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30일 목요일

홈 레코딩, 어디까지 해 봤니? 43 - 작은 소리를 레벨업시켜주는, 기적의 로우레벨 컴프레서 MV2

초보자는 현재 자신의 수준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는 사람,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 그리고 저는 여전히 홈레코딩의 초보자입니다. 

제가 자주 들어가서 구경하는 큐오넷 사이트에 질문과 답변 란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분들이 음향과 믹싱에 대한 질문을 하고 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답을 달아줍니다. 이 게시판을 보는 것이 굉장히 재미있는데, 왜냐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저의 문제점과 그것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게시판에서 "로우 레벨 컴프레서"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습니다. 응? 이건 뭐지? 컴프레서는 레벨을 누르는 개념이 아닌가? 그런데 로우 레벨을 어떻게 컴프레싱 한다는거지? 가만히 질문과 답을 읽어보니, 로우 레벨 컴프레서라는 것은 기존의 컴프레서와 정 반대의 개념으로 움직이는 컴프레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큰 레벨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작은 레벨을 올려주는 것입니다. 

글을 읽다가, 갑자기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거구나! 음악을 만들다 보면 정말 어려운 구간은 코러스가 아니라 벌스 구간입니다. :) 왜냐하면 벌스는 음압 자체가 작고, 그리고 그 작은 음압을 잘 들리게 해야하는 모순되는 목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벌스를 작게 부를 경우에는, 가사조차 잘 안들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단순히 볼륨을 올려서는 안됩니다. 처음부터 너무 소리를 크게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발라드 형식의 곡일 경우에는 벌스와 코러스가 분명히 차이를 가져야 합니다. 문제는 그 차이가 너무 커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적당한 수준에서 음압을 가지고 들리다가 마지막 부분에서는 더욱 드라마틱하게 커지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당연히 컴프레서를 사용했습니다. :)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코러스 쪽을 눌러주면, 전체적으로 들어보았을 때에 상대적으로 앞 부분이 더 커지게 들릴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죠.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으로 코러스만 누르다 보면, 너무 지나치게 컴프레싱이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느낄 때에는 마스터링에서 관건은 얼마나 투명하게 결과물을 뽑아내는가 입니다. 만약에 코러스 파트로 넘어갔는데 리미터로 심하게 눌리면 답답한 느낌이 확 듭니다. 곡 전체의 밸런스가 깨진 것이 너무 심하게 티가 납니다. 이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벌스 부분을 살릴려고 하니 코러스가 너무 눌리고, 코러스를 살살 누르자니 벌스가 죽어 버립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를 "로우 레벨 컴프레서"가 해결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말 그대로 너무 작은 부분을 살짝 살짝 올려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로우레벨 컴프레서의 업계 표준이 MV2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MV2

발라드 곡 전체를 생각할 때에 두군데를 걸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보컬입니다. 메인 보컬을 속삭이듯이 불렀을 때에 아무래도 음압을 살리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살짝 보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벌스 부분에서 전반적으로 사운드가 작을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을 마스터 트랙에 사용해서 보완하는 것입니다. 아래 그림처럼 하나는 보컬에 하나는 마스터에 적용했습니다. 



보컬이든 마스터단이든 거의 채널 체인 안에서 거의 앞부분에 넣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리지널 시그널 자체를 먼저 음압을 처리해준 다음에 사운드의 후처리를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위의 두 셋팅을 적용한 보컬의 상황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저의 커버 곡의 메인 보컬 웨이브 파형입니다. 녹음시에 외장 컴프를 사용해서 받은 소스이지만, 여전히 벌스와 코러스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특별히 제가 알려드리지 않아도 한눈에 벌스와 코러스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볼륨값을 조절하지만, 아무리 벌스에서 볼륨 값을 엔벨롭으로 따로 넣어도 이것을 극복할 정도로 상세하게 조절하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MV2를 사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 차이를 가져올까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일단 아직 이 플러그인의 메뉴얼을 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 너무 단순해서 뭘 할 것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하이레벨 컴프레싱은 다른 플러그인으로 하기 때문에 (LALA) 로우 레벨 컴프레싱 레벨을 약간씩 올렸습니다. 특히 보컬 쪽은 더욱 조심해서 넣었습니다. 왜냐하면 컴프레싱을 건 것이 너무 티가 안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기적"을 보았습니다. :) 지난 번에 글로 정리한 것 처럼, 보컬을 속삭이듯이 부르는 것을 현재의 목표로 잡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이크를 가까이 대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대면 립 노이즈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만 최대한 가까이 대야 합니다. 

