을 좌뇌의 감성에 적용하는 과정이며, 개인에게 그 내용을 체화시키는 과정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때론 고통스럽지만, 어쩌면 참된 학습이라는 것은 결국 지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의 결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면에서 지금 읽으시는 글과 제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음악을 결합해 놓은 것은, 제 나름대로의 전략입니다. :)

2012년 8월 17일 금요일

당신이 지혜를 찾고 있다면 / Father - Olso Gospel Choir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박한 시간이 있다면, 아마도 '수능' 시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수능 기도회를 인도할 경우, 말씀 준비가 더 부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험장에 자녀들을 보내놓고, 어쩌면 그들보다 더 긴장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님들을 생각할 때에, 더욱 정성으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언젠가 수능 기도회 설교를 하게되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본문(열왕기상 3장)을 준비했습니다. 특별히 다른 본문이 생각나지 않았고 또 개인적으로 궁금한 본문이었기에 집중해서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맨처음 저를 놀라게 했던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의 재판 이후에 '사람들의 반응' 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다' 이상하지요? 그저 우리의 생각으로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의 판결을 백성이 즐거워하고 기뻐했을 것 같은데, 사실은 백성이 왕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그들이 두려웠던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의 지혜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것' 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그 사건은 '제3자인 증인' 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범죄자가 왕 앞에 떳떳하게 행동할 정도로, '완전 범죄' 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풀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는, 세상에 흔하게 보는 '지혜로운 사람' 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누가보아도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신적인 지혜' 가 드러난 사건이었고, 그것이 사람들을 진실로 두렵게 했던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의 세상에, 우주의 절대자가 등장하심으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신을 향한 경외감' 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 부분을 묵상하고서, 도대체 솔로몬이 어떤 식으로 기도를 했기에, 그런 지혜를 받았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앞 본문을 통해 그의 대사를 곰곰히 읽어보고서, 그의 '태도' 혹은 '동기' 가 특별함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you have made your servant king)...'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I am only a little child and do not know how to carry out my duties)'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the people you have chosen)...'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who is able to govern this great people of yours)...'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to govern your people)...' (NIV)

솔로몬의 자기 인식과 그의 태도가 너무 놀라웠습니다. 그의 하나님을 향한 대사는, 정말 한절 한절 마음에 묵상해볼 만합니다. 일국의 왕이 되었음에도, 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종' 에 불과함을 알았습니다. 모든 백성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와 백성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 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중한 일이 자신에게 맡겨졌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 고통했습니다.

저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가 '지혜를 구했던 이유' 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일' 을 정말로 '잘' 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일을 잘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과 동기와 방향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일을 맡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자녀의 마음, 자신의 부족함을 이해하는 겸손함, 그리고 자신의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한 그 어떤 것을 구할 때, 반드시 주시리라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고, '신적인 지혜' 를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재판은, '단순한 지혜' 를 논하는 사건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의미와 목표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명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소망을 담은 기도에 대한 '확인' 이요 '성취' 입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설교 원고를 다 작성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의 내용이, 단순히 수능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이, 제 인생에 중요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저는 굉장히 우둔한 사람입니다. 지혜가 너무 없고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정말 똑똑해 지고 싶습니다. 지혜로워지고 싶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제가 섬길 성도님들을 위해서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들과 노력들의 동기가 순수하고, 저의 태도가 아름답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길 또한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들을 통하여 솔로몬에게 그러하셨던 것 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허락하실 수 있는 '신적인 지혜' 그리고 '필요한 다른 것' 들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하루하루 직장과 가정과 인생 가운데 주께서 맡기시는 일들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는 당신에게도, 바로 이것이 인생의 목표가 그리고 확신과 소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 야고보서 1장 5절)

그래서 오늘도 행복, :)

