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13) - 광야를 지나며

 


1. 가사 살펴보기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2. 곡 소개

곡은, CCM 그룹 히즈윌의 2013년도 앨범, “살아가다에 수록된 곡이다. 이 곡은, 출애굽 이후에 메마른 광야를 지나야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 시대의 크리스천에게 탁월하게 적용한 곡이다. 광야의 고난을 통하여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고, 나 자신이 아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은혜를 누리게 됨을 고백하는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신명기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8:2 Remember how the LORD your God led you all the way in the desert these forty years, to humble you and to test you in order to know what was in your heart, whether or not you would keep his commands.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8:3 He humbled you, causing you to hunger and then feeding you with manna, which neither you nor your fathers had known, to teach you that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the LORD.

 

8:2–6 Disciplined in the desert

God continues to discipline his children as he did the Israelites (5). He sometimes leads us through difficult, bewildering, even bitter experiences to prove our dependence upon him. Such times can be used to strengthen our faith, determine our priorities, enrich our witness and increase our usefulness to others. When we encounter new situations or come up against adverse circumstances, we must remember that these times may not be as threatening or destructive as, at first sight, they often seem. The Lord may be using such events to ‘discipline’ us or teach us. Testing times are learning times. One of the most important things we all have to learn is what life is all about. These pilgrims had to learn that life consists of more than eating and drinking. When they were hungry in the desert God gave them manna (3) which fed their earthly bodies but nothing more. They were spiritual people who received God’s word in the desert and this kept them truly alive. Jesus used the words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 from … the Lord (3) to respond to the devil’s temptation when Jesus was physically hungry (Mt 4:4; cf. Lk 4:4). In so doing Jesus showed that he understood the supremacy of spiritual necessities above physical ones.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분의 자녀들을 훈련시키십니다. 그분은 때때로 우리가 그분을 의존하고 있음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어렵고 당혹스럽고 쓰라린 경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한 시간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만들고, 우선 순위를 결정하게 하고, 우리의 믿음의 증언을 풍부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우리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거나, 혹은 적대적인 상황에 직면할 , 우리는 이러한 시간이 언뜻 보기에 위협적이거나 파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키시거나 가르치시기 위해 그러한 사건들을 사용하실 있습니다. 시험을 받는 시간은 배움의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가 배워야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는, 삶이 과연 무엇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순례자인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삶이 단순히 먹고 마시는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굶주릴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는데, 그것은 그들의 육신을 먹이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말씀이 그들을 참으로 살게 하는 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육체적으로 굶주리시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물질적인 필요보다 영적인 필요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계심을 보이셨습니다.

NIV Bible Speaks Today: Notes (London: IVP, 2020), 239.

마태복음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개역개정) 4:4 Jesus answered, "It is written: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NIV)

4:4 Jesus quoted Dt 8:3. His reference to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recalls the OT theme that God’s words are not idle but are to be received as commands. Deuteronomy 8:1, 6 emphasize the need to obey God’s commands, and Dt 8:1 teaches that man lives by following God’s commandments just as 8:3 says that man lives by what comes from God’s mouth (Dt 6:24). Thus the OT text that Jesus quoted teaches that obeying God is more important than being well-fed. Israel struggled to learn this truth (Ex 16:3; Nm 11:4–5). In contrast, Jesus hungered for righteousness more than bread and thirsted for obedience more than water. He urged his disciples to have the same priority (Mt 5:6).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8 3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에 대한 그분의 언급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구약의 주제를 상기시킵니다. 신명기 8 1,6절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신명기 8 1절은, 8 3절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람이 사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구약의 본문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먹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Robert H. Stein, “Differences in the Gospels,”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503.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찬양은, 광야가 가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찬양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이후에, 그들이 원래 머물던 이집트와는 너무나 다른 척박한 광야로 그들을 인도하신다. 광야는, 눈에 보이는 의지할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곳이다. 광야는, 생존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자기 자신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이 하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물론 그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광야는, 내가 지식적으로 알고 인정하던 신앙의 내용들이, 드디어 나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받아들여지고 뿌리를 내리며, 삶 속에서 실제로 나의 것으로 만들어지는 곳이 광야이다.

가장 완전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의 눈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도, 아버지의 뜻 가운데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을 광야를 통해서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고난을 통해서 그분의 자녀들을 훈련시키시고, 오직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그분의 성숙하고 참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신다.

