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책들을 읽었고 또 읽고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책은 "골든 아워"입니다.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분투, 사회의 현실과 한계 그리고 그 안에서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이 책을 통해서 보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설교에서 인용하면서 또 한번 마음이 새로워 집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국종 교수님 만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바로 그 부분에서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거룩을 이루어가라는 그리고 삶에 최선을 다하라는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를 초청합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며,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선택은 없습니다. 오직 응답 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2절 설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교훈과 권면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4장 1절에서 12절까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한국의 남자들이 혹은 제가 처한 어려움 중에 하나는 여자친구나 아내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한다 라는 것입니다. 제 경험상 대부분의 여자분들은 본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남자친구나 남편이 본인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것을 이해해 주고 알아서 스스로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여자분들의 바램과는 많이 다르게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여자친구나 부인의 마음을 잘 읽어내지 못하고서는 헛다리를 짚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녀 사이의 문제에서는 서로가 마음을 못 알아 줄 때에 그저 몇번 웃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만약에신앙의 문제에서 이것이 똑같이 적용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은근히 마음을 감추고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면 혹은 빙빙 돌려서 이야기를 한다면 과연 그분을 따른다라는 우리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하게 알려주지 않고 애매하게 말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아마 우리의 신앙 생활은 너무나 어려울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신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어떤 무당과 같은 영매들이 필요하고, 또 어떤 특별한 의식을 통해서만 신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반인들은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분명하게 그분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무엇을 소중히 여기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모든 이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고”, 2절에 보니 “주 예수로 말미암아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이미 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물론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구체적인 선택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인생의 큰 방향을 확고하게 결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우리의 인생의 전체적인 방향을 어디로 이끌어 가야 하는지는 대단한 영적인 인물들을 동원하거나 대단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이미 성경으로 하나님의 진리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절에는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절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절에는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라는 도시는 B.C. 168년 경에 로마에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주의 수도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데살로니가 도시의 전성 시대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동서양을 잇는 길목에 있어서 무역이 발달했습니다.
매우 화려하고 번창한 도시였고, 로마의 문화가 깊숙히 들어와 있는 도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의 전역에서는 음란한 문화가 만연했습니다. 성적인 관계가 우상 숭배의 의식 중에 하나였습니다. 노예들도 성적인 관계에 이용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로마 제국은 혼외 성관계에 대해서 매우 관용적이었습니다. 일반들조차 혼전관계가 평범할 정도였습니다.
결혼이 소중히 여겨지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보통 20대 중반의 남자가 한번도 만난 적 없는 10대 초반의 여성과 짝을 이루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남자들은 직업 여성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주 흔한 상황이었습니다. 결혼한 남자들은 첩을 거느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여관과 식당들에서는 손님들을 접대한다는 명목으로 소녀 노예들을 키웠습니다. 심지어 존경 받는 남성들은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여성과 잠자리를 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명예가 유지된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이유는, 지금 바울 사도가 오늘 말씀하시는 것이 단순히 거룩함을 지켜라 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그 당시의 현실의 문화 전체가, 그들이 경험하고 마주치고 보게 되는 그 모든 것이 철저하게 망가져있고 성도를 압박을 하고 유혹을 할 때에 너희의 거룩을 지켜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문화 속에서 살고 있던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당신들은 반드시 거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분명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그것은 당신의 가정을 거룩하게 지키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형제를 당신의 정욕 때문에 해하지 말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단 이 바울 사도의 경고가 그저 시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데살로니가 교회에만 보내는 메시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동일하게 악하고 음란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안타깝지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또 혹시 들어 보신 적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영화 감독은 엄연히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배우와 대외적으로 두 사람이 연인임을 감추지 않고 오랫동안 불륜의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여전히 뉴스와 미디어에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예술가로서 여전히 창작 활동과 사회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가정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파괴하는 것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라는 것입니다.
