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3일 토요일

영혼을 향한 진실한 사랑 / Julie - Earl Klugh


새롭게 이사한 아파트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이름은 필리스. 육십대이시지만 건강하시고 친절하시고 삶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분입니다. 선하게 살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는 분입니다. 저희 집 밑에 집에 사시는데 무려 26년을 그곳에서 지내셨습니다.이든이가 그 집 강아지 테시를 많이 좋아합니다.

간간히 지나가다가 대화를 나눕니다. 저의 집이 2층이기 때문에 늘 그 집을 지나쳐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부터 영적인 것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저를 소개하면서 목사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궁금한 것이 많으시고, 본인을 스스로 영적이다(Spiritual) 그렇게 소개하십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그분이 전형적인 Postmodernism 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하나님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성경적인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싫다고 하십니다. 부처도 다른 신들도 다 좋고, 자신은 자연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7년 동안 산 경험이 있고, 집 안에서는 인도 음악 같은 것이 잔잔하게 흘러나옵니다.

필리스 할머니를 만나고 나서 주님께서 주신 소망은, 그분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구원 받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싫다고 하십니다.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를 선물해 드렸지만 책은 싫다고 하십니다. 성경 공부를 하자고 했더니 자신을 개종시키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만, 한주일에 한번 정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차 마시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시간을 선하게 인도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필리스 할머니를 만나고 나서야,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들, 어떤 의미에서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이라고 느꼈던,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의 역사성, 믿음의 중요성, 중생, 죄 등등의 것들이 마음에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와 전혀 다른 하나님을 늘 이야기하길래, 정중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You have a different concept about God compared with me. Logically, if we can know about God with our reason, it is not God because Deity is beyond our understanding. So, God reveal himself from Bible and I read the Bible.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영어 실력이라 답답하지만, 적어도 이곳에 사는 동안은 그분과 친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걸려도 끊임 없이 복음으로 대화하고, 필리스가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도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것들이, 결국 한 영혼을 살리고 그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임을, 이곳에서 깨닫습니다. 그리고 저의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모든 설교와 양육 프로그램의 준비하는 것들의 내용이 새롭게 보입니다. 그저 추상적인 차원에서 허공을 맴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실제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이고 실질적인 것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하기 위해서, 더 신경을 쓰게 되고 노력하게 됩니다. 목사는 진리를 맡은 사람이라는 그 무거움과 더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제 마음도 이럽게 답답하고 황당한데, 주님 마음은 어떨까 싶습니다. 제가 그분을 회심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희 가정의 작은 역할을 통해서, 필리스 할머니가 구원 받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최근에, 그리고 어쩌면 처음 저의 마음에 나타난, 영혼을 향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교회 갈등의 성경적 해결 방법" 북리뷰

1. 배운점과 깨달은 점

이 책을 통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목회자로서의 정체성과 소명이다. 좋은 설교자로서의 목회자의 상이 굉장히 강했던 나에게, 그것은 목회의 본질이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은 굉장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화평이 되심과, 결국 목회자가 그러한 화평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목회의 본질이라는 저자의 논증은, 목회자로서 나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고,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정체성의 강한 재확립을 가져다주었다.그리고 저자의 주장을 통해서, 건전한 성경 신학을 정립하게 되었다.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죄를 해석하고 변화를 해석하는 그의 해석은, 보수적인 매우 탁월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인간을 빈 잔으로 해석하고, 단순히 위로해야 하는 존재 정도로 받아들이는 세상의 이론에 반박하며, 오직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갈등에 대한 해결이 단순히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적인 것임을, 그 어떤 것보다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런 면에서 우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묘사한 부분은 굉장히 탁월하다. 자기 계발이나, 혹은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는 현대적인 목회의 흐름 가운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 안에 우상이 들어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목회적으로 어떻게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설교할지에 대한 통찰력을 준다.

저자에게 배우는 또 다른 신학적인 통찰력은, 갈등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을 주장하는 부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굉장히 파격적이다. 그러나 갈등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목적을 가진 그 어떤 것으로 봄으로써, 그것이 목회의 본질로써 다뤄져야 하고, 갈등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식으로, 그분을 신뢰 가운데 해결해야 한다는 강력한 논리적 근거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화목하게 하는 것이, 세상의 법조계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존재적인 특징이라는 것은, 세상의 논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탁월한 논리이자 논증이다.