* 홈 레코딩 어디까지 해봤니?
- 따뜻한 보컬을 위한 끝없는 분투

https://jungjinbu.blogspot.com/2021/09/blog-post_8.html

그런데 MV2를 걸었더니, 정말 기적처럼 보컬의 음압이 살아납니다. 속삭이듯이 불렀지만 아주 살짝이지만 정말 정말 자연스럽게 볼륨이 올라옵니다. 

진짜 감동했던 부분은, "가사의 발음 사이사이" 모두가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볼륨 엔벨롭으로 수동으로 넣을려면 도저히 불가능할텐데, 로우레벨 컴프레싱을 걸었더니 그 발음 사이사이, 그 순간 순간의 보컬의 볼륨들을 약간 올려주면서 평탄하게 만들어줍니다. 세상에, 이걸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을 기적이라고 부르겠습니까? 

마스터 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저는 인트로에 피아노만 들어가기 때문에 아무래도 음압이 약합니다. 그런데 마스터 단에다가 걸었더니 앞 부분을 적당하게 올려줍니다. 언뜻 들으면 눈치 못챌 수준이지만, 확연하게 벌스 부분을 전반적으로 음압을 올려줍니다.

덕분에, 마스터단에서 극단적인 컴프레싱과 리미팅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이미 벌스 부분이 적당히 올라온 상황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마스터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러스 부분이 눌리는 느낌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LUFS 8을 맥스로 잡았지만 느낌에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위의 셋팅을 적용하여서 녹음한 곡을 한번 들어보시죠. 


사실 이 곡은 두가지 면에서 큰 도전이었습니다. 하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홀 리버브가 아니라, 룸 리버브 중심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왠지 제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이 낯간지럽고 그리고 악기가 직접 들리는 것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곡 분위기상 룸 리버브가 좋겠다고 판단되어서 룸을 메인으로 그리고 또 다른 옥스 트랙에 홀 리버브를 약 1/10 비율 정도로 약간 섞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로우레벨 컴프레서를 전체에 적용해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는 이 곡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 제 수준에서는 베스트 결과물입니다. 아직 저의 이큐 실력이 부족해서 발음이 약간 안들리는 부분들이 있지만 무난하게 소화하였습니다. 그리고 벌스와 코러스의 밸런스가 많이 잡혀서 곡 전체를 들어도 위화감이 없이 들립니다. 

찾아보니 MV2가 로우레벨 컴프레서에서는 거의 업계 표준이라고 합니다. :) 나름 홈레코딩 경력이 꽤 긴데, 이제서야 알게 되어서 부끄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알아서 감사합니다. 제가 곡을 만들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만약에 댄스곡 등 강한 비트를 가진 곡에서도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다음 발라드 형태 곡에서는, 좀 더 강하게 MV2를 걸어보면 더 흥미로울 듯 합니다. 혹시 작음 음압에 대하여 저와 같은 고민이 있으시다면, 꼭 한번 사용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 "홈 레코딩 어디까지 해봤니?" 전체 글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0/blog-post_31.html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24장 / 리브가를 찾아서 데려오다

 

결혼이 한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만 할까요? 너무나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가장 긴 장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서 내건 조건은 사실 너무 까다롭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거의 불가능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가나안 땅 여인은 안됩니다. 자신의 동족이어야 하는데, 동시에 가나안 땅까지 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두가지 조건이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배우고 경험한 아브라함의 자연스러운 이성적인 추론을 통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가문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바로 가나안 땅임을 믿은 아브라함은 이 두가지 조건을 가지고 자신의 종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의 여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저 수동적인 입장에서 가만히 않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을 사용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종에게 신신 당부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 어려운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엄청나게 자세하게 그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셔야 가능한 것임을 종은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24장 전체가 종의 기도와 그 기도가 이루어진 내용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그는, 아브라함의 조건에 더하여서 낙타까지 먹일 수 있는 아가씨를 찾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리브가를 처음 만난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단순히 종에게 물을 먹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낙타까지 먹이겠다고 말합니다. 낙타는 물을 정말 많이 먹는 짐승입니다. 오랜 여행끝에 지친 낙타를 먹이겠다는 것은, 보통의 친절로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혹시 리브가는 체구가 굉장히 크고 튼튼한 아가씨가 아니었을까요? 여하튼 리브가는 외모도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더 아름다웠습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에 "리브가의 친절"은 두가지의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바로 앞장에서 과장된 친절을 가장하여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장지를 팔아넘겼던 가나안 사람들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들은 큰 슬픔을 당한 사람조차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삼는 악인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24장에서, 선물로 받은 손목고리를 보고 눈이 휘둥그래져 아브라함의 종을 환대한 라반과도 대조가 됩니다.

