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일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80) - 주 사랑 앞에 엎드려

 


1. 가사 살펴보기  

사랑 앞에 엎드려 인자하심 경배해
두렵고 친밀한 주님 영혼 떨며 기뻐해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경배합니다 경배합니다 

공의와 사랑 이곳에 죄인 영광 앞에
죽임 당하신 어린 영원히 계신 하나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경배합니다 경배합니다

 

2.  소개

곡은어노인팅 12 기름 부으심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곡은, 가장 거룩하신 주님 앞에 완전한 겸손과 복종 가운데 엎드려 경배하는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주님 앞에 경배할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성경적으로 탁월한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요한계시록 19:4 이십사 장로와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19:4 The twenty-four elders and the four living creatures fell down and worshiped God, who was seated on the throne. And they cried: "Amen, Hallelujah!" 19: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자나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19:5 Then a voice came from the throne, saying: "Praise our God, all you his servants, you who fear him, both small and great!"

여기서 예배 중에 엎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겸손과 복종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멘을 외치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확증하셨습니다.

Bruce Barton et al., Life Application New Testament Commentary (Wheaton, IL: Tyndale, 2001), 1261.

시편 85:9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85:9 Surely his salvation is near those who fear him, that his glory may dwell in our land. 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85:10 Love and faithfulness meet together; righteousness and peace kiss each other. 

인애와 화평은 죄인에 대한 그분의 동정심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의라는 것은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조화로운 은혜는 입맞춤으로 표현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덮으심으로 의롭게 처리하십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조화를 이루십니다. 궁극적으로 입맞춤은 마지막 어린 양의 피를 통해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George Robertson and Bruce A. Ware, “Psalms,” in Gospel Transformation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ed. Bryan Chapell and Dane Ortlund (Wheaton, IL: Crossway, 2013), 733.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개역개정) 5:21 God made him who had no sin to be sin for us, so that in him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NIV)

이 구절은 복음의 메시지의 주요한 요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을 그리스도에게 넘기셨고, 우리가 그 죄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으신 우리의 대속자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R. C. Sproul, ed., The Reformation Stud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2015 Edition) (Orlando, FL: Reformation Trust, 2015), 2057.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곡은,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대중 문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근거하여서 신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끊임없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심어주고 있다. 특히 마블 영화 시리즈는 신이란 그저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 정도로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 문화의 주장은 절대자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만들며 죄인이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우리의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모든 것과 완전히 구별되시며 가장 완벽하시고 만물을 오직 그분의 뜻대로 다스리시고 이끌어 가신다. 타락한 인간은 감히 그분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조차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여 죄를 짓고 영혼이 죽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으로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사랑이시다. 그런데 어떻게 그분의 공의와 사랑이 하나로 연결되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죄인의 모든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홀로 짊어지시고 죽으심으로 오히려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의로우신 분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분은 기꺼이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심으로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분의 위대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이들에게 마땅한 반응은, 그분을 향한 사랑의 고백, 그리고 진정한 경배이다. 엎드린다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의 겸손과 순복을 뜻한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친히 이루시는 그분 앞에서 합당한 경배를 진실한 사랑 가운데 올려 드리는 모든 분들이 되시기를 기대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2024년 6월 11일 화요일

목사님, 어떻게 이런 블로그를 하는 건가요? / 대답을 위해 나의 마음으로 깊이 들어가 변명하다

 




