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0일 토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91) - 우리 함께 기도해

 

1. 가사 살펴보기

우리 함께 기도해 주 앞에 나와 무릎 꿇고
긍휼 베푸시는 주 하늘을 향해 두 손 들고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
이 땅 가득 내리도록
마침내 주 오셔서 의의 빗줄기
우리 위에 부으시도록


2. 곡 소개

곡은 고형원 선교사의 곡으로, 예수 전도단 8집인 부흥 2000”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두가지 점에서 강조점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하게 간구하면서 모두가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하늘로부터 은혜가 내려오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으신다는 간구와 고백을 담고 있는 찬양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호세아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10:12 Sow for yourselves righteousness, reap the fruit of unfailing love, and break up your unplowed ground; for it is time to seek the LORD, until he comes and showers righteousness on you.

호세아 : 선지서는 호세아 선지자와 간음하는 그의 아내와의 관계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충격적인 비유로 사용한다. , ‘남편되신 하나님께 대한아내이스라엘의 패역이 호세아의 아내의 간음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하신남편되신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을 함께 선포한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은 비록 여로보암 2세의 강력한 통치로 전체적으로는 부강해지긴 했지만 종교적 혼합주의나 사회적인 불의와 부패가 심각한 때였다.

김성수, 구약의 , 3 ed., 바이블 키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생명의 양식, 2017), 258.

10:12 Hosea calls the people to repentance, reminding them that a decision could not be postponed, and that God’s blessings could still be restored. In Israel’s case, the people had to reestablish social justice—righteousness—and loyalty—mercy—in the land. Break up your fallow ground: Plowing and planting are necessary preliminary steps for growing a crop, which eventually sprouts when the rain falls in season. In the same way, repentance would set the stage for restored blessing, which God would eventually rain down on His people. 호세아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결정은 미룰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은 여전히 회복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백성은 땅에서 사회 정의 (의로움) 충성 (자비) 다시 세워야만 했습니다묵은 땅을 기경하라 : 쟁기질과 심는 것은 작물을 재배하는데에 있어서 필요한 예비 단계이며, 결국에는 비가 때에 싹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회개는 회복된 축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것이며,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에게 (은혜) 내리실 것입니다.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10:12.

시편 145: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45:18 The LORD is near to all who call on him, to all who call on him in truth. 145: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145:19 He fulfills the desires of those who fear him; he hears their cry and saves them.

God is great and gracious, majestic and merciful, glorious and good. But these qualities, as amazing as they are, are reserved for those who truly seek and trust him and love him. God is near to those “who call on him” (v. 18), he fulfills the desire of those “who fear him” (i.e., give him proper regard; v. 19), he preserves all those “who love him” (v. 20).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영광스러우시고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은, 그것들이 놀라운 만큼, 진정으로 그분을 찾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계시며, 그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을 보호하십니다.

George Robertson and Bruce A. Ware, “Psalms,” in Gospel Transformation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ed. Bryan Chapell and Dane Ortlund (Wheaton, IL: Crossway, 2013), 788.

마태복음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18:19 "Again, I tell you that if two of you on earth agree about anything you ask for, it will be done for you by my Father in heaven.  18:20 두세 사람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개역개정18:20 For where two or three come together in my name, there am I with them." (NIV)

18:19–20 two of you shall agree … ask. Christ’s church should be a house of prayer (21:13), and united prayer especially receives God’s blessing (Acts 12:5, 12). gathered together … there am I. Jesus promised His special presence to the church when it meets in humility and love to use the means of grace by faith in His Lordship (v. 5; 28:18–20). two or three. Perhaps alluding to church discipline (v. 16), promising Christ’s presence in the most difficult duties of the church. This ought to encourage and admonish church officers not to exert authority on the basis of their own strength.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 그리스도의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고, 특히 함께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모인 곳에는 :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겸손과 사랑으로 만나 되심 안에서 믿음으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할 때에 그분의 특별한 임재를 약속하셨습니다. 또는 : 아마도 교회의 권징을 암시하며, 교회의 가장 어려운 의무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약속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자신의 힘으로 권위를 행사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훈계하는 것입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388.

