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원고를 작성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자체가 저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저의 연약함으로 끊임없이 남과의 비교 속에 살아가며, 그것을 복음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부단히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말하듯이 설교를 준비한다면 담담하겠지만, 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마음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너무 감정이 격해지지 않기 위해서 실제 설교 때에는 마음을 많이 다잡아야 했습니다.
이번 설교는 기본적으로 참조하는 책들을 다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석에 의존하는 설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받은 은혜들, 그리고 저의 결단들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마음에, 또 베드로 사도의 마음에 들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설교의 전체 논지는 팀켈러 목사님의 평소 논지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내가 잘되는 것이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팀켈러 목사님은 참 많이 강조합니다. 설교를 거의 매일 반복해서 들으면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 부분에 대해서 더 진중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습니다.
추가로 존파이퍼 목사님의 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료를 찾다가, 말씀 뒷 부분에 인용한 요한복음 21장에 대한 짧은 글을 찾았습니다. 존파이퍼 목사님처럼 솔직한 분은 없는 듯 합니다. 혹시라도 이 설교에 더하여 아래 글을 읽어 보신다면 많은 유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https://www.desiringgod.org/articles/what-is-that-to-you-you-follow-me?lang=ko
* 설교 후 반응
저는, 그 누구보다 아내의 평가 혹은 반응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그러더군요, “마음이 정말 아팠다” 저도 동일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크게 회개했다고 하시고, 또 어떤 분들은 은혜 많이 받았다고 악수를 청하기도 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아무 말씀 않고 제 손이 으스러져라 꽉 잡으시는데 뭉클했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좋은 순간은, 예배 이후에 집으로 돌아가실 때에 성도님들의 활짝 웃으시는 모습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특권과 바램이 채워졌음에, 저도 함께 기뻐합니다.
한편의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은 너무나 길고 지루합니다. 애써 고독함과 싸우며 지쳐 쓰러질 정도 되면 그제서야 원고가 완성됩니다. 끝이 아닙니다. 강단에서 홀로 시간을 재면서 연습합니다. 35분을 목표로 문장 하나 조사 하나까지 다듬어서 날카롭게 날을 갑니다. 모든 내용이 심지어 단어 하나까지 제 마음에 익숙해지고 고백이 되고 흔들리지 않을 때 까지 반복해서 연습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정말 몸서리치게 외로운 일입니다.
막상 세번의 설교를 하고 나면, 마음은 가볍지만 몸이 너무 아픕니다. 이렇게 타이레놀을 자주 먹어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거의 삼일은 꼬박 아픕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와, 제가 몸으로 버틸 수 있는 그 무게를 견주어 봅니다. 한번 한번의 설교가 기적이지만 마음에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계속 이렇게 할 수 있을까? 그저 딱 한 걸음씩만 하나님께 맡기며 나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설교자의 길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 말씀을 위한 기도
아버지 하나님, 이 자리까지 우리를 이끄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존귀한 말씀 앞에 서고 그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반석이시며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주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낙심한 자에게는 위로하여 주시고 갈 길을 잃은 자에게는 그 길을 보여주시며 마음이 교만한 자에게는 겸손으로 채워주시고, 주님의 자녀됨의 기쁨과 영광을 새롭게 경험하는 복된 시간으로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존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 아들과 딸
아주 어렸을 때에 본 드라마 중에 "아들과 딸" 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남매의 이야기입니다. 등장 인물의 이름 안에 이 드라마가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최수종씨가 연기했던 아들의 이름은 "귀남" 입니다. 이 아들은 무려
7대 독자이고 이름 자체가 "귀한 남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혜선씨가 연기한 귀남이의 어머니는 끔찍히도 아들을 아끼고 편애하는 역할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는 쌍둥이 딸이 한명 더 있는데 김희애씨가 연기한 딸 이름은 "후남"
입니다.
