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9일 토요일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 _9강 설교를 준비하기(Sermon Preparation) / 요한복음 8장 21-30절 설교

 


* 이전 글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8강 본문 선택하기
(Choosing the Text) / 요한복음 6장 41-59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1/8-choosing-text.html

아홉 번째 강의는 Sermon Preparation 입니다. 처음에 이 제목을 들었을 때에는, 드디어 뭔가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비법이 등장하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분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설교 준비 방법이 있을까? 그렇게 질문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더군요. 파이퍼 목사님은 여기서 말하는 설교 준비는, 설교 시작 바로 전에 하는 그런 준비가 아닙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본인의 한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40년이 필요했다고 말씀하시네요. 

본인이 청소년 시절 아팠던 바로 그 경험이 설교에 들어가고,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던 바로 그 경험이 설교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결혼 생활의 어려움, 그리고 부모로서의 고민들이 또한 설교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설교자를 준비시키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서 4장 17절 부터 인용합니다. 

야고보서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4:13 Now listen, you who say, "Today or tomorrow we will go to this or that city, spend a year there, carry on business and make money."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4:14 Why, you do not even know what will happen tomorrow. What is your life? You are a mist that appears for a little while and then vanishes. 4: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4:15 Instead, you ought to say, "If it is the Lord's will, we will live and do this or that."

말씀을 인용한 이후에, 사람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잠깐 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라고 고백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말씀을 바탕으로, 파이퍼 목사님은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연기와 같은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삶의 실재를 깨닫는 것"이야 말로, "설교자가 말하는 그 내용"을 빚어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실재의 경험이, 바로 설교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5절에서 "말하기를" 이라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면서 파이퍼 목사님의 야고보서 4장 13-15절에서 뽑아낸 원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 그리고 모든 실재에 대한 경험이 설교자가 말하는 설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고통의 경우에, 파이퍼 목사님은 그것을 꺼려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면서 마틴 루터가 설교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세명의 위대한 스승이 있다고 말한 것을 인용합니다. 그것은 기도, 묵상, 그리고 고난입니다. 모든 설교에 있어서 위대한 신학교가 바로 고난입니다. 그리고 루터가 인용한 시편 119편 71절을 인용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71 It was good for me to be afflicted so that I might learn your decrees.

고난을 당하였기 때문에, 고난 당한 설교자가 전하는 바로 그 내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 준비는 고통을 찾아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서 벗어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 고난이 당신에게 얼만큼 필요한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장 6절을 인용합니다. 

고린도후서 1: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1:6 If we are distressed, it is for your comfort and salvation; if we are comforted, it is for your comfort, which produces in you patient endurance of the same sufferings we suffer.

이것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그들의 목자에게 고난을 주심으로, 목자가 자신의 양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를 알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설교자의 고난이, 성도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의 설교 준비에 있어서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맥락에서 존 파이퍼 목사님은 또 한 곳을 인용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8-9절입니다. 

고린도후서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1:8 We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brothers, about the hardships we suffered in the province of Asia. We were under great pressure, far beyond our ability to endure, so that we despaired even of life.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9 Indeed, in our hearts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But this happened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

여기에서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자가 부활을 설교 할 때에는 고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진심어린 마음이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부활에 대해서 설교할 때 꾸며서 억지로 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설교자를 죽음의 문턱으로 이끌고 가셔서, 그 이후에 설교자는 부활에 대해서 제대로 설교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어떻게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살아내고, 신뢰하고, 고난을 끌어 안으라"라고 파이퍼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언에 조금 더 설명을 덧붙입니다. 

설교 준비라는 것은 설교자가 읽는 모든 것 그리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책과 영화 등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삶의 실재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보아야만 합니다. 