18:20 two or three. Jewish tradition requires at least 10 men (a minyan) to constitute a synagogue or even hold public prayer. Here, Christ promised to be present in the midst of an even smaller flock—”two or three witnesses” gathered in His name for the purpose of discipline (see note on v. 15).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회당을 구성하거나 공적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 10명의 남자가 필요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권징을 목적으로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두세 증인 적은 양의 무리 가운데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John F. MacArthur Jr., The MacArthur Study Bibl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hville, TN: Thomas Nelson Publishers, 2006), 18:20.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먼저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찬양이다. 이 찬양은 기도에 대한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시대는 기독교 신앙조차 개인의 신앙 성숙을 더 선호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더욱 심해지고 있는 이기주의를 신앙과 섞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 받을 때에 처음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 만드셨으며, 우리는 공동체를 통하여 함께 주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이 찬양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호세아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이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이 찬양은 맹목적으로 그저 은혜를 내려달라는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진실한 회개를 먼저 촉구하는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분의 자녀로 용납 받은 이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태도는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며 그분과 가까워지기 힘쓰며, 그분 안에서 마음을 돌이켜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간절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는 이들을 아버지께서 반드시 만나 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공동체가 마음을 다해서 기도할 때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다. 이 찬양을 통해서 그런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감이 새롭게 되기를, 그리고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한다

삶으로 드리는 찬양 프로그램 전체 묵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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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9일 금요일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13) - 담임목사가 되기 전에 알아야 할 7가지 Part 1 / 교회 쇠퇴의 시대를 걸어간다는 것

 


기독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경험주의" 입니다. 내가 이렇게 경험해 보았더니 그랬더라" 라고 말하며 그것을 절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이 앞서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치명적인 오류를 불러 일으킵니다. 자신의 경험과 맞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데 까지 나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경험" 입니다. 사랑은, 논리일 뿐 아니라 경험입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면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가장 숭고한 경험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고난을 통과한 사람만이, 기독교의 진리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기독교는 진정으로 경험의 종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담임 목회를 준비하는 사람을 위한 책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신앙적인 깊이가 있는 성도님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결국 개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담임 목사에게 필요한 내용들을 읽어보는 것은 결국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내용을 읽어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전체가 7 part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 책을 그렇게 처음부터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왠지 제목만 보면서 상투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좋다고 느꼈습니다. 역사에 기록될 천재들의 책이 아니라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모든 책에서는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담임 목사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마음이 암담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분들이 어렵게 사역하시고 계시고 저도 그 대열에 머지 않아 동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교회의 대부분은 작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사역해 보면, 큰 교회와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열악한 목회 환경이라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됩니다. 목회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 속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리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의 목회의 처지에 들어가보지 않았다면, 함부로 그들의 어려움을 말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이 책의 Part1에서는, 이러한 목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말 그대로 "쇠퇴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인정하는 글의 서두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한 없이 낙천적이어야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서 모든 경제적인 상황이 급격히 맞물려 변하는 것 처럼,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낙관주의는 결국 절망을 불러올 뿐입니다. 

몇가지 글에서 살펴보면, Part1에서 제안하는 교회 쇠퇴의 시대에 제안은 이렇습니다. 교회는 과거에 행해오던 모든 프로그램의 관습을 벗어나서, 현실적으로 시대상에 맞는 부분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기도회, 선교회, 주일 학교 등등의 모든 것을 대형교회를 모방하는 것을 벗어나서 작은 교회에 맞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례와 교리 교육을 강조해야 합니다. 대형 교회가 쉽게 하기 어려운 성례의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예배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별히 청년들을 염두에 둘 때에 쉽고 그들에게 익숙한 인스턴트식 신앙 교육이 아니라 깊이 있고 꾸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쇠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는 쇠퇴할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목회자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것은, 작은 교회가 무조건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 처럼, 대형 교회는 군중 속의 고독을 경험하기 때문에 작은 교회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더욱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교회일수록 오히려 더욱 새로운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관계를 잘 쌓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 걸 맞는 수준의 것을 시도하라 라고 말합니다. 만약 무작정 대형 교회와 같은 내용과 형식 혹은 규모를 추구하다보면, 그것이 오히려 우스운 모습일 것이라고 냉정하게 조언합니다. 오히려 대단한 교육 부서를 만들 수 없다면, 전 세대 예배에 집중하고 교제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은 청년들을 염두에 둔 챕터입니다. 말씀과 성례와 신앙 고백에 충실한 사역, 세대와 세대가 서로가 경청하며 소통하는 사역, 그리고 인내함으로 사역해야 한다고 저자의 사역의 경험에 바탕하여 설명합니다. 