기적처럼, 리브가가 가나안 땅까지 오게 됩니다. 성경은 이삭이 들에서 묵상하다가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삭은 사라의 장막으로 리브가를 들어오게 하고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큰 슬픔에서 회복되며 위로를 얻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아브라함과, 그 아브라함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종,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친절과 사랑을 지닌 여인,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놀라운 뜻을 이루십니다.

2021년 9월 29일 수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 봤니? - 창세기 23장 / The death of Sarah

 

목회자가 되고 나서 장례식에 자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아픔은 어떤 것으로도 위로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남편 혹은 아내를 잃은 분의 마음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분이더라도 큰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평생을 함께 했던 사라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함께 먼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고,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함께 했던 아내를 잃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슬픔을 과연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스터디 바이블은, 사라의 나이가 창세기에 기록된 가장 짧은 자연적인 수명이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이 기대하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사라가 소천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사라를 잃은 아브라함의 큰 슬픔을 자세히 기록하기 보다는, 사라의 무덤을 얻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의 땅을 사고자 하는 과정이 과장된 정중함을 통한 가격 협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서로를 높여 주면서 흥정하는 모습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브라함 당시와 다윗 왕 당시에 세겔의 가치가 동일하다고 왜 전제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이 매우 높은 가격에 무덤을 구입했다고 스터디 바이블은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소유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브라함은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그제서야 처음으로 가나안 땅을 아주 작은 부분을 소유하게 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분명히 값을 치르었기 때문에, 확실히 그의 땅이 되었음을 반복하여서 강조합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이 장에 대한 해석까지는 깊게 들어가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의 저의 묵상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기대하지 않았던 아픔과 시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그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내의 무덤을 구하는 과정이라기 보다는 더 큰 맥락이 있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큰 슬픔 속에서도,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는 그 죽음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갈망이 가득했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삶으로 드리는 찬양 (49) - 내가 주인 삼은

 


1. 가사 살펴보기

내가 주인 삼은 모든 내려놓고 되신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사랑 영혼의 반석 사랑 위에 서리

 

2.  소개

 곡은경희대학교 의대생이었던 전승연씨의 곡이다의료선교 단체 모임에서 찬양 인도를 하던 중에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기도하였다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곡과 가사를 쓰게 하셨다그리고 이후로 점점 찬양이 퍼져서 많은 이들의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

곡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다는 성도의 결심과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안에 거하면 하늘의 평안을 누릴 있고 담대한 삶을 살아갈 있음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곡이다.

작곡자 아닌 의대상이 만든 ‘내가 주인 삼은’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85600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요한일서 2:15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안에 있지 아니하니 2:15 Do not love the world or anything in the world. If anyone loves the world, the love of the Father is not in him.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 인간 사회의 가치가 신자를 정의해서는 안됩니다 대신에 성도들은예수님의 가치에 의해서 형성되어야 합니다요한은 사랑을 선호하지만악을 묵인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신자의 열정은 세상의 문화가 제공하는 것에 향하지 말고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들을 향해야 합니다.

John D. Barry et al., Faithlife Study Bible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2, 2016), 요일 2:15.

데살로니가후서 2:16 우리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2:16 May our Lord Jesus Christ himself and God our Father, who loved us and by his grace gave us eternal encouragement and good hope, 2: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17 encourage your hearts and strengthen you in every good deed and word.

이것은 바울이 그의 편지들 속에 적은 많은 축도 중에 하나입니다 안에서 바울은 사랑과 은혜에 근거한 하나님의 능력을참된 격려와 힘의 근원으로 간구합니다.

John F. MacArthur Jr.,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2006), 살후 2:16.

 

4. 찬양에 대한 묵상

곡은 구체적인 말씀을 기반으로 쓰여진 곡은 아니지만성경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그것은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 것이다성도는 평생동안세상의 가치들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 분만 사랑하기를 힘써야 한다.

