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굉장히 긍정적인 편입니다. 하지만 저의 가장 깊은 내면은 항상 허무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준비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내가 뭔가 말한다고 해서 무엇인가 바뀔까? 과연 성도님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기나 할까? 이런 허망한 생각들과 늘 싸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준비합니다.
어쩌면, 설교라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설교자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분노하였던 사람들이 허다 없었는데, 하물며 저의 설교일까요?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고, 그 말씀이 크게 들리고 천둥처럼 느껴지고, 그 말씀으로 인해서 저의 생각과 삶이 가장 먼저 변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설교자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의 목회 가운데 저 하나만 변화시켜도, 삶의 큰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를 세우시고, 그의 고민과 아픔과 생각과 추구하는 것들을 하나로 종합하셔서 그분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정성으로 설교를 준비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 진실하게 변하고 싶은 저의 마음을 담은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제 자신의 내면을 향하여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선포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 사무엘상 12장 16-25절 설교문
오늘의 말씀은 12장의 앞 부분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앞 부분에서는 사무엘의 연설이 나옵니다. 왕이 세워지는 대관식의 자리에서 사무엘이 백성 앞에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왕이 세워졌음을 선포하고, 자기 자신은 마지막 사사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일 하나 없이 섬겼다는 것을 온 백성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하시기를, 이미 여호와께서 왕으로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여호와께서 백성을 지금까지 지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구한 것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백성에게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이 세워진 이후에라도,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그들을 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전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16절에서 18절의 말씀인데 “하나님이 주신 징조” 그리고 둘째로는 19절에서 마지막 절까지인데 “백성의 진실한 회개”라고 소제목을 붙일 수 있겠습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함께 말씀 나누기를 원합니다.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맥락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온 백성이 큰 기쁨 속에 머물러 있는 때입니다. 백성이 그토록 바라던 왕의 제도가 성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울을 세워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거기에 동의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온 백성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있어서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사울은 암몬 사람 나하스와 병사들이 쳐들어 왔을 때에 그들을 물리치면서, 진정한 왕의 면모까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최종적으로 길갈에서 왕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막힌 타이밍에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시는 것일까? 백성의 목전에서 행하시는 큰 일 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혹시 왕이 세워진 것을 축하하시는 축포라도 쏘시려는 것일까? 라고 어쩌면 백성들이 엄청나게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이렇게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17절에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다시 말해서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기가 아니냐?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무엇을 구한다고 하는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큰 우뢰들과 비를 보내 달라고 간구하겠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축제의 분위기, 다시 말해서 왕이 세워지고 대적을 물리치고 모두가 기뻐하는 이 시점에 있어서 무슨 날벼락을 예고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무엘은 눈치도 없고 백성에게 앙심을 품은 속이 좁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무엇입니까? 18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에 큰 우뢰와 비를 내리심으로 온 백성은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사무엘이 이렇게 행한 이유가 무엇인가? 17절 하반 절에 보니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백성이 언제 부터 왕을 요구를 한 것입니까? 사무엘상 8장에서 왕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한참 흘렀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과정 중에서 백성들도 이미 마음에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무엘도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것을 어떻게 했습니까? 은근히 덮고 지나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어떤 비밀처럼, 백성은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고 슬프게하고 그분에게 큰 반역을 저질렀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그저 덮고 지나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결국 짚고 넘어가시는 것입니다. 백성은 지금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의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것을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덮고 넘어가려 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결국 하나님께서 날벼락을 치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하늘의 징조가 보이니까, 그제서야 백성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진실하게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니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한 사람이 그리고 한 무리가 자신들의 죄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것을 정말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변 분위기가 좋으면 그것으로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서 자신들은 문제가 없는 사람들인 것 처럼, 그렇게 군중 속에 묻혀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죄인의 본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백성들은 죽을 것 같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아직 한명도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실 백성의 회개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이들에게 더 화를 내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여호와 대신에 왕을 구한 것은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처절한 반역이요 모욕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들이 면전에서 아버지에게 침을 뱉으며, 당신은 더 이상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대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20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좇는 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죄인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본능적으로 이제 내가 하나님을 더 멀리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가린 것 처럼, 죄인의 특징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무엇이라고 격려합니까?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감히 여호와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 그분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여전히 마음으로는 부끄럽고 죄송스럽고, 그런 죄인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찾을 수 있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2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슴 아픈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버린다" 라는 단어입니다. 