저는 작은 교회를 꿈꿉니다. 글쎄요, 작은 교회가 어느 정도의 규모를 말하는 것일까요?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작은 교회는 결국 현실의 수준에 맞는 것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영상과 음향을 꿈꾸기는 힘듭니다. 모든 것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깊이 있는 예배, 경험적인 예배, 말씀을 깨닫고 함께 깊이 기도할 수 있는 예배, 공동체성을 누릴 수 있는 성찬과 세례입니다. 목회자로서 저의 꿈입니다.

제가 사역하면서 느끼는 것은, 교회의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은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에너지가 한 곳에 모이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목회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기존에 운영되던 어떤 모임과 형식이 있으면, 그것을 백업하는데에만 실질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목회자의 모든 에너지를 예배와 설교와 찬양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의 예배에 대한 철학은, 일단 예배가 시작되면 숨도 못쉴 만큼의 긴장감과 영적인 어떤 놀라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영적으로 숨이 막혀야 합니다. 결국 평소에 경험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을 주일 예배 가운데 경험해야만 그 작은 교회에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온 세대가 함께하는 예배 가운데 쉬운 찬양을 손을 잡고 부르면 어떨까요? 부모가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통성으로 기도해주면 어떨까요? 자녀를 함께 끌어안고 기도해주면 어떨까요? 성찬을 둥글게 서서 할 수는 없을까요? 꼭 찬송가만 불러야 할까요? 단순히 찬송가가 아니라, 아주 부드러운 건반과 패드 사운드를 가지고 친숙한 ccm을 부르면 어떨까요? 담임 목사만 성경 구절을 읽을 것이 아니라, 온 성도가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성경 구절을 합독할 수는 없을까요?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활발한 소그룹 모임에 집중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담임 목회를 생각하면서 한주에 최소 네 번 이상의 소그룹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현장도 좋고 줌도 좋습니다. 낮도 좋고 밤도 좋습니다. 만약 작은 교회라면 담임 목사가 온 성도를 모두 함께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결국 주도적인 목회의 우선 순위의 조절이 필요합니다. 경험상 최소 열번 이상 소그룹 안에서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인격적인 관계가 있어야 어떤 일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틀을 다시 점검하고 작은 교회에 걸맞는 틀을 찾아내야만 할 것입니다.

결국 제가 직접 성도를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신앙과 교감해야만 그것이 목회를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작은 교회 목회는 결국 소그룹이 전부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 소그룹을 준비하기 위한 북클럽과 모든 컨텐츠를 만들고 공유하기 위해서 저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제 마음 안에 깊이에는, 교회 쇠퇴의 시대를 걸어간다는 현실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역사속의 교회가 항상 그러했던 것 처럼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 되신 주님을 의지하여, 교회 쇠퇴의 시대를 오늘도 담대하게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 "책 어디까지 읽어봤니?" 전체 글 모음 /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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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터널을 거의 지나 빛을 앞에 두고, 뜨거운 사람이 되기 위해 / 김동률 - 내 마음은

 

지난 몇개월이 참 쉽지가 않았습니다. 거의 반년의 시간을 마음의 어려움을 가지고 지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도 한참을 고민하고, 또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도 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체력이 고갈된 부분도 있습니다. 인간 관계의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방향을 잃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도 했고, 또 많은 부분이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꾸준히 제가 할 일은 포기하지 않고 해냈지만, 그 과정이 정말 쉽지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저의 내면 안에 있는 가장 깊은 갈등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뜨겁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뜨거운 사람이 될 것인가"의 갈등이었습니다. 