놀라운 것은주님이 우리를 이미 넘치게 사랑하셨기 때문에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있다는 것이다사라질 밖에 없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면 우리의 마음이 불안해질 밖에 없다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우리의 마음이 참된 평안과 위로를 얻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여주시는 가장 중요한 표시이다특별히 팬데믹으로 어려운 시기에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도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묵상하고 굳게 믿을 때에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있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2021년 9월 27일 월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09) - 인생 (박영선) /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성도의 행복과 목적

 

석사 과정 중에, 아내가 출산을 하였습니다. 사랑스러운 첫째가 태어났다는 기쁨도 잠시, 육아의 엄청난 짐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때 당시의 저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정말 정신이 다 나갈 만큼 힘들었습니다. 부족한 수면, 감당해야 하는 학업, 요동치는 감정들과 미래에 대한 불안, 모든 것이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삶이 평온할 때에는, 신앙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보통의 사람의 모습인 듯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적당한 여가도 즐길 수 있으며, 주변에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도 있고, 건강한 상황에서는 신앙이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찾아올 때에, 내 속에서 터져나오는 분노와 억울함에 잠을 못 이룰 때에,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삶이 막막할 때에, 그럴 때에 신앙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과, 그 본질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펜데믹이 찾아오면서 모든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물론 어떤 부유한 분들은 기회를 더 잘 타서 더 부유하게 되었다고 소식을 접하지만, 보통의 소시민들은 종잡을 수 없는 미래에 부딪혀 버렸습니다. 그나마 누리던 최소한의 여유와 건강을 잃어버린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불확실성 속에 던져졌습니다.

목회는 어떤가요? 예배에 오고 싶어도 오시지 못하는 분들이 태반입니다. 예배에 오고 싶지 않아서 오시지 않는 분들도 태반입니다. 온라인이라는 도구로 은혜를 누리는 분들도 많지만, 온라인을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분들이 더 많습니다. 줌이라는 낯선 도구를 붙들고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지만, 화면을 꺼 버리는 분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 어떤 단체보다 관계성이 중요한 단체입니다. 성도 간의 인격적인 관계는 우리의 신앙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누리던 것들을 너무 많이 상실한 지금, 첫째가 태어난 그 시간 이상으로 현재의 상황이 쉽지 않게 느껴집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영선 목사님의 책을 읽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목사님의 책을 정독한 것이 정말 오랜만입니다. 제목부터 울컥합니다. "인생"이라, 과연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쓸 수 있는 저자가 몇분이나 될까요? 너무 큰 주제이고 너무 버거운 주제입니다. 하지만 박목사님이라면 이정도 제목을 사용해도 괜찮은 분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전제를 확고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마음에 큰 위로가 됩니다. 지금 시대는, 당신이 열심히 살아서 하나님을 만족시킨다면, 그때에 하나님이 복을 베풀어줄지도 모르겠다라는 자기 개발식 복음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기는 하는데, 도대체 예수님이 성도의 삶과 영원한 운명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어주신 분 정도로만 이해하는 단편적인 내용들만 이야기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영선 목사님을 좋아합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을 가감없이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택한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길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자녀로 만드시는 그 과정과 목표는, 단순히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그분의 목적으로 삼으시고,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존재로 만들어가시는 것이 목표임을 박목사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저는 이런 박목사님의 꾸준함이 너무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세월이 흘러 내용은 더 깊고 풍성해졌지만 한결 같이 하나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분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성도의 삶에 대한 설명은 초지일관 하나님의 주권 중심입니다. 그분 안에,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를 붙들어가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가시는 것에 대한 확신이 충만합니다.


