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십자가
/ 예레미야 15장 10-21절 주일 설교 (준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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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 예배하게 하시며 존귀한 주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올 때에 오직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너무나 어리석어 우리의 귀가 닫힐 때에라도 성령의 충만함을 새롭게 허락하시며, 우리의 영혼 가장 깊은 곳으로 주의 말씀을 넣어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복된 시간이 되기 원하오니,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관계의 깨어짐
영화 중에 많이
등장하는 단골
소재는 시간
여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과거에 꼭
바꾸고 싶어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그 선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성도님들께서는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가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돌아가고 싶은 그
날 그
선택의 순간이
있으십니까?
⁃ 전도사의 선택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저의 모 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스물 일곱의 나이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전체 찬양팀을 책임 지고 있었고 저녁 예배 찬양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청년부 찬양 인도는 저보다 두살이 많은 형님이 섬기고 계셨습니다. 그분도 그 교회에서 잔뼈가 굵은 아주 영향력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안 좋은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청년부 찬양팀 안에서 편애가 매우 심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또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당시에 책임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저보다 어린 동생들이 저를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았을 때에 제가 바로 잡아야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첫째로는 제가 대해야 하는 상대가 저보다 연장자라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실상 그 교회에서 찬양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고 실력적으로도 인맥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찬양팀에 문제가 있다
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았지만
정작 거의
한달을 고민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더 큰
고민과 어려움이
제 마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그분과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것인가? 또
이 후에
나의 사역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혹시라도
내가 오히려
공동체에서 고립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깊은 두려움
때문에 하루에
몇번씩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내가 굳이
이 문제를
꺼내서 공론화
시킬 필요가
있는가? 계속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였습니다.
⁃ 예레미야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까? 물론 그의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지만 사실 저는 예레미야라는 한 사람에게 더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아마도 스무살 부터 거의 40년 동안 선지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라는 것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늘 말씀 10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10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번역했습니다. “아! 어머니
원통합니다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그가
경험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다
라며 아픔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아픔의
이유는 무엇인가? 10절
마지막에 말하는
것처럼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라는
것이 그의
고통의 원인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 예레이야와 관계
어떤 분들은 오늘 말씀을 보면서 그의 아픔을 이렇게 과소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정도 어려움 쯤은 버텨야지 선지자가 왜 이렇게 약한가?”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온 나라를 통틀어서 예레미야를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고 결국 망한다 라는 그의 메시지 때문에 그는 실제로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인간 관계의 문제는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가장 연약한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소명을 주실 때에 그는 1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특별히 나이가 어린
자신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괜히
나이도 어린
자신이 나섰다가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을 겪을까봐
처음부터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그가
예상한대로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평생동안 사람들로
부터 비난과
정서적인 학대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단절
영국에서 두번이나 올해의 저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요한 하리 라는 사람은 10대 때 부터 항우울제를 복용한 우울증 환자입니다. 그는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면서 우울증의 원인에 대해서 파고 들어가면서 책을 썼습니다. 그는 사실상 현대인의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은 "단절" 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타인과의 단절"이지 거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70년대 중반에 신경과학자인 존 카치오포는 자신의 지도 교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지도 교수는 인간을 바라볼 때에 마치 인간이 외딴 섬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만이 마치 우울증의 모든 원인인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파치오포는 이것에 반박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일상 생활을 하는 동안에 심장 박동을 측정하면서 그것의 변화가 있을 때에 얼마나 외로움을 느끼는지 혹은 친밀감을 느끼는지 기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낀다고 기록했을
때에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의 농도가 치솟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준은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일을
겪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예레미야가 생각이 났습니다. 40년
동안 모든
친밀한 관계가
단절되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예레미야가 어떻게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위로
그런 맥락에서 참으로
감사하고 놀라운
것은, 내가
왜 태어났는가 한탄하면서 괴로워하는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책망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오히려 부드럽게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시면서 세상
모든 사람이
너를 등지고
버릴 지라도
나는 여전히
너를 위하고
있다 라고
강조하십니다.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하겠다 너에게
복을 주겠다
라고 약속하십니다.
