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된 안정감
/ 예레미야 8장 4-15절 주일 설교 (준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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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8장 4-15절 설교 원고
- 설교 기도
말씀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인자하심과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우리의 전부이시고 반석이시며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보호자이시고 주인이시며 생명이십니다.
오늘도 존귀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역사하셔서, 번개가 치게 하시고 바람이 불게 하시고 폭우가 내리게 하시고, 햇빛이 비추이게 하시고 따뜻함과 포근함이 있게 하시고 청명한 하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존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 나는 왜 그랬을까?
두 주 전에 금요 찬양 예배를 끝나고 늦게 집을 향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아주 조금씩 차의 창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저의 집 방향에서 번개가 치는 것이 보였지 번개가 상당히 심상치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차를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에서는 여전히 비가 거의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로컬 길을 오분 정도 가고 있는데 아내의 문자가 왔습니다. 셀폰을 슬쩍 보니까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여보 여기에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어 그러니까 교회에 더 있다가 와 지금 오지마” 라고 문자가 왔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차를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려갔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집에 너무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현재 제가 지금 가고 있는 그 시점에서는 거의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에이 뭐 별거 있겠어? 이대로 가도 괜찮겠지"
그런데 십 분쯤 더 내려가는데 갑자기 상황이 급작스럽게 변하였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심한 비는 처음 경험하였습니다. 바람과 비 때문에 사실상 앞이 거의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도로는 잠기고 굵은 나무 가지들이 부러진채로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덜컥 내려 앉았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저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은 것입니다.
무슨 정신으로 십분을 더 운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겨우 한 쇼핑몰로 들어가서 차를 세우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일어나 보니 빗길에 어디서 부딛혔는지 범퍼가 깨져서 차를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깨진 범퍼를 비닐로 묶어서 겨우 카센터까지 갔습니다. 차를 수리하면서 애꿎은 수리비를 내면서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제 자신을 향해서 굉장히 진지한 질문을 던진 날이었습니다.
-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한탄을 쏟아놓고 계십니다. 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극히 상식적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길거리에서 넘어져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면 거기에서 가만히 엎드려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벌떡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오거나 다시 그분을 진실하게 만나기를 거절하는 아주 완고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가? 자 한번 여기서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비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근본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여호와를 멀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그 부분에 대해서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 지금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주 주도적인 여론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8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8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그리고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가운데 지배적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혜롭다 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서로 속고 속이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8절에서 서기관이라는 사람은 율법을 손으로 그대로 배껴서 복사본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붓이 거짓의 붓이 되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교묘하게 바꾸어서 자신의 뜻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백성의 귀에 듣기 좋은 말로 말씀을 비틀어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서 그들이라는 것은 또 다른 종교 지도자인 선지자와 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들의 상처를 가볍게 치료하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마치 이런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지금 병원에 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자기 자신도 이유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몸의 상태가 안 좋아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진찰을 하고 있습니다.
몇가지 질문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저 자기가 먹던 진통제를 손에 쥐어 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라이센스가 있는 메디컬 닥터가 틀림 없는데 그리고 찾아온 그 사람이 사실은 암의 증상인듯 한데 적당히 치료 행위를 하고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찾아온 환자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의사가 괜찮다고 하니 마음이 편안한 것도 사실이고 진통제를 먹으면 아픈 것도 잠시 사라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말도 안되는 상황과 같은 것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다 라는 것입니다.
- 거짓된 안도감
그러므로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고 우상 숭배를 하고 자기들이 살고 싶은대로 사는 것 그것 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들은 지금 "거짓된 안도감"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안도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제 나라가 망한다고 선포하더라도 아직은 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래도 어느 정도 평안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어느 정도 괜찮은 삶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사는데 그리고 그들이 취미 생활을 누리는데에도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매번 안식일 마다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갈 때에도 종교 지도자들이 말할 때에 하나님의 성전이 여기에 있으니 우리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예레미야 같은 사람이 떠드는 이야기는 무시하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거짓된 안도감은 "나의 현실의 상황이 아직은 괜찮다" 라는 것에 기초해 있었습니다. 그 거짓된 안도감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점점 병들고 완고하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그들이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 거짓된 안도감 1
저는 학부는 행정학을 전공하였습니다. 행정학은 조직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거의 20년 전에 읽었지만 여전히 제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이 있습니다. "조직의 성쇠"라는 책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도쿄 대학에서 발행하는 책 중에 "취직 안내서"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 전후로 나온 이 책을 보면 명문 도쿄 대학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지망한 업종이 있습니다. 그것은 석탄 산업입니다. 그 당시 전 세계의 연료 구조는 석탄에 맞춰져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석탄 산업은 일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도 밀어 주었고 많은 혜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대는 반드시 바뀌는 것입니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석탄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로 주 에너지 원이 바뀐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불보듯이 뻔하게 다가오는 그 미래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현재의 모습을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석탄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거짓된 안정감을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앞으로도 석탄 우대 정책이 계속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정부조차 여론 때문에 석탄 산업을 계속 밀어 주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수입하는 석유에다가 추가로 관세를 부과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까지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거짓된 안도감에 사로잡힌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한 석탄 산업은 순식간에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석탄 산업은 이미 일본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공동체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이 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망하고 있는 적나라한 모습을 오늘 말씀에서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10절 하반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지위와 나이와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이 거짓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현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이들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분명한 진노 앞에서 이들이 보이고 있는 집단적인 태도입니다.
