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묵상하다가 문득 성경은 동양화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토리 안에 여백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여백을 억지로 채우지 않고 그대로 놔둡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도록 우리를 부르는 듯 합니다.
드디어 사라가 이삭을 낳습니다. 성경은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녀를 돌보시고 행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고 계속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긴 기다림을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했습니다. 기다림, 혹은 인내라는 말로는 더 이상 표현하기도 어려운 그 상황을 다 지나간 이후에, 드디어 약속의 아들이 태어납니다.
성경은 한 사람의 인생의 어떤 장면에서 꼭 필요한 부분을 드러냅니다. 아마도 이삭이 태어난지 삼 년 정도 지났을 때에,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립니다. 이때 이스마엘은 거의 십 칠세라고 스터디 바이블은 지적합니다. 제 생각입니다. 십 칠세의 나이라면 어린 아기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 나이가 아닐까요?
이 장면은 누가 과연 진짜 아브라함의 상속자인가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에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가는 장면이 무려 13절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삭이 태어난 그 감격적인 장면보다 더욱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과연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인가의 문제는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오랜 후에, 갈라디아서에서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게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 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자녀만이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시 확인하십니다. 단순히 집안에서 여인들의 권력 다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중요한 맥락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순간에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그에게 약속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그 긍휼이, 창세기 곳곳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했던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도 여기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기전에 우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이 사건을 통해서, 모든 생수를 민족들에게 흐르게 하실 하나님을 봅니다. 약간은 과장된 해석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햇빛이 타오르는 광야 지역에서 우물을 자신의 것으로 확실하게 소유한 아브라함의 마음은 한 없이 풍성해졌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소유하게 된 그 우물의 자리에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영원하신 여호와라는 표현이 바로 여기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다섯번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마음으로 여호와를 이렇게 불렀을까요? 혹시, 자신의 약속의 자녀를 향한 기다림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진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영원처럼 길었던 기다림을 넘어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에 대한 감격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을까요?
저를 긍휼히 여기시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팬데믹의 인내와 고통의 시간 속에서, 생수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인내를 요구하는 아픈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를 결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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