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4일 금요일

참된 경건의 길 / 사무엘상 30장 21-25절 설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여러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기준이 성경적인 기준일까? 근본적인 질문을 제 자신에게 종종 던져봅니다. 우리는 과연 참된 경건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신앙의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어떤 패러다임의 완전한 전환 없이는, 절대로 신앙 성장이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신앙 생활, 나의 유익만을 위한 신앙 생활이라는, 세상의 중심에 나를 놓은 그 형태로는, 사실상 신앙의 성숙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것을 나누는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 들어오고 움직일 때에, 그제서야 우리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답은 분명한데, 어떤 분들은 답을 인정하지 않고, 또 어떤 분들은 그 답을 내 삶 속에서 풀어내야 하는 엄청난 과정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역시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은혜 받은 자임을 기억하기를 원하고, 또 그것이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부터 흘러 가기를 원합니다.

* 사무엘상 30장 21-25절 설교

사무엘상 27장에서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견디다 못하고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안에 거주하면 어쩔수 없이 자신의 동족과 싸울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오히려 은밀하게 다른 이방 민족들을 치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블레셋 족속과 이스라엘 민족의 전면전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현재 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블레셋 편에 서서 참전해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그 위기 속에서 다윗을 구해주셨습니다. 블레셋의 장군들이 그들의 큰 적인 다윗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다윗이 블레셋을 배신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다윗은 그들과 함께 전쟁에 함께 나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전쟁터에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흘길을 걸어서 시글락으로 돌아와보니, 온 성읍이 잿더미로 변해있었습니다. 아말렉 족속이 모든 여자와 아이들을 다 포로로 잡아간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그동안 다윗에게 충성했던 사람들조차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반기를 들면서 오히려 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위기의 순간에, 여호와를 더욱 의지함으로,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봇을 통해서 여호와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답을 주시기를, 약탈자들을 쫓아가면 반드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실한 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그 즉시로, 부하 600명을 거느리고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한번 이 때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속도로 추적을 했을 것입니다. 반드시 가족들을 되찾아야 한다라는 일념으로 똘똘 뭉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다윗의 부하들이 용맹 했지만, 그들 모두의 체력이 동일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600명 중에서 200명이 완전히 지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브솔 시내를 건너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400명이 다윗을 따라서 계속 추적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400명을 끌고 추격을 하다가, 다 죽어가는 한 젊은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군인들이 그를 발견하고서는, 그 급한 와중에 추격을 잠시 중단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의 기력을 되살렸습니다. 상황을 알아보니 그 사람은 이집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원래는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병이 들어서 종이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주인이 그 종을 버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이 바로 다윗의 성을 약탈해 간 바로 그 사람들 중에 한명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종의 안내를 받아서 아말렉 족속을 끝까지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넓은 들에서 약탈한 물건을 가지고 즐기고 있던 아말렉 족속을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새벽에 동틀 때에 부하들과 함께 그들을 기습하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19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경은 다윗이 아무것도 잃은 것 없이 완벽하게 찾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지금 분위기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윗은 돌로 맞을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을 회복하였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다윗과 군사들이 돌아올 때에 지쳐서 남겨졌던 200명도 기뻐하면서 다윗을 영접하러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환영과 기쁨과 감격의 순간을 망치는 이야기가 병사들 안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22절에 보니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라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세상에 그 어떤 공동체도 완벽할 수 없는 것처럼, 다윗을 따르는 이들 중에도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앞장서서 수고하고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전리품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전리품의 일부는 원래는 자신의 동료의 물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말렉으로 부터 다시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기다린 자들에게는 최소한의 가족들만 돌려주자는 것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이것은 늘 우리가 듣던 주장이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노력한 자가 그 결과를 얻고, 노력한 자에게는 그에게 합당한 상을 주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당연히 나눠줄 것이 없다는 이 주장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듣는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23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3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라고 부하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진정한 리더의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악한 이야기를 하는 자들에게조차 “나의 형제들아” 라고 부르며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놀라운 점이 무엇인가? 