당신은 설교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휴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설 속의 가공된 삶을 혹은 길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을 설교자의 마음 속에 가져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설교자가 삶의 충만한 그 실재 그리고 신적인 실재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어느 공간으로 들어가든지 간에 사람들에 대하여 무심해서는 안되며, 사람들의 행동, 동기, 그들이 보는 것,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가지는지 등등에 대해서 반드시 보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이 아니라 실제 사람을 만나고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잘 알아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은, "설교자 자신"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자신이 느끼는 많은 감정들에 대하여서 예를 들어, 동기, 기쁨, 환호, 좌절 등의 역동성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살피고 또 공부함으로써 그 누구를 살피는 것보다 인간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자기 인식이야 말로, 절대적으로 설교 준비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자기 자신을 살피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다다르지 못한다면, 그런 설교자는 설교를 해서는 안됩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자신의 실상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설교하는 것이기 땜눙비니다. 설교자 자신의 교만, 두려움 등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을 알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단순히 세상과 사람과 자기 자신을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성경을 보아야만 한다고 강조합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차고 넘치게 되고 거기에 완전히 빠져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완전히 마음을 적셔야 합니다. 물론 다른 책을 읽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성경이 설교자의 삶을 지배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삶의 모든 것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Kilby Clyde가 C.S. 루이스의 말을 인용해서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깨어있는 지성 (A Mind Awake)"입니다. 루이스는 모든 것에 있어서 깨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의 매우 견고하고 또 구체적인 실재들을 엮어서 사람들이 듣기에 너무나 매력적으로 만들어냈다고 설명합니다. 

저도 루이스를 너무 좋아합니다. 단 한줄만 읽어도 마음이 밝아지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아마 주님 오실 때 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루이스의 글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를, 너무나 명확하게 파이퍼 목사님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이스는 한마디로 "삶의 모든 실재에 있어서 깨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하는 것은, 설교 예화에 관련된 책을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본인의 세미너리 수업의 일화를 이야기합니다. 모두가 조용한 그 순간에 엠뷸런스 사운드를 듣지 못했던 것을 설명합니다. 누군가가 엠뷸런스 속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텐데 그 사람을 태우고 가는 엠뷸런스 소리도 듣지 못했다면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던 교수님의 탁월한 조언을 알려줍니다. 

단순히 예화집만을 가지고서는 사람들의 삶에 다다를 수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이웃의 고통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완전히 각성된 상태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삶의 모든 즐거움, 사람들, 자기 자신, 고통, 등등에 있어서 완전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모든 것이 설교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며 강의를 마칩니다. 

저는 파이퍼 목사님의 진지한 얼굴을 너무 좋아합니다. 강의를 위한 강의가 아니라, 이분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삶의 실재를 꾸밈 없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강의이며 동시에 진실한 호소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는 참으로 신비한 것이라고 느낍니다. 원래 언어란 것이 신비로운 것입니다. 단어와 단어가 모여서 결국 문장을 만들고 의미를 빚어냅니다. 마치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글 속에는 의미와 힘과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적이어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철저하게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결국 설교의 대상은 성도님들이며 살아있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실재를 경험하고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설교도 철저하게 인간적이어야 합니다. 

목회자로서 저에게 정말 쉽지 않은 것은, 공감 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공감이 뛰어난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성도님이 아프고 힘들고 고난 당할 때 함께 울어주시던 어머니의 진실한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읍니다. 여전히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의 마음에는 공감이 부족합니다. 

제 생각에는 고난으로 공감이 생기는 듯 합니다. 석사 과정 중에 허리가 아파서 일주일 동안 누워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 허리가 아프다는 분만 만나면 너무나 공감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이 설교자에게 주시는 고난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설교의 준비라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강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설교 준비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람에 대한 이해 혹은 삶의 실재에 대한 이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 강의의 흐름 안에서, 단 한권의 책 성경의 사람이 되는 것 보다 더 먼저 등장한 것이, 사람에 대한 이해입니다. 