후남이라는 이름의 뜻이 참 서글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꼭 아들이면 좋겠다" 라는 한자 뜻이 후남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후남이는 어머니로부터 엄청나게 차별을 받으면서 자랍니다. 이 집의 편애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귀남이는 어머니 등에 업혀가고 후남이는 걸어갑니다. 이란성 쌍둥이기 때문에 당연히 생일이 같습니다. 그런데 생일 날에 귀남이는 잔치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후남이는 그 음식을 부엌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 너 때문에 내가 안 된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아주 극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이제 귀남이와 후남이가 둘 다 대학 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남이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지 못해서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후남이는 어머니 몰래 시험을 보고 오히려 합격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후남이는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되려 어머니에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후남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고로 한 집에 한 해에 급제자 두 명이 안 나온다고 했다,
니가 귀남이를 떨어트린 것이여 귀남이 앞길 막을 년” 이렇게 악담을 퍼붓습니다.
지금 이 대사는 귀남이 어머니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귀남이 어머니는 이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잘 되야 하는 것은 오직 귀남이다 라는 것입니다. 후남이가 잘되면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귀남이 어머니는 세상을 바라볼 때에, 한 사람이 잘 되면 반드시 한 사람이 망하게 되는 일종의 전쟁터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무섭도록 지독스러운 비교 의식과, 이 세상에서 누군가가 나보다 잘 되면 나는 망하는 것이다 라는 그 지독한 질투심이 드라마 안에서 잘 표현이 되었던 것입니다.
- 이스라엘은 정말 악하다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은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정말 사랑하셔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민족을 만드시고 율법을 주시고 사랑하셨는데,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0장에서는 그것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지금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도 그리고 심지어 지금까지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완강히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은 망한 것인가?
자 그렇다면, 이러한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들은 로마 교회 성도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로마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섞여 있는 공동체였는데, 그 중에서 아마도 이방인이 숫자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의 편지를 쭉 읽으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자기도 모르게 의기 양양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유대인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어휴 저 답답한 유대인들 같으니, 아니 저렇게 받은 것이 많은데 왜 아직까지 저렇게 살고 있는가? 나는 혈통적으로는 유대인도 아니지만 이렇게 믿음이 좋고 이렇게 예수님 잘 믿고 행복한데, 아직까지도 저렇게 살고 있다니 참 답답하다, 아무래도 하나님께서는 나는 특별히 사랑하시고 유대인들은 버리신 것이 틀림 없다” 이런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 바울의 이야기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11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로마 교인들의 태도와 생각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만 대단하다고 그리고 반면에 다른 사람은 다 버렸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비록 지금 너희 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답답해 보이고 마치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너의 착각에 불과하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절에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나도" 라는 한 마디에 얼마나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바울 사도의 "나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가 여기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혈통적으로 완벽한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죽이기 위해서 쫓아다니던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정 반대의 삶을 살던 사람인데 그렇게 형편없던 바울 자신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고 나를 돌이키셨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엘리야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 이후에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를 꺼내고 계십니다.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알고 계십니까? 지금 로마서가 기록된 시점이 AD 56년 경입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는 BC 860년경의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거의 천년 전에 사람을 불러서 바울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당시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정말 엄청나게 영적으로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에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은 왕 중에 최고로 악한 왕이었고 부인인 이세벨은 어떻게든 엘리야를 잡아서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보이는 시점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너무나 고독한 중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아무리 자기 주변을 돌아보아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이 정말 하나도 없다고 느끼던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죽음을 피해서 광야로 도망을 갔는데 완전히 탈진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먹을 것을 먹이시고 그가 겨우 기력을 차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엘리아야 너는 왜 여기에 있느냐?”