새로운 한해는 어떤 한해가 될 것인가? 아마도, 고난의 한해가 될 것이다. 경제적인 정치적인, 혹은 교회들의 상황은 여전히 어두워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분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라고 말씀을 통해 그리고 이 찬양을 통해 용기를 주신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06/1_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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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7일 화요일

인공지능 (A.I.) 검색 ChatGPT, 목회에 사용할 수 있을까? (2023년 1월 업데이트)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 우리의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운영하는 찬양 채널의 모든 찬양 커버를, 인공 지능 DALLE2 가 그려주는 그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매주 한곡씩 커버곡을 준비하면, 특색 있는 그림을 준비하는 것이 도저히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빠르고 간편하게, DALLE2가 그려주는 그래도 꽤 괜찮은 그림들로 유투브 영상의 커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급스러운 느낌의 그림들을 "단 몇초"만에 생성시켜주는 능력은 언제나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 DALLE2

* 페이스 피아노

그런데 얼마전에, 흥미로운 기사를 우연히 보았습니다. "ChatGPT"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대화형으로 검색을 해주는 실험적인 단계의 검색 형태"인데, 그 성능이 너무나 뛰어나서 구글에서 긴장하고 대응한다는 기사였습니다. 심지어, 프로그램 코딩을 수정해 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놀랍더군요, 이미 현재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장되지 않은 구글에서 긴장을 하고 있다고?

바로 찾아보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늘 사용하는 DALLE2를 개발한 OpenAI의 하위 서비스였습니다, 갑자기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이미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DALLE2를 개발한 회사에서 검색 엔진을 만들고 있다? 그것도 단순한 검색 엔진이 아닌 마치 사람에게 물어보고 답을 얻는 듯한 결과를 주는? 이건 정말 "새로운 차원의 도전" 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테스트해 보았습니다. 

현재 접속자들의 폭주로, 구글 검색을 통한 링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아래 블로그로 들어가시면 최상단에 "Introduting ChatGPT research release Try" 가 보입니다. 

* OpenAI Blog
https://openai.com/blog/

"Try"를 누르시면 서비스 접속이 가능합니다. 처음 사용하신다면, 아마 계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냥 이메일로 계정을 만들면 에러가 종종 납니다. 그래서 "구글 아이디"를 이용해서 접속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듯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아래 링크로 접속하게 되며, 실제로 "화면 하단 채팅창"에 검색 내용을 집어 넣고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래 화면은 데스크탑 접속 화면이고, 셀폰으로도 거의 유사한 화면에서 실행이 가능합니다.

* ChatGPT: Optimizing Language Models for Dialogue - OpenAI
https://chat.openai.com/chat


자, 여기까지 왔는데 사실 마음이 조금 떨리더군요, 무엇부터 물어보면 좋을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야로 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평소에 많이 고민하던 부분에서 나오는 답을 보게 된다면, "그 결과물의 수준을 평가하기에 좋겠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추상적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을까?

그래서 첫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실 조금은 무모하다고 생각하면서 큰 기대감 없이 질문을 넣었습니다. "How to develop the reading skill?" 청년 시절 이후로, 지금도 제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거대하고 또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래도 남들보다 조금은 더 고민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자부심이 있는 분야입니다. 아래 글처럼 답이 나왔습니다. 


답이 나오는데, 마치 사람이 글을 직접 쓰는 것 처럼 순차적으로 번호에 따라서 내용이 나왔습니다. 약 5초 정도 걸린 듯 하네요. 일단, 분량에 너무 놀랐습니다. 사실 제 질문은, "실용적이면서도 상당히 추상적인 질문"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천차 만별의 답변이 가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읽기 능력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에 대한 "굉장히 탁월한 내용"을 정리해서, "단 한번"에 보여줍니다. 

위의 내용에서, 저는 이런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책 읽기 위해서 시간을 따로 내라는 것, 그리고 흥미로운 것에서 부터 먼저 시작하라는 것, 그리고 적당한 쉼을 가지면서 요약을 하라는 것, 그리고 "active reading"을 하라는 것, 크게 소리내서 읽어보라는 것, 그리고 멘토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내용 전체가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엇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active reading을 하라는 것은 정말 좋았습니다. 요즘에 제 관심이라서 더 눈에 보인 듯 합니다. 

결론적으로 책 읽기라는 분야에서, 제가 평소에 고민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거의 다 들어가 있습니다. 북클럽이라는 그룹 셋팅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개인 리딩에 관한 거의 완벽한 대답"입니다.

답변을 보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나에게 찾아와서 정말 간절한 얼굴로, "어떻게 해야 읽기 실력을 늘릴 수 있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과연 내가 5초 안에 저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솔직히 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하루 정도 고민해도, 저 정도 대답은 만들어내기 어려울 듯 합니다. 위의 내용을 보고서 제가 생각한 것은, 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서 교육 자료로 만들어도 충분하겠다는 판단입니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생각입니다. "그 때 출처는 뭐라고 적으면 좋을까?" 