⁃ 여전한 사명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예레미야를 위로하시고서는 그에게 다시 한번 사명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13절과 14절 까지입니다. 유다 백성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유다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재산은 탈취를 당하게 될 것이며 14절에서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유다를 사를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님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좀 너무하신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기는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 소리치는데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그냥 심판의 선언의 수위를 낮추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나라가
위기를 겪겠지만
완전히 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고
예레미야가 말
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을텐데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물러설 마음이
전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 예레미야의 고통의 이유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는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겠는가? 그는 아마 화가 많이 났을것입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해도 해도 너무 하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드디어 토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이 말씀에서 진하게 배여 있는 그의 정서는 무엇인가? 여호와를 향한 회의감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신다고 처음부터 약속하셨지만 상황은 그가 핍박 받는 것으로 계속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부분은 후반부입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에서 예레미야의 그 깊은 내면을 잘 들여다보기를 원합니다. 그가 지금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예레미야는 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졌고 아마도 심각한 우울증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단계 더 깊이 내려가서 그의 내면을 살펴보니 그는 지금 너무나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선지자의 역할을
하고 보니
그것은 무엇인가? 그
메시지 때문에
그가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심각한
정서적인 손해를
봐야 했습니다. 그는
수치를 당하고
모멸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시키셨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런 아픔을
겪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 예레미야의 하소연
그래서 17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마치 이런 장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이 즐겁게 파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이 깊도록 사람들은 즐겁게 웃으면서 서로 대화를 하고 즐기고 있었어 그런데 예레미야가 홀로 길을 걸어가다가 그 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는 멀리서 사람들의 실루엣을 멍하니 바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살게된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른다는 것이 결국 이런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가장 심한 모욕 중에 하나입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2장 13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다 라고 말했던 예레미야가 오늘의 탄식 속에서는 주님은 마치 물이 다 말라서 나를 속이는 샘과 같습니다 라고 완전히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정말 실망한 것은 단순히 사람과의 관계의 단절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고 이런 손해를 보았고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이런 여호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서 이렇게까지 고통 받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수모를 참야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자신이 실제로 하나님의 종으로 경험하는 그 현실이 너무나 거리가 있다고 느껴진 것입니다.
도대체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여호와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정신적인 어려움과
혼란 속에서
결국 내뱉지
말아야 하는
말을 내
뱉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기꾼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크게
실망했습니다”
⁃ 돌아오라
놀랍게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19절
전반부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여전히 그분의
따뜻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마음을 돌이키라
그리고 헛된
것을 버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무엇이 헛된 것인가?
지금 예레미야의 모든
감정을 이해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들은 모두
헛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모욕을 받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며,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이렇게까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도 견딜
수 없다라는
자기만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신앙이라는 것은 헛되다 라는
것입니다. 나
중심적인 내가
판단하고 내가
생각하는 선지자의
역할과 신앙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요구하시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자리로
돌아오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시험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광야로 들어가서 금식하셨습니다. 그때 마귀가 그를 찾아와서 시험하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곳으로 가서 세상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4장 9절 말씀입니다. “4: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라고 마귀가 이야기하였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자신에게 굽히고 절 한번만 제대로 한다면 예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가장 쉬운 길로 가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그 끔찍한 고난을 그분의 신적인 권능으로 이미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을 마귀가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큰 고통과 억울한 일 따위는 다 피할 수 있다고 거짓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엄청난 유혹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10 ...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유혹 앞에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히려 사탄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시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동등되신 분이셨지만 자신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다시 말해서 오직 주님의 방법인 십자가에 순종하겠다고 마귀에게 선언하시며 그를 물리치시는 것입니다.