엘리야는 이렇게 하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4절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마음에 지금 무슨 마음이 있는 것인가? 그의 마음에는 괴로움과 고통과 불만이 가득한 것입니다. 나는 열심히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만 남아 있고 그나마 다른 이들이 나를 죽이려 합니다 이렇게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 남아 있는 7천명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새롭게 사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왕기상 19장 18절 말씀입니다.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이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오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엘리야의 입장이라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라가 온통 타락했고 엉망이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외치고 싸우는 사람은 이제는 자기 밖에 없다고 완전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아니다 엘리야야, 그것은 너의 착각이다 너는 여전히 잘 모르고 있구나, 너처럼 신실한 사람 우상에게 굴복하지 않은 칠천명을 내가 남겨 두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일곱명도 아니고 칠십명도 아니고 칠백명도 아니고 무려 칠천명이 여전히 남아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이 말씀을 들은 다음에 엘리야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도님들께서 엘리야라면 어떤 기분이었겠습니까? 제가 엘리야라면 아마도 기분이 완전히 상했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틀어서 나 하나만 지금 주님을 충실하게 따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사람 심지어 나 보다 신실하고 더 뛰어난 사람이 칠천명이나 있다고 하니 그것보다 더 김이 빠지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 하나님은 그분을 위하여 여전히 일하신다
자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엘리야에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오늘 로마서 말씀에서 우리가 아주 중요한 한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로마서 11장 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열왕기상의 말씀과 로마서 말씀을 비교하면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라는 말씀이 더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라는 말씀이 더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 사도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성도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그 관점의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가 혼자서 착각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만 위해서 일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가장 큰 영적인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여호와께서 일하신다 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꺼고 하나님은 나만 위한다 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나라는 이기적인 테두리를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 엘리야의 속 마음
엘리야의 그 깊은 마음 속에 들어가보면 어떤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잘되는 나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탐욕이라는 것은 자신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그토록 추구하던 너보다 훨씬 잘 되는 나라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은혜로운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누가 감히 그것을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짜 문제는 엘리야의 그 마음 깊은 곳에 “너보다 훨씬 잘되는 나”라는 그 탐욕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더 교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어깨가 으쓱하는 것입니다. “그래 이스라엘 민족 중에 내가 최고야 내가 비록 재산은 없어도 그래도 이스라엘 민족 중에 신앙 하나는 내가 최고야 나 말고는 다른 사람이 없어 하나님은 나만 특별히 사랑하시고 내가 제일 잘 되야 해” 그렇게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드럽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엘리야야 그렇지 않다 너가 지금까지 참 잘했다, 그러나 나는 너 말고도 다른 사람에게도 충만하게 역사하고 있다, 너는 나의 일하는 것을 다 볼 수 없지만 나는 여호와다, 나는 너의 생각을 뛰어 넘으며 온 세상 속에서 여전히 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 은혜의 신비
그렇다면 지금 이 말씀이 로마 교회 이방인 성도들에게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그들의 뒤통수를 강하게 치는 그런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은근히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만 위해서 일하시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보다는 내가 훨씬 낫다 내가 잘되고 있다 라고 은근히 뻐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로마서 11장 5절과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바울 사도는 은근히 교만하고 은근히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성도들에게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넘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 바로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속으로 은근히 교만해져 있는 이방인들이 사실 어떻게 그 자리까지 갔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유대인들이 답답해 보이고 그들이 전혀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서 그들과 나를 비교해 보면 나도 모르게 나만 특별하고 나만 잘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계시며 여전히 유대인들도 넘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 간증
예전에 한국에서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 어떤 유명한 분이 학교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신실한 크리스천인데 미국의 경제계에서 굉장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분이셨습니다. 신학교 채플에서 간증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중에 압권은 이것이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그분이 정말 먹을 것이 없고 가난했는데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미국에서 유명한 대학에 무작정 찾아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리고성이 생각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그 학교의 담 주변을 매일 돌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돌다가 학교의 총장을 만난 것입니다. 총장이 물었습니다. “자네 여기서 뭐하나?”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그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제안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네 그럼 전액 장학금을 지원해 줄테니 우리 학교에서 공부해보지 않겠는가? 말 그대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분은 정말 얼마나 열정적으로 간증 했는지 모릅니다. 마치 세상의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자기에게 올인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날 채플의 분위기는 많이 무거웠습니다. 저는 그분이 참 진실하고 간증 자체는 참 좋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신학생들 대부분은 정말 가난하고 힘든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삶을 드리겠다고 신학교까지 왔지만, 겨우 대출 받아서 등록금을 낸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고, 등록금을 전혀 내지 못하고 학교의 눈치를 보고 있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만 바라는 성숙