친절을 베푸셨습니까? / Your Will (feat. Darick Rutley) - Ken Reynolds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 우리에게 돌아올 어떤 이익을 바라며 '친절' 을 베푼다면, 그것을 '친절' 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순수한 이기심' 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행동의 목적과 동기와 방향은 오직 '자기 자신' 을 향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친절' 이 아니라 '투자' 라고 부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마음의 중심' 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동기' 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물어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8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 앞에 호소했던 그들이, 결코 주님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들이 한 일이 결코 작은 일들이 아니었음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에서 가장 큰 일들을 했던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의 행했던 수 많은 업적들이,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 진실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이것 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놀랍게도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적용하며, 우리가 더욱 선행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것을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책망받는 자들은, 행함의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또다른 그 어떤 기준에 대하여 책망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뜻' 이라는 것은 언제나, 철저하게 세속적인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그 어떤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장)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결국 우리의 인생이 여기에 달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거스르는 진리입니다. 도저히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황금과 같은 인생의 길입니다. 틀림없이 그 문은 좁고, 찾는 이가 아주 적을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셨습니까? 많이 선을 베풀었습니까?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그 중심에 존재하던 우리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제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 인생을 예상해 봅니다. 예 그렇습니다. 저에게 유익이 되는 자에게만, 친절과 사랑을 베풀었던 행동들을 진심으로 돌이키고 눈물로 회개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의 인생 가운데, 저의 작고 연약한 손길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런 이들에게 향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이, 주님 앞에 큰 칭찬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2012년 8월 15일 수요일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며 / 사람, 사랑 - 박정현 & 김범수


언젠가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갔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식사하고 있는 미국인 부부를 보았습니다. 두분 다 연세가 있어 흰머리가 많았습니다. 특히 부인은 몸에 힘이 없고 연약해 보였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묵묵히, 접시에 있는 수박을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그것을 천천히 먹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조용한 식사의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제 마음까지 따뜻해졌습니다. 유독 그분들이 앉은 그 창가에만,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듯 했습니다. 서로 많은 말이 오고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활기찬 모습도 아니었지만, 그 모습 그대로가 '사랑' 이었고, '부부' 가 무엇인가를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내와 결혼한지 4년째가 되었고, 만난지는 10년이 넘어갑니다. 언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악하고 완고함이 아내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고, 힘들게 한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런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연약한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준 시간들은 저의 인생에 가장 큰 부끄러움이고 또 아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저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격려해준 아내가 있었기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고 또 지금의 이 시간들을 누리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제 자신을 돌이켜 보면 흠이 너무 많아, 때론 어디서 부터 고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좀더 책임감 있고 좀더 용기있는 모습으로, 좀더 따뜻하고 배려있는 모습으로 성숙해나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내일은 아내의 생일입니다. 비록 잠시 떨어져 있지만 짧은 글로 감사과 축하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의 아내의 인생 가운데 진실로 행복하고 소중한 일들이 넘쳐나기를, 아내의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발견하고 천국을 경험하기를,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이 아내로 인해 희망과 사랑을 발견하기를, 아내의 주님을 사랑함이 날로 승하여지고 육체와 마음이 건강하기를, 주님의 뜻이 늘 아내 인생 가운데 따뜻하게 펼쳐지고 그것으로 인해 마음 가운데 행복과 감사함이 넘치기를, 넉넉하지 못함이 우리의 서로를 향한 기쁨을 가로막지 못하기를, 혹 어려운 일들 속에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더욱 든든해지기를, 새롭게 태어날 생명을 통해 더욱 아름다운 가정이 이루어지기를, 세월이 흘러갈수록 우리의 사랑은 더욱 강하여지고 깊어지기를, 이것들을 진심으로 바라고 소망하고 또 기도합니다.

진희야, 사랑해 :)
그래서 오늘도 행복,

2012년 8월 13일 월요일

새로운 시작 - 주님안에 소망을 둡니다 / It is well with my soul - 4Him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이자 또한 행복은, '내일 일은 알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아주 자주 불행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게 됩니다. 참 이상하지요, 냉정하게 말하면 확률이 반반일텐데도, 이상하게 모든 생각과 확신은 자연스럽게 불행으로 기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휴, 내일도 또 고생하겠군..' 참 이상하지요?

