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일 금요일

"하나님의 나라"라는 맥락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 / Why? - 4HIM


구원 혹은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냐 혹은 '인간의 의지'냐 라는 것은 아주 어려운 주제입니다. 특별히 그 둘의 관계의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경우, '하나님의 주권' 은 대개 인간의 부족하고 흠 많은 노력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성도의 삶과 역사를 주도해 가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 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성을 가지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해됩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서로 대립되어 보이지만, 성경은 두가지를 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답이 없는 질문이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것을 '신비'라고 부릅니다. (존경하는 배영진 목사님이 저에게 읽히셨던 '인간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처음으로 이것이 신비의 관계라는 것을 읽었습니다) 현재까지 저의 고민을 통하여 얻어진 결과를 굳이 표현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의지에 힘과 용기를 불어 넣으신다'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오늘 오랜만에 박영선 목사님의 예전에 하신 사도행전 설교(1장 1-3절)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라는 것을 좀더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맥락 안에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 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님을 통하여 이 땅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다스리심 그리고 그 대상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맥락에서 인간의 의지' 라는 것은, 단순히 당신이 해야 할 바를 책임 있게 하라라는 의미보다 더 확대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삶 속에서 나 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내가 남을 다스리는 위치에 서야 하고,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의 집중을 받아야 하고, 내가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이 나 중심적이며 세상이 추구하는 바 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성도라도 얼마든지 그러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치관 안에서 하나님이란 존재는, 결국 나를 옆에서 도와주는, 나의 목적을 이루어주는 도구에 불과합니다.(마이클 호튼과 박영선 목사님 두분 다 동일하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상화 시키는 것 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라는 맥락' 안에서 생각해 보면, 이런 그림이 펼쳐 집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처럼, 단순히 구원과 인생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다 맡긴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하시니 내가 아무것도 안하겠다 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그 나라에 속한 일원으로서, 내가 하는 일의 목적과 방향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에 최우선적인 목표를 둔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모든 행동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 그분의 주권이 세상 속에서 나의 신앙의 삶 속에서 실현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다스리지 않아도 혹은 다스려도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받지 않아도 혹은 받아도 좋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지 않아도 혹은 서도 괜찮습니다. 그러한 요소들은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는 환경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그래서 두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나의 야망과 목적을 이루는가 혹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는 것인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이렇게만 설명한다면, 상당한 압박감과 부담 혹은 나 자신이 도구화 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마치 군대에 처음 들어간 사람이 (제가 그랬습니다), 더 이상 너는 너의 것이 아니니, 자신이 아닌 군대의 일원으로, 하나의 부속으로 살아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에 느끼는 그런 좌절 혹은 압박감입니다. 그것은 인격으로의 부름이 아니요 일종의 기계적인 부속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섬뜩한 감정은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의 대목이 나올 때 마다, 마치 군대에 징집된 군인이 된 것 처럼 느껴 집니다. 저 자신이 설교할 때 조차 이런 동일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물론 구약에서 강조되는 이스라엘의 역할은 하나님의 군사 이지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조직에 속한 조직원이 어떤 부르심의 맥락에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느끼고 반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 라는 인격에 대한 존중과 사랑은 온데간데 없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니 우리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있다면, 교회와 군대가 무엇이 다를까요?

이 부분을 박영선 목사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우리를 그의 동역자요 자녀로 부르시고 참여케 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심으로 적어도 저에게 있어 새로운 관점을 도입합니다. 군대와 하나님의 나라가 형태상으로는 매우 유사하지만 (구성원은 조직의 목표를 위해서 존재하고 자신의 개인의 이익이 아닌 조직 혹은 리더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구성원이 사실은 그 나라 왕의 자녀요, 하나님 홀로 하실 수도 있는 수 많은 일을 어리석고 나약한 우리에게 믿고 맡기시고 응원하고 격려하시고 심지어 상까지 주신다는 점에서 다른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분한 부르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럴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적은 것을 한 우리에게 과분한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군대에 억지로 끌려가는 군사로 종종 느끼는 저를 포함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다라는 그 부르심에 대하여,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거의 이해하고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처럼, 우리는 늘 주님에서 'why?' 라고 끊임 없이 질문합니다. 왜냐하면 때로 우리가 하는 일들은 아주 작아보이고 소용없어보이고, 나 자신조차도 너무나 작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이런 하찮은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연약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입니다. 그러한 목소리는 언제나 이럴 때 들려옵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때에, 그리고 남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에, 세상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되어 있을 때 바로 그때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너집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며, 이곳에서의 하루 하루가, 나의 공부와 생각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와 있는 목적이, 남들보다 학위를 더 가지고, 남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고, 남들보다 더 돋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도 다시 한번 확인 했습니다.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환경적인 변화에 불과합니다. 제 목표는 달라야 합니다. 저는 이곳에,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담당하기 위해서 그분의 격려 속에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격려하심과 인도하심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은, 많은 부분에서 염세적이고 어그러져 있는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말씀을 들으며 제 자신을 만들어가고 다스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틀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추구해가기 원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를 향한 연약한 마음과 믿음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하게 인도해 주시기를..

그래서 오늘도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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