14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 “14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정말 놀랍고도 충격적인 반응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주목할 부분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모일지어다 라고 말하면서 이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시점에서 함께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고 함께 그분을 찾는다면 이것보다 더 복된 결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단은 무엇인가? 같이 죽자 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저 자포 자기의 상태로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15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5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강이라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주입시키던 가짜 평강입니다. 나에게는 지금 아무런 문제가 없다 라며 스스로 붙들고 있었던 거짓된 안정감입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여호와의 진노가 닥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거짓된 안정감을 생각하고 붙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현실을 인정하고 여호와께 돌이켜야 하는데 여호와께 돌아가기 보다는 차라리 단체로 죽고 말겠다는 영적으로 황당하고 어리석고 완고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 거짓된 안도감 2
팬데믹이 마무리되고 이제 모든 것이 정상화 되는 시점에서 한 성도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사실 누구셨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분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저에게 전해주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략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이번에 팬데믹으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예배에 빠지고 교회에 안 나와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지는 않더라구요” 제가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언급한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마음에 은밀하게 숨겨진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짓된 안정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지금 당장 벼락이 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잘먹고 잘 살고 별일이 없기 때문에 나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 생활 대충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도 당장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봐야 하는 것이지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의 안정감을 얻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혹시라도, 지금 내가 건강한가? 지금 내가 별일 없는가? 지금 내 사업이 잘되고 있는가? 지금 내 자녀가 잘되고 있는가? 라는 것이 기준이 되어서 나의 삻을 그것으로 평가하며 그것을 나의 안정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안정감 속에서 어느덧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기준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지금의 나를 기준으로 나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반드시 오는 미래
베드로후서 3장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특징이 무엇인가? 자기 마음대로 방탕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온다고는 했는데 그분이 오셔서 심판하신다고 내가 듣기는 들었는데 여전히 나의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라고 말하며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자신의 평탄한 삶에 취해서 거짓된 안정감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조롱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배 안드려도 벼락도 안 떨어지는데 굳이 예배 드릴 필요 있느냐? 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의 한결같은 모습입니다.
인류 역사 초기에 노아의 방주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방주를 최소 70년 동안 지을 때에 그를 찾아와서 방주에 태워달라고 말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과 39절 말씀입니다.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늘로 부터 비가 갑자기 쏟아지기 전까지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현재의 안정감에 사로잡힌 노아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조롱하면서 자신의 일상의 삶을 사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이러한 것들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금 대출 이자가 몇퍼센트인지, 내가 지금 무슨 아이템을 골라야 사업이 번창할지, 내가 어떤 식당에 가서 먹어야 최고의 식사를 할 수 있을지, 내가 누구를 만나서 데이트를 해야 내가 즐겁고 내 인생이 성공할지, 이러한 것들에만 모든 관심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로 살다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 심판이 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할 때 마다 이 말씀이 제 마음에 더 깊이 그리고 더 진실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많은 장례식에 가고 심지어 장례 예배를 집례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저의 타락한 본성은 거짓된 안정감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자주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5절에 보면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고집하다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구약의 용례들을 찾아보면 고집부리는 완악한 마음에 사용되기도 하고 혹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용기로 가득찬 마음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지어 기독교 인이라 자처하는 이들도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잊어버리고 자신의 현재의 평탄한 삶에 취해서 거짓된 안정감에 사로잡힌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하셨지만 그건 아마 농담일꺼야, 지금까지 나에게 아무 일도 없었으니 난 안전해, 다른 사람은 죽을 지 몰라도 나는 최소 30년은 더 살꺼야, 이런 거짓된 안정감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라는 것입니다.
- 여호와의 긍휼을 바란다는 것
오늘 말씀 속에서 참으로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완고한 백성을 부르실 때에도 여전히 "내 백성" 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7절에 말씀하실 때에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호와께서는 이들이 완전히 망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라시는 것은 이것 한가지입니다. 그들이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나는 지금 평안하니 아무 문제가 없다 라는 거짓된 안정감을 버리고, 누군가가 각색한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성찰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6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분의 귀를 기울여서 찾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 앞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깨닫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안정감에 빠져서 방탕하고 교만하게 살고 있던 사람이 드디어 깨닫는 것입니다. "오 주님, 제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이것은 마치 탕자의 비유를 구약의 버전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허랑 방탕하게 살던 그 탕자가 가진 것을 다 잃고 가장 비참한 신세가 되어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바로 이것이야 말로 한 사람의 영적인 죽음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넘어가는 가장 결정적이고 유일한 터닝 포인트 전환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 수치스러운 죄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살펴보니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 생각보다 훨씬 더 수치스러워서 자신의 회개조차 받아들여질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하나님께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라고 모든 백성이 결단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야 말로 인간의 그 복잡한 내면을 너무나 탁월하게 묘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자포자기와 절망과 자기 학대와 수치와 분노가 뒤엉켜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이키기에는 자존심이 너무나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에게는 그 어떤 소망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하나님을 떠나서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끝까지 버티다가 죽는 것이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워준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범죄 이후에 자신들의 비참함을 깨닫고 구멍이 숭숭난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어설프게 자신들을 가린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설령 자신의 수치를 스스로 깨닫고 괴로워하더라도 가릴래야 가릴 수도 없는 그 비참한 모습이야 말로 모든 인간이 처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그렇게 느끼신 적이 없으십니까?