많이 긴장을 했는지 그저께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뒤척이다가 일어나서, 오늘 정식으로 학교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였습니다. 학교가 크고 정말 아름다워서 좋았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 학교에 다닌다는 어린아이 같은 기쁨이 있었습니다. 학교 스텝들이 너무 친절해서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활기차 보여서 좋았습니다. 학교 안에 아내와 함께 갈만한 마음에 드는 커피숍이 있어서 그것도 좋았습니다. 사물함 번호가 외우기 쉬운 제 나이라서 그것도 좋았습니다.(나중에 아내가 알려주었습니다. 오빠! 그거 오빠 나이잖아! ㅋㅋ) 사랑하는 동기 형종 목사님과 달라스에서 알게된 재미난 은준 목사님을 보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몇몇 마음을 염려케 하는 것들이 보였지만, 마음을 넓히고 믿음을 가지고 극복해 보기로 생각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20대의 대부분의 시간은, 거의 염세주의 속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 자신을 다듬고 만들어가야 했던 저의 사랑이, 그만큼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프다는 감정, 나 자신을 향해서 스스로 연민에 빠져 있는 그런 것, 그리고 그 슬픔이 또다른 더 큰 슬픔을 부르는 그런 삶, 그리고 그런 내가 마치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는 일종의 환상 속에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감성과, 그로인해 충분히 견고하지 못했던 현실의 삶들이 많은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참 쉽지 않았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인생은 슬픈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마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는 야곱의 고백처럼, 우리는 슬프고 험악한 인생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언제나, 작지만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약한 믿음이 있는 자에게 보이는 것이고, 속으로 삭이는 희미한 기도 속에서 들리는 것이고, 하늘을 향한 한숨과 눈물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이 이곳에서 저와 아내를 인도해가시기를.. 그래서 오늘도 행복,

2012년 8월 11일 토요일

참된 성숙의 길,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 서른 너머... 집으로 가는 길 - 윤종신


안타깝게도 생각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숙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때론 '허공' 을 향해 손을 휘젓는 것 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아름다운 열매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지성인들의 공통 분모가 '독서' 라는 것은, 언제나 틀림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제가 알리스터 맥그라스라는 신학자의 글을 어디선가 인용했을 때에, 누군가가 댓글로 '맥그라스를 조심하라' 라고 적어주었습니다. 아마도, 맥그라스가 전통적인 개혁주의적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역시 동감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독서가 무엇인가' 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독서는 '저자와의 대화' 입니다. 독서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는 저자의 말을 주의 깊에 들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나의 생각과 저자와의 생각을 견주어보아야 합니다. (사실상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면 나는 힘을 다해 그에게 반박하고 나의 의견을 '주장'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긴 고민 끝에 그의 말이 정말 옳다면, 그것에 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 도 필요합니다. 