아끼는 목사님이 물어 보았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런 블로그를 하는 건가요?’ 사실 가볍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 며칠에 하나씩 쓰다보니까 여기까지 왔어요.’ 솔직한 저의 고백입니다. 정말 며칠에 하나 정도씩 글을 쓰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주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스스로 제 마음 속에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삶의 많은 부분은 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표면적으로는, 어떤 의미 있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처음에 CFNI에서 공부할 때에 영어로 부르는 찬양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묵상을 해보면 어떨까 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짧은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이 블로그의 시작입니다. 지금보니 The Rest of You는 문법적으로 틀렸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휴식이 되고 싶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본다면, 저의 발전을 위해서입니다. 저는 어떤 부분에서 탁월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더 깊은 저의 내면에서 저의 부족함을 항상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 절실함은 아마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가진 책임에 비해서 저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영혼을 가다듬기 위해서입니다. 삶을 조금이라도 더 정돈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맡은 역할을 더 충실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글쓰기야 말로 제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번 더 내면으로 들어가 본다면, 누군가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어느 순간 제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힘들게 정리해 놓은 어떤 것이,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작은 휴식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의 목회와 신학과 사고들을 종합한 그 어떤 것들이 타인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제이든지 글을 쓸만한 것이 있다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저의 글들을 보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해 본다면, 저는 글쓰기를 통해서 저의 존재의 해방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글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습니다. 역사 속에 일어난 수 많은 기적들과 사건들은 그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 글로써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글을 쓰면 시간을 초월하여 나의 손가락으로 감히 영원을 만지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수가? 그래서 글쓰기 자체가 신의 행위임을 의미합니다. 글 쓰기는 우리의 존재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제 자신을 스스로가 추스를 수 없을만큼 아파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저의 내면과 정직하게 만나는 것이 저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쓰는 행위 자체가 위로 이상의 어떤 것을 저에게 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픔을 동일한 크기의 위로로 메꿀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타인에 의해서 할퀴어진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으로 그것보다는 훨씬 큰 어떤 것이 필요했습니다. 

글을 쓸 때에 어떤 황홀함을 느낍니다. 그것이 저를 치유했고 치유하고 있습니다. 가늠하기 어려운 저의 영혼의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이어령 선생님께서, 죽음 조차도 자신의 글로 쓰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없이 작고 비참한 나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느끼고 경험했던 그 수준과 경지를, 어쩌면 저도 아주 조금은 경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라는 질문에는, 왜라는 이유에 대한 대답을 먼저 하는 것이 적절할 듯 합니다. 단순히 글을 쓰라는 말로는 글쓰기의 깊이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악인론의 저자의 말처럼, 글을 쓰면 성공한다는 것에 사실 너무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 말만으로는 글쓰기의 깊이를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는, 내 영혼의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글 쓰기를 통해서 저의 자아를 초월하여 영적인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제가 경험하는 글쓰기의 신비입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글을 쓰는 순간 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저녁입니다. 마치 한 없이 펼쳐진  빛나는 들판에서 두 손으로 풀들을 훑으며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 감각이 저를 감격하게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감각이 저를 몰아갑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라는 것에 대답할 차례입니다. 마케팅적인 측면에서는 저의 글의 초점을 더 좁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존재 자체를 완성해가는 측면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곳은 정보적인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 프로그램과 그리고 레코딩, 그리고 독서에 대한 수 많은 이야기들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모아져, 한 인간을 구성합니다. 마치 흩어졌던 작은 혈관들과 미세한 근육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육체에 갇혀 있는 저의 작은 생각과 마음은 글을 통해서 세상을 향해 뻗어 갑니다. 그 과정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놀랍게도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급적 자주 쓰려고 합니다. 쓰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평가나 남의 생각, 저를 향한 비판과 무관심,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저는 글을 씁니다. 글을 쓰면서 저의 존재를 발견하고 완성하고, 그것을 채워가고 다듬어 갑니다. 그래서 생각이 나는 것들은 기록을 합니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가치 있는 것임을 확신한다면 글로 엮어 나갑니다. 그 행위 자체가 나 자신과 세상의 고통을 이기는 저의 대범한 저항입니다. 

저는 가장 깊은 글 쓰기는, 더 이상 그 어떤 사람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를 읽어보니, 그가 바로 그것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루이스의 글쓰기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성향 자체는 니체를 닮은 듯 합니다. 저의 마음 속에 고독한 자로서 홀로 우뚝 서고 싶은 마음, 그러나 오직 하나님 앞에서 저의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싶은 그런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과, 그러나 따뜻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될까요? 가보지 않은 길이라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책이 나오게 되면 어떤 것이 달라지게 될까요? 책을 쓰면서 저의 글 쓰기가 얼마나 부스러기와 같은 가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겸손할 것입니다. 여러가지가 변화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눈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그 날까지, 그리고 더 이상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릴 힘이 없어지는 그 날까지, 저는 글을 쓸 것입니다. 