이러한 확고한 하나님의 주권을 바탕으로 하여 박영선 목사님이 짚어내는 인생의 핵심은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컨텍스트이다"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어떤 상황들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각 사람에게 맞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상황이 애시당초 우리가 기대하는 아름다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를 집어 넣으십니다. 그리고 성화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살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그 긴 시간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맡기신 삶이기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감이 생깁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당신이 열심히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감동시켜 보라라는 것은 쉬운 말인 듯 합니다. 그건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안해도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물만 만들어내면 됩니다. 물론 우리의 영혼에 참된 만족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만족하면 교만으로, 그리고 실패하면 비참한 절망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박영선 목사님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인생을 설명합니다. 복음 안에서,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 자신을 보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손 안에서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구원을 운명으로 확보했습니다. 아, 이런 표현을 얼마만에 들어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은 한번의 전율로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의 고된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며 그분이 나를 자녀 삼으시고 삶을 맡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예에 걸맞게 살아가라 라고 말한다면, 이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구원을 운명으로 확보하게 된 사람"은 자꾸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화 한번 잘못 냈다가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이라도 하면 너무 큰일이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방법이 정직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이루신 이 일은 정말 놀라운 일이며,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이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하는 성도들을 반복해서 격려합니다. 심지어 삶은 잘잘못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명예롭게 위대하게 살도록 권면합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박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종종 느끼는 부분입니다. 갑자기 논리의 도약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완전히 모순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결해서 붙여놓았습니다. 삶을 잘못 살게 될 때가 너무 많은데, 어떻게 명예롭고 위대한 것을 꿈꿀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것보다 더 신앙을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실패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우리의 선택보다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위대한 삶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온통 줄을 쳤습니다. 하지만 아직 저의 실력은 너무나 미천하여, 책을 읽고 감동하는 수준 그리고 어설프게 반박하는 수준에 머무를 뿐입니다. 저는 박목사님을 너무 좋아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제 마음에는 본능적인 반항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확고히 믿지만, 제 삶과 마음 속에 깊이 들어오기 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내는 저만큼 박목사님을 좋아합니다. 아내가 이 책을 추천했습니다. 함께 책을 읽었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아내를 향해 반박을 많이 했습니다. 박목사님께 대들수가 없으니, 애꿎은 아내에게 연신 반박 질문을 합니다. 

"여보, 이건 너무 모순적인 이야기인거 아닌가? 박목사님처럼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이런 책 쓸 수도 없었을텐데 하나님이 다 하실꺼니까 버티고 살아가라 라고만 말하다면, 너무 안일하고 수동적인 삶을 옹호하는 이야기하는것 아닌가?" 

"여보, 그럼 신앙이 약해진 성도를 그냥 내버려두면서, 하나님이 다 책임지실꺼니까 좌충우돌 많이 해보라고 그러면서 실력이 쌓이는 거고 삶이 다 그런거라고 이야기해주는게 좋은 목회자인가?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쳐야만 하는거 아닌가?"

아주 오래 전 기억입니다. 이제 노회에 갓 들어간 목사로 한 노회에서 참여했습니다. 점심 시간이 한참 넘어서서 배가 고픈데 회의가 끝날 줄을 모릅니다. 박목사님이 손을 번쩍 드시더니 웃으면서 크게 말씀하십니다. "밥먹고 합시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역시 큰 어르신은 정말 다르시구나!" 모든 상황 속에서 여유를 잃지 않으시고 웃음으로 후배들을 격려하시는 모습이 그렇게 크게 보였습니다.

저의 목회의 남은 시간들은, 이 책의 내용을 제 삶에서 풀어낼 과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목회적인 상황들은 앞으로는 더 어렵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바로 그 상황 속에 넣으시고, 그 안에서 버티며 명예롭게 성도로서 행동하라고 격려하십니다. 

이 책을 읽고 정말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성도로서 목회자로서 제 자신에 대해서 저의 삶의 컨텍스트 안에서 아주 조금 여유가 생겼습니다. 조금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살아가는 것에 조금 더 마음으로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대단한 열매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현재의 삶 속에서 명예롭게 살아가기를 요구하십니다. 제가 성도로서 수 많은 좌절 속에서도 명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저를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의 "인생"입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https://jungjinbu.blogspot.com/2023/03/blog-post_6.html

2021년 9월 26일 일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 봤니? - 창세기 22장 / The sacrifice of Isaac

 


누구나 자신의 삶의 가장 어려운 시간을 지나갑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을 얻은 인생의 정점을 경험한 이후에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는 청천 벽력 같은 명령을 듣게 됩니다. 그의 믿음의 삶이 오래 무르익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장 어려운 명령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사랑하다"라는 동사가 처음 등장하는 부분이 바로 이 장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전부이며 그의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십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에게 닥친 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을 읽는 독자,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렇게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보이시지 않을 때에조차 선하신 분이신가? 그분은 과연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신가?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삭을 통해서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합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에, 스토리의 중간에 아브라함의 대사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등장합니다. 그리고 스토리의 마지막에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짓습니다. 이 구조를 통해서, 스토리의 목적이 여호와는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임을 알려줍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이 본문이 제물이 살아 있는 동안에 제물을 제단에 올려 놓는 성경을 유일한 예임을 알려줍니다. 아마도 십대 중반이었던 이삭은 아버지의 명령에 스스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까지 마다하지 않고 나아갑니다. 