2013년에 미국의 성행동 연구소에서는 미국 안에서 불륜에 관한 통계를 조사했습니다. 918명의 기혼 남녀를 온라인으로 조사했는데, 여성은 19퍼센트 그리고 남성은 23퍼센트가 현재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설문 조사에 응답했습니다. 눈여겨 볼만한 것은 남녀 모두가 외도의 주된 원인으로 배우자와의 소통 단절을 꼽았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부부간의 대화가 거의 끊어지고 상호 신뢰가 무너지자 불륜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바울 사도의 가정에 대한 명령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4절에 말씀하는 “거룩”이라는 뜻은, 구별하다라는 뜻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존귀함”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함으로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는 성적인 방종과 사회적인 타락을 앞에 두고, 성도의 가정을 지키고 음란을 막기 위해서 실질적으로 바울 사도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정 안에서 부터 남편의 역할이 중요한 것인데, 마치 하나님께 성도가 그렇게 하는 것 처럼, 다른 여인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에게 구별되고 헌신되고 그리고 아내를 존귀하게 대함으로써, 서로간의 관계가 단단해 지도록 그렇게 가정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본질적인 부분을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가운데 바울 사도가 또 하나 명령하는 것은"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라" 라는 것입니다.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은 이렇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서는, 예수님께서 곧 재림 하신다고 주장하면서 생업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그런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로 인해서 당연히 어떤 결과가 나타났겠는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로 부터 교회가 큰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을 다 포기하고 접어버리고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성도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고 의미이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첫번째 적용은, “나의 가정을 소중히 여기자" 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굉장히 저에게 중요하게 다가왔던 것은, 거룩함이라는 것은 가정에서 부터 시작되고, 부부간에 가정 안에서의 분명한 서포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거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의 거룩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고 나 홀로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입니다. 열심히 개인 기도 생활을 하고, 열심히 개인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또 열심히 좋은 책들을 개인적으로 읽으면 나의 신앙이 성장한다 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은, 서구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개인적 관점에서 생각하다 보니, 신앙의 성숙이나 거룩이라는 것도 나 홀로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 처럼, 결국 한 사람의 거룩함을 만들고 그 사람의 성적인 순결을 만들어가는 것은 가정 안에서의 부부 사이의 그 중요한 관계가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쇼윈도 부부" 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실제로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여서 공식 석상에서는 잉꼬부부처럼 행동하는 부부를 두고 쇼 윈도우 부부라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부터"가정 내 이혼" 이라는 말로 이 현상이 주목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말씀 드리기가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저와 성도님들의 가정은 또 부부 사이에 관계는 정말 깊은 애정과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이미 차갑게 식어져서 마치 쇼윈도우 부부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살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러한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저 이 시대 부부들은 다 그렇게 살아가는 별 것 아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체의 신앙과 거룩을 좌지우지하는결정적인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를 내어 놓고 하나님께서 부부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다시 한번 서로를 향한 존중과 헌신이 회복되도록 그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부분에서 에베소서 5장 말씀을 한번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24절은 아내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5절은 남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내와 남편은 분명히 동등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정 안에서 질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에서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오직 아내를 위해 기꺼이 내어 주는 가장 헌신적인 사랑 그리고 무조건 적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이 되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거룩이 점점 완성되어지는 아름다운 성령의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째 적용은, “자신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자" 입니다. 제가 읽은 여러 책 중에 정말 좋았던 책은 이국종 교수님이 쓴"골든 아워" 라는 책입니다. 혹시 성도님들은 2011년에 있었던 석해균 선장 사건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석해균 선장이라는 분은 소말리아 해적과 싸우다가 총상을 입고 사경을 해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살려내서 유명해진 분이 아주대 병원에 이국종 교수라는 분입니다.
이국종 교수는 아주대 외상외과에서 일했던 분입니다. 외상외과라는 것은 굉장히 심각하게 외적인 부상을 입은 사람이 치료를 받는 곳입니다. 그런데 아직 대한민국의 의료 시스템이 선진국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 환자 한명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국종 교수와 그 팀의 이야기를 골든 아워라는 책에 담담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정말 놀랐던 것은, 본인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 책에 거의 삼분의 일이 이국종 교수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싶다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벅찬 치료의 스케쥴과 현실이 너무 힘들고 자신이 이상으로 추구하는 것과 너무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이 교수님은 너무 오랫동안 과로에 시달리다가 한쪽 눈을 거의 실명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국종 교수님이 팀원으로 한 사람을 추천 받게 됩니다. 정경원 교수라는 사람입니다. 이국종 교수는 이 사람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하게 되었습니다. 인품이나 실력으로나 자기 팀에서 너무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부서 환경이 너무 안 좋으니까, 차마 같이 하자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국종 교수가 정경원 교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기를, 외상외과가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지금 현실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정경원 교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교수님, 저는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거면 됩니다. 큰 욕심 없습니다. 저는 외상외과 수련을 마치고 난 뒤 직장에 대한 보장이나 윤택한 삶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에서든 사람을 살리는 외과 의사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심도 있는 수련을 받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을 쓴 이국종 교수님은 천주교 신자라는 말은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종교가 없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책의 많은 부분에서, 말 그대로 사지와도 같은 자신의 부서에서 함께 일하는 정경원 교수에게 얼마나 감사하는지, 또 얼마나 그가 그를의지하고 기대하는지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국종 교수가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이른 새벽에 그 앞을 지날 때면, 정경원의 나지막한 통성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하루도,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이 환자들에게잘 전달 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고,제가 하는 일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이국종 교수는, 크리스천인 정경원 교수의 이 기도를 듣고서 그리고 그 기도를 자신의 책에 자세히 기록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때에,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우리의 예배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것은 백퍼센트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 아니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리고 우리의 열매가 맺히는 부분은 우리의 직장이고 가정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멀리 떨어진 사람들, 나와 이해 관계가 없는 사람들, 그저 한달에 한두 번 만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사실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내가 매일마다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 우리의 직장 상사와 동료와 부하, 우리 옆집 이웃 그리고 나의 부모님과 동생과 형과 누나가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나를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말씀 가운데,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써서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라”, 다시 말해서 예의 있고 품위 있게 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외인에게 있어서 특별히 크리스천이 아닌 나의 가장 가까운 그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직장에서 비지니스 일터에서 그리고 나의 가정에서 나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성실과 정직과 사랑으로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멋진 분이신가가 나를 통해 드러나고 그분께 모든 영광 돌리시는 아름다운 믿음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놓고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아버지 하나님 저의 가정을 회복시켜 주시기 원합니다. 남편에게 순종하고 따르는 아내 그리고 아내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남편 그렇게 성경적으로 회복되는 관계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모든 음란한 것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 안에서의 거룩이 날로 깊어지는 저의 가정이 되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아버지 하나님저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기 원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비지니스에서 저의 말과 행동과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외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는 믿음의 사람으로 더욱 서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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