김동률 노래는 참 깊은 삶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에 들었을 때에 가사가 너무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뜨겁지 않은 사람이 됐어" 그것이 저도 모르게 제가 처했던 저의 마음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별로 모든 것에 무감각하고, 다른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그저 제 자신만 생각하는 그런 마음의 상태로 많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에 저에게 주신 그 사랑의 감각을 잊어버리고, 겉보기에는 그래도 괜찮은 목회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사람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진실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정말 진실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대하다보면,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결국 그 사람의 진심이 보입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내면이 서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보고도 보고 싶지 않은, 알면서도 믿고 싶지 않은 그런 순간입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에 뜨겁지 않은 사람이라면 거기에서 멈추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만 거기에서 멈추어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적당히 신앙적으로 둘러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저도, 그 사람도, 세상도 멈출 뿐입니다.

뜨거운 사람이 되려면, 상처를 많이 받게 됩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세상은 뜨겁지 않은 사람으로 가득차 있고, 식어 있는채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뜨거운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책으로 남겨진 것은, 그런 사람들이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뜨거운 삶을 산다는 것은, 나의 진심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며, 오히려 왜 그렇게 순진하게 살아가느냐고 비웃음을 당할 가능성이 많은 길입니다. 사실 동시대에 뜨거운 사람은 그저 허망하게 잊혀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이제 나는차라리 뜨겁지 않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훨씬 실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삶은, 내면의 극심한 모순을 가져옵니다. 오랜 기간 동안 괴로워하며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뜨거움을 주시고, 진실하게 살아가도록 밀어붙이시는데, 내가 나 하나 편하자고 식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잠시는 편할지 모르지만 결국 나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맞먹는 큰 모순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온전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뜨겁게 사는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설교 때 마다, 불타는 초 처럼 녹아서 없어지는 삶을 살고 싶다고 반복했던 분입니다. 어린 시절 그때 그분의 설교를 들을 때에는, 그것을 어떤 추상적인 문학적 장치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 역시 목회의 길을 조금 걸어보니, 그것은 추상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목회자 혹은 성도의 삶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가장 아름답게 드러날 것이고, 우리의 존재 자체는 결국 녹아서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목회를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을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신학교 시절의 배움들을 기억하고, 또 유학 시절에 어려운 순간들과 학업과 기도와 아내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바랬던 모든 학위들을 마치게 하셨던 것도 기억했습니다. 바라고 소망하던 것들을 매우 더디게 이루시며, 동시에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긴 터널을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삶을 얼마나 놀랍게 인도하셨는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셨습니다. 눈물이 나더군요, 저의 삶이 저만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빚어오신 소중한 것이며, 저의 온 가족이 함께 일구어낸 소중한 것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책임감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남편이며, 아빠이며, 아들이며 또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시카고의 겨울은 너무나 혹독하고, 시카고의 여름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날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 좋은 때입니다. 저는 지금, 길었던 터널의 끝에 빛의 바로 앞에 서 있습니다. 물론 마음에 결단은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 아주 조금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삶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딛으라고 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아마 언젠가 마음에 또 어려움이 심해서 좌절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적어도, 하나님께서 지금 주신 마음과, 저에게 주신 비전들을 마음에 붙들고 계속 걸어가야겠습니다.

2022년 7월 25일 월요일

"창의적인 크리스천"이 되기 위하여 by 1등의 습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인간은 비록 질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우리의 영혼 가운데 소유하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이것을 바라본다면, 기적 그 자체입니다.

학위를 위해서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부담이었습니다. 논문을 써서 졸업하는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결국 원하는 공부까지 마무리했지만, 제 마음 한켠에는, 저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물론 교수님들은 만족하셔서 학위를 취득했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것이 가장 탁월한 공부인가에 대한 궁금함은 언제나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1등의 습관"이라는 책은 자기 계발의 백과 사전과 같은 책입니다. 딱 어떤 한마디로 종합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모든 내용이 의미가 있고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로 충만합니다. 그 중에서 저는 "창의성"에 대한 부분에서 큰 통찰력을 얻었습니다.

저자는 창의성이라는 것을 설명할 때에, "아주 독창적인 어떤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것들, 혹은 이질적인 영역에 있는 것을 결합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좋았습니다. 