* "실제적인 교육 목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자, 이렇게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 얻고나니, 갑자기 궁금해지더군요, 저는 역시, 천상 목회자입니다. 그럼 혹시 ChatGPT를 목회에 이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비슷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How to develope the understanding of the Bible?" 모든 목회자가 그리고 성도님들이 해볼만한 질문입니다. 비슷하게 약 5초 정도 후에 아래 대답을 내 놓았습니다. 


처음의 답변보다 좀 더 놀랐습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이렇게 해주는거지?" 이 답변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시간을 특별히 내라는 부분, 당신이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고르라는 것, 스터디 바이블을 포함해서 필요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쓰라는 것, 그리고 그룹으로 하라는 것, 질문을 하라는 것, 이해를 위해 기도를 하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삶의 루틴으로 만들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탁월하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부족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추가적으로는 이런 내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번역만이 아니라, 중요한 몇가지 번역을 정해서 비교를 하면 좋겠고, 개인 사고의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묵상과 질문을 먼저 하고 나중에 도움되는 자료를 보면 더 좋겠고, 또 결국 성경에 대한 이해는 평생 깊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검색 엔진이 혹은 인공지능 chat이 정도 결과를 단번에 보여줄 수 있다면,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의 하나를 준비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틀만 조금 도와줘도, 엄청나게 큰 수고를 더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성도님들을 대상으로 큐티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된다면, 위의 내용을 간단히 참고해서 구조와 내용을 수정하고 살을 더 붙여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혹시, "설교 준비 자체"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여기까지 해보니, 갑자기 더 궁금해지더군요, "그렇다면 설교 준비에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순간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습니다. 왠지, 금단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들더군요, 저는 들어본적이 없지만, 곧 설교를 대신 써 주는 인공지능이 나올거라고 해서 웃어 넘겼던 기억도 났습니다. 

"혹시 ChatGPT에게 설교를 요구하면 어떻게 대답을 해줄까?" 그래서 해보았습니다. "First John chapter 5 verse 1 through 12 sermon" (처음에 검색 때에는 대충 하느라 오타도 났는데 심지어 오타도 가볍게 파악하고 수정하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가 이 검색을 하기 전에, 위의 본문 말씀에 대한 저의 설교 준비는 아직 충분하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본문 묵상을 어느 정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고, 개역 개정에서 NET BIBLE을 살핀 이후에, 스터디 바이블들을 다섯 권 정도 읽어본 상태였습니다. 시간은 다섯 시간 정도 사용했고 내용은 약 70퍼센트 정도 머리 속으로 정리한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에서 ChatGPT의 답변을 보고 제가 느낀 첫 인상은, "쉬워서 좋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요한 1서는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닙니다. 쉬운 듯 굉장히 복잡한 논리 구조가 그 안에 들어가 있고, 그것을 성도님들이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는 것이 저는 참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제가 좋아하는 스터디 바이블들도 일치점이 부족하고, 의외로 약간 뭔가 헤매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ChatGPT는, 순식간에 논리의 흐름에 따라서 단락 별로 정리를 해주었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깊은 신학적인 의미나 통찰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아주 간단하게 본문의 개요를 살펴보는 정도로는 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아마 많은 목회자들이 공감할 것입니다, 쉬운 설교가 정말 어려운 설교라는 것을, 그런 면에서 위의 내용은 저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저의 실제 설교 내용에 넣어 보았습니다. 제 설교에 있어서 실제로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인트로 부분에서 "이 본문이 어떤 내용이다" 라고 두줄로 요약한 부분입니다. 제가 이해할 때에는 큰 무리 없이 잘 정리했다고 생각해서, 실제로 제 설교 인트로에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흥미로웠던 것은, 10-12절을 제가 가장 애용하는 Grace and Truth 스터디 바이블과 비교해 본 것입니다. 놀랍게도, 본문의 기본적인 의미를 ChatGPT가 좀 더 드러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 설교의 논지를 그쪽 방향으로 포커스를 맞추어서 설교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5:10–12 Ultimately, the testimony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originates with God himself. Those who accept this testimony have eternal life, while those who reject it not only reject the message but imply that God is a liar. How one responds to the Son results in eternal life or death, since to reject the Son is to reject God himself. No one can love the Father and not love his Son.

Barry Joslin, “1 John,” in The NIV Grace and Truth Study Bible, ed. R. Albert Mohler Jr. (Grand Rapids, MI: Zondervan, 2021), 1761.

*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승리
/ 요한1서 5장 1-12절

https://jungjinbu.blogspot.com/2022/12/1-5-1-12.html

만약에 누군가가, 저의 짧은 새벽 설교에 ChatGPT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주었는가 물으신다면, 저는 약 15퍼센트 정도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ChatGPT의 내용 제안은, 저의 설교의 서두와 전체 구조에서 영향을 주었습니다. 