다윗의 부하들 중에서 악한 자와 불량한 자들의 마음에는, 자신들의 노력으로 얻은 전리품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겠다는 지극히 지극히 세상적인 논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지금의 상황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던 다윗은, 지금 이 기적같은 승리와 넘치는 전리품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작품인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호하셨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신의 손에 넘기셨고, 여호와께서 약속대로 주셨기 때문에, 절대로 세상의 방식으로는 이 일을 처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니, “전장에 내려갔던 이들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 것이다 같이 분배해야 한다” 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 25절에 보니 “25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다윗의 입장에서는, 공동체의 모든 이들이 함께 전쟁의 결과와 기쁨을 누려야 한다는 결정이,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원리가, 자신이 다스리는 현재의 공동체, 그리고 더 나아가 앞으로 왕으로 다스릴 전체 공동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영적인 삶의 원리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강한 자도 그리고 약한 자도 함께 기쁨을 누리며, 힘이 있는 자도 그리고 연약한 자도 함께 공동체 속에서 유익을 얻는 바로 그것을 꿈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는, 오늘 말씀을 보시면서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와 닿으십니까? 저는 오늘 말씀의 큰 구조 속에서,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큰 대조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아말렉 족속을 급하게 추적할 때에 누구를 발견하였습니까? 병들어서 더 이상 쓸모 없어졌다고 버려진 초라한 행색으로 죽어가는 거지와 같은 이집트 사람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수 있는 것은, 아말렉 족속 안에서 모두가 받아들이는 관습이 있었는데, 종이 병들고 걷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그를 버리는 것이 아말렉 족속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효용 가치가 있으면 데리고 있지만, 효용 가치가 없으면 즉시 버리는 것, 그것이 아말렉 족속의 방식이고 세상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그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다윗의 무리가 아말렉 족속을 쫓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에, 그들이 발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버려진 사람에게 무엇을 먹였는지를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가장 급박하고 힘든 순간에 조차,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지나치지 않고 힘써 먹인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의 자비와 따뜻함과 사랑의 마음과 태도가, 오늘 말씀 속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더 흥미로운 것은, 1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무리가 그를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라고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소에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다윗이 평소에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성품이 없었다면, 절대로 부하들이 이 사람을 데려갔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의 리더가 관심도 없는 괜히 병자를 데려갔다가, 괜히 욕만 먹는 상황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하들이 평소 다윗의 성품을 알았기 때문에, 죽어가는 자를 발견했을 때에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그를 다윗에게 데려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다윗의 마음이, 오늘 말씀 속에 그대로 흐르고 있습니다. 다윗은 비록 온전한 왕으로 세워지 못한 도망자의 신세였지만, 그러나 그가 섬기는 그 공동체와 그의 무리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깨달아 알기를 다윗은 간절히 원했다는 것입니다. 유력하고 강한자만 대우 받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고 힘이 없는 자 까지 함께 유익을 누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되기를 다윗이 간절히 원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로마서 5장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아담 안에서 영원히 본성이 타락하여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망한 우리였지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하나님의 선물을 넘치게 받았다 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말씀이 놀라운  것은, 바울 사도는 자신의 수고를 평가 절하하거나, 자신이 고생한적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너무나 많은 수고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수고 가운데 역사하신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받은 것들을 연약한 자들에게 나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경건이라는 것은,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았음을 깨달으면서 가장 연약한 자들에게 마음과 관심과 사랑을 쏟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참된 경건을 우리의 삶 속에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저와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께서,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요 사랑을 결과임을 인정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넘치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그 넘치는 은혜 때문에, 가장 연약한 자에게 우리의 마음이 향하기를 원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참된 사랑과 경건을 실천하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직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자녀 삼으시니 감사합니다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하여, 저의 가운데 언제나 은혜를 인정하며, 주님께 감사를 돌리는 복된 성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인정하며 은혜와 넉넉함이 저를 통해서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제가 속한 공동체 안에 있는 가장 연약한 자들도 저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있게 하시고, 저의 삶의 시선과 방향이, 가진자 유력한 자를 향하지 않고, 가장 연약한 고아와 과부를 향하고 그들을 위해 살아가도록 주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문" 전체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1/blog-post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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