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8일 화요일

"설교의 요소"와 "영역 구조"에 대한 고찰 - "성경, 설교자 그리고 청중"의 만남 / 마 24:15-31 주일 설교를 준비하며

 




* 설교는 참으로 "신비롭다"

설교는, 하면 할수록 신비로운 듯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두렵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을 통해서" 선포된다는 것은, 설교자를 한 없이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자리 자체"가, 저에게는 너무나 큰 무게입니다.
 
저는 아주 오랫동안 제 설교가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더 열심히 할 수 없을만큼 이미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거듭할 수록, 막연했던 것들이 더 선명해지고, 더욱 발전해야 하는 부분들이 보입니다. 그런 부분을 발견할 수록, 더 능동적으로 제 자신을 굴복시키고 훈련하게 됩니다.

*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교를 깨닫다"

최근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갑자기, "하나의 거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설교의 요소들과 구조"에 대한 아이디어입니다.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위의 그림"입니다. 

저는 설교학 전공이 아니지만, 설교에 대해서 많이 고민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런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성경 본문을 놓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과연 설교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함께 나눕니다. 

* 설교에는 "성경"이 들어간다

이번에 준비한 설교는, "마태복음 24장 15절에서 31절"까지 입니다. 다니엘의 예언으로 바탕으로 한 예수님의 예언과 미래에 닥쳐올 마지막 시대를 한꺼번에 다루는 사실 굉장히 복잡한 본문입니다. 하나하나 파고들면 주해적인 내용이 끝이 없고, 또 한편으로는 마지막 때를 다루는 본문이기 때문에 예민한 본문이기도 합니다. 

자 이렇게 복잡하고 난해한 본문을 과연 어떻게 접근하고 설교해야 할까요? 우리는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맞는 말입니다. 성경이야 말로 설교의 가장 중요한 것임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만약에 설교를 이루는 요소가 "성경이 전부"라면, 사실 성경만 봉독해드리고 설교자는 다시 내려오면 됩니다. '아무런 해석'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설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 설교에는 "설교자"가 들어간다

그렇다면 드디어 여기에서, 설교의 또 다른 요소인 "설교자"가 등장할 차례입니다. 성경은 설교자를 통해서 "해석"되어집니다. 설교자는 성경을 충분히 "묵상"하고 "주해"하면서 그 내용을 밝히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과 설교자 사이"에는 "주해"가 존재합니다. 

주해라는 것은 결국 "주관성"이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최대한 좋은 주석들을 살펴보고 공통점들을 찾지만, 결국 성경을 살피는 해석자라는 점에서는 설교자의 주관성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설교는 단순히 성경을 읽어주는 것이 아닌, "설교자의 주관성"이 개입하는 작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그 어떤 오류도 없는 설교와주해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설교에는 "청중"이 들어간다

그러나 설교에는, 성경과 설교자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청중"이 있습니다. 모든 설교는 "듣는 사람"이 반드시 존재하며, 그들은 설교에 영향을 주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할 때"에 청중을 고려해야 합니다. 만약에 설교 가운데 성경과 설교자만 존재한다면, 설교 중에 설교자는 자신이 조사한 "주해 자료"만 발표하고 설교단에서 내려오면 될 것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했고, 누구는 저렇게 이야기했고, 누구는 이렇게 마무리 했다 라고 내용만 이야기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번 설교는 스터디 바이블 뿐만 아니라, 저명한 마태복음 주석들을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Exegetical Summary를 꼼꼼하게 다 살펴보았습니다. 아마 그 내용만 이야기해도 두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설교일까요?

그러나, 설교자는 청중을 목회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본문이 "내가 섬기는 회중"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설교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는 "목회"가 존재합니다. 설교자가 읽고 공부한 주해 자료는, "청중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꼭 필요한 내용들이 드러나며 압축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는, "주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해를 어느 정도 선까지 어느 방향성에서 나눌 지"를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해를 "청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청중의 입장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공부한 내용이라고 아무 내용이나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면에서 목회자는, 평소의 "목회"를 통해서 성도의 영적인 수준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번에 준비한 본문은, "성경과 설교자, 그리고 주해만 생각한다면" 이렇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얼마나 정확했는지, 혹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고 또 그것이 비참했는지를 전달만 하면 됩니다. 