퍼센트로는 적어 보일 수 있겠지만, 제가 위의 내용을 보기 전에 묵상하고 고민했던 부분을 ChatGPT가 제안한 틀 안에 넣었다라는 맥락에서는 정말 대단한 영향입니다. 물론 저는 문과이기 때문에 상당한 부분을 직감적으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로서 제가 받은 인상은, "제가 충분히 본문 묵상을 하고 또 다양한 자료들을 본 이후에 한번쯤 ChatGPT로 검색해 보는 것도 정말 괜찮겠다"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마치 "인공지능 스터디 바이블 한권"을 얻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똑똑하고 점점 성장하고 있는 그런 책입니다.

어떤 자료든지 그대로 인용하고 그대로 설교하는 것은 표절이지만, 그러나 충분히 모든 자료들을 살피고 그것을 해석하고 종합할 능력이 있는 목회자라면, ChatGPT를 통해서 크고 작은 도움을 분명히 얻을 수 있겠다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했습니다. 

* 혹시, 설교에 들어갈 "인용 자료"를 찾아줄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정도 사용해보고 나니, 조금 무서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하고 고민해 온 것들이 흔들리면서, "과연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들더군요. 

정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기업에서 AI를 연구하는 연구원이, "자신이 개발하던 AI가 인격이 있다" 라고 주장했던 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그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여하튼 저는 실용적인 부분에 관심이 크기 때문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설교에 들어갈 인용할 수 있는 내용들을 찾아줄 수 있을까?" 예를 들어서 "C.S. 루이스가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언급을 한 인용을 찾아줄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 부분이 어쩌면 설교자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과 아티클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수준의 자료들을 사용했는가를 통해서 결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의 자료를 읽고 인용하는 것이, 설교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부분은 중요하지만, 정말 고통스러운 부분입니다. 설교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꾸준하게 독서를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마도, 훈련된 목회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목회자가 꾸준히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저는 그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로고스 10에서도 그런 인용 문구를 제공하는 기능을 야심차게 넣었다고 생각합니다.

ChatGPT에게 "복합적인 의미를 담은 인용 문구"를 요구할 생각을 하면서, "그건 좀 어려울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ChatGPT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저는 솔직히, 위의 말씀드린 설교에 대한, 혹은 본문 설명에 대한 내용은, 그렇게까지 난이도가 높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대단한 결과이지만 그럼에도 제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결과라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어짜피 내용이 더 늘어나지 않고 정해져 있고, 그 정해진 분량 안에서 이미 관련된 많은 데이터베이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대한 자료만 모으면, 본문 구조 분석과 요약 정도는 인공 지능도 가능하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C.S. 루이스가 주장한 희생적 사랑에 대한 인용을 찾으라" 라는 식의 요구는, 좀 심한 요구입니다. 아마 제가 동료 목회자에게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해도, 상대방이 적잖이 당황할 것입니다. 이건 방대한 검색 뿐 아니라, "고차원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쩌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 중에는, "희생적인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복합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저의 관점에서는 "사람이 하는 일" 입니다. 그것도 아주 숙련된 사고를 할 수 있는, 훈련된 성도 혹은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기대감을 가지고,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순전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넣었습니다. "What is a quotation of c.s lewis about a sacrificial love?" 그런데 이런, 제 생각을 완전히 뛰어 넘었습니다. 


"소름이 돋는다"는 것이 이럴 때 쓰는 말일까요? 아주 오래전에 네가지 사랑을 다 읽었고, 최근에 설교 준비하면서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거의 정확하게 루이스의 요점을 파악하고 답을 해주었습니다. 루이스의 인용, 인용한 책,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까지 정리해서 알려줍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요? 

위에 넣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질문을 몇 번 더 넣어 보았습니다. 기본적인 내용은 비슷한데 흥미롭게도 약간씩 내용이 바뀝니다. 그런데 또 다른 내용에서는, 루이스의 희생적인 사랑은 vulnerable 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설명을 덧붙이더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제 이성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완전히 빠져서 듣고 있는 팀켈러 목사님 설교의 핵심 내용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소 다섯편 이상에서 비슷한 내용이 등장했습니다. 

루이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팀켈러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의 정말 커다란 논지들을 하나님의 vulnerability를 통해서 풀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서 vulnerability를 기꺼이 감수하신다는 논리입니다. 들으면서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차에서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걸 보다니?

그렇다면, 가능성은 다시 무한대로 뻗어갑니다. 비록 제가 해보지는 않았지만, 얼마든지 응용 질문이 가능할 것입니다. "What are the most four famous quotations about the sacrificial love of the pastors?" 만약 이런 수준의 질문을 넣을 수 있고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이것은 과연, "꿈과 같은 일들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좀 더 고차원적인 질문"에 답해줄 수 있을까?

