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9장 1-14절 새벽 설교 by 정진부 목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크게 보았을 때에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1절 한절인데 “돌이키는 자의 지혜” 라고 소제목을 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14절 까지는 “공동체를 살리는 지혜” 라고 소제목을 붙일 수 있겠습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함께 말씀 나누기를 원합니다.
1절에 보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1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 한 사람을 등장시키고 계십니다. 이 사람에 대한 설명은 “목이 곧은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의 표현이 참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굳이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교만한 사람을 말할 때에 “목이 곧은 사람이다” 라고 종종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에 목이 곧은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감사하게도 책망하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렇게 살면 망한다 라고 책망하고 교정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못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라는 것을 강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2절부터는 그 말씀의 성격이 조금 달라져서, 한 사람의 내면과 삶을 다루기보다는 “한 사람이 전체 공동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2절에 보니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의인이 열 명이라도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하시겠습니까?” 라고 간절히 물어보던 그 장면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한 성읍과 도시에 의인이 많으면 어떠합니까? 그 도시의 온 백성에게 즐거움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권세를 잡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 역시 백성에게 큰 탄식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공동체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으로 계속 이어지는 맥락에서 4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4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역시 한 사람의 리더가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정의로우신 것처럼 그분의 성품에 맞추어서 정의를 세워가는 왕을 통해서 한 나라 전체가 견고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악한 리더가 세워진다면 결국 그 나라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12절도 아주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12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현대어 성경은 좀 더 풀어서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29:12 정권 잡은 자가 거짓 정보에 귀기울이면 그 아래 있는 관료들은 거짓말만 골라서 하게 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씀은 특별히 한 공동체의 리더의 주된 관심사라는 것이 공동체 안에서 점점 전염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경우에는, 조직의 탑 리더가 정직하고 바른 말은 무시하면서 자기 귀에 듣기 좋은 혹은 흥미를 가지게 하는 거짓 정보들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리더의 입맞에 맞추어 준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분위기가 어떻게 되는가? 잠시 잠깐은 서로 화기애애하고 좋을 지 모르겠으나 결국 그 공동체는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12절이, 공동체에 미치는 한 사람의 악한 영향력에 대해서 강조한다면, 반대 의미에서 한사람이 공동체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이 14절 말씀입니다.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리더가, 가장 힘이 있는 사람이, 가장 연약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공정하고 정의롭게 다스리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보면 왕이 정직하고 공정하게 연약한 자를 돌보는 것은 왕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그런 일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일을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감당하는 그 한 사람을 통해서 공동체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유익과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그 행위를 통해서 본인 스스로에게도 큰 유익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이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첫 번째 적용은, “돌이킬 것인가? 아니면 결국 망할 것인가?”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저는 1절 말씀을 읽으면서부터 “굉장히 등에 식은땀이 난다”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고의 말씀이 결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를 책망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특별히 새벽 예배를 꾸준하게 드리시는 분들은 매일 아침 첫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격려를 받고 격려 뿐 만 아니라 책망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 말씀을 개인적으로 읽고 묵상하면서 끊임없이 책망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비춰보니 책망을 자주 받는 우리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목이 곧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책망을 받는다는 그 사실이 그 사람이 겸손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으면서도 혹은 공동체의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얼마든지 마음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는 것입니다.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너에게 머리를 숙이고 듣고 있지만 나중에 한번 두고 보자” 라는 악한 마음을 얼마든지 가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어떤 결과가 있는가? 갑자기 패망을 당한다, 그리고 피하지 못한다 라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들이 많이 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자주 꺼내서 보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리 스트로벨이 쓴 “특종 믿음 사건” 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의 난제에 대해서 저자인 리 스트로벨이 유명한 신학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날카롭게 질문하고, 그 답에 대해서 정리한 책입니다.