저의 박사 학위 논문은 크리스천 북클럽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을 세가지 영역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북클럽, 그리고 기독교 성인 교육입니다. 언뜻 보면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이 세가지 영역에서 저는 끊을 수 없는 연관성을 발견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북클럽에 대한 메뉴얼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제 마음에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한 사람이 북클럽의 연구 분야에서 한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의 논문이 오래 걸렸던 이유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틀을 준비하고, 누구도 시도한적 없었던 부분의 연결을 하여서 결국 논문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런데 1등의 습관을 보니 마음에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제가 사용했던 방법론 자체가, 창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방법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가장 의미있는 공부의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창의성이라는 저자의 설명을 통하여 제가 더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바람직한 크리스천의 신앙 생활"의 의미입니다. 저자에게 배운 것을 바로 적용한 것입니다. 어쩌면 저자는 단지 자기 계발서의 맥락에서 자신의 지혜를 저에게 나눈 것이지만, 저는 저자의 제안에 따라서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일반적인 창의성의 개념을, 좋은 신앙 생활과 연결해 본 것 입니다.

보통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의 마음 가운데, 좋은 크리스천에 대하여 정의할 때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말씀의 특별한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기준이 있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설교자가 "내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어떤 탁월한 통찰력"을 제시하면 그 사람은 훌륭한 설교자입니다. 혹은 어떤 성도님이 "성경 해석에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지면" 그 사람은 훌륭한 성도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지적인 영역이며, 또한 성경이라는 영역에 상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그 원래 뜻을 잘 이해하고 설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청중이 지루하지 않게 탁월한 통찰력, 시대를 꽤 뚫는 지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좋은 설교는 매우 새롭게 들려야 마땅하며, 굉장한 통찰과 새로운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해 아래 새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성경에 대한 해석이 충분히 발전되어서 출판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론 우리가 너무 어떤 통찰력과 천재적인 번뜩임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 생활의 많은 에너지를 거기에 쏟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재쳐 놓고 공부만 하는 것을 마치 신앙 생활의 궁극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에 "1등의 습관"을 보면서, 오히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창의적인 도전"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완전한 진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충분한 성경에 대한 해석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실현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성경과 삶의 괴리를 최대한 줄여가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의 삶의 다양한 영역들을 신앙적으로 하나로 연결해가는 노력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교회와 학교, 교회와 직장, 교회와 가정, 신앙과 행동, 신앙과 정치, 신앙과 사고 등등을 꾸준하게 공부해나가면서 연결하는 것, 그리고 내가 배운 것들은 영역을 넘어서서 계속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장의 길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공부해가면서,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적용의 부분입니다. 적용이라는 것은 결국, 다양한 영역의 연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던 곳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통하여서 연결이 되고. 풍성해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크리스천의 진정한 창의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천 북클럽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클럽은 성경 공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북클럽은 다양한 영역을 매우 밀도있게 연결하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삶을 성경의 진리와 책의 내용과 비춰보면서, 다양한 영역들을 연결해서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는 장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내용 혹은 주제를 다른 이들과 심도 있게 나누면서, 나라는 한계를 뛰어 넘어서 창의성이 풍성하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만약 신앙 생활의 어떤 정체기를 겪고 계시다면,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삶의 다양한 영역들, 혹은 성경과 관계 없다고 생각하던 영역들을 신앙과 연결해서 고민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할수만 있다면, 주변의 크리스천들과 만남 속에서 북클럽을 함께 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22년 7월 23일 토요일

노래를 잘하고 싶어서, 오늘도 공부합니다.

크리스천들은 각자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장 큰 소망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그 아래에, 자신의 소망을 하위 영역으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저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하나님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 노래를 잘 하고 싶습니다.

제가 노래를 잘하고 싶었던 것은, 순전히 CCM 가수 박종호씨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분은 저의 목표입니다. 박종호씨를 모창하면서 발성의 기본적인 부분들을 깨달았습니다. 저에게 발성의 감각은, 코와 이마 사이로 나오는 일종의 단단한 소리입니다. 말 소리와는 다르지만 소리를 약간 띄워서 내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것이 이마를 넘어서서 어떤 공간으로 앞서 나간다는 그런 느낌입니다. 