장로교 합신교단에서 자라고 안수 받은 제가, 오순절 성경학교인 Christ for the nations institute 를 간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그 결정을 위해,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를 읽었습니다. 그가 보는 기독교의 긴 역사 가운데, 나의 미래를 향한 선택이 과연 옳은가 검증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두꺼운 그 책을 읽으면서 두주 동안 마음으로 전쟁을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과 저의 생각이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저 평범한 저의 생각과, 천재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신학자인 그의 생각을 견주고 싸우는 것은 진심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결국 그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CFNI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말한 대로,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부흥한다는 오순절 교단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의 목회 인생에 있어서 큰 유익이 되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리딩으로 리드하라 류의 책을 보는 많은 분들의 목적은 '자신의 출세' 일 것입니다. 혹은 '내가 어떻게 남보다 똑똑해 질 것인가' 일 것입니다. (물론 감사하게도 이지성씨는 그 책 가운데, 인문 독서의 목표와 그 열매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많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일반독서와 인문에 새롭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러한 목표를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순히 나 자신의 출세 혹은 천재적인 뇌를 만들어내고자 함도 아닙니다. 물론 성경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혹은 성경보다 그것들이 우월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 제가 가진 기독교 세계관을 더욱 섬세하게 다듬어가고, 그것이 참 진리라는 것을 견고히 인식하고, 저 자신과 다른 이들을 참되게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성숙은, 결국 자신의 것을 충분히 견고하게 만들고 동시에 남들과 자신을 견주어 봄으로써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본 이후에, 10년 정도를 이제 인문서적에 매진해야하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그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마음 한편에는 서글프고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만약 부모님이 혹은 다른 누군가가, 좀더 내가 어렸을 때에 생각하는 법과 사고하는 법과 인문 고전들을 소개시켜주고 지도해주었다면, 나의 인생이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입니다. 이제서야 철학 개론서들을 읽고 있으니 스스로 마음이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겨우 나의 이정도 수준으로 대학원을 나왔다고 그리고 목회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부끄러움이 늘 있습니다. 그러나 후회만 하고 있기에는 인생은 너무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아직 늦지 않습니다. 10년후에 그 때가, 제가 맞이할 수 있는 저의 진정한 전성기라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그 열매가 당장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계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선한 열매를 맺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과정들이, 그것을 향한 아주 작은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도, 언제나 그런 독서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근에 읽은 몇 권의 책을 적어봅니다. 방학동안 제가 읽은 책은 이제 다 적은 듯 합니다. 제가 잘하고 있으니 따라오시면 좋겠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스스로 고민하고 충분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스스로 사고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의 훈련입니다. 당신의 상황이 저보다 훨씬 좋을 수도 혹은 아주 많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라도 포기하지마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 참 소망을 두는 것,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버팀목이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방학이 다 지나가버려 자유로운 독서의 시간이 없어지니 마음에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작은 걸음들 안에 소망을 가져 봅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1. 대한민국 엄마들이 꿈꾸는 덴마크식 교육법, 김영희, 명진출판사 - 덴마크 대사 부인이 그곳에 거주하면서 교육 시스템과 그 나라에 대해서 관찰하고 적은 책입니다. 큰 기대 없이 보았지만 세계 행복지수 1위라는 덴마크의 교육이 굉장히 놀랍고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특히 중학교 가기전, 대학교 가기전 학생들이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가지는 1년 정도씩의 기간, 그리고 초등학교 기간을 담임 한명이 담당한다는 정책 등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결국 한 분야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국가 전체가 제대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2. 화내는 당신에게, SBS 스페셜 제작팀, 위즈덤하우스 - 인간이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좋은 것인가에 대한, 일반 학문적인 통찰을 정리한 책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인 만큼, 앞으로 곰곰히 생각하며 성경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을 발견했습니다. 

3. 도킨스의 망상: 만들어진 신이 외면한 진리, 알리스터 맥그라스, 살림 - 4년 전쯤에 우연히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그는 대중에게 진화론을 설파하는 알려진 학자인데, 책을 보고 너무 당황스럽고 화도 나고 분노를 삭히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신학과 과학에서 박사 학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맥그라스가 그 책,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진화론적 논리들에 대해서 반박하는 책을 썼습니다.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그리고 아직 잘 모르겠지만, 국내의 창조과학회가 비판받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창조론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어떤 논점에서 변증을 해야 하는가와 관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4. 철학의 숲 길을 묻다, 박일호, 풀빛 - 이지철학을 억지로 :) 다 읽고 다음 책으로 읽은 책입니다. 이지 철학 저자가 중국 사람이고 번역이다보니 말이 모호하고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훨씬 선명하고 정리가 잘 되있고 글 자체도 정말 잘 쓴 책입니다. 이 책은 비록 깊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지만, 간략한 철학의 흐름과 철학자들에 대한 소개가 잘 되어 있습니다. 철학자들의 본문 자체보다는 주로 저자 자신의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5. 철학 역사를 만나다, 안광복, 웅진지식하우스 - 철학을 소개하는 책이지만, 역사와 결합시켜서, 그 당시에 왜 그런 철학이 나올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역사에 늘 관심이 있지만 문외한인 제가 봐도 너무 재미가 있었습니다. 저번 글에서 적었던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과 더불에, 한꺼번에 같은 주제들의 책을 보니, 서로 상호 보완하는 것을 느낍니다. 다만 역시나, 최근에 읽은 철학에 관한 4권책 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다분히 편파적이며(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적었다는 것이 많이 보이는 점이 아쉽고 또 주의해서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2012년 8월 6일 월요일