사람에 대한 연구가 성경 연구보다 더 앞에 오는 이 강의의 흐름을 놓고, 어느 누가 파이퍼 목사님이 성경을 경시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사람을 알아가고 사람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그만큼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에게는 설교 준비만큼, 때로는 더 중요한 것이 사람과의 만남, 심방입니다. 그리고 독서입니다. 책상 앞에만 앉아서 책만 펴 놓고 있을 때에는 사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통찰이 풍부한 책들을 읽을 수 있겠지만, 고난 당하는 누군가를 만나 대화하며 위로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야 말로 사람을 알아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목회자의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이번 강의를 통해 제가 바른 방향으로 목회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요즘 제가 관심있게 보는 책들이 모두 "사람에 대한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북클럽을 학위 논문 주제로 다룰만큼 책을 좋아합니다. 평소에 여러 종류의 책들을 동시 다발적으로 읽어나갑니다. 

하지만 저는 책을 단순히 지식의 확장을 위해서 사용하기 보다는, 사람과 삶의 실재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의를 통해서 저의 책을 보는 성향과 방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최근에 감동 깊게 읽고 실제로 삶과 설교에 많은 통찰력을 제공해준 책들은 대부분 인간의 삶 자체를 다룬 책들입니다. 삶의 목적, 삶의 의미, 삶의 현실을 다룬 책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책들을 부지런하게 읽는 것은,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 봤니? -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 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08/blog-post_6.html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 보통 사람들의 전쟁 / 성도에게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의 의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08/blog-post_30.html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 싱크 어게인 / "경청"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도록" 배려하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12/blog-post_76.html

반복적으로 힘을 써서 심방을 하고 책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며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스스로 평가할 때에는 저의 설교에 진실성이 조금은 올라갔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단순히 성경이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논리를 펼치는 것에서 넘어서서, 진실로 우리의 삶의 실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이 아무래도 설교에 묻어 나오는 듯 합니다. 

특별히 최근에 했던 새벽 설교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성도로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관찰했던 모든 것이, 삶의 목표와 동기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그 열망이야 말로, 사실상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해를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강의를 저의 삶의 현 시점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진실한 눈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서 이런 강의를 듣겠습니까? 어디에서 이런 진실한 조언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한번 한번의 강의를 영어로 다 듣고 공부하고 확인하고 스스로를 그것에 따라 반추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압니다. 

그러나 오늘 강의를 통해서 강조하신 것 처럼, 우리는 삶의 실재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그 험난한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야만 합니다. 삶의 모든 실재에 있어서 완전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제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며 격려입니다. 바라기는 강의를 통해 배우고 익히고 계속적으로 훈련하면서, 성도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들의 삶의 실재를 보듬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설교를 통해서, 누군가가 좀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클리닉에 대한 분석과 적용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 _ 10강 설교 구성하기
(Lecture Introduction: Preaching Is a Great Thing)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8/10-lecture-introduction-preaching-is.html

* 존 파이퍼 "설교 클리닉" 전체 글 모음 / "설교의 대가"에게 설교를 배우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9.html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마태복음 19장 / 결혼의 가치 &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택하라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방으로 가십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합법적인 이혼 근거에 대해서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고 알려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떤 이유가 있다면 아내를 버려도 되는가 안되는가?"입니다. 이들의 말 속에서는 결혼의 소중함보다는, 내가 원한다면 아내를 버리고 싶은데 그것이 언제 가능한가에 더 초점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혼의 제도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셨고 한 몸이 되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결혼의 목적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일깨우시며, 사실상 이혼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반박합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고 버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이혼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그것을 허락하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음행이라는 특정한 상황에서만 이혼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간음"이라고 사용되는 헬라어 단어가 따로 있음을 설명하면서, 사실상 여기서 말하는 음행이라는 것은 매우 포괄적인 성적인 일탈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형태로든 성적인 순수함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당황합니다. 이렇게 이혼이 어렵다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겠다고 주님께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독신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주십니다. 결혼은 성경적인 것이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했다면 하나님이 이루신 그 결혼이 유지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독신으로 남아 있는 것도 주님의 뜻일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이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한가지 확고한 생각은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에 이 사람은 자신이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이 놀라운 자신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GT 스터디 바이블은,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깨달아야만, 선행이 영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고 설명합니다. 좀 더 풀어서 이해하자면,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 앞에 그분이 만족하실 만한 완전한 선행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교만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 들어가십니다. 21절에 명령이 무려 네가지나 연속하여 등장합니다. "가라", "너의 소유를" 팔아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입니다. 이 사람은 사실상 하나님 대신에 자신의 재물을 신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재물이 이 사람의 삶의 이유였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 사람은 자신의 영적인 현실을 보지 못하고,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토록 당당하던 이 사람은 갑자기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현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보다는, 근심하며 주님을 떠납니다. 이 사람이 과연 자신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었을까요? 그리고 다시 주님께 돌아왔을까요?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열린 결말로 남겨 놓습니다. 