사무엘상 8장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아 백성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우리 중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받은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하나님께서 경험하는 이 경험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백성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하며 덮고 지나가는 그저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좋아하고 즐기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들을 걱정하시고 배려하시며, 비록 그들은 여호와를 버렸을 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위대한 이름을 걸고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 라고 충격적인 사랑의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여호와처럼 백성을 품는 사무엘의 모습 때문입니다.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 말씀은, 기도를 강조하는 말씀으로 참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의 문맥을 생각한다면 어떤 문맥인가? 사무엘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겠다, 너희를 포기하지 않고 가르치겠다 라고 선언하는 이 대상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과 사사인 사무엘에게 큰 실망감과 상처를 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뿐 아니라 사무엘 자신도 사실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40년 넘게 사사로 섬기는 동안에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모두가 인정할 만한 탁월한 사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이스라엘 장로들이 그를 찾아가 아들들의 문제로 면전에서 모욕을 하였습니다. 그가 여전히 사사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도력 따위는 필요 없으니 왕을 세우라고 윽박지르던 것이 바로 이 백성이었습니다. 사실 이 백성은 사무엘에게 정식으로 사과한 적도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그것만을 이루는데 관심이 있고, 자신의 영적 리더가 상처를 받았는지 아닌지 따위는 이들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도님들께서 사무엘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무엘은 이런 백성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맡은 바 모든 역할을 끝까지 감당 하겠다고, 이들을 영적으로 인도하며 돌이키며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그렇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 어떤 왕이라도 백성이라도 끝까지 여호와를 따르기를 거절한다면 멸망한다고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떤 부분이 가장 크게 마음에 남으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어떤 것을 많이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삼위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워간다면 배우는 것 그 행위 자체로 인하여서 나의 삶이 변화된다고 그렇게 일대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배우고 읽었다는 그것 자체를, 자신의 신앙의 성숙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목회를 하면서 크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변화라는 것은 얼마든지 별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과 지식과 배움이라는 것에 나 자신을 진지하게 비춰보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을 정말 내 진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겉 모양만 그럴듯한 신자로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야고보서 1장 21절은 정말 놀라운 말씀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넷 바이블 영어 성경은 “humbly welcome the message”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안에 이미 심겨진 말씀들이 있는데, 진짜 문제는사람들이 그것을 진정으로 자신을 낮추며 환영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 속에 큰 문제가 존재하고 영적으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저와 성도님들은 어떤 상태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혹시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비추신 그분의 뜻을 은근히 무시하면서 알고는 있지만 크게 환영하지는 않는 상태로 미적미적하면서, 그분이 아직 날벼락은 안 치셨기 때문에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거기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간절히 바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읽고 묵상할 때에 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것이 마치 거대한 천둥과 번개처럼 우리에게 느껴지며 그 말씀을 두손 들고 환영하며, 우리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려내며, 우리의 잘못된 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며, 그렇게 진실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하나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마태복음 5장 46-48절입니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모든 사람은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지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자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족을 너무나 사랑해서, 자기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들 모두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자기가 친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주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친한 사람이 아파서 그 사람에게 음식을 해다 주면서, 나는 참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투자라고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이며, 오늘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바로 이 기도로 밀어 넣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제 노인이 된 사무엘에게 있어서 조차, 하나님께서는 그가 영적으로 더 성장하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을 능가하는 영적 지도자는 성경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쩌면 사무엘의 영적인 성숙과 지도력이라는 것은, 바로 오늘의 본문의 이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백성이 그를 버렸고 그를 모욕했고 그를 비난했고 그를 무시했지만, 그러나 사무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품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쉰다면 그것이 죄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 장은, 사무엘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놀라운 장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의 반역과 무지와 비난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시며 여전히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되는 놀라운 은혜의 장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의 진정한 영적인 성숙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지극히 평범하고 세상적인 사랑에서 벗어나서,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조차 품고 사랑하는, 위대하고 혁명적인 사랑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는 증거이며, 주님께서 그런 우리를 귀히 여기실 것이며, 잘했다 우리에게 칭찬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놓고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말씀이 천둥처럼 여겨지기 원합니다. 그 말씀을 우리의 겸손한 마음으로 환영하기 원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덮고 지나가던 죄들이 드러나길 원하고, 아버지 앞에 진심으로 나 자신을 내어 놓길 원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고쳐지며 변화되기 원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성숙한 자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서 베푸시는 그 사랑의 모습이 저의 사랑의 모습이 되길 원합니다. 어렵고 연약한 이들을 돕게 하시고 나를 대적하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놀라운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위대한 믿음의 길로 저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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