책을 가까이한다면, 행복 / A Song for You - 이승환


며칠 동안은, 왜 기독교에 지성이 필요한가 그리고 왜 독서가 중요한가에 대해서 글을 쓰기 위해서 끙끙대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제가, 그 글을 쓰기에는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좀더 준비한 이후에, 좀더 거시적이고 탁월한 시각으로 그 문제를 다루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부정적인 것들을 나열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지성과 독서의 긍정적인 부분을 부각함으로, 다른 분들을 독려하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공간은, 언제든지 무엇을 적든지 저의 자랑으로 보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시대가 더 이상 유학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에게 유학은 여전히 특권입니다. 어떤 어떤 책을 읽었다고 적는다면, 그저 책 많이 읽었다고 자랑한다고 보일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부작용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무서워하며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포기한다면, 어쩌면 우리에게 발전과 성숙이라는 것은 바라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느 단계까지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아주 중요하지만, 그러나 결국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본인의 확신, 영혼의 깊은 곳에서 부터 전해오는 가장 확실한 소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기독교 역사 안에 견고하게 뿌리박아야 하지만, 결국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달려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제가 교육학을 지원한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 단 한가지입니다. 모두가 '훌륭한 신앙인이 되라' 라고 말할 때에, 저는 '어떻게 해야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가'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의 관찰과 사색의 결론은, 결국 그 안에 독서가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물론 더 깊게 들어가면 '질문하는 인간, 사색하는 인간 그리고 성령님의 조명'이 그 핵심에 있으나, 그것을 이루는 어떠한 틀을 찾는다면 그것은 독서입니다

저는 어떤 분들이 어떤 책을 보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책이 그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청년부 시절 존경하는 배영진 목사님이 추천하는 책을 읽었던 것도, 신학교 시절 사랑하는 주재형 목사님이 추천하는 책을 읽었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읽는다면, 비록 어떤 의미에서 바보 같지만 그것을 그대로 읽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결국 그것이 첩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을 단순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상조차 못할 수 많은 환경의 변수와 우주보다 더 복잡한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서 일어나는 지적인 변화에 대하여 어찌 감히 인간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모두의 지적인 수준이 동일하지 않은데 어떻게 한종류의 책만 강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너무나 큰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이미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목회자의 한편의 설교, 한편의 글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결국 그것에 대해 양분을 공급하는 것은 책이라는 거름입니다. 요즘에 더 그런 것을 느낍니다. 그 한 문장 한 문장은 말 그대로 영혼을 모두 녹여내어 연단하여 만들어진 가장 빛나는 금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자신이 읽는 책에 대하여 잘 소개하고 인도해가는 경우는 보기가 드뭅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무조건 추천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도 읽어보지 않은 터무니 없이 어려운 책을 권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의 노하우로 여기고 읽은 목록들을 공개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종종 제가 어떤 책을 보는지 적어보려고 합니다. 만약 저를 잘 아시는 분들이라면, 그렇게 제가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결국 이런 공간 속에 글을 적는 이유도 삶과 지혜를 나누기 위해서니까요

저는 솔직히 서평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을 실제로 읽기 전에 편견을 가지게 할 때가 종종 있고, 마치 그 책에 대하여 다 아는 것 처럼 적어놓은 글이 오히려 제 자신에게 혼란을 가져다 줄 때도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가급적 그 책에 대하여 원래 그 내용으로 접근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필요하면 작가와 책의 배경 지식 정도를 찾아봅니다

그리고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은, 왜 그 사람이 그 책을 보았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너무나 두꺼운 책은 다 보지 않고 그저 구입해서 보관하거나 특별한 부분을 발췌해서 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이 저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보았는지에 대해서 짧게 두 문장 정도로 적는 것이 차라리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7년 이상을 난이도를 떠나 주로 신학책을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의 결과물로 어느 정도 미래 교육 목회에 대한 나름의 방향과 청사진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팀캘러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결국 그 신학의 틀 안에서 여러 세상의 학문들과 지혜들을 녹여 융화시켜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다양한 책을 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이지성씨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와 같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문 고전에 대한 강조는 아주 반길만한 풍토이지만, 그러나 결국 그러한 인문 고전과 탁월한 지혜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적인 세계관 안에서 해석되고 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수준의 독서와 나눔이 저의 삶 가운데, 그리고 한국 교회의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유학 생활이라는 것은 아주 단조롭습니다. 사실상 아주 많은 돈을 들여 시간을 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할일은 책 읽는 것 외에 별로 없는 삶을, 성도님들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분들과 단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나 꾸준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 읽는 정도에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우리가 함께 위대한 책들을 읽어나가야 한다는 그 목표는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1. 성경 / 하나님 