재물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재물은 세상의 신입니다. 모든 것을 약속하는 전능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구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심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큰 위로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옆에서 지켜본 베드로는 자신들이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주님께 여쭤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이 받게 될 특별한 상급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하늘의 상급과 영생이 있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늘 30절이 마음에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구절입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문맥을 살려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상급은 선물이며, 보상을 받기 위해서 주님을 섬기는 자는 나중이 되지만, 순수하게 주님께 순종하며 감사하는 자는 먼저 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묵상해야하겠지만, 일단 이 정도 수준의 이해가 충분해 보입니다. 

In Matthew 19, Jesus deals with marriage and money. Pharisees test Jesus about the condition of a divorce. When we see their question, their desire is to make divorce easy. For me, it is almost impossible to see the weight of the marriage in their mind. 

About the divorce, Jesus emphasizes the origin of marriage from God. God designed it and make it a holy institution. Therefore, without sexual immorality, it is impossible to divorce. However, at the same time, Jesus says that it is possible to live alone. 

In this age, money is a god. It seems that money has the power to sovereign people's minds and bodies. But the real salvation is to accept God as his only one Lord. Someone came to Jesus to ask how to get eternal life. However, if he can not understand who God is, he can not realize his spiritual reality. Jesus commends him that go sell your possessions and give the money to the poor, and then follow me. 

Surprisingly, the mood is changed dramatically. At the first time, the young man was so proud of his lifestyle and his obedience to God. However, he became very sorrowful when Jesus pinpoint this weakness. How about our attitude toward money? These are very critical questions for me and you. 

2022년 1월 28일 금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마태복음 18장 / 아버지의 마음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라

 


가능하면 새벽에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루 동안 해야만 하는 일들을 감안할 때에 사실 오늘은 말씀 묵상은 불가능할 것 같아 라고 수십번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의 삶은 우선 순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먼저 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큰지를 물어봅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이 질문에 대해서 세례 요한의 천국에서 지극히 작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다고 설명합니다. 충분히 근거 있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질문은 누군가를 따르는 제자라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인간 본능 안에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큰 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부르십니다. 다정하고 따뜻한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세우시고,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살지 않고, 자신의 지혜로 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부모님을 의존합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오직 아버지의 능력으로 아버지의 지혜로 사는자가 천국에 들어가는자이며, 이렇게 자기를 낮추어야만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어떤 것일까요? 자신을 돌이켜서,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한 심각한 경고는, 문맥 안에서 어린 아이 하나,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지혜로 살아가게 하려는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Context is Matter라는 바른 방향에서 말씀에 집중할 때에 큰 유익이 있는 듯 합니다. 