여호와에 대한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이삭의 믿음과 신뢰 또한 보여줍니다. 순종만을 강요하는 자리에는 저주와 비참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부터 나온 순종은, 인간의 상식과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어버립니다.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들을 들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말리십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것에서 나온 순종을 기뻐하시며, 그를 향한 복의 약속을 한번 더 풍성하게 확증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의 위대함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단 하나의 소망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한 인간을 사랑하시어 자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마음으로 아들을 주셨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이 본문은, 몇마디 말로 언어로 정리하기가 어려울만큼 벅찬 본문입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인다면 조금은 성숙한 신앙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여호와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주신 분이시기에, 오직 여호와만을 찬양합니다.

2021년 9월 24일 금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21장 / The birth of Isaac

 


얼마전에 작은 미술 전시회를 다녀왔습니다. 여러 작품들 중에서 저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묵으로 그린 동양화였습니다. 다른 모든 작품들이 다양한 색으로 면을 꽉 채운 것과 비교할 떄에, 동양화의 가치가 더욱 돋보였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공간이 비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그 여백이 그렇게 아름답습니다. 여백 속에 그려진 선들이 여백과 서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성경을 묵상하다가 문득 성경은 동양화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토리 안에 여백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여백을 억지로 채우지 않고 그대로 놔둡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도록 우리를 부르는 듯 합니다.

드디어 사라가 이삭을 낳습니다. 성경은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녀를 돌보시고 행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고 계속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긴 기다림을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했습니다. 기다림, 혹은 인내라는 말로는 더 이상 표현하기도 어려운 그 상황을 다 지나간 이후에, 드디어 약속의 아들이 태어납니다. 

성경은 한 사람의 인생의 어떤 장면에서 꼭 필요한 부분을 드러냅니다. 아마도 이삭이 태어난지 삼 년 정도 지났을 때에,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립니다. 이때 이스마엘은 거의 십 칠세라고 스터디 바이블은 지적합니다. 제 생각입니다. 십 칠세의 나이라면 어린 아기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 나이가 아닐까요? 

이 장면은 누가 과연 진짜 아브라함의 상속자인가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에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가는 장면이 무려 13절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삭이 태어난 그 감격적인 장면보다 더욱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과연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인가의 문제는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오랜 후에, 갈라디아서에서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게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 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자녀만이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시 확인하십니다. 단순히 집안에서 여인들의 권력 다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중요한 맥락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순간에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그에게 약속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그 긍휼이, 창세기 곳곳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했던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도 여기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기전에 우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이 사건을 통해서, 모든 생수를 민족들에게 흐르게 하실 하나님을 봅니다. 약간은 과장된 해석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햇빛이 타오르는 광야 지역에서 우물을 자신의 것으로 확실하게 소유한 아브라함의 마음은 한 없이 풍성해졌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소유하게 된 그 우물의 자리에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영원하신 여호와라는 표현이 바로 여기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다섯번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마음으로 여호와를 이렇게 불렀을까요? 혹시, 자신의 약속의 자녀를 향한 기다림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진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영원처럼 길었던 기다림을 넘어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에 대한 감격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을까요?

저를 긍휼히 여기시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팬데믹의 인내와 고통의 시간 속에서, 생수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인내를 요구하는 아픈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를 결단합니다. 

2021년 9월 23일 목요일

말씀 묵상 어디까지 해봤니? - 창세기 20장 / The deception of Abimelech

 