또한 저자에게 배우는 것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세속의 협상에서, 상대방은 그저 협상 대상자이다. 그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의 갈등의 대상자는 바로 우리의 형제자매임을 깨우쳐 준다. 그것은 완전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그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갈등 해결의 이유, 과정, 결과 등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갈등을 교회 안에서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름 아니라 가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협력적인 타협을 시도할 때에, 나만의 이익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의 일을 강력하게 돌아볼 것이 권면되고, 또한 내 마음의 동기를 살펴보도록 권면된다. 그것 역시 바로 그들이 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서라는 것이, 단지 윤리학이 아니라 신학이며, 하나님이 중심이 되시는 것이다 라는 저자의 설명을 통해 큰 통찰을 얻는다. 용서는 하나님과 관계있는 것이며, 하나님 없이는 용서도 없다 라는 저자의 주장은, 일반 갈등 해결 원리들에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 용서의 신적인 근거이며, 존재론적인 맥락에서 탁월하게 용서의 이유를 이끌어낸 것이다.

또한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들의 묘사 속에서, 신학적으로 잘 정비된 목회적인 섬세한 도구들을 배운다. 예를 들어, 창의적인 해결 방법에 있어서, 저자는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이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 가운데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갈등이 있는 이들이 서로의 상황을 그려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 등, 저자가 잘 이용하는 좋은 도구들을 소개하고 있고 그것을 배웠다.

또한 이 책을 통해서 한국 교회를 돌아보게 되었다. 한국에 내 놓아라 하는 대형교회들이 그리고 신학교들이, 세상의 법정 가운데 자신들의 문제를 내어놓고 해결해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 교회를 돌아보았을 때에, 마음에 큰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를 포함한 목회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왜 충분히 교회가 먼저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들이 세상의 법정까지 올라가야 했던 것일까?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제자 훈련을 외치며,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자 노력했던 한국 교회이지만, 어쩌면, 신학의 혹은 목회의 방향이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많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하게 되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그 뜻은, 실천을 위한 첫 시작도 시도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저자로부터 얻는 가장 큰 배움은, 지금 시대야 말로, 성도들을 화평하게 하는 참된 목회가, 교회 가운데 나타나야 하는 바로 그 때라는 것이다.

2. 평가 

이 책이 탁월한 이유는, 목회자의 실제의 고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갈등의 현장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적은 책이 아니라, 자신이 목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하면서, 참된 화평의 길을 추구하는 목회자가 어떠한 것인지를 고민한 그 결과물이다. 이 책은 목회자의 이야기이며, 또한 나의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뎌져 있던 마음을 돌이키며 각성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다. 목회자로서 경험하는 가장 아픈 부분들을 말한다. 오직 말씀만 열심히 준비해서 전하면 성도들이 변할 것이라는, 저자의 말대로 “이단적”이라 말할 수 있는 안일한 생각 속에서, 목회자인 독자를 불러낸다. 그것은 화평의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원하시는, 화평의 중재자로서의 강력한 부르심이다. 화목하게 함은 목회의 부수적인 내용이 아니라, 목회 그 “자체” 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 갈등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화목하게 하심이라는 이 중요한 주제가, 결코 세속적인 것 혹은 세상이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 기반 하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으로 성도의 삶 가운데 이루어내야 하는 것임을 저자는 강력하게 논증한다.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갈등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저자가 탁월한 점은, 결코 화목을 추구하는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민과 어려웠던 점들을 감추지 않는다. 죄악으로 망가진 인간은 결코 쉽게 변화되지 않으며,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서 목회자로서 행복을 얻는 이유는,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자의 도전과 기쁨 그리고 희망을 함께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설교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갈등을 해결해야 하지만, 그것을 도전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실패를 예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두려움들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도전할 때에, 그때서야 세상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대로 실천하는 공동체로,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그 어떤 특별한 곳으로 인식함을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한다.