노래를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젊은 시절 그것으로 한참을 고민했고 배우기 위해서 찾아다니기도 했고, 지금도 공부중입니다. 할수만 있다면, 은퇴하기 전까지 한걸음이라도 더 노래를 더 잘 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요즘에는 유투브 영상이 너무 좋아졌습니다. 과거에는 정말 알음알음으로 배워야했던 많은 것들이 공개되어 있고, 탁월하게 설명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예전부터 영상을 통해서 유익을 얻었는데 몇가지 영상을 링크를 걸고 제가 도움을 얻었던 부분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요즘에 찬양을 하면서 많이 느낀 것은, 제 목소리가 좀 답답해 졌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앞으로 멀리 틔여진 소리라고 스스로 생각한 부분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너무 마이크를 의지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드럽게 발성이 된다는 느낌을 많이 못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차에 아래 영상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영상에서 한관희 원장님은 발성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을 잡아 줍니다. 요즘에 제가 고민하던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이 영상은 고음을 다루는 부분이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서 적용하는 것은 약간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찬양의 앞 부분은 대부분 저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저음의 경우에는 가슴으로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하지만 소리가 조금만 올라가면, 기본적인 발성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 분은 오히려 "소리를 멀리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영상에서 보시는 것 처럼 "엄마"라고 멀리 있는 엄마를 부르면, 누구나 대부분 발성적인 소리를 자연스럽게 내게 됩니다. 그런 감각을 가지고 높은 영역을 계속 부르는 것입니다. 영상의 설명이 너무 탁월하네요. 

그리고 실제로 적용해 보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좀 더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훨씬 단단해 진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약간 느낌이 이상하긴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이크를 입에 대고 부르기 때문에 마이크로 소리가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소리를 멀리 보내는 느낌으로 노래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영상은, 가사의 감정 표현의 부분에 관련된 영상입니다. 사실 이것은 정말 찬양팀 보컬로서 너무나 중요한 부분인데 제일 설명하기 어렵고 힘든 부분입니다. 


영상이 시작되자 마자, 첫 소절이 시작할 때에 "늦어"라고 말하면서 끊어버리는 상황이 조금 당황스럽기는 합니다. 저도 깜짝 놀랐네요. 그만큼 보컬의 첫 시작이 반주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음악의 느낌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 하듯이 표현을 하면서, 가사의 전달과 감정의 전달을 하라"는 것입니다. 대중 가요이든 혹은 찬양이든 가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사에 있어서 "중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 찬양팀 분들께 "조사"를 강하게 발음할 필요는 없다 정도로 부탁을 드리곤 했습니다. 이 영상을 보고 새롭게 깨닫는 부분은, 찬양의 가사의 전체적인 해석과 뉘앙스를 계속 확인하면서, 좀 더 감정적으로 찬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래 영상은, 위의 내용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결국 노래라는 것은 소리가 앞으로 나와야 하는 것인데, 단순히 음만 올리려고 하면 결국 몸이 긴장해서 제대로 발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영상입니다. 제가 느낄 때에 제대로 된 발성을 하면 마치 "입과 코로는 공기가 혹은 소리가 안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굉장히 이상한 느낌입니다. 분명히 노래라는 것은 공기가 성대를 통과해서 나오는 것인데, 실제로 노래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입과 코로 공기가 안나오는 것 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저 제가 그런 느낌만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거의 그것이 맞다는 것을 아래 영상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제목은 강제로 고음을 내는 방법이라고 적혀 있어서, 괜시리 겁을 먹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까지는 아닙니다. 앞으로 목에 힘을 주면서 노래를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영상에서처럼 입과 코를 막고 소리를 내보면서 오히려 소리를 약간 띄우는 혹은 머리 뒤쪽으로 약간 넘어가면서 소리가 새롭게 올라가는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감각을 약간 가지고 있는데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만약에 완벽하게 익힌다면 초고음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노래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도 계속 배우고 연습하는 중입니다. 

배움은 끝이 없는 듯 합니다. 사실 배움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길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면 좋겠고, 또 저 역시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2022년 7월 22일 금요일

로고스 어디까지 써봤니? - WARNING! 스터디 바이블 두권 (CSB & KJV)의 내용이 겹치니 주의하세요!