어쩌면 기본적이고 꾸준한 성경 통독도 없이 신학을 논한다는 것, 혹은 설교를 논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쉽고도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꾸준한 통독과 고민만이 실제로 연관된 독서를 할 때에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킵니다. 저 역시 쉽지 않습니다. 하루에 한장이라도 좋습니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2. 피고석의 하나님 / C.S. 루이스, 홍성사 

루이스의 글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보석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의 글을 읽을 때야 말로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세상의 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아내가 구입했고 같이 보았습니다. 교육과 가정에 대한 그의 통찰이 너무 유익했습니다

3. 자유론 / 존 스튜어트 밀, 펭귄 클래식 시리즈 

고전중에 하나라 읽기 시작했고 절반 정도 읽었습니다. 일종의 백과사전과 같은 구성이지만, 그 안에서 인간이 가진 가장 깊은 사고를 함께 따라간다는 것은, 이보다 더 큰 배움과 즐거움은 없는 듯 합니다. 특별히 배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을 얻었습니다. (차후에 글을 적어볼 예정입니다.)

4. 3살 까지는 엄마가 키워라 / 스티브 비덜프, 북섬 

보육 시설에 아이를 맡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학술적으로 정리한 책입니다. 아내에게도 꼭 읽어보라고 추천했습니다. 열매의 탄생을 기다리는 제가 받은 감동과 영향이 너무 커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생명의 신비, 양육의 방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5.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 레슬리 스티븐슨, 갈라파고스 

세계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종교들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바라보는가에 대한 관점을 적은 책입니다. 이 분야에 교과서적인 책이라는 평을 보고 읽기 시작했는데, 쉽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자유주의 기독교의 입장에 가깝게 조금 실망스럽게 기독교를 설명합니다. 현재 1/4 정도를 읽었는데, 유교가 결국 행위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는 점이 저에게 소중했습니다

6. 이지철학 / 멍원젠, 책과함께 

저에게 쉽게 철학에 대해서 설명해줄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언제나 바랍니다. 특별하게 이야기형식으로 철학자들의 논리를 설명해줍니다. 이해도가 30퍼센트가 안되는 것 같아 아쉽고, 저는 이 분야에 식견이 없어서 이 책에 대해 평가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다른 철학책 보다는 조금 쉽게 읽히는 것이 위안이 됩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의미와 그 논리를 좀더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현재 절반 정도 읽었습니다

7. 안철수의 서재 / 이채윤, 푸른영토 

예전부터 좋게 생각했던 안철수씨가 어떤 책에서 어떤 유익을 받았는지 정리한 책입니다. 그렇게 깊은 내용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철수가 읽었던 책을 부분이나마 같이 읽고 지식을 확장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적어도 이 책 안에서 안철수씨는 그렇게 대단한 책을 읽은 것이 아닌듯 한데, 그 속에서 통찰과 지혜를 얻는것이 참 놀라웠습니다. 결국 읽는 사람이 문제라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8. 무역 천재가 된 홍대리 / 이기찬, 다산북스 

역시 이 분야에 문외한인 저는 처음으로 제목이 좋아서 읽었습니다. 글이 탁월한 것은 아니지만, 무역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얕게나마 아주 흥미있게 배웠습니다. 이 책을 덮으면서 마음에 떠오른 한마디. '그래! 우린 세계로 나가야되!'

9.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문예출판사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나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저린 마음, 이 책을 읽으면 어쩌면,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 인문학자 스티브잡스를 말하다 / 이남훈, 팬덤북스 

생각해보면 잡스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생전에 했던 여러가지 말에 대해서 각주 형식으로 저자가 설명을 넣었습니다. 그렇게 큰 통찰은 없지만, 잡스를 이해하고 애플을 이해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때론 정말 무례하고 잔인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천재라는 사실은 변함없어 보입니다