이 책을 읽고 고민하는 동안에도, 목회적인 갈등은 존재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들은 나의 가족이다. 나의 아버지요 형이요 누님이요 동생이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주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목회자로서 나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 모든 것들이 진지한 고민이 되었다. 나의 시각을 새롭게 바꾸었다. 이 책은, 나에게 있어 그리고 아마도 많은 목회자들에게 “새로운 이정표”로 여겨질 것이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목회의 길을 진지하게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화평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처음부터 원하셨던 진정한 목회를 목표로 삼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화평의 중재자로서의 첫 걸음이 시작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북리뷰



1. 서론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은예일대 졸업식 설교를 확대하여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저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미국 교회사 가운데 최고의 신학자 그리고 철학자이며 18세기 부흥 운동의 주역이다

이 책은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는 역사적인 부흥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데그 목적은부흥시 발생하는 여러 현상들로 인해 부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며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일어난 참된 부흥임을 논증하는 것이다. 


2. 요약 

사도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엄청나게 부어진 시대였다그러나 모조품들도 동시에 많이 나왔다그러므로 참된 영과 거짓 여을 분별할 수 있는 어떤 분명한 규칙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표지들이 필요했다그것이 요한일서 4장의 목적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데 있어서 증거가 될 수 없는 소극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첫째로아주 비범하고 특별하게 일어난 일즉 어떤 일이 일상적이지 않고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단정할 수는 없다지금까지 비범하게 일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롭고 특이한 역사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과 작용이 특별하다고 해서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죄의 본성에 대해서 비범하게 깨닫게 될 때에아주 비범한 정서들이 솟아나는 일이 있다고 할 때그 일들이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성경적 표지들을 위반하지 않는다면그 역사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특이하고 비범한 역사라 할지라도그 본질이 성경의 표지들과 일치한다면 성령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사도 시대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났다만일 매우 특이한 역사는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옳다면항상 그러해야 하고 사도 시대도 마찬가지이다그러나 사도 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많은 면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났다또한 성경은 마지막 성령의 부으심이 있을 때그 방식이 아주 비범하여 새로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둘째로몸에 일어나는 특이한 증상들에 의해서는그 역사가 참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그것이 참된 성령의 표지의 하나로 주어진 것은 아니기 대문이다또한 어떤 외적인 모습을 보고서그 사람이 성령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다고 결론 지을 근거 또한 없다왜냐하면 성경에는 그런 영향들을 배척하는 영 분별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고뇌할 때에비참함에 대한 인식으로 울부짖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또한 하나님께서 때로는 성도들에게서 신체적 힘을 약화시키면서 천국을 맛보게 하시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성경과 이성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 생기는 신체의 특이한 현상을 반대하지 않는다제자들처럼 무서움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어 힘이 다 빠지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열광주의자들이 보통 신체에 큰 영향을 가진다는 이유로신체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을 반박할 필요는 없다. 

셋째로소동과 종교에 대한 큰 잡음이 나타난다고 해서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은 참으로 위대하기 때문에 미지근하게 감동 받거나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아주 불합리한 일이다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세상의 눈에 공개적으로 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사도 시대에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커다란 소요와 소동이 모든 곳에서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로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는 사람들이그들의 상상에 커다란 인상들을 받는다고 해서그 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는 작용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묵상 가운데 수반되는 상상적인 생각 없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의 사고를 고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하나님께서 상상력을 주셨기 때문에이러한 능력을 적당하게 사용하면 마음의 다른 기능들을 보조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일종의 황홀경에 빠진다고 해서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이 행한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사람의 사고가 집중되고정서가 강해지며영혼이 몰두하고 황홀케 되며 삼켜질 때는모들 체질이 녹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상상력을 통한 감각은 무조건 적인 신적 계시는 아니지만성령은 상상력을 통해 진리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주시기도 한다. 

다섯째다른 사람의 모범이 사용되었다고 해서사람들의 마음에 나타나고 이루어진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모범을 통하여 영향을 받는 것은 성경에 부합하며 또한 합리적인 일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분발하게 했다고 해서그 효과의 선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모든 사람들은 모범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세계를 관찰했을 때에 명백한 사실이다부흥 시대에는 모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일이 많았고모범을 통한 영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영향의 보조 수단이다또한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 된다. 

여섯째성령의 역사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행동이매우 신중하지 못하고 변칙적인 일들이 있다고 해서그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양한 군중들이 혼합되어 있는 곳에서그들의 마음이 깊은 감명을 받을 때에그들 중에 신중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그 예가 고린도 교회이다기적적인 은사와 성령의 영향력에 있어서 성령의 축복을 받았지만그러나 그들 속에 변칙적인 이들과 혼돈이 있었다또한 베드로도 실수를 했다신자 속에 있는 어두움과 부패 때문에 실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또한 지나친 열심으로 인해 실수를 범하는 수도 많다. 