자 여기까지 오니, 늦은 밤 심장이 심하게 뛰고 현기증이 조금 느껴졌습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건가?" 그리고 정말 호기심으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위의 질문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질문"으로 일부러 시도해 보았습니다. 

아예 루이스의 책 한권을 정해서, "그 안에서",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언급을 물어본 것입니다. "What is a quotation in mere christianity of c.s. lewis about sacrificial love?" 순전한 기독교를 여러번 보았지만, 솔직히 저에게 누가 이렇게 물어보면 최소 며칠 이상 고민할 질문입니다. 아마 답을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ChatGPT는 이렇게 답을 주더군요.


제 기억으로 이 부분은, "고통과 고난이야 말로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라고 루이스가 표현하는 유명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ChatGPT 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그 이후에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과 연결합니다. 글쎄요, 충분히 더 살펴보아야하겠지만, 여하튼 감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수준에서 답변을 만들어내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물론 결국에는 사람이 중요하고, 목회자 자신의 성숙한 사고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ChatGPT의 결과를 "평가"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위의 내용을 평가해보고, 만약에 이 부분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못하다면 넘어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 부분을 주의 깊에 살펴보고 또 다른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면, 목회자는 새로운 신학적인 사고를 끌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심스럽지만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어쩌면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학위 논문 하나도 거뜬히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위의 내용에 대하여서 제가 너무 과장된 평가를 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생각하신대로 "구글 검색" 혹은 "구글 스칼라 검색"을 열심히 하면, "누군가가 순전한 기독교 안에서 희생적인 사랑에 대하여 정리한 아티클 혹은 논문"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ChatGPT은 아직 시작 단계" 라는 것입니다. 겨우 평가 단계에서 이 정도 결과를 보여주는데, 전면 개방 되고 완전한 서비스가 시작되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발전하게 될지 그 끝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입니다. 물론 하루 종일 앉아서 다양한 아티클과 논문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을 종합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늘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저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목회자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내가 얻고자 하는 그 결과를 위한 과정에서 들어가는 시간과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빠르게 사고를 도와주거나 혹은 전환 시켜줄 인공지능의 도움이 있다면, 감히 누구도 상상치도 못했던 놀라운 편의성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 결론 : 우리 앞에 펼쳐질 "전혀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라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에 시작한 몇가지 질문과 답이, 제가 상상하지 못한 수준으로 일이 커진 듯 합니다. "공부, 학습, 검색, 논리, 종합" 등등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모든 영역이, 완전히 새롭게 보여집니다. 배움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공 지능은 과연 그 능력의 한계는 어디이며, 우리는 어디까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놀라운 것은, ChatGPT는 아직 시험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분에 무료로 사용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테스트 단계가 끝나면 마치 DALLE2 가 그런 것처럼, 질문 몇개 당 크레딧 얼마 정도로 금액이 정해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만약에 ChatGPT가 더 충분한 데이터 베이스가 쌓인다면, 이것의 파급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최근의 기사를 보니, 뉴욕시의 학교들은 학교에서 ChatGPT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막은 이유에 대해서 "학생의 배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그리고 컨텐츠에 대한 안전함과 정확성에 대한 염려"라고 말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제가 경험한 혼란스러움에 대한 내용이 정확하게 동일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아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형국이 될 듯 합니다. 학교에서 사용하지 않으면 집에서 사용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학교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누군가는 찾아낼 것입니다. 저는 기사를 보면서, 결국에는 ChatGPT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어떻게 유용하게 쓸 것인가를 공론화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사고, 사고력을 키우기 위한 배움 그리고 그러한 배움의 근간인 컨텐츠에 대해서, 그 정의에서부터 새롭게 접근해야할 시급한 필요성을 느낍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영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는 인공지능 자비스와 함께 살아갑니다. 자비스는 매우 복잡한 계산을 해내고, 공학 시스템의 전반을 관장하면서 토니를 바로 옆에서 돕습니다. 

그런데 저는 영화를 보면서 단 한 순간도, 토니 스타크의 탁월함과 위트, 그리고 그의 지혜가 자비스 때문에 손상된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토니는 자비스를 의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스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는 자비스와 동행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를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자비스의 능력을 활용하지만, 결국에는 그의 독자적인 지혜와 판단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현대의 수 많은 발명품들이 SF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 처럼, 어쩌면 ChatGPT도 그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ChatGPT에 지나치게 놀랄 필요 없는 것은, 이미 영화에서 보던 것이 겨우 보기 좋게 구현되는 시작 단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어떻게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갈지에 대한 해답도, 동일하게 그 영화 안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ChatGPT로 몇번의 검색을 하면서, 로고스가 많이 생각 났습니다. 로고스는 탁월한 프로그램입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성경 그리고 신학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나 이제 경우, 구글 번역 기능을 추가로 넣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체적인 인용문 검색을 하기 위해서는, 고급 패키지를 구입해야만 합니다. 로고스 10은 스타터만 구입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저는 인용문 검색 기능을 아직 사용해 보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비해서 로고스의 검색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ChatGPT의 수준으로 정보를 가공해서 보여줄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건 마치, 고급 프로그램과 다방면에 뛰어나고 지혜로운 유능한 비서 한명을 두는 것의 차이 정도로 느껴졌습니다. 마치, 기계와 사람의 차이를 보여주는 정도의 격차를 느꼈습니다.