11. 돈의 원리 / 막스 귄터, 북스넛 

주로 어떻게 투자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조언을 담은 책입니다. 워낙 이런 책을 본 적이 없어 내용이 궁금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아주 재미가 있었습니다. 투자가 도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자는 과감히 투기를 하라고 조언합니다. 글쎄요, 아직 제가 이 책을 소화할 능력은 없는 듯 합니다. 좀더 시간과 자료가 필요합니다

12. 책을 읽어야 하는 10가지 이유 / 안상헌, 북포스 

탁월한 책은 아니었지만, 독서를 강조하는 저자는 굉장히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 되는지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3. 지식의 서재 / 한정원, 행성:B잎새 

소위 사회의 지식인들이라 불리는 분들의 책 읽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그날 밤, 저의 책에 대한 나태한 마음에 엄청난 불이 붙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날, 전자책을 어떻게 대여해야하는가를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여기 언급된 대부분의 책들은 전자책으로 대출 받아 보았습니다.)

14. Magnifying GOD in Christ / Thomas R. Schreiner, Baker Academic 

안타깝게도 제가 신약 신학에 대해서 많이 약합니다. 주재형 목사님이 추천해서 비교적 얇은 요약본을 샀습니다. 영어가 그렇게 어렵지 않아 읽기가 수월하고, 기본적인 신약 신학의 주제들에 대해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한페이지 한페이지 공부하면서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15. The GOD Who is There / D.A.Carson, Bakerbooks 

이곳에 있는 베이커 서점의 할인 코너를 뒤지다가, 보수적이고 믿을 수 있는 카슨의 책이라 보게 되었습니다. 팀캘러가 무조건 사라는 추천의 조언이 인상적입니다. 예전에 이애실 사모님 책으로 강의하면서, 일반적인 성도님들이 너무 어렵지 않게 성경에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강의 안에서는 스토리와 어느 정도의 본문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이 책은 성경 전체를 스토리와 본문과 어렵지 않게 신학을 개괄하여 종합해 놓은 아주 특별한 형태의 책입니다. 언젠가 강의를 할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빠르게 속독해서 읽어보니 내용이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16. Introduction to Philosophy - a Christian Perspective / Norman L. Geisler and Paul D. Feinberg, Baker Academic 

기독교적 관점에서 일반 철학을 설명하고 정리해놓은 입문서입니다. 서문에서 도입 정도까지를 읽었는데 다행히도 그렇게 어려워보이지 않고 친절합니다. 특이하게도 철학의 역사순이 아니라 주제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ex)지식이란 무엇인가? 실체란 무엇인가? 궁극이란 무엇인가? 등등) 특별히 실체 부분에서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중 존 듀이를 다루는 부분이 있어서 구입했습니다. 완전한 지리에서 듀이에 대한 비판과 연결점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17. Preaching the Gospel in a Post-Modern World / Edmund P. Clowney, Timothy J. Keller

이것은 책은 아니고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 박사 과정에 속한 수업이었습니다. 60페이지가 조금 넘는 강의안이 있습니다. 구글에서 제목으로 검색하시면 강의안과 아마도 무료 수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저의 목회와 설교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팀캘러는 박영선과 비교될만한 탁월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 하나를 방학동안에 본 것만으로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만큼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강의안 중에 언급된 책 6권 정도(최근에 쓴 우상에 대한 관점과 해석을 배우기 위해서)를 앞으로 볼 예정입니다

2012년 8월 3일 금요일

"하나님의 나라"라는 맥락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 / Why? - 4HIM