제자들의 모든 관점은, "내"가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대답은 "공동체" 혹은 "너와 나"를 통한 대답입니다. 팬데믹 시절이 되면서, 아니 사실상 그 이전의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큰 문제는 "공동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치 영상으로 독립된 "내" 자신이 홀로 신앙 생활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혀 성경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공동체와 떨어진 신앙을 이야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것은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죄를 짓게 하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와의 "관계"속에서 우리의 삶의 진실함이 나타나고 누군가를 격려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누군가의 삶을 망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극심한 진노를 사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것의 사전적인 정의보다 더 와 닿는 것은 컨텍스트입니다.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NET BIBLE은 disdain으로 번역했습니다. 세상은 연약하고 힘 없는 자들을 경멸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직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은, 그 누구도 경멸함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진심으로 소중히 여김을 받고 존경 받는 곳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행정적인 처리나 그 사람에 대한 처분이 강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향한 누군가의 관심, 그리고 교회의 리더쉽과 공동체의 사랑과 관심입니다. 죄를 짓고 넘어진 한 사람을 돌이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과정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 교회 전체가 힘을 쓸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돌이키기를 거절하는 자에게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교회의 무관심과 혐오가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이라는 구절을 영어로 보았습니다. NET BIBLE은 "if two of you on earth agree about whatever you ask"라고 번역했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아도, 한글 번역과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한글로 읽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면"이라는데 포커스가 맞춰진 것 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어번역은 NET BIBLE처럼 너희가 구하는 그 어떤 것에든지 "합심하면"에 포커스가 더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문맥 안에서 생각해 본다면,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바로 그것에 "마음을 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 조차 개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하나됨과 그 하나됨으로 하나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을 읽으면서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너무 많습니다. 문맥적으로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탁월한 연결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을, 그 문맥안에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Realizing that there may be some within the community who put on a show of repentance yet continue to sin, Peter asks whether there is a limit to forgiveness."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용서라는 것은, 단순히 용서 자체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권면을 통해서 돌이킨 사람이 회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계속 용서해야 되는가 묻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너무나 중요하고 또 practical 한 부분입니다. 

교회 안에 속해 있지만, 죄를 짓고 회개를 했지만, 계속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회개하고 돌이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은 얼마든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횟수에 제한은 없습니다. 충격적입니다. 과연 이것이 실현 가능한 것일까요?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과 은혜 가운데 들어 있다면,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mercy) 여겨 주신 것 처럼, 우리 역시 다른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과연 이런 공동체가 있을까요? 그리고 내가 리더일 때에 이런 공동체를 추구했을 때에 과연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미래는 불안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로운 길을 교회 가운데 보여주실 것입니다. 

In Matthew 18, I saw the importance of the church community. Even when we quote the verse about forgiveness, we think of this behavior is in the area of individual forgiveness. But in the conext, Jesus conceives his teaching in the context of the community. 

I think that everybody in the world wants to be a great man. A great man means that every other person admires him and his achievement. However, surprisingly, there is no connection between who I am and what I achieved. The only thing that God is concerned that he is the man who relies on his heavenly father and does his will with his father's strength. 

I think that the pinnacle of this chapter is how many times we should forgive. In this context, forgiveness should be given to the repent. However, the big problem is this. Should we forgive him continually if he continues to sin with repentance? 

I was shocked because Jesus want us to keep forgiving. As a church leader, I am seriously afraid that this continuous forgiveness could ruin the church community. However, I have conviction with this God's word. If we do according to his word, he will open new ways that we did not go through. He will do surely. 


2022년 1월 27일 목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시편 7편 / 의로우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라

 

시편 7편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다윗은 사자 같은 사람들 앞에 있습니다. 사자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대상이며, 또한 생명을 반드시 앗아가는 존재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다윗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합니다. GT 스터디 바이블은, 우리의 삶의 어려움을 두가지로 구분하여서 설명합니다. 우리의 삶의 고통 중에 많은 부분은 우리 스스로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잘못 없이 일어나는 일도 당연히 있습니다. 이 경우가, 오늘 시편 속의 다윗의 상황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잘 아시고 또한 그것에 따라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은 완전한 자가 아니지만, 적어도 오늘 시편의 경우에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도움을 구합니다. 

이 시편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닌 것 처럼 사람들은 주장하지만, 세상은 강자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연약한 이들이 핍박과 어려움을 겪는 일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을 감찰하시며 심판하시는 분이 없다면, 연약한 자들의 억울함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상황에 대한 억울함으로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아시며, 원수들을 향하여서 분노하시며, 악인이 자신의 포악과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을 확신하면서 마음에 위로를 얻습니다. 