 


스터디 바이블을 사용한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성경 묵상, 또 교회 강의 자료들을 만들 때에 저에게는 이제 없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스터디 바이블 자체가 이북으로 출판된 것은 올리브트리가 사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고스에서 스터디 바이블을 메인으로 쓰는 것은, 훨씬 기능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보통 어떤 본문을 보면, 스터디 바이블을 다섯권 정도 먼저 살펴봅니다. 그리고 만약에 거기에서 해결이 되지 않으면 점점 범위를 넓혀서 제가 가진 스터디 바이블 스무 종류 정도를 다 살펴봅니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부지런함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내용이 겹치는 경우를 아주 간혹가다 한번씩 경험하게 됩니다. 다양하게 다 훑어보다보니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내용이 살짝 겹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실질적으로 내용이 완전히 같은 스터디 바이블 두권을 발견했습니다. 


스터디 바이블들을 다양하게 보다보니, CSB 스터디 바이블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해석이 건전합니다. 그리고 탄탄합니다. 별로 흠 잡을 곳이 없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물론 적용을 위한 스터디 바이블이 아니기 때문에 적용은 거의 없지만, 적어도 본문의 맥락을 구절별로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가장 좋다고 느꼈습니다. 

얼마전에 KJV Study Bible 이 나왔습니다. 사실 더 이상 필요는 없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너무 표지가 예뻐서... 구입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표지 뿐 아니라 내용도 좋았습니다. 아주 만족스럽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렇게 저렇게 훑어보다보니, 즐겨보던 CSB 스터디 바이블과 내용이 거의 겹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적잖이 당황이 되더군요. 두 스터디 바이블의 내용이 아래처럼 겹칩니다. 그리고 사실상 완전히 동일한 저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아주 살짝 내용이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시편 91:4절 주석 자체는 전혀 바뀐게 없고, 4절을 중심으로 앞 뒤로 아주 약간의 변화만 준 것으로 보이네요. 그리고 이제 살펴보니 출판사도 동일하군요. :)


출판 연도를 기준으로 보니 KJV 는 2012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설명에 보니 Key Features Inside the KJV Study Bible and its over 2,400 pages you’ll find: 15,000 study notes 141 photos, 62 timelines, 59 maps, 16 illustrations & reconstructions and 15 charts A 40-page concordance 20 articles and essays A helpful glossary of 17th century expressions relative to the KJV’s signature phrasing A one and three-year Bible reading plan 라고 되어 있군요. 

CSB 의 경우에는 2017년도 출판입니다. 그리고 설명에는 Key Features 15,000+ study notes 315 word studies 141 photographs 62 timelines 59 maps 24 articles 16 illustrations/reconstructions 15 charts Book introductions and outlines 이라고 적혀 있네요. 

사실 15,000+ 라는 설명에서는 살짝 웃음이 났습니다. 사실 일일이 세어본 사람은 당연히 없을것이고 KJV 의 동일한 저자들에게 새로 스터디 바이블을 출판하려고 하니 스터디 노트를 업데이트 해달라고 출판사에서 부탁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CSB 스터디 바이블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정말 좋은 주석이라면, 구판 신판을 다 구입해서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터디 바이블을 놓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결론입니다. 아주 약간 아쉽기는하네요. 만약에 CSB 스터디 바이블이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실질적으로는 KJV 스터디 바이블의 개정판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도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표지가 예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이제라도 뭔가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다행이네요. 만약에 혹시라도 저 처럼 스터디 바이블을 좋아하신다면, 이러한 상황을 아시고 구입하시면 좋겠습니다. 

삶으로 드리는 찬양 (90) - 내 모습 이대로

 

1. 가사 살펴보기

내 모습 이대로 사랑 하시네
연약함 그대로 사랑 하시네
나의 모든 발걸음 주가 아시나니
날 인도 하소서 

주의 날개 아래 거하는 것
주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
나의 가장 큰 소망 나의 가장 큰 은혜
주와 함께 동행하는 일 