일곱번째판단에 있어 많은 실수들이 있고 사단이 그 역사에 어떤 미혹들을 뒤섞어 놓았다고 해서그 역사 전체가 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참된 성도에게 있어서도 은혜와 많은 부패가 함께 존재하며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가 같은 마음 안에 잠시 동안 함께 있다. 

여덞번째소위 성령의 영향을 받았다는 몇몇 사람들이 심각한 실수들을 범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그 사역 전체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성령 충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서도 배교자가 생길 수 있다종교개혁 시대부흥의 시대그리고 청교도의 시대에도 배반자가 많이 있었다그러므로 마귀가 그러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해서하나님의 성령의 참된 역사가 영광스럽게 수행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아홉번째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공포가 강조되고격한 감정과 열정의 설교자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진행되는 것 처럼 보인다고 해서그 일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커다란 현실적인 재난인 지옥의 위기를 경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또한 지옥은 무한히 두려운 곳이기 때문에냉담한 태도로 지옥을 설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순 되는 것이다또한 복음의 설교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율법은 매우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겁을 주어서라도 지옥에 대해서 경고해 주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게 해 주는 적극적인 증거를 통해서우리가 보게 되는 어떠한 영적인 역사도 현혹되는 위험이 없이 판단할 수 있다첫째로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이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확신하게 되고 공고히 나타난다면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확실한 표징이다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촉진시키는 영은 성령이시다또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인정하게 하는 영은 성령이시다반면에 마귀는예수님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예수님을 절대 높이지 않으며예수님을 높이는 영은 오직 성령이시다. 

둘째로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분은 성령이시다성령은 세상을 미워하도록 하며마귀는 세상을 사랑하도록 한다세상이라는 말은죄의 욕심에 속한 모든 것이며마귀는 이 세상에 속한 영이다반면에 성령님은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하고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게 하신다사단은 사람의 죄와 양심을 깨우치는 일을 하지 않으며또한 양심이 각성된 사람일수록 마귀에게 미혹될 확률이 적다양심을 깨우치고 죄의 악함을 깨닫게 하시고구원을 추구하게 만들며하나님 나라의 탁월함으로 세상 욕망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성령님이시다. 

셋째로, 성령은 성경을 존중하게 하고, 성경을 사랑하도록 하신다. 반면에 마귀는, 그의 거룩한 책, 즉 성경에 대하여 언제나 치명적인 악의와 증오를 보인다. 넷째로,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를 드러내 주고,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 즉 영의 작용 방식이 진리의 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 영이 바르고 참된 영이라고 안심하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사단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다. 

다섯째로사랑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사람들 사이에 역사하고 있는 영이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그것은 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표징이다성령은 사람들을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으로 이끈다참 사람의 모조품은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리스도인의 사랑은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는 겸손한 사랑이다그리스도의 사랑은원수들에게까지 향하는 사랑이다그러므로 사랑과 겸손은마귀의 영과 가장 반대되는 성령의 특징이다이러한 사랑의 표지들은마귀가 하려고도 하지 않고 또 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지금에 일어나고 있는 비상한 영향력은전체적으로 봐서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터 온 것이다그것은 사도 요한이 제시한 기준으로 볼때성령의 역사가 틀림 없으며또한 많은 이들의 관찰을 통해서그리고 직접 그들과 교제하고 관찰한 결과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죄의 비참함을 사람들이 깨달았으며그들은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그들은 죄와 심판에 대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큰 신체적인 영향력을 받은 것이었고잠시 예배 순서가 중단된 적은 있었지만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각성케 하심으로 그러한 현상을 피할 수 없다면그것은 혼란이나 방해라고 여길 수 없다 

현재의 부흥은 사도 요한이 제시한 표지와 동일하며하나님의 역사라도 처음부터 완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이들은예전과 다른 새로운 성격의 기쁨을 느끼고 있고과거와 비교할 때에 훨씬 위대한 하늘과의 교통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방해하거나 저지하는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았던 자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 이들은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되었다지금 일어나는 역사는본질적으로 초림 때의 성령의 역사와 동일하다이러한 영광스러운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은헤가 나타났는데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임하셨다고 증거하지 않는다면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항상 걸림돌을 만나게 될 것이고영광스러운 개혁을 위해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지만그들은 정작 개혁이 온다면 인정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을 것이 틀림 없다또한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한다면단순히 의심할 뿐만 아니라자세하게 관찰하고 부지런하게 조사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현재 부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며부흥을 찬성하는 편에 서지 않는 것 역시 부흥을 반대하는 편에 서는 것과 동일하다.