저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기독교를 가장한 그 어떤 것을 열심히 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간절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이라는 것은 세상의 논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잘 나서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귀남이로 태어나서 귀남이기 때문에 당신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후남이로 태어나서 후남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만 미워하시고 그래서 절망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면서 상대방이 가진 것을 빼앗아야 살아남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 모두는 아무런 소망 없던 죄인에 불과한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라는 것은 여러분만 잘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남보다 훨씬 잘되고 그럴듯해 져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겉으로 잘나가는 누군가에게도 겉으로 못 나가는 누군가에게도 동일하게 넘치는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연결될 수 없는 사람들
저는 본격적으로 성경을 읽은 것이 스무살 정도 부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니 참 이상한게 많이 보였습니다. 특별히 믿음장이라고 이름 붙여진 히브리서 11장은 정말 이상하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34절 부터 말씀입니다.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내가 남들보다 훨씬 잘되는 것으로 심지어 내가 남들보다 뭔가 은혜 많이 받았다고 뿌듯해 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도대체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나라를 이기고 승리하며 사자의 입도 막았습니다. 기적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동안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글로 기록된 것을 읽는 것 조차 너무나 고통스러운 돌로 맞고 칼로 죽임을 당하고 집도 없이 짐승의 가죽 하나 걸치고 도망다니고 학대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기독교는 단순히 한 사람의 삶에서 겉으로 나타난 모습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이든, 가족이든,아들이든, 딸이든, 옷이든, 차이든 심지어 교회 직분이든, 기도 응답이든 그래도 너보다는 훨씬 잘 되는 나의 모습을 가지는 것이 기독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이후에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마음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시고 나의 양을 먹이라 라고 그에게 숭고한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사실 그 다음 장면이 굉장히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원하지 않는 곳으로 비참하게 끌려갈 것이며 그는 십자가에서 죽을 것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베드로가 옆에 있던 사도 요한을 흘낏 보더니 갑자기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에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베드로 사도께서 이것을 왜 물었을까? 갑자기 마음에 비교 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자신은 비참하게 죽는다고 말씀하시는데 혹시 요한은 나보다 훨씬 잘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마음이 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는 정말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며 예수님의 귀한 제자입니다. 바로 앞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는 그 베드로의 마음도 분명하고 진실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이면 요한보다는 더 그럴 듯하게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나 중심적인 나만 생각하는 나라는 틀에 갇힌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 앞에 이야기한 것입니다.
-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장 22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의 마음을 다 아셨습니다. 베드로야 요한이 너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멋지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나는 요한을 사랑하는 것 만큼 너를 충분히 사랑한다, 나는 그에게도 그리고 너에게도 여전히 동일한 은혜를 베풀고 있다, 너는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말고 오직 너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감당하는데 초점을 맞추어라,
너는 심지어 너의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너의 가장 비참한 모습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너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너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나를 바라보아라, 내가 지금까지 너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기억하라, 나는 너를 위하여 나 자신 나의 전부를 주었고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와 동행하겠다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 다시 한번 너에게 말한다,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너 없이도 된다
저의 아버지께서는 경상도 남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이 많은 편은 아니십니다. 그런데 제 인생에 꼭 필요한 말씀으로 항상 저를 인도해주시고 계십니다. 아마 제가 30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목사 안수 받은 지 얼마 안되었고 정말 힘써서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아들아, 너가 없으면 교회가 잘 안된다는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처음에 그 말씀을 딱 듣는 순간 너무 마음에 화가 났습니다. “아니 아버지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요, 제가 맡은 일이 이런 이런 이런 것입니다” 저를 무시하신 것 같아서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제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았더니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터 영적인 교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있다, 여러 목사 중에 그래도 내가 낫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훨씬 인정 받고 잘되는 나이다, 그러니 내가 없으면 교회에 큰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저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주 은밀하게 교만이 뿌리 박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라
그런데 그러한 저의 태도가 유학을 나오면서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저는 장로교 목사이지만 오순절 교단에 속한 신학교에서 처음에 유학을 시작했습니다. 전세계에서 찬양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찬양하고 찬양을 배우는 곳입니다.