저는 로고스를 너무 좋아합니다. 저의 든든한 목회의 동반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대단하던 로고스가 약간 초라해져 보이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그래서 저는 이미 완숙한 단계에 있는 로고스를 현재의 상태에서 계속 사용하고, 앞으로 ChatGPT는 추가로 한달에 30불 정도는 투자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꾸준히 공부하고 책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고 목회를 해야하겠지만,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ChatGPT를 통해서 많은 부분이 편리해지고 더욱 탁월한 부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심지어 목회의 영역에서도 전혀 새로운 세상이 앞으로 열릴 것을 기대해 봐도 좋을 듯 합니다.

ChatGPT, 벌써 "교회 안"으로 들어오다 (2023년 1월 업데이트) 

이 글을 쓴지 얼마 안되어서, 제가 섬기는 교회 EM(English Ministry)쪽에 목사님이 멤버 중 한 명의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자기가 혼자서 성경 공부할 때에 ChatGPT로 찾아봤는데, 내용이 좋았다" 라고 모임 중에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저희 교회 목사님들과 이미 나누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직접 들으신 목사님께서는 현재 상황을 우려하면서 저에게 가장 먼저 물어보시더군요. "정목사님, ChatGPT는 출처가 불분명한 것이죠?" 

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ChatGPT가 실제로 성도들에게 너무나 빨리 다가갔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제 글을 통해서 먼저 읽어보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 목사님은 ChatGPT가 뭐냐고 반문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목회자에게는 낯설고 먼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IT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나이가 어린 분들은 벌써 능동적으로 ChatGPT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든 생각은, "목회자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입니다. 만약에 성도 중에 누군가가 ChatGPT를 통해 얻어낸 성경 묵상 내용을 가져와서 이것이 너무 좋다고 말한다면, 무슨 이유로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AI가 여기저기 참조해서 만들어내서 별로이다" 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것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현재로서 저의 마음에 드는 생각은, 이제야 말로 목회자는 "좋은 자료를 근거로 자신의 설교와 교육을 뒷받침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감으로 설교하고, 그저 감으로 교육하는 정도로는 더 이상 성도들에게 권위를 가지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목회자인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당신은 수긍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시대는 사실상 지나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히려 성도님들에게 "좋은 자료들을 제시"하고, 그것을 "함께 읽고 공부하고 평가하는 능동적인 사고의 훈련"을 온 교회가 실행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 시급합니다. 성도님들이 혹시라도 ChatGPT가 만들어낸 내용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자료를 가이드로 삼아서 스스로 그리고 함께 성경을 배우고 익히면서, ChatGPT를 오히려 평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로고스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가장 잘 쓰여진 스터디 바이블 세권 정도를 함께 꾸준히 사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일단 비용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몇년 동안 시도하면서, 보통의 성도님들에게는 스터디 바이블 한권을 구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올리브트리"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올리브트리에서는, 가장 표준적인 스터디 바이블이라 부를 수 있는 ESV 스터디 바이블의 축약본인 ESV Global Study Bible이 무료입니다. 그리고 개역 성경도 무료입니다. 적어도 올리브트리를 사용하면, 전혀 추가적인 비용 없이 무료로, 성도님들이 참조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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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너무나 급변한다는 것이 때론 두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눈앞에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는 변화를 무시할 순 없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쇠퇴하는 지름길입니다. 변화를 직시하고 그것에 대해서 대비하고 장기적으로 대응해나가는 것만이, 미래 목회를 준비하는 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의 배움이 중요하고, 오늘 하루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앞날을 지키시고 인도해가실 것을 믿고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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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6일 월요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승리 / 요한1서 5장 1-12절 설교

 



요한1 5 1-12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이 성도의 삶 가운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 한 구절 안에 기독교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라는 묵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그분은 "그리스도" 이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이 호칭은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 , 선지자가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에게 "그리스도" 라는 호칭이 붙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완전한 제사장, 완전한 왕, 완전한 선지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죄인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가장 완전한 제사장이십니다.