성령의 역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그 역사를 촉진시키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모든 실수와 비행을 피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주의하여야 한다겸손과 자기 부인그리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책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이충동과 강한 인상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었지만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운 영향력과는 상당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충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의 이유는다가올 교회의 영광의 시대에 특이한 은사들이 회복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영향력은성령의 은혜이지 특이한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만약 어떤 은사가성령의 평상적이고 거룩하게 하시는 영향력이 목적이 아니라면그것은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신적인 사랑으로 전달하시며그것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이다교회의 영광스러운 시기의 특징은기적적인 은사들의 회복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과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기쁨을 자아내시는 성령 하나님의 영향력이다영감이 아니라 인간적인 학문에 힘을 써야 한다지식이 많아지는 만큼원하는대로 선을 행하는 것이 쉬워진다다른 사람을 함부러 판단하지 말고그들의 회심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또한 너무 화를 내거나 대적들과 논쟁해서는 안된다또한 본질상 상당히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사람들에게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일반적인 관습에 따라서 하는 것이 좋다. 


3. 비평적 평가 

이 책의 탁월한 점은참된 부흥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이다일반적으로 강조하는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성도들의 순간적인 반응만을 가지고 부흥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소극적인 증거들을 먼저 살펴보고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적극적인 증거를 살펴 보았다는 점에서정확하게 어떤 현상이 참된 부흥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잘 제시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씀한 영광스러운 개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른다면그것을 위해 기도하여도 실상 그것은 모르는 것을 그저 추상적으로 기도하는 것일 뿐이다(173). 중요한 것은정확한 기준을 이해할 때에성령의 역사를 더욱 간절히 사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영들을 시험해야 한다는 저자의 권면은 지금 한국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46). 흥미로운 것은소극적인 혹은 중립적인 기준과 적극적인 기준을 구분하는 것이사단이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그리고 성령께서 반드시 그 일을 하시는가 하지 않는가로 구분하였다는 점이다즉 사단은 소극적인 9가지 증거들은 일으킬 수 있지만적극적인 5가지 증거들은 만들어 낼 수 없으며소극적인 9가지 기준은 성령님께서 만들어내시기도 하지만적극적인 5가지 증거들은 오직 성령님만이 만들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일인 부흥을영적 존재인 사단과 성령의 역사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어떠한 부흥의 역사를 평가할 때에 가장 적합한 판단 기준이라 말할 수 있다또한 이것은 마치애굽의 술사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내었지만결국 물러가고 말았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나게 한다. 

성령의 비범하게 역사하심을 별로 강조하지 않는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조용한역사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입장에서는조나단 에드워즈가 비범하고 특별한 일 그리고 몸에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중립적인 기준으로 놓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을 것이 틀림 없다왜냐하면어떤 이들의 눈에 이것은 광신도들의이성을 잃은 채 황홀경에 빠져서 일으키는성령의 역사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분명히성령 하나님이 부어지실 때에그 역사의 방식이 비범하다고 말한다(56). 또한 지옥의 경고 앞에서 몸에 특별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도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60).  

그렇다면 냉담하고 지식 중심적인 교회 가운데 이것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비록 이 현상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중립적인 것이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가운데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에무조건적으로 배척하거나 터부시 하지 않을 것이며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일 수도 있다는 경각심과 기대감을 동시에 가지고 면밀하게 그 영의 영향력을 관찰하려고 할 것이다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준은성령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좀더 넓은 가능성의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성령의 영향력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 나오는 비정상적인 행동이중립적인 기준이 된다는 것 역시 매우 놀랍다이것을 통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소위완전주의를 배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린도 교회 그리고 베드로도 실수를 했다는 것을 지적한다(85). 중요한 것은그가 이러한 성도들의 완전치 못함이반드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새 사람과 옛 사람이 같은 사람 안에 공존한다.(92) 

성령께서 역사하시지만 사람들 가운데 실수가 나올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는 것이고부흥이라는 것을 때로는 완전한 급진적인 변화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부흥에 대한 상식에 경종을 울린다그리고 오히려그런 무엇인가 불완전하고 부족해 보이는 상황에서도성도가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되고그런 상황에서 조차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를 진술하면서그 첫째를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영이 역사할 때에 바로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제시한 것은 매우 탁월하다(109). 그리고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존경심과 애정을 나타내면서 선언하는 것이라는 그의 정의 역시 매우 유용하다(110). 