구원 혹은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냐 혹은 '인간의 의지'냐 라는 것은 아주 어려운 주제입니다. 특별히 그 둘의 관계의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경우, '하나님의 주권' 은 대개 인간의 부족하고 흠 많은 노력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성도의 삶과 역사를 주도해 가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 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성을 가지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해됩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서로 대립되어 보이지만, 성경은 두가지를 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답이 없는 질문이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것을 '신비'라고 부릅니다. (존경하는 배영진 목사님이 저에게 읽히셨던 '인간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처음으로 이것이 신비의 관계라는 것을 읽었습니다) 현재까지 저의 고민을 통하여 얻어진 결과를 굳이 표현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의지에 힘과 용기를 불어 넣으신다'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오늘 오랜만에 박영선 목사님의 예전에 하신 사도행전 설교(1장 1-3절)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라는 것을 좀더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맥락 안에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 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님을 통하여 이 땅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다스리심 그리고 그 대상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맥락에서 인간의 의지' 라는 것은, 단순히 당신이 해야 할 바를 책임 있게 하라라는 의미보다 더 확대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삶 속에서 나 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내가 남을 다스리는 위치에 서야 하고,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의 집중을 받아야 하고, 내가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이 나 중심적이며 세상이 추구하는 바 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성도라도 얼마든지 그러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치관 안에서 하나님이란 존재는, 결국 나를 옆에서 도와주는, 나의 목적을 이루어주는 도구에 불과합니다.(마이클 호튼과 박영선 목사님 두분 다 동일하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상화 시키는 것 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라는 맥락' 안에서 생각해 보면, 이런 그림이 펼쳐 집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처럼, 단순히 구원과 인생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다 맡긴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하시니 내가 아무것도 안하겠다 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그 나라에 속한 일원으로서, 내가 하는 일의 목적과 방향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에 최우선적인 목표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모든 행동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 그분의 주권이 세상 속에서 나의 신앙의 삶 속에서 실현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다스리지 않아도 혹은 다스려도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받지 않아도 혹은 받아도 좋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지 않아도 혹은 서도 괜찮습니다. 그러한 요소들은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는 환경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그래서 두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나의 야망과 목적을 이루는가 혹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는 것인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이렇게만 설명한다면, 상당한 압박감과 부담 혹은 나 자신이 도구화 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마치 군대에 처음 들어간 사람이 (제가 그랬습니다), 더 이상 너는 너의 것이 아니니, 자신이 아닌 군대의 일원으로, 하나의 부속으로 살아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에 느끼는 그런 좌절 혹은 압박감입니다. 그것은 인격으로의 부름이 아니요 일종의 기계적인 부속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섬뜩한 감정은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의 대목이 나올 때 마다, 마치 군대에 징집된 군인이 된 것 처럼 느껴 집니다. 저 자신이 설교할 때 조차 이런 동일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물론 구약에서 강조되는 이스라엘의 역할은 하나님의 군사 이지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조직에 속한 조직원이 어떤 부르심의 맥락에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느끼고 반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 라는 인격에 대한 존중과 사랑은 온데간데 없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니 우리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있다면, 교회와 군대가 무엇이 다를까요?

이 부분을 박영선 목사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우리를 그의 동역자요 자녀로 부르시고 참여케 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심으로 적어도 저에게 있어 새로운 관점을 도입합니다. 군대와 하나님의 나라가 형태상으로는 매우 유사하지만 (구성원은 조직의 목표를 위해서 존재하고 자신의 개인의 이익이 아닌 조직 혹은 리더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구성원이 사실은 그 나라 왕의 자녀요, 하나님 홀로 하실 수도 있는 수 많은 일을 어리석고 나약한 우리에게 믿고 맡기시고 응원하고 격려하시고 심지어 상까지 주신다는 점에서 다른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분한 부르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럴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적은 것을 한 우리에게 과분한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군대에 억지로 끌려가는 군사로 종종 느끼는 저를 포함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다라는 그 부르심에 대하여,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거의 이해하고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처럼, 우리는 늘 주님에서 'why?' 라고 끊임 없이 질문합니다. 왜냐하면 때로 우리가 하는 일들은 아주 작아보이고 소용없어보이고, 나 자신조차도 너무나 작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이런 하찮은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연약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입니다. 그러한 목소리는 언제나 이럴 때 들려옵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때에, 그리고 남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에, 세상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되어 있을 때 바로 그때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너집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며, 이곳에서의 하루 하루가, 나의 공부와 생각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와 있는 목적이, 남들보다 학위를 더 가지고, 남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고, 남들보다 더 돋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도 다시 한번 확인 했습니다.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환경적인 변화에 불과합니다. 제 목표는 달라야 합니다. 저는 이곳에,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담당하기 위해서 그분의 격려 속에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격려하심과 인도하심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은, 많은 부분에서 염세적이고 어그러져 있는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말씀을 들으며 제 자신을 만들어가고 다스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틀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추구해가기 원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를 향한 연약한 마음과 믿음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하게 인도해 주시기를..

그래서 오늘도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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