2. 곡 소개

곡은 2015년도에 발매된 제이어스 찬양팀의 정규 2집인 “Born Again”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는 이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을 일깨워주는 곡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그리고 그분과 동행하기를 원하게 된다는 것을 노래하는 찬양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5: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The poor in spirit are not just those in material need, but those who acknowledge their spiritual poverty before God (Ps 34:6; Zep 3:12). To such, and only to such, the kingdom of heaven (3) is given. Those who mourn are not primarily those who mourn the loss of a loved one, but those who mourn the loss of their right standing before God. It is the sorrow of repentance. Such mourners will be comforted (4) by the free forgiveness of God (Isa 61:2; Rev 7:17).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궁핍함을 인정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만 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애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를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회개의 슬픔입니다. 그렇게 애통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거저 주어지는 용서로 인하여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NIV Bible Speaks Today: Notes (London: IVP, 2020), 1303.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7:10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7:10 GODLY GRIEF. People repent as they become aware of sin in their lives and propose to change so as to be in conformity with God’s ways. The Corinthians became aware of how out of line their actions were in regard to Paul. This insight brought sorrow, which in turn led to a change of attitude and behavior. WORLDLY GRIEF. Worldly sorrow does not lead to the positive change of heart and life that repentance implies but brings only bitterness and resentment.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죄를 인식하게 , 회개하고 하나님의 방식에 순응하도록 변화될 것을 계획하게 됩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이 바울의 말씀과 관련하여서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슬픔을 가져왔고, 이는 결국 태도와 행동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세상 근심 : 세상적인 근심은 회개가 함축하고 있는 마음과 삶의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오직 비통함과 분노만 가져옵니다.

Lyman Coleman, ed., Life Connectio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1865.

시편 91: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개역개정) 91:4 He will cover you with his feathers, and under his wings you will find refuge; his faithfulness will be your shield and rampart. (NIV)

91:4 His feathers … His wings: God is described as a mother hen under whose wings the psalmist can come for refuge (61:4; 63:7). Shield and buckler indicates complete protection from all harm. God is an all protective shield for the believer. 그의 , 그의 날개 : 하나님은 시편 기자가 날개 아래로 들어와서 피할 있는 암탉으로 묘사 되십니다. 방패와 방패 : 이것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완전한 보호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보호하는 모든 방패가 되십니다.

Earl D. Radmacher, Ronald Barclay Allen, and H. Wayne House, The Nelson Study Bible: New King James Version (Nashville: T. Nelson Publishers, 1997), 91:4.

시편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7:4 One thing I ask of the LORD, this is what I seek: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gaze upon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seek him in his temple.

27:4–6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David recognizes that his source of power is God. He draws his strength from a higher king; as a steward-king under God, he can look to the Lord’s palace as a place of refuge and wise counsel. David’s only security is the Lord, and his only real place of safety is in the Lord’s house.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 다윗은 자신의 능력의 근원이 여호와이심을 인정합니다. 그는 하나님 밑에 속한 청지기 왕으로서 자신보다 높은 왕으로부터 그의 힘을 얻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전을 도피처와 지혜로운 조언의 장소로 바라볼 있었습니다. 다윗의 유일한 안전은 주님이시며, 다윗의 인정한 안식처는 여호와의 뿐입니다

Lyman Coleman, ed., Life Connectio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s, 2019), 822.

27:4 To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may mean continually returning to the sanctuary for worship. It can also be more general in referring to living one’s life in God’s presence. In either case, the point is that there is constant fellowship with the Lord throughout one’s life (see note at 23:6). 여호와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예배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성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지 경우 모두, 요점은 평생 동안 주님과 끊임없는 교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Kevin R. Warstler, “Psalms,”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840.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태도로 나아가는 복된 성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제대로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드러나는 나의 죄와 부족함으로 인하여 크게 상심하며 슬퍼하게 된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애통이다. 그런 면에서 이 찬양은, 내가 마음대로 살겠으니 그냥 이대로 받아달라는 노래가 아니다. 오히려 완전히 그 반대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진실한 회개의 고백을 담은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어미새처럼 자신의 날개 아래 자신의 자녀들을 품으신다. 하나님 안에서 그분과 동행할 때에만 우리의 영혼이 소생한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의지할 것이 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도움과 능력이 되심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마음 가장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소통하기를 원하고 그분과 교제하기를 원하게 된다. 그리고 평생 하나님과의 동행 안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회개가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놀라운 용서와 사랑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소원이, 여호와의 품 안에 거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 되기를 원한다.

삶으로 드리는 찬양 프로그램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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