이러한 기준은 특별히 최근에 한국에서 급격히 세를 확장하고 있는 이단들을 볼 때에 더욱 그 가치를 드러낸다만약 이단이 부흥하는 이유가진정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고 한다면그 모임 안에 오직 그리스도가 높아져야 한다그분을 향한 독점적인 애정과 사랑과 존경이 나타나야 한다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니라교주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가 사랑과 존경과 애정을 독점하고 있다면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이다.

또 다른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 가운데사단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하고 양심을 깨우치는 일에 힘쓰지 않으며오직 성령만이 그렇게 하신다라는 것은목회 가운데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을 살피며우리가 참된 성령의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는 탁월한 기준이 된다(116). 

교회에 다니면서 성도라고 말하면서거짓과 기만으로 자신의 양심을 덮어버린 사람들이 있다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못하며 양심에 화인을 맞은 이들이 있다그렇다면 그들은 분명히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이들이 틀림 없다오직 죄에 예민하며양심이 살아 있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조나단 에드워즈의 기준을 통해서 확인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어떤 이에게 역사하는 영이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영으로 역사한다면그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분명한 표징이라 말한다(128).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성령의 역사의 적극적인 표지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은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충격적이다물론 사랑이 중요하다그러나 소위사역이 훨씬 중요하지 않은가부흥이라 부르는 많은 집회들 가운데만약 그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살아나지 않으면 분명히 그것은 거짓 부흥이 틀림 없다

중요한 것은이웃을 향한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놀라운 것은 그것이 종교적인 그 어떤 외적인 아니라우리의 삶의 가장 작은 부분들과 내면의 변화라는 점이다다툼을 억제하고화평과 우호가 일어나고외적인 행동이 친절해 지고다른 이들의 영혼의 구원을 열렬히 바라는 것이다(131). 그것은 겸손한 사랑이며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133).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적은어떠한 종교적인 일을 행하는 의미로서의 사역이라는 용어에 익숙한 나 자신이 그리고 한국 교회가성령의 역사하심의 확실한 성경적 표지인 사랑을 향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4. 결론

이 책은부흥을 실제로 경험했을 때에그것이 정말 성령 하나님의 역사인지 아닌지에 대한 탁월한 기준들을 제시한다이 기준들은 자기 자신의 영적인 현상에 대하여 또한 공동체가 경험하는 영적인 현상에 대하여 분석적 적용이 가능한 기준들이다

특별히 부흥이라는 맥락 가운데 외적인 규모와 현상들을 강조해 왔던 한국 교회 가운데, 그리고 이단이 부흥의 모습을 위장하여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는 이 때에, 진정한 부흥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며,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며, 성경과 진리에 대한 관심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 지는 것임을 정확하게 지적함으로써, 부흥을 사모하는 성도가, 그리고 앞으로 한국 교회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바가 무엇인지 그 방향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 세례와 충만" 북 리뷰


1. 서론

성령세례와 충만은성령의 사역에 관한 설교 내용을 책으로  것이다저자인  스토트(John R. W. Stott)성공회 사제이며세계적으로 알려진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책의 목적은성령의 사역 가운데성령의 약속성령의 충만성령의 열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각각 살펴보는 것이다또한  책은최근에 영향력을 크게 끼치고 있는 신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주의를 염두에 두고 내용을 개정한 것이다.


2. 요약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인데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내주하시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자녀를 삼으시기 전에 그리고 후에 성령을 준다고 성경은 동시에 말하며중요한 것은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모든 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또한 성령을 소유한 이가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이다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은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는 것이다또한 선한 열매를 맺는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또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성도를 연합 시키시고성령에 의해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신다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부터 마침까지성령의 사역에 의존하고있다.