누군가가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할 때에 우리는 먼저 비난의 화살을 쏩니다. 보통의 인간의 지극히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하지만 곰곰히 성경을 살펴보면,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끔식은, 사실은 매우 자주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굳이 이런 황당한 행동은, 그 사람이 꼭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고 나타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12장의 아브라함과 비교하면서, 오히려 20장에서는 기근도 없었고 약속의 땅을 떠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다 보여주지 않지만, 제 생각에는 이번 사건은 더욱 아브라함에게 책임이 커 보입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에 아브라함의 삶에 대한 내용이 11장부터 20장까지 이어지는데, 그의 삶에 대한 묘사의 마지막 부분이 바로 아비멜렉에게 거짓말을 한 장면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바로 전에 일어나는 이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 전체에 긴장감이 매우 고조됩니다. 사라가 아비멜렉의 여인에 속하게 되어서 그의 궁으로 들어갑니다. 과연 이 엄청난 위기를 넘어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굉장히 명백하게 아비멜렉이 잘못이 없고 오히려 억울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최초로 누군가의 꿈에 나타나십니다. 저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스터디 바이블을 보니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돌아온 때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해석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본문을 보자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민족을 만드시고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오히려 더 애닳아 있는 듯 합니다. 아브라함은 느긋합니다. 그는 스토리 뒷편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간섭하시면서 문제를 풀어나가십니다. 

시편 105편에서는 이 사건을 가지고,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라고 인용합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꼬투리 하나까지라도 잡아서 혼을 내는 그런 분으로 종종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감찰하시며 우리를 징계하시고 훈련 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더욱 큰 분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 넘으십니다. 그분은 약속하시며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열심으로 일하십니다. 정작 언약의 당사자인 아브라함은 넋을 놓고 있는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를 친히 보호하십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회복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에 대한 풍성한 감격, 그리고 그분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추궁하는 아주 매서운 교사로서 역할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풍성한 사랑으로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부모님 품에 드디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 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는, 그저 공허한 논리가 아니라 참으로 우리 삶에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능력이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바로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 우리는 진정으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삶으로 드리는 찬양 & 금요 찬양 교실 (48) - 내 삶의 이유라 / 예수는 내 힘이요

 



1. 가사 살펴보기

(1) 예수는 힘이요 나의 기쁨 소망
이름의 생명이 삶의 이유라
오직 주만 따라갑니다
오직 주만 높임 받으소서 

(2) 내가 사나 죽으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드리니 나를 받으소서
오직 주만 따라갑니다
오직 주만 높임 받으소서 

(후렴) 평생에 이름을 그의 선한심을
세상에 노래합니다
이름의 크신 능력 영원한 생명이
삶의 이유라

 

2.  소개

 곡은이권희 집사님이 작사 작곡한 곡이다이권희 집사님은 중학생 시절 우연히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원래 그는 록커가 되는 것이 목표였지만이후에 하나님의 음악을 하기 위해서 CCM 사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권희 집사님은 지금까지 10 이상 ‘예수’, ‘아버지’, ‘성령’ 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앨범을 발표해왔다대표곡으로는 ‘사명이라는 곡이 있다. ‘ 삶의 이유라라는 곡은, ‘성령 2’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성도의 삶의 이유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고백한 아름다운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1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pleasing to God--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 : 구약에서 제사에 사용되던 언어는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을 묘사하는데 사용됩니다몸이라는 것은사람의 전체를 의미합니다몸과 영혼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은  제물입니다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을 누립니다. ‘살아있다라는 말은구약의 동물 제사처럼 그들이 죽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영적 예배라는 것은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J. I. Packer, Wayne Grudem, and Ajith Fernando, eds., ESV Global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2012), 1597.

빌립보서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9 Therefore God exalted him to the highest place and gave him the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0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개역개정) 2:11 and 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NIV)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이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에게 그분의 높아지심에서 수여된 이름 칭호인 ‘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름은아버지께 받은 자신의 구속 사명에 대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치하하고 기리기 위해 주어진 이름입니다신인이신 예수님은, ‘ 부르심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드러나셨습니다.

R. C. Sproul, ed., The Reformation Stud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2015 Edition) (Orlando, FL: Reformation Trust, 2015), 2111. 

 

4. 찬양에 대한 묵상

곡은너무나 아름다운 가사를 통해서 성도의 삶의 목표를 선명하게 고백하고 있다성도의 삶은오직 주만 따라가는 것이며오직 주만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가우리가 분명히 있는 것처럼세상은 완전히 반대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오직 자기 자신의 욕심을 따르며오직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과는 완전히 반대로성도인 우리는우리의 몸과 영혼의 주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다그러므로나의 가장 작은 부분조차도오직 주님만이 주인이 되신다나의 어떤 부분도나의 욕심이 아닌오직 예수님이 높아지시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찬양을 부르며내가 땅에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오직 예수님의 뜻을 우리의 삶에 이루며 전부를 바쳐 주님만을 위하여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그리고그리스도의 선하심과 그분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며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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