⁃ 베드로의 꾸짖음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인생 통틀어 가장 귀한 고백을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이 고백을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베드로가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2절 말씀입니다.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무슨 의미인가? 베드로는 그 당시 다른 사람들이 생각했던 바로 그 방식대로 메시아는 억울하게 죽는 존재가 아니라 당당하게 승리하고 인정 받고 높아지는 존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정말 확실한데 왜 십자가를 져야 하냐며 오히려 감히 예수님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마태복음 16장 23절 말씀입니다. “16:23 ...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을
듣고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만큼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호되게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십자가의 희생과
억울한 길을
걸어가기를 거절하며
심지어 그것을
가로 막고
비난하는 자야
말로 사탄이며
그것은 거짓
신앙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 빚진 것이 없으신 예수님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10절 마지막에 예레미야의 탄식이 새롭게 들렸습니다. “10 ...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빚이 있으십니까? 혹시 억울하게 독촉 전화를 받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마치 예레미야의 심정이 그런 것입니다. 자신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취급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사람들이 하는 가장 큰 착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뭔가 아쉬워서 혹은 뭔가 책임을 지기 위해서 혹은 우리에게 뭔가 얻을 것이 있어서 찾아오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타락과 망가진
세상에 대해서
도대체 하나님이
무슨 책임을
가지고 계십니까? 오히려
그분의 형상을
따라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진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했고 그분을
대적했고 그분에게
상처를 준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의
멱살을 잡고
너는 이
끔찍한 빚을
갚고 결과를
책임지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 값을 치르신 예수님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섬김 받으시기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지 않아도 되었지만 삼위 일체 하나님의 약속과 결단과 그분 자신의 사랑과 순종으로 인하여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온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마치 예레미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고통과 자신의 감정과 버림 받는 것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과 그 모든 것을 너무나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26:39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단 한걸음도 물러서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단호한 기도한 것처럼 기꺼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그분께서 마치
자신이 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조롱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마치
자신이 흉악한
죄인인 것처럼
죄의 댓가를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갚아야 하는
죄의 빚을
그분이 다
해결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감히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모여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라
칭함을 받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적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 공동체가 답인가?
앞에서 말씀드린 요한 하리의 책을 읽어보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서 그가 찾는 답은 공동체 안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관계에서 단절되었을 때에 진실한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진실한 공동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저는 오늘 말씀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라면 19절의 마지막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예레미야가 그토록 갈망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따뜻한 인간 관계를 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들에게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시는 것입니다. 지금 그 공동체는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잠시 돌아가서
얄팍한 인간
관계를 누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너에게 돌아와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타락한
백성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제대로
들어갈 때에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병든 공동체
그러므로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대단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토록 다시 돌아가고 싶던 그 이스라엘 공동체는 지금으로 치면 병든 교회라는 것입니다. 진짜 교회 혹은 건강한 교회였다면 예레미야가 최고로 소중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았겠지만, 병든 교회에서는 진리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레미야는 필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현대 사회에서 능력이 없고 학력과 인맥과 돈이 없으면 무시 당하는 것처럼 그들은 예레미야를 무시하고 경멸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유다 백성은 견고한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성전도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도 있었고 예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마음에 진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넣고 힘써 붙들고 약자를 위하여 기꺼이 삶을 헌신하며 인내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오직 자기와
친한 자들과
하나가 되고
더 나아가
약한 자를
무시하고 학대하며
속이고 거짓말
하고 빼앗는데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예레미야의 소외와 그의 절망과
고통을 그
누구도 눈
여겨 보거나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진정한 변화
그러므로 공동체의 진정한 변화와 소망이라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진리가 그 안에 들어가야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기꺼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얽어매고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하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진정한 공동체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칭하실 때에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고아와 과부야 말로 가장 연약한 자이며 소외 받는 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처절하게 무시 당하는 이 세상에서 공동체 안에서 과연 누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인가? 오직 십자가를 마음에 품은 사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분의 희생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우선
순위를 따지자면. 변화의
순서는 공동체가
변하고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해야 공동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모여서 공동체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나라는 존재를
뛰어 넘어서
십자가를 자신의
삶 가운데
살아가는 바로
그 한
사람 때문에
그 공동체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한 사람이 변화시킨다