처음에 글 쓰기가 아주 작은 시작이었던 것처럼, 여전히 모든 것은 저의 작은 걸음입니다. 이 글도 그런 맥락에서 아주 작은 글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지나치게 멋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진하지 못할 것 같았던 한 인생이, 단어와 문장과 문단의 기적과 같은 연결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조금 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저의 글을 읽고, 삶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제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하늘의 축복일 것입니다.

2024년 6월 10일 월요일

아름다운 박일양 권사님, 소중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 토저의 '온전한 믿음을 추구함'을 선물 받고






아직 저는 젊은 편입니다. 중년을 넘었지만 크게 아픈 곳도 없고 건강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정말 크게 아프신 분들, 그리고 이제 육신의 모든 힘을 잃어가는 분들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죄송할 때가 참 많습니다.

제가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그 부족한 마음이라도 최대한 펼쳐봅니다. 아프신 분들의 상황에 공감하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저에게 다가올 삶의 마지막 날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전에도 그렇지만 더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목회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 입니다. 

박일양 권사님은 이제 아흔이 거의 가까워 오십니다. 얼마전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하나님 품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우시던 모습이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 아픈 마음은 감히 제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교회에 계단이 많아서, 그리고 워낙 약하신 몸이라 가끔씩 제 팔을 내어 드립니다. 함께 사역하는 전도사님께서 몰래 사진을 찍어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저런 모습으로 권사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는 것도 사실 몰랐습니다. 저의 마음은 혹시라도 권사님이 넘어지실까 조마조마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한걸음씨 걸어가고 있는 저의 발, 그리고 권사님의 발만이 보일 뿐입니다. 

오늘도 뵙고 인사드렸는데 갑자기 줄게 있다고 하십니다. 언뜻 들으니 ‘책’이라고 하셔서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잠시 자리에 서시고는 작은 가방을 주섬주섬 여시는데 정말 책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A.W. 토저의 '온전한 믿음을 추구함' 입니다. 

권사님께서 토저 책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구십이 다 되신 어르신께서 여전히 책을 읽으신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정목사님, 내가 토저 정말 좋아해, 이 책 얼마전에 산 건데 줄께, 그리고 나중에 사도행전 설교도 사서 줄께' 

책을 받아드는데 어떤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너무 야위어서 이제는 걷기도 힘든 권사님께서, 손자와 같은 목사에게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책을 직접 전달해주시는 것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바쁜 날이지만 바로 읽어 보았습니다. 이 책은 마치 토저 목사님의 마음을 토로하는 그대로라고 느꼈습니다. 잠깐 읽는 동안에, 이 부분이 참 좋았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광신적일까?
그렇게 살아 내어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맛보려는 것이 광신적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 광신은 율법서가 권하는 광신이요, 
시편이 권하는 광신요, 선지자들과 신약성경이 권하는 광신이다.

오늘은 글을 쓰고 있지만, 조금은 울적한 날입니다. 하루 종일 분주해서 무엇인가 집중하기 힘들었고 또 제 자신을 보았을 때에 불만족합니다. 따뜻한 햇빛 조차 마음이 불편한 날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토저의 글을 읽으면서 저의 감정을 가다듬어 봅니다. 저의 감정과 저의 환경과 상관 없이 제가 가야할 길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길이며, 토저 목사님의 표현에 따르면 광신의 길입니다. 오늘도 잠잠히 그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23) - 의지력의 재발견 (로이 바우마이스터) / 선택, 초점, 습관, 그리고 의지력 = 크리스천의 삶의 변화시키는 핵심 키워드

 




가끔씩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봅니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모든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음을 진심으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인생이 좌초할 수 있는 수 많은 위기 속에서 있었고, 하나님이 저를 항상 건지셨습니다. 