- 어린 왕자
이러한 죄인의 근원적인 수치스러움을 소설 어린 왕자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어린 왕자가 한 별에 갔더니 술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옆에는 이미 마신 술병과 아직 마시지 않은 술병이 가득했습니다. 어린 왕자가 물었습니다. 아저씨 여기에서 뭘 해요? 술을 마신다
어린 왕자가 물었습니다. 술은 왜 마셔요? 잊어버리려고 마신다 그 술꾼이 너무 안쓰러워서 다시 물어보고 있습니다. 무엇을 잊어버려야하는데요? 술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어 부끄러운 걸 잊어버리려고 그러지, 어린 왕자는 다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끄러운데요? 술을 마시는게 부끄럽지 술꾼은 이렇게 말하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죄인이 경험하는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다시 술을 마십니다. 죄를 짓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운데 그러나 그 부끄러움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또 반복해서 죄를 지으면서 악순환 속에서 스스로를 망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 내가 돌아 올 수 있는 이유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그들의 고집으로는 그들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봐도 내가 너무나 한심하고 부끄러운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지혜가 되신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의 댓가를 지불하시고 죄를 지은 우리가 마땅히 당해야 하는 모든 수치를 십자가에서 홀로 짊어지셨습니다. 나라는 사람이 당해야 하는 비난과 조롱과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예수님께서 가져가시고 십자가에서 없애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 말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가장 완전하고 가장 아름다운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의 안정감과 우리의 소망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십자가를 의지하고 붙들고 주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 바로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원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 내가 살아갈 이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현재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게 하시는 참된 지혜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과 12절입니다.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우리가 거짓된 안정감을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노아의 시대에도 예수님의 시대에도 지금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된 안정감을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기 시작할 때에 다시 말해서 내가 의지하던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나의 신앙을 회복하려 할 때에 세상은 우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그 사람은 매우 어리석어 보일 것이며, 앞 뒤가 꽉 막힌 사람으로 보일 것이며, 지나치게 신앙만 생각하는 답답한 사람이라며 조롱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 말씀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된 안정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변함없이 포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의 재림과 그분의 심판과 그분의 구원을 기대하는 자만이 “현재의 나”와 “현재의 이 세상”이라는 거짓된 안정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붙드는 자만이, 설령 내가 이 세상에서 내가 안정감을 느끼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완전히 넘어지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령 바로 내일이 우리의 삶의 마지막 날이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칭찬과 천국의 상급을 기대하며 지금 이 순간을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주리지 않는다
1851년에 앨런 가디너라는 영국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타고 가던 배가 남아메리카 최하단에 있는 외딴 무인도에 난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시체 옆에서 일기를 발견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시편 34편 10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고 그의 일기의 마지막은 이것이었어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압도 되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는 문자 그대로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안정감도 가질 수 없는 가장 극한의 상황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때 그가 발견하고 끝까지 붙든 것은 무엇인가? 여호와를 찾는자, 여호와를 구하는자,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담은 자, 오직 여호와를 자신의 절대적인 안정감으로 삼은자야 말로 모든 좋은 것이 넘치는 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서 안정감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오늘도 거짓된 안정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를 위하여 주님의 사랑의 팔을 벌리시고 내 백성아 너는 나에게 돌아오라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의 삶의 매 순간마다 사랑스럽고 부드럽고 엄위하신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미 나를 찾아오시고 사랑하시며 함께 하시는 그분을 더욱 간절하게 더욱 새롭게 사모하고 찾기를 원합니다. 그 어떤 것도 흔들 수 없는 영원하신 나의 주님만 의지하여서 평생을 견고하게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함께 기도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이 아닌 현재의 제 자신과 상황을 쳐다보고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잃어버린 어리석은 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 저의 마음을 돌이키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악 된 삶을 돌이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주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저의 안정감과 모든 것이 되게 하시고 주님 주실 영원한 생명과 칭찬과 상급을 바라보며 저의 삶을 진실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우리의 모든 죄의 수치를 친히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를 인내하시며 부르시고 안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나를 변화시키심으로 영원하고 참된 소망을 품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교통하심이, 이제는 내가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내려 놓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을 붙들고 살아가기 원하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의 머리 위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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