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한국에 있어 가장 화두가 되는 것은, 갑과 을 이라는 관계 입니다. 원래 계약을 맺을 때 편의상 사용하는 수평적인 단어이지만, 이미 많은 이들에게 갑과 을이라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사람을 고용하고 부리는 '갑'과, 그리고 그러한 갑의 횡포에 대하여 저항하지 못하고 불합리하게 부림을 당하는 '을'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제가 이해할 때에, 이러한 관계가 최근에 더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사회 전반에 '불합리한 갑과 을'의 관계가 팽배해져 있다는 것이 방송을 통해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기업들이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을의 관계에 있는 단체와 개인들의 고혈(膏血,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기름과 피이지만, 몹시 고생해서 얻은 이익과 재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을 짜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부리는 갑의 횡포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이미 그들은 법 따위는 안중에 없습니다. 기업이 그리고 사주가 이익을 가질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합법을 가장한 불법적인 방법을 총 동원하여서, 을을 착취합니다.
드러나는 그들의 횡포를 보면서 한가지 절실하게 얻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부패하여 있는가에 대한 가슴 서늘한 새로운 자각입니다. 언뜻 보면 법을 중심으로 세상이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업들은 그래도 도덕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 같고, 고용되어 일하는 힘 없는 을들에게 그래도 희망은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감추어져 있는 세상의 이면에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추악함이, 인간의 탐욕과 죄악이 활개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이익' 이라는 한가지 목표를 가지고 행해집니다.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 더욱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한계가 없는 탐욕이 그 원동력입니다. 가끔씩 뉴스에 전해지는, 어떤 기업이 몇백억, 몇천억, 몇조의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내었다라는 소식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수 많은 이들의 흘리는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담아 얻은 그 이익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더 기억할 것은, 이러한 갑과 을의 관계는 비단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죄악된 인간이 가지는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갑과 을의 관계, 곧 어그러진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우리의 삶 모든 곳에 뿌리내려 있습니다.
저만 경험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부자인 사람들이 가지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가지는 외모가 부족한 사람에 대한, 지위가 높은 사람의 지위가 낮은 사람에 대한, 영향력 있는 사람의 영향력 없는 사람에 대한 태도와 모습 말입니다. 자신보다 어떠한 조건에서든 약자의 입장에 놓인 사람에 대한 은근한 우월감과 자신감, 그리고 상대방을 하찮게 대해도 된다는 확신, 더 나아가서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조작하려고 하는 그 묘한 시도들을 말입니다.
동성(同性) 사이에 예의없고 무례한 이상한 사람이지만, 이성(異性) 앞에서는 누구보다 멋진 사람이고, 자기보다 연약한 사람에게는 한 없이 잔인하지만,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이고, 영향력 있는 사람 앞에서는 한 없이 순종적이지만, 영향력 없는 한 사람 앞에서는 끊없이 폭력적인, 집 밖에서는 부드럽지만, 정작 자신의 가족에게는 억압적이고 무뚝뚝한 그런 사람을 그리고 심지어 그런 기독교인을, 저만 경험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역을 쉬고 설교를 하지 않고 공부만 한지 이제 일년 정도가 되어 갑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에 대한 감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러나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성경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 성도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여러가지 환경이 절박한 이곳에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세계에 뿌리 내려 있는 가슴 아픈 불평등을 보면서, 그리고 그것이 비단 경제 뿐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본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두가지 말씀이 다시 한번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All the Law and the Prophets hang on these two commandments)' 마태복음 22:35-40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인생에 큰 모험이라는 유학을 떠나, 솔직한 지금의 저에게 가장 절박한 목표는 '졸업' 입니다. 그리고 더욱 치장된 그럴듯한 목표는, '훌륭한 목회자' 가 되는 것입니다. 더 그럴듯한 궁극적인 목표는 '미래의 목회를 준비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서, 제가 진실로 가져야 할 인생의 최종적인 목표가 그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저를 포함한 우리는 늘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학위를 얻고, 더 많은 배움을 얻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더욱 큰 능력을 가지고, 남보다 강자가 되고, 영향력 있는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크리스천의 인생의 목적이라 여기고, 정말 최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의 진실한 목표가 그리고 인생의 완성과 기쁨이 그것이 아님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은 '다른이가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 처럼, 나도 다른 이에게 행하는 것' 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저의 이 글을 보고, 이것이 매우 '진부'한 도덕적인 가르침이라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다 아는 이야기를 왜 또 꺼내 놓느냐, 혹은 그럼 조금 더 착하게 살아가라는 이야기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의 성격 혹은 본질을 함께 보고자 함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이 부분에서 실패하고 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는 세상,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세상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라면, 이것이 진부한 가르침에 불과하다면, 이제 너무 들어서 지긋지긋하다면, 왜 이렇게 세상은 고통스럽고, 전혀 변하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질까요?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마이클 호튼의 복음이 이끄는 기독교 라는 책을 처음 보았을 때에(아마도 그 책이라 기억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저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호튼은, 우리가 들어 보았던 도덕적인 가르침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이 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하라' 라는 것을, 이미 우리 마음 안에 들어 있는 이야기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보통, 내가 평소에는 잘 모르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주일에 설교 시간에 듣고 그제서야 행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 모두가 그러한 가르침을 이미 마음 가운데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저에게 깊은 생각의 변화를 주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우리는 복음을 믿는 사람인데 말씀을 지키지 않을까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말씀을 지키지 않는것이 아니라, 복음을 더욱 깊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성도로서 우리의 생각에 큰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물론 일반적인 차원에서 어느 정도 지켜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에게 열심히 반복해서 가르침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 근원에서부터, 순수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자, 하나님의 자녀되어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자, 오직 크리스천만이 실행하게 되는 신적인 계명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상이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갑과 을의 관계를 단순히 비판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소극적인 태도이며, 또한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부패한 세상의 단면이 아니라, 세상이 보여주는 전부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 없이는 깨어질 수 없는 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상대방이 나를 대해주기를 바라듯이, 나도 상대방을 대한다는 것은 결코 진부한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적인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가 세상에서 주장하는 도덕이 아닌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의 죄인됨을 깨닫는 것, 그리스도의 전적인 용서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그분의 감동과 다스리심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한 경험되지 못할,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두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복음을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것으로 포장하여 가르치는 도덕적인 훈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감격시키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의 가장 작은 것 속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듯이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나보다 외모로, 재력으로, 영향력으로 못한 누군가에게, 가장 따뜻한 위로와 격려와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지금 시대야 말로, 그러한 소박한 실천이 가장 절박한 시점이라 생각됩니다. 거대한 영향력과 성공적인 삶은 우리의 결과는 될 수 있지만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의 최선이 성공과 영향력을 가져올 것인가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변해가는 우리의 모습이며, 그것은 결국, 우리 주변에 있는 가장 연약한 자, 을의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모습과 태도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집니다. 만약 오늘 당신이, 당신보다 연약한 누군가에게 자비와 긍휼과 인자함, 그리고 섬세한 선을 베풀었다면, 그것은 결코 작거나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며, 천국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곳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실존한다고 듣기는 했으나 세상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너무나 새롭고 황홀하여 차마 믿기 어려웠던, '그리스도의 향기' 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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