제 자신을 발전시키고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하는 모든 몸부림은, 정확하게 말하면 제가 의도적으로 이끌어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저의 노력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과 지혜들,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성경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 방향을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에 부어 주셨습니다. 

끊임없이 책을 읽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책을 함께 읽으면서 가장 기쁜 것은, 결국 어느 순간 그 가치있는 것들이 연결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제 삶이 그렇습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의지력의 재발견'입니다. 즐겁게 그리고 유익하게 읽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자기 계발서라고 말하기에는 굉장히 따분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인간의 의지력에 대한 중요한 통찰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읽는 중이지만, 어제 저의 삶에 결정적인 통찰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결정을 내리는 행위'가 의지력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럴수가! 흔히 생각할 때에는 그저 앉아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힘이 드느냐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선택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의지력을 '심각하게' 빼앗아 간다고 실험을 기반해서 확고하게 이야기 합니다. 

여기까지 읽는데 제 머리 속에 번개가 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한가지에 '크리스천의 삶 전체'가 달려 있다고 느꼈습니다. 성도의 현실에 대한 중요한 답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자신이 의지력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세상의 방향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선택을 하기 위해서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택 자체'가 의지력을 갉아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어떤 것을 실제로 행할 의지력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의지력은 고갈될 수 밖에 없는 한정된 것이기 때문에, 의지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관리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설계하면서 완전히 반대로 접근해야 합니다. 의지가 없다고 고민하면 안됩니다. 의지가 없기 때문에 역으로 고민을 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저것 다양한 선택 앞에서 고민하면서 주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감하게 초점을 맞추어서 그 방향으로 한걸음을 내 딛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전히 자신에게 남아 있는 의지력을 가지고, 가장 의미 있는 곳에 넉넉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의지력을 관리하는 것을 통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사람의 '습관'과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습관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의지력을 절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위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의지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행위를 습관을 만들어서 최대한 의지력을 적게 사용하는 형태로 만들면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성숙의 선순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습관을 통해서 성숙한 만들어가기 시작하면, 의지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적은 의지력으로 좋은 일에 사용하고,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의지력을 활용해서 더 좋은 방향으로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가질수록 여전히 의지력이 충분한 사람이 되고, 그 의지력을 옳은 곳에 발휘하는 선순환 안에서 자기 계발의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일반적인 원리는 이것입니다. 내가 의지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선택의 기회를 최대한 줄이고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삶을 단순화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의지력이 남아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습관을 꾸준히 만들면서, 최대한 효율적이고 발전적으로 의지력을 사용하는 선순환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것을 크리스천에게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의지력이 부족해' 라고 말만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때로는 자포자기한 모습 속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밑바닥으로 내려갈 곳이 없다라는 심리적인 안정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는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나마 나에게 남아 있는 의지력을 보전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유혹 혹은 여러 신앙의 관점에서 쓸데 없는 생각과 선택들을 의도적으로 배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의지력을 보존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오히려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출발한 의지력의 관리는 좋은 습관을 형성하면서 더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반복을 통해 신앙의 좋은 습관을 만들어서 내가 가진 의지력을 최대한 절약하면서도 더 성숙한 나로 변화시켜 나가는 선순환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저에게는 혁신적인 이야기입니다. 삶을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왜' 그렇게 해야하는가를 이제서야 선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답은 '의지력'입니다. 의지력을 보존하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나의 삶에 쓸데 없는 선택 요소들을 최대한 없애고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습관을 만들어 최소한의 의지력으로 더욱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아쉽게도 이 책은 당연히 그런 부분이 거의 배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뭔가 더 고귀한 혹은 숭고한 생각을 품는 것이 인간의 의지력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정도입니다. 인간을 진화론적인 존재로 보면서도, 여전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숭고함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애매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크리스천입니다. 한편으로는 나의 최선을 다하지만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과정에 힘을 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그래서 가급적 오전에, 즉 아직 나의 의지력이 고갈되지 않았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그분의 공급하심을 갈망하고, 그리고 그분께 전적으로 나를 맡기는 것은 신앙의 가장 핵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나치게 묵상만 매달리는 것은 효율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의지력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 묵상을 통한 삶의 영적인 초점을 잡는 것과, 남은 의지력을 가지고 그 초점에 맞추어 실천하는 것에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오히려 아주 작은 반복으로 신앙의 습관을 지속적으로 만들면서, 나의 한정된 의지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실질적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삶이 무너지고 혼란에 빠져 있는 성도님들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면에서 어떻게 하면 그런 분들을 잘 섬길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합니다. 이번에 얻은 이 중요한 통찰력이 앞으로 제 목회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합니다. 