다윗은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겠다고 말하며 시편을 마무리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신이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나의 환경을 초월하여서 존재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올 때에, 억울함으로 고통 받을 때에, 지존하신 여호와를 찾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만이 성도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In Psalm 7, David calls his God to save him from the evil men like a lion. David asks that God search his mind and soul to discover the sin. Of course, David is not the perfect right man before God. However, in this chapter, he is in an unfair situation. 

When we are in an unfair situation, it is so hard to get comfort from the people or situation. However, David got a great comfort that God is sovereign and he knows everything and makes revenge for him on the evil people according to their sin.  

God is "the Lord Most High". This is the greatest comfort for all his people who have faith in him. We should pray for him with confidence that he will rescue me from an unfair situation and make justice. 

삶으로 드리는 찬양 (66) 부르신 곳에서 / 따스한 성령님

 



1. 가사 살펴보기

따스한 성령님 마음으로 보네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만족함을 느끼네

사랑과 진리의 한줄기 보네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사랑을 느끼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내가 걸어 길이 되고
살아갈 삶이 되는
곳에서 예배하네

 

2.  소개

 곡은 2009 마커스 라이브 워십에 수록된 곡으로한국 교회에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곡은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세상을 멀리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그분을 높이고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 아름다운 찬양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요한복음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17 the Spirit of truth. The world cannot accept him, because it neither sees him nor knows him. But you know him, for he lives with you and will be in you.

진리의  :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다른 칭호입니다이것은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로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리될 없음을 강조합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538.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하나님은 언약 아래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특히 성전에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때때로 구름 기둥이나 기둥으로 나타나시고그의 영으로 개인에게 임하셨습니다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에 성령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임하여 영원히 그들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D. A. Carson, The Gospels and Acts,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1924.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5:16 So I say, live by the Spirit, and you will not gratify the desires of the sinful nature. 

성경이 우리의 “걷는 것”  대해서 이야기할 그것은 우리의 삶의 행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은 죄인된 인간의 관점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어떤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관점을 발견하고 거룩한 관점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정하고당신의 순종을 강화하기 위해서 성령에 의존하는 것입니다성령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성령님이 모든 일을 하시는 동안 당신은 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세요우리는 성령님의 능력 주심을 믿으면서 걸어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Tony Evans, The Tony Eva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 2019), 1387.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1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pleasing to God--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12:2 너희는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우리의 참된 예배는 우리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 우리의 존재를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리스도인은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의 사회와 달라야 합니다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마음은 기도로써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예배를 통해그리고 우리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묵상함으로써 변화됩니다.

Paige Patterson, Salvation in the Old Testament,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800.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개역개정) 5:2 and live a life of love, just as Christ loved us and gave himself up for us as a fragrant offering and sacrifice to God. (NIV)

우리의 삶의 방식은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됨으로써 특징지어져야 합니다바울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서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은 종류가 되어야 하는데그것은 애정을 넘어 자기 희생의 섬김에 이르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Bruce Barton et al., Life Application New Testament Commentary (Wheaton, IL: Tyndale, 2001), 824.

 

4. 찬양에 대한 묵상

찬양은 온전한 성도의 그리고 예배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찬양이다성경은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에게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안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신다성령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신다.

성경은 성령님을 따라서 행하라 라고 말씀하신다우리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을 따라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그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서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온전한 예배는교회에서 드리는 것뿐 아니라우리의 전부를 주님 안에 전부 드리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우리는 찬양을 때에세상 속에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어두운 세상을 빛의 자녀로서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자신이 아니라오직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특별히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자기 희생의 섬김을 결단하며 사랑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2022년 1월 21일 금요일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_8강 본문 선택하기 (Choosing the Text) / 요한복음 6장 41-59절 설교

 


* 이전 글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릭닉_7강 기적을 행하기
(Acting the Miracle) / 사사기 16장 15-31절 설교

한동안 정말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맡겨진 모든 것을 감당하고,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늘 질문합니다. 그리고 대답은 항상 한결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계획한 것처럼 매주 하나는 아니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여덟번째 강의를 듣고 리뷰해 봅니다. 