저는 장로교 목사였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제 마음 안에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장로교가 제일 잘 되야 한다 장로교 목사가 최고다, 목사는 그래도 이름 있는 학교를 나오고 학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곳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장로교 목사나 장로교 교인이 아니어도, 남들이 알아주는 학위가 없어도, 너무나 인품이 좋고 또 신앙이 좋은 그리고 찬양에 탁월한 은사가 있는 사람들이 정말 모래알처럼 많은 곳이었습니다.
저는 유학 생활을 하면서, 저라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나라 라고 불리는 이 영광스러운 곳에서 아주 작은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고백하는 기독교의 목표라는 것이,
내가 남보다 훨씬 잘 되기 위해서 내 사역을 더 빛내고 더 멋진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종처럼 부려 먹고 교회를 이용해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여호와의 종이 되어야 하며, 마땅히 그분의 뜻을 이루는 그 유일한 단 하나의 삶의 목적 하나를 위해서 이 땅에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내가 내 눈으로 보기에는 그 사람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일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에 A.W. 토저 목사님의 기도문을 가끔 읽고 있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설교 전에 하셨던 기도들을 모은 책입니다. 거기에 이렇게 기도를 하셨습니다. “주님, 간절히 기도하오니, 우리가 공작새처럼 깃털을 들어 올리고 곧게 세워 자신을 실제보다 다섯 배 크게 보이도록 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 얼마나 악한지,어린양의 보혈과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한지를 깨닫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야 말로, 기독교가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며, 진정한 영적인 성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남보다 훨씬 잘 되는 나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그저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신앙은, 그 마음 안에 은혜에 대한 감각으로 온통 가득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여전히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음을 인정하며 그것을 기뻐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 맺으며
말씀을 맺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세상은 지독스럽게 우리에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잘되는 내가 되어야 한다, 훨씬 기도도 잘 이뤄지고 훨씬 믿음도 좋아야 하고, 훨씬 열매도 많아야 하고 훨씬 그럴듯해 보여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그것만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잘되는 것 같으면 교만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그렇지 못할 때에는, 헤어나오기 어려운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이 틀림없어, 나보다 훨씬 잘 된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너무 마음이 힘들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아”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다른 형제 자매를 질투하며,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께 나도 모르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니, 저도 이제서야, 하나님의 복음이 저의 내면 속에 역사하는 그 긴 여정에 첫 발을 내딛은 것 같습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칠천명의 신실한 사람을 남겨 두었다” 라고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이, 그리고 “요한의 죽음과 그의 삶이 도대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라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아주 조금씩 저의 내면에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내가 뭔가 신앙적으로 잘 풀리는 것 같을 때에도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겸손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시고 그분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혹시라도 삶이 낙심되고 내 인생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때에도 남과의 비교에 빠져서 고통 속에 헤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집중하여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맡겨진 성도의 영광스러운 삶을 충실하게, 오직 주님만을 따르며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의 삶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높아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이 시간에 말씀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먼저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저의 영적인 교만을 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나만을 위하여 하나님이 존재해야 한다고 착각하며, 나만 잘 되기 위해서 신앙 생활 했던 저의 모습을 돌이킵니다, 나 같은 죄인도 기꺼이 사랑하시며 나와 모든 이들에게 넉넉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그 주님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감격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나를 통해서 오히려 잘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죄인을 위하여 기꺼이 내어 주신 것처럼, 나의 사랑과 나의 수고와 나의 헌신을 통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그분만 따르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과 능력 주심이, 나에게 부어진 주님의 은혜를 확신하며 맡겨진 주님의 길을 힘써 걸어가기로 결심한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머리 위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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