죄인에게 생명을 주시며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가장 완전하게 다스리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자신이시며 이 땅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드러내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그리스도라 불림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1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이라는 단어는 어떤 느낌을 받는가? 그것은 지적인 것이고 논리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어떤 차가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우리는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수 밖에 없는가? 그분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이라는 것은 그분을 향한 사랑을 동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나 아름다운 분이시며 그분의 일하심은 너무나 놀랍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은 우리의 생각과 수준을 뛰어넘는 정말 경탄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은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연결 될 수 밖에 없다고 요한 사도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절 하반절입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면 교회라는 공동체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성별도, 나이도, 출신 지역도, 학력도, 사는 집도, 차도, 입는 옷도 모든 것이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인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오늘 말씀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으로 부터 난 자이다 그리고 이 교회 공동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난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형제 자매가 될 수 밖에 없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을 읽으면 약간 의아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좀 부담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냥 하나님을 사랑해라 라고 말하면 좋겠는데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혹시 성도님들께서도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어릴 때 본 드라마이지만 그 중에 명대사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한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남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은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노력할 준비도 돼 있고요 평생 노력할 겁니다 이런 말로 안되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사랑은 노력할 수 밖에 없는가? 성경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은 순종하는 것이다 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평범한 인간의 표현으로는 노력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더 깊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노력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깊이 남게 되고 결국 사실상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한없이 연약한 우리가 감히 어떻게 그의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너무 좋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이 그분의 소원과 바램과 갈망이 우리에게 무거운 것이 되지 않고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리의 믿음이 사랑을 만들어내고, 우리의 그 내면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 낸다면, 과연 이 믿음이라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4절과 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세상을 이겼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갈 때가 종종 있고 세상에 두려움을 느낄 때도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의 이 단호한 표현들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우리가 분명히 이기고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확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칫 오해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자기 확신이 강하거나 혹은 허세가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에는 아닌데 근거 없는 자신감에 사로 잡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이 말씀을 그저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이나 허세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긴다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믿는 대상이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 3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이후에 그들에게는 큰 어려움이 닥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심시키시는가? 내 안에서 너희가 평안을 누리게 하겠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제자들이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담대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이기셨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분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댓가를 치르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신 그분이 가장 순결하고 소중한 그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몸을 찢으셨습니다. 그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마귀의 머리를 부수시며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얻으셨습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와 영적으로 연합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의로움을 우리의 것으로 넘겨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중보하시며 기도하시며 우리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에게 영적으로 능력을 부어주시며 그분의 모든 위로와 사랑을 부어주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모든 괴로움과 고난과 어려움과 유혹과 실패와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세상에 이기고 있다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담대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를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증거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마지막 부분은, 지금까지의 모든 말씀들이 얼마나 확실하며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흔들릴 수 없는가를 확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5:9 우리는 법정에 선 증인들의 증언을 신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언은 더욱 확신을 가지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법정에서 증인들을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만큼은 그 사람들이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렇게 오류가 많고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는 그 사람들이 정말 진실을 말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오류가 많고 흠이 많은 인간도 믿는다면 가장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니 오히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은 믿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요한 사도는, 그 증거가 우리 안에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고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지금 예배 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다른 사람이 나를 비난하고 욕한다 하더라도 이 말씀을 붙들고 믿는 분들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강하게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의 능력과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구원은 너무나 확실하여서 영원한 것임을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 23-2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도전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평생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깊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분을 더 알아가면서 더 깊어지는 사랑을 주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을 향한 기쁨의 순종이 더욱 넘치기를 원합니다. 때론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낙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의지하며 그분 안에서의 영원한 승리를 확신하시기를 원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영원히 남을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신뢰하고 믿고 확신하며 성도로서의 복된 삶을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시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과 경배가 평생동안 더욱 넘치고 깊어지는 저의 삶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 주님을 알아가며 사랑이 더욱 깊어지기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저의 마음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뜻이 저의 뜻이 되게 하여 주셔서, 아버지가 원하시는 삶을 기쁨으로 살게 하시고 오늘도 주님의 뜻을 추구하며 도전하는 복된 성도 복된 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
설교문전체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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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4일 토요일

삶으로 드리는 찬양 (112) - 주님 여기 계시기에 / 물 위를 걷는 자


1. 가사 살펴보기

주님 나를 부르시니 두려움 없이 배에서 나아가리라
주님 나를 부르시니 주님 내게 오라시니
주님 보고 계시기에 의심치 않고 바다를 걸어가리라
주님 오고 계시기에 주님 여기 계시기에

주님 여기 계시기에 이 깊은 바다가 반석이되고
주님 여기 계시기에 반석 위를 내가 걸어가리라
주님 여기 계시기에 저 거친 파도가 반석이 되고
주님 여기 계시기에 반석 위를 내가 걷습니다

 

2. 곡 소개

곡은 CCM 그룹인 시와 그림의 곡이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서 물 위를 걸었던 장면을 찬양으로 그려내었다. 베드로는 비록 그의 믿음이 약하여 져서 물에 빠졌지만, 주님께서 친히 그를 건져 올리셨다. 이 곡은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서, 전능하신 주님이 항상 그분의 자녀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오직 주님을 의지하여서 삶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겠다는 성도의 믿음의 확신과 결단을 담은 아름다운 곡이다.