혹은 전천년설, 후천년설, 그리고 무천년설을 다루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학자들의 논의와 요한 계시록과의 연관성을 따지면서 그것을 나누면 됩니다. 아마도 상당히 아카데믹하면서 지루한 논의가 될 것입니다. 제 자신의 주해 자료들만 고려하면 이렇게 진행하는 것도 충ㅂ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설교에서 "청중"을 "목회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그 방향성"이 바뀌게 됩니다. 성도님들의 현실을 고려하여서 "택자"라는 성경적인 맥락, 그리고 "주님이 반드시 오신다"라는 그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설교의 방향을 조정하였습니다. 만약에 청중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설교의 방향을 결코 이렇게 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설교에는 "적용"이 들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교에는 "적용"이 들어갑니다. 적용은 결국 "목회의 꽃"입니다. 좋은 주해를 가지고 있는 설교자가, 목회적인 마음으로 청중을 고려하면서, 설교의 방향을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주 날카롭게 적용의 핵심을 갈고 닦아서, 적용점이 "청중의 마음"에 박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청중 사이"에는 적용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과정적"으로는 성경과 설교자 사이에 존재하는 주해가 있고, 또 목회적인 고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성도들은, "성경이 요구하는 적용" 이다 라고 적용점을 느끼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적용이라는 부분에서, 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제가 만든 "퓨전 설교"구조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번 설교도 철저하게 퓨전 설교의 구조였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갈고 닦지 않았다면, 정말 중요한 지금의 시점에 있어서 우왕자왕하면서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 설교는 결국 "균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 가운데, 과연 "설교 자체"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설교라는 것은, 성경과 설교자와 청중이라는 "세가지 요소 그 사이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위의 "설교"라는 노란 원은,세 요소 사이 "중앙"에 위치합니다. 

기억하실 것은, 제가 "파란색 점선"으로 설교의 원을 처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의 영역 안에 위치하는 "설교 자체"가, "어느 정도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설교는 "성경" 쪽에 더 가깝고, 어떤 설교는 "설교자" 쪽에 더 가깝고, 또 어떤 설교는 "청중" 쪽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부분에서, 어느 정도 유동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와 같은 보수적인 목회자는, "성경 자체를 잘 드러내는 것"이 마치 "설교의 성공"인것 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의 이미지에서 보는 것처럼, 사실상 좋은 설교는 "세가지 요소"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이 각각 분명한 위상을 가지고 있어야하고, 가급적 성경과 설교자 그리고 청중이라는 세가지 요소 사이에 "균형 있게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 설교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설교의 요소를 생각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설교를 이루시고 이끌어가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성경, 설교자, 청중, 그리고 설교 자체를 지배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위의 그림에서처럼, "모든 요소와 과정을 포괄하여서" 그리고 "설교를 이루는 전체 구조"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분리된 설교"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 성경의 저자이시고, 설교자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청중의 안에 함께 거하시고, 설교자가 청중을 목회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청중의 마음에 말씀을 적용하게 하십니다. 

왜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구조"가 중요할까요? 먼저 이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고 성경적이라고 받아들였을 때에야 저는, "설교 직전의 기도" 속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강하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설교 전에 기도할 때야 말로, 성령님의 역사를 간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이번에 더욱 확고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구조"라는 점에서 또 다른 중요한 한가지는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설교자가 "원고에서 조금 자유로워지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항상 궁금합니다. 과연 그러한 주장은 무슨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사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미" 역사하고 계십니다. 설교의 요소들을 통해서, 그리고 설교의 전체 구조와 그 흐름 안에서 이미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굳이 "정리되지 않은 언어들로 두서 없이 이야기 하는 것"을 마치 성령님의 특별한 역사라고 주장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 좋은 설교를 꿈꾸며

저는 오늘도 좀 더 좋은 설교를 꿈을 꿉니다. 제 설교를 듣고 제 자신이 변하고 싶고, 또 함께 들으시는 성도님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그분들의 마음과 삶이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님의 불처럼 뜨거운 역사가 경험되고 느껴지는 그런 설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설교자로서 평생의 저의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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