이제 말씀드릴 내용은, 그 중에서 “영원한 지옥이 무슨 필요인가?” 라는 챕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모어랜드라는 교수가 지옥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따라서 지옥이란 일차적으로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 리 스트로벨이 물어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지옥을 택한다는 말인가요?" 그랬더니 모어랜드가 대답을 합니다. "아닙니다.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천국을 거부하고 대신 지옥을 선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천국의 일상이 될 그런 부류의 가치를 거들떠보지 않기로 한 것은 분명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덧붙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은 단순히 선고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이 생에서, 바로 지금 여기서 날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의 종착점이기도 합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1절을 보면서 방금 읽어드린 책의 내용이 생각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선택의 관계라는 점에서 저에게 가장 큰 통찰력을 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을 보면서 혹은 악인의 종말을 생각하면서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옥은 결국 죽은 이후에나 가는 것이고 사는 동안에는 나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죽기 전에만 잘 돌이키면 된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시간이라는 연속성 안에서 하루 하루의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가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그 결론이라는 맥락에서 천국을 들어가는 것이고 지옥을 들어가는 것이다 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죄인의 구원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그분이 우리를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고 믿으며, 한번 선택하신 자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능히 용서하시며 뛰어 넘는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 사도는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로마서 3장 3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은 자로서, 그분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 말씀으로 바꾸어서 표현하자면 이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자주 책망을 받을 때에 목이 부드러워져서 그 강팍한 마음이 녹아들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돌이키며 통회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기꺼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서 순종하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께 회개하기를 기뻐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구원을 받은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성도님들은 어떠합니까? 혹시라도 우리는 하루하루를 내 마음대로 방종하여 살면서, 하나님이 오시려면 아직 멀었다고 혹은 내가 이렇게 산다고 해서 내 구원은 아무 문제 없다고 이상한 착각 속에 빠져서 그렇게 어리석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그 부분에서, 우리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사랑으로 책망하시며 선택한 자들이 다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우리의 마음이 완고하고 악하다면 바로 그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온 마음을 쏟고 성실하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 주시는 기쁨과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두 번째 적용은 “선한 영향력인가? 아니면 악한 영향력인가?”입니다. 조금 예민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본인이 소천하신 이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불러주기를 원하십니까? 만약에 성도님들의 이름 앞에 누군가가 수식어를 붙여준다면 어떻게 붙여 주기를 원하십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에, 남아프리카의 나라 중 하나인 짐바브웨의 무가베 전 대통령이 95세로 사망하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했던 사람이 소천 하였다면 얼마나 나라 전체가 크게 슬퍼할 일입니까? 그리고 한 나라의 수장이 소천 했다면 전 지구상의 나라들이 얼마나 함께 아쉬워할 일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한 뉴스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이렇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사상 최악 독재자, 무가베 짐바브웨 전 대통령 95세로 사망" 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는 무려 95년의 삶을 살았지만, 그리고 무려 30년 동안 한 나라의 대표자였지만 그의 삶의 마지막이 끝나고 사람들은 그를 부르기를 사상 최악의 독재자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말씀 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4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성경의 모든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적어도 이 말씀이,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문자적인 내용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기사들을 살펴보니 무가베 전 대통령은 처음에는 그래도 통치를 잘 한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변질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정적을 탄압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국민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마음껏 채우고 온갖 폭정과 공포 정치와 그리고 무능한 경제 정책으로 나라를 완전히 망쳐 버렸습니다.
2천 년대 중후반에는 대략 800억 퍼센트라는 물가가 말도 안 되게 올라가는 초 인플레이션으로 전 세계에 짐바브웨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로 인해서 무려 국민의 80퍼센트가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궐하는 에이즈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환자가 2백 만 명이 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낮은 평균 수명이 되었습니다. 어떤 기사는 그에게 대해서 묘사하기를 짐바브웨는 국민들에게 “살아있는 지옥”이 되었고 무가베에게는 “향락의 왕국”이 되었다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그리고 무가베가 망하게 한 그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공동체에 미치는 리더의 영향력 혹은 한 사람의 역할과 그것의 중요성이라는 것을 정말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는가에 대해서 놀랍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입니다.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몸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지체들이 완전히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몸의 모든 부분은 근육으로 완전히 연결되어서 피가 흐르고 있고 영양분과 성장과 고통을 하나로 공유하는 것이 몸이라는 구조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의 공동체가 성장하고 쇠퇴하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함께 책임이 있다 라는 것이, 바로 성경이 보여주시는 엄청난 영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따로 떨어져 있어서 서로에게 아무 영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적으로 서고 성장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 혹은 나의 악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는 영적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13절 말씀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바울 사도는 모든 공동체의 멤버들이 각자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목표 가운데 모든 관심을 예수님에게 쏟고 그분을 알고 믿는 것에 함께 자라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의 상황과 태도에 대해서 곰곰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공동체로 만드시고, 그 공동체 안에서 영향을 미치는 놀라운 존재로 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만약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의 말씀에 나의 마음을 담아서 그것을 공동체 가운데 실천해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영향력이 점점 확대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하루라는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 하루가 의미 있게 쌓여져서 결국에는 누군가가 우리를 떠올릴 때에 “하나님을 높이는 누구누구” 라고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혹은 “긍휼의 사람 누구누구” 라고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영향력을 펼쳐 나가시고 그것을 통해서 공동체를 변화시켜 나가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시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 앞에서 언제나 회개하고 돌이키는 참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마음과 돌이키는 마음을 주시고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복된 자녀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배우고 알아가며 내가 속한 공동체 가운데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함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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