저는 오늘 예레미야의 상황을 보면서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생각이 났습니다. 로마 교황청이 베드로 성당의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면죄부라는 것은 이미 죽은 어떤 사람을 위해서 돈을 내면 그 사람의 영혼이 연옥을 벗어나게 된다는 돈으로 구원을 사는 참담할 정도로 비 성경적인 주장이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서 성경을 버리고 사람을 속이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일어난 것입니다. 이 면죄부라는 끔찍한 교회의 주장으로 인해서 영적으로 고아와 과부와 같은 사람들 성경을 잘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은 영혼을 유린 당했습니다. 루터는 사제였기 때문에 면죄부에 대해서 설교를 해야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맞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이것을 항의하고 글을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95개조의 항의문을 작성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보름만에 독일에서 퍼지고 6주 만에 온 유럽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것은 그 당시에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교황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1521년 4월 18일에 왕국의 회의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단으로서 심문을 받게 됩니다. 교황의 대리인으로 온 알레안더는 루터의 글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그 내용을 그대로 계속 주장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한번
루터가 받은
압박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를 지지하던
많은 이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레미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실상
그는 전
세계를 상대하며
비난과 대적을
당하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저 그가
모든 것을
눈감고 면죄부에
대해서 침묵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씀에
따라 교회를
사랑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이 자리까지
끌려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내리는 결정은
그의 운명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 루터의 결단과 영향
그가 느끼는 정서적 압박이 얼마나 심했던지 루터는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동일한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고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로잡힌 바 되었습니다. 나는 철회할 수도 없거니와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양심에 불복하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를 도우시옵소서 아멘"
그의 말을 듣고서 한쪽에서는 탄식이 나오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환호가 터져나왔습니다. 루터는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신학을 주장했고 그가 은혜 받은 대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루터는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의 마지막 두 항목을 이렇게 장식하는 것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난과 죽음과 지옥까지 통과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안전하게 보장된 평화보다는 수많은 시련을 통해 하늘에 들어간다는 것을 더욱 굳건히 신뢰해야 한다” 라고 적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미래, 자신의
감정, 자신의
인간 관계, 혹은
자신의 처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앞세우면서 기독교의
역사를 새롭게
세운 인물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교회를 성경적으로 개혁한 인물이며 바로
지금 우리가
예배 가운데
믿고 선언하고
고백할 때에 "주의
말씀"이야
말로 그
어떤 인간의
주장과 선언도
뛰어 넘는
유일한 진리이며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역사적인
토대와 근거를
제시한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 내가 했던 결단 과연 잘한 것일까?
성도님들께서는 진정한 신앙의 성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마치 어떤 것을 계속 배우고 공부해 나가는 것 그 자체가 혹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 그 자체가 신앙의 성숙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것은 매우 소중하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성숙은 자신이 배우고 익힌 십자가의 길을 애써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다른 이유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자신이 경험하는 그 모든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나 자신을 바꾸고 내가 속한 공동체를 바꾸어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설교의 앞에서 말씀드린 저의 경험은, 저의 어린 목회자 시절 가운데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제가 안하고 싶었고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제가 그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자리를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섬기는 것은 그냥 단체가 아니라 주의 몸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용기를 내어서 사람들을 소집했습니다. 찬양팀과 관련된 모든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야기를 꺼내는 제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누구누구 형제님 제가 이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사실입니까? 그리고 저는 그런 부분들이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은 당사자가 굉장히 당황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이야기가 다 맞았기 때문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자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분이 행동하던 많은 부분들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찬양팀 멤버들이 힘들어 하던 많은 부분들이 해소가 되었습니다. 동생들이 찾아와서 감사를 표하며 진심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사실 그분은 오랫동안 저와 친분이 있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 하나로 인하여서 관계가 많이 틀어졌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관계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상
제가 그분을
통해서 누리던
모든 것들을
다 잃었습니다. 저는
아주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만약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항상 결론은
똑같이 끝납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때
잘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 결론
말씀을 맺기를 원합니다. 오늘 예레미야는 너무나 심각한 외로움과 고통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억울하게 당해야 했던 그 상황들이 하나님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토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으시며 그를 위로하시며 달래시며 너는 다시 나에게 돌아오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고 자신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것 그것이 선지자의 일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 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모든 상황은 마치 성자 하나님께서 당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분은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기꺼이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거침없이 전진하며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스러운 교회가 만들어지고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걸어가시기를 바합니다. 그리하여
나 자신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두움과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주님의
큰 기쁨이
되시며 온전한
빛으로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통성 기도
이 시간에 통성으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먼저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저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때로는 제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들이 있습니다, 더 이상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없을 것 같은 절망도 경험합니다, 주님께서 위로하여 주시고 저에게 새롭게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저도
걸어가기 원합니다, 제
자신을 변화시키며, 공동체를
변화 시켜
나가기 원합니다, 오직
말씀에 매인
사람이 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저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시며 통성으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낙심한 우리를 넉넉히 위로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우리에게 새롭게 용기와 능력을 부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과 인도하심이 이제는 나와 공동체를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더 걸어가기 원하는 모든 믿음의 성도님들의 머리 위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리옵나이다, 아멘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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