누군가 저에게 무엇이 가장 하기 싫은가 라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영어 공부라고 말할 것입니다. 영어로 듣고 쓰고 말하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늦게 공부한 영어는 늘 저에게 큰 부담이며 짐입니다. 

하지만 영어를 하면 할 수록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을 느낍니다. 한글로 굳이 거쳐서 번역하지 않고 느끼고 이해할 때에 찾아오는 어떤 쾌감이 있습니다. 기적적인 감동들을 경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매일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TGC코리아에서 파이퍼 목사님의 강의를 번역해 주신 것은 저에게 큰 감사이며 도움이 됩니다. 영어가 크게 어렵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영어 강의를 먼저 여러번 들으시고 또 그 이후에 번역된 강의를 들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먼저 영어로만 열심히 공부하고 이후에 번역을 통해서 나의 부족한 이해를 채우면 됩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오늘 강의의 핵심은, 설교를 위한 설교 본문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주제입니다. 다시 한번 본인이 강조하는 설교의 정의를 말씀해 줍니다. 그것은 Expository Exaltation 입니다. Expository는 본문의 실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근거가 될 성경 본문이 필요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설교를 위해서 오직 하나의 본문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많은 본문을 한 설교에서 인용하는가는 강해의 핵심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다만 청중들이, 본문의 말하는 바라고 그것의 실재를 분명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이퍼 목사님은 주제 설교 시리즈도 좋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제 설교의 그 메시지가 설교자의 생각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규칙은 보통의 경우에 하나의 중심적인 본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기 저기 본문을 짧게 요약하면서 끌어와서 설교하는 것 보다, 하나의 본문 안에서 연결해서 꾸준하게 설명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훨씬 든든한 바탕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신뢰도 면에서 더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설명(elucidation)과 확증(confirmation)을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여러 성경 말씀을 인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길이는 어떠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해서 파이퍼 목사님은 굉장히 자유로운 분으로 보입니다. 짧은 본문에서 의미를 완전히 짜낼 수도 있고, 혹은 긴 본문을 통해서 하나의 챕터나 성경 한권에 대하여서 큰 틀을 보여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본인은 로마서에서 단지 두 절로 여섯번의 설교를 한 적도 있고, 혹은 선지서 설교에서는 한 권의 성경을 하나의 설교로 소화한 적도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거기에서 고민했던 것은 그 성경에서 도대체 무엇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지를 고민했다고 말합니다. 

혹은 욥기 전체를 다섯 번의 설교로 끝낸 적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분량에 대한 결론으로서, 본인은 작은 본문을 아주 세세하게 설교하는 것과 큰 덩어리로 성경 한권 혹은 챕터를 설교 하는 것이 다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설교 본문 자체"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먼저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성도들을 영적으로 강하게 하고 싶은데 그들을 위한 어떤 본문이 가장 좋은지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첫째로, 과연 설교자 마음 안에서 불타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청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전체 구원의 경륜 가운데, 나의 사역 속에서 설교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에 파이퍼 목사님은 사도행전 20장 27절을 인용합니다. 

사도행전 20:26-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개역개정) Therefore I testify to you this day that I am innocent of the blood of all, for I did not shrink from declaring to you the whole counsel of God (ESV)

넷째로, 지금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어떤 세상의 이슈들을 이야기할 때에 정작 설교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합니다. 설교자는 설교 본문을 정할 때에 세상의 이슈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질문은 교회의 장로들 지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입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본인의 경우에 신뢰할 만한 장로님들에게 원하는 설교 주제 등에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그것을 종합했다고 제안합니다. 