당장 다음 주에 상담할 집사님에게도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이렇게 말해야 겠습니다. '집사님, 우리가 가진 의지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관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집사님의 선택에 대한 여러 고민들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고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좋은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은 의지력으로 집사님이 더 발전하고 싶은 만큼 앞으로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시면서 최선을 다해 그 길을 달려가시면 좋겠습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2024년 6월 8일 토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79) - 담대하라





1. 가사 살펴보기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기르시네
너는 두려워 말아라 너를 지키리
담대히 길을 걸으라 

삶의 폭풍이 너는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인도하시니 두려워 말아라
담대히 길을 걸으라 

담대하라 담대하라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담대하라 담대하라 주께서 너와 동행하신다 

세상 친구 떠날 너는 두려워 말아라
주께서 되셔서 동행하시리
담대히 길을 걸으라 

담대하라 담대하라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담대하라 담대하라 주께서 너와 동행하신다 

내가 믿고 의지함은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주께서 너와 주께서 너와 동행하신다
담대하라

 

2.  소개

곡은 손경민 목사님의 정규 앨범인 ‘Soli Deo Gloria’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면서, 주님께서 자신의 자녀를 온전히 인도하시기에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고 격려하고 권면하는 탁월한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마태복음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6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do not sow or reap or store away in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much more valuable than they?

만약 하나님께서 새들을 먹이신다면, 반드시 자기 백성도 돌보실 것입니다.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Mt 6:24–26.

빌립보서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4:19 And my God will meet all your needs according to his glorious riches in Christ Jesus.

이 약속을 고려해 볼 때에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음식, 의복, 돈의 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 일부가 물질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때론 우리를 부자로 만들지 않으시거나 심지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하십니다.

Tom Constable, Tom Constable’s Expository Notes on the Bible (Galaxie Software, 2003), Php 4:19.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1:9 Have I not commanded you? Be strong and courageous. Do not be terrified; do not be discouraged, for the LORD your God will be with you wherever you go."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것이며 두려워하거나 성공을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341.

신명기 31: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개역개정) 31:6 Be strong and courageous. Do not be afraid or terrified because of them, for the LORD your God goes with you; he will never leave you nor forsake you." (NIV)

이 말씀은 출애굽 2세대의 백성들에게 이 명령을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백성 앞에 놓은 임무는, 그들의 용기와 확고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전적으로 주님께 의지해야 했습니다.

Candi Finch, ed., “Deuteronomy,” in The Study Bible for Women,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4), Dt 31:6.

 

4. 찬양에 대한 묵상

곡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서 담대하라고 크게 격려한다. 그리고 이유는 주님께서 지키시고 돌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심을 말씀하시면서, 성도들은 새들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고 물으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가진 조건들로 나의 가치를 평가 받는다. 돈이 많고 똑똑하고 배경이 좋은 사람들을 대접해주는 것이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주권적으로 우리를 선택하신 것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더욱 담대할 있다. 성도들도 삶의 어려움을 당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는 일이시며, 모든 순간에 주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에 두려워 말고 담대하게 걸어가야 한다. 비록 삶에 어려움이 있고 일들이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넘치게 사랑하시며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은 당당함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찬양을 들을 때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신분과 특권을 새롭게 깨닫고 마음에 깊이 경험하면서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힘있게 걸어가시기를 바란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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