 

3. 말씀으로 바라보기

마태복음 14: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14:27 But Jesus immediately said to them: "Take courage! It is I. Don't be afraid."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14:28 "Lord, if it's you," Peter replied, "tell me to come to you on the water."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14:29 "Come," he said. Then Peter got down out of the boat, walked on the water and came toward Jesus.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14:30 But when he saw the wind, he was afraid and, beginning to sink, cried out, "Lord, save me!"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14:31 Immediately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caught him. "You of little faith," he said, "why did you doubt?" 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14:32 And when they climbed into the boat, the wind died down.

14:27 Take heart. Jesus spoke a word of encouragement and self-revelation. it is I. Gk ego eimi. God made Himself known to Moses using similar words: “I am who I am” (Ex 3:14). 안심하라 : 예수님께서는 격려의 말씀과 자기 계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니 : 이것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유사한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Edward A. Engelbrecht, The Lutheran Study Bible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9), 1612.

14:27 The words it is I are literally “I am.” The statement is Jesus’s purposeful echo of OT texts like Ex 3:14 and identifies him as Yahweh. 나니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내가 이다입니다. 진술은 출애굽기 3 14절과 같은 구약 본문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적인 반향이며, 그분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식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Robert H. Stein, “Differences in the Gospels,”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525.

14:31 little faith. A startling statement considering Peter’s willingness to go out to Jesus on the water, but part of the strength of faith consists in its perseverance under trial. wherefore. Why, for what reason. 믿음이 작은 자여 : 이것은 베드로가 기꺼이 위의 예수님께 나아갔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진술이지만, 믿음의 힘의 일부는 시련 속에서 인내하는 있습니다.

Joel R. Beeke, Michael P. V. Barrett, and Gerald M. Bilkes, eds., The Reformation Heritage KJV Study Bible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4), 1382.

14:28–31 Matthew wants readers to know that this miracle was made possible by Jesus’s power, not Peter’s. Before you look down your nose at Peter, though, keep in mind that he was the only one who got out of the boat to attempt the impossible. The other disciples just stared as he stepped out in faith. Remember, Jesus rebuked him for having little faith—not for having no faith (14:31). 마태는 독자들이, 기적이 베드로의 능력이 아닌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무시하기 전에, 그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기 위해 배에서 내린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가 믿음으로 걸어 나간 것을 단지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적은 그를 꾸짖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Tony Evans, The Tony Evans Study Bible (Nashville, TN: Holman Bible, 2019), 1116.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개역개정) 7:24 "Therefore everyone who hears these words of mine and puts them into practice is like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on the rock. (NIV)

7:24–27 The adjectives wise and foolish describe a person’s spiritual and moral state, not his intellect. Whether one is considered wise or foolish is determined by his response to Jesus’s teaching. Since OT writers described God’s wrath using the image of a great storm (Is 28:16–17; Ezk 13:10–13), the storm that destroys the house on the sand is a picture of divine judgment. Hence, the person who hears and acts on Jesus’s teaching is prepared for judgment. The one who hears but doesn’t act on Jesus’s words will be destroyed in the storm of judgment. 지혜롭다 그리고 어리석다 라는 형용사는, 사람의 지능이 아니라 영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롭다 혹은 어리석다라고 여겨지는지의 여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그의 반응에 따라 결정됩니다. 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거대한 폭풍의 이미지를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했기 때문에, 모래 위의 집을 파괴하는 폭풍은 하나님의 심판의 그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의 폭풍에 멸망 당할 것입니다.

Robert H. Stein, “Differences in the Gospels,” in CSB Study Bible: Notes, ed. Edwin A. Blum and Trevin Wax (Nashville, TN: Holman Bible Publishers, 2017), 1512.

 

4. 찬양에 대한 묵상

이 곡은,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 속에서 위기를 맞이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곡은, 그 말씀의 깊은 핵심을 짚어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당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그분 자신이 바로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심을 알리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기를 촉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성도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주님의 동행하심과 그분의 능력을 의심치 않을 때에 기적처럼 모든 위기를 극복하게 되고,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하는 길을 주님의 능력으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고, 참으로 지혜로운 자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환경과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연약하게 만들고 믿음을 흔들리게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럴 때일 수록, 더욱 주의 말씀을 힘써 듣고, 그 말씀을 실천 하는데 삶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인내이다. 이것이 참된 영적인 지혜이며, 성도의 그 견고한 삶의 길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한해를 준비하면서, 참된 반석과 같은 믿음과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삶으로 드리는 찬양 전체 묵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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