마지막으로 파이퍼 목사님이 제안하는 것은 설교를 성경 전체를 설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교회에 필요한 주제들에 대해서 설교하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이유는 첫째로는 설교자들의 짐을 덜어주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설교자가 낯설지만 다루어야 하는 어려운 내용들을 다루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그것을 통해서 성도들이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임을 알게 해 줍니다. 성경 전체가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설교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본문만 다루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파이퍼 목사님은 "전체의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전체를 성도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이라는 거대한 틀을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반석처럼 성도들이 그 위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하나의 본문이든 여러 본문이든, 길든 짧든 상관 없이 설교자가 말하는 모든 요점은, 본문에서 그 의미와 실체를 얻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강의를 마칩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실제로 얻은 것은, 적어도 전형적인 강해 설교이든 주제 설교이든,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본문을 기본으로 하여서 설교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여기에 어떤 긴장이 있는 듯 합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설교할 때에 꼭 거기에 맞는 본문을 찾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에서 관련이 있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지만 적어도 파이퍼 목사님은 그렇게 하기 보다는 기본적인 본문을 꼭 정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합니다. 파이퍼 목사님의 주제 설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데, 추후에 한번 찾아서 연구해 보아야겠습니다.

또 하나 제가 얻은 유익은, 성경 전체를 설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이런 면에서는 너무 작은 본문에 얽매여서 하는 것은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본인의 설교 기회가 많아서 많은 다양한 본문을 다룰 수 있다면 아주 작은 본문도 좋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보통의 부사역자의 경우에는 한주에 한번 정도를 설교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한주에 두번 정도의 설교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가급적 아주 작은 본문 보다는, 의미상 나눠지는 적당한 수준의 여덟에서 스무절 정도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파이퍼 목사님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전체 경륜을 다룰 수 있도록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파이퍼 목사님이 제안한 것처럼 설교 본문을 정하고, 그 본문을 중심으로 다른 본문들을 인용하면서 설교를 끌어나갈 때에, "과연 어느 정도로 인용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부분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아직 전체 강의들을 다 들어 보지 않아서 혹시 이후에 언급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실제로 설교하는 입장에서기본적인 본문을 설명하면서 "추가로 그것을 설명하고 확증하는 과정"은 매우 실제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접근할 때에, 과연 몇구절 정도, 그리고 과연 몇군데 정도가 적절한가는, 실제 설교자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퓨전 설교"의 형태에서는, "아주 간략하게" 다른 본문의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최대한 간략하게 배경이 필요하면 넣고 길어야 세 네구절 정도 그리고 많아야 두군데 본문 정도에서 인용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의 집중력이 결국 제가 "지금" 설교 하고 있는 본문에서 흩어지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설교를 통해서 제가 하나의 본문에 집중하면서 아주 간략하게 다른 성경 구절을 후반부에 인용하는 실제의 예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파이퍼 목사님은 매우 도전적인 목회를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그분도 피하고 싶은 본문도 있고, 본인이 선호하는 본문도 있었겠죠. 하지만 무엇이 옳은가 방향을 잡고 그것을 위해서 도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강의에서도, 어떤 본문도 피하지 말고 설교함으로, 성도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하게 하라고 강하게 권면할 수 있었겠습니다.

당장 오늘 들은 강의를 모두 적용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 담임 목회를 생각하면서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탁월한 지혜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또 한번 파이퍼 목사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의 설교 클리닉에 대한 분석과 적용은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 존 파이퍼의 설교 클리닉 _9강 설교를 준비하기
(Sermon Preparation) / 요한복음 8장 21-30절 설교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1/9-sermon-preparation-8-21-30.html

* 존 파이퍼 "설교 클리닉" 전체 글 모음 / "설교의 대가"에게 설교를 배우라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9.html

추천 글

로고스 프로그램으로, 평신도 성경 공부하기 with 스터디 바이블 노트 Study Bible Notes (2023년 9월 업데이트)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 119:103) 누구나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는 말은 듣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꿀보다 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

리딩 크리스천 독서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