하지만 성령이라는 약속된 '선물' 성령의 '세례' 동일한 것인가 부분에서 사람들의 확신이 나뉜다다르다고생각하는 이들은성령 세례를  번째요 나중 경험이라고 가르친다같다고 보는 이들은성령으로 '세례받은 것은성경을 '받은  나타내는 생생한 수사학적 표현이며 '세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것으로 여긴다.


'부어 주심또는 '세례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  하나이다예수님은 '세례자또는 '세례 주는 ' 불렸는데그것은 성령으로 세례 주는 것이 그분의 사역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예수님의 사역은죄를 지고 가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가지이다이것은  언약의 두가지 주된 복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8 가운데 두가지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가지 선물로 이해했다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약속 또는 선물과 동일한 것이고구원의 복음에 필수적인 것이다성령의 부어주심 또는 세례는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일  아니라 또한 보편적 축복이다요엘 선지자를 통해서성령이라는 선물의 보편성을 확인한다구약과 비교할 때에성령의 사역은  넓고 깊어 졌다모든 믿는 이들에게 성령의 축복이 있다구약 성도들이 알지 못했던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고본질적으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오순절에 서로 다른  그룹이 성령의 세례 또는 선물을 받았는데그것은 초두에 나오는 120명과말미에 나오는 3,000명이다. 120명은 이미 중생한 자들이고, 3천명은 불신자들이었다가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동시에 받았다 일에 대해 기다림 없이 회개하고 믿은 즉시 일어났다오늘날의 표준은 첫째 그룹이 아니라 둘째 그룹이며, 120명의 경험이  단계에 걸친 것은단지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순절의  가지 의미를 구별하지 못해 현대에 혼란이 있다성령의 부어 주심은 예수님이 행하신 구속 사역 마지막 사건이다따라서  일은반복될  없다그러나  축복은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다모든 이들은   이후  시대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고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또한 오순절은 최초의 부흥이다그러므로 3천명의 회개는표준적이라   없다그러나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표준적인 것으로 내용은 죄사함과 성령을   받는 것이다.


사도행전 8:5-17절은사도들이 파송된 이유는 회심자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와 끝까지 이루러  증인이 되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에 대한 묘사  일부이다사마리아인들이라는 특수성 때문에사도가 그들의 회심을 검토하고 안수하고 확증하기 전까지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성령의 선물을 보류하신 것이다이것은 예외적인 상황임으로오늘날의 영적 경험의 표준이   없다빌립이 잘못 가르치거나사마리아인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단지 역사적 상황 가운데 성령이 나중에 주어진 것이다


사도행전 19:1-7절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은누가의 묘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같다그리고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했다그리고 복음을 그들에게 다시 설명했다 이들에게 바울이 세례를 주었고안수 했을 때에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그들은  이전에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이야기는 회심에  따르는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의 증거가   없다.


신약 성경은, '성령의 세례'라는 표현과 '성령의 선물' 동의어로 사용하며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 하거나 '세례를 받는다'   사용되는 동사와 동의어로 쓰인다성령을 '가진 ', '성령으로 사는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등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그들의 믿음의 성숙도와 관계없이그들이 새롭게 출생하는 바로 순간부터 똑같이 적용되는 표현들이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 '' 반복되어 강조되어 사용되는데 장의 후반부에서 은사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전에서두에서 영적 은사의 수여자이신 성령의 통일성을 강조한다이것은 성경의 선물과 성령의 은사들사이의 차이점이다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며  우리에게 성령을 마시게 하신 분이시다세례받는 것과 마시는 것은 동일한 표현이며모든 그리스도 인들은   가지를  경험했다.


성령의 세례는 단회적인 선물이다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많이 충당되어져야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세례는 반복될 수도 혹은 잃어버릴 수도 없지만충만은 반복될  있고 유지되어야  필요가 있다성령 충만은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특징이며특정한 사역을 위해서 내려 주시며위기 상황에서 준비시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 세례에 관련된 신약 성경의 일곱 구절은명령형으로  권면은 없지만성령 충만은 받으라고 하는 명령들의 구절들이 존재한다고린도 교회 성도들은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성령의 은사를 넘치게 받았지만성령으로 충만했던 것은 아니었다계속적인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계속해서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


또한 성령 충만의 증거는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다에베소서 5:18-21에는성령의 충만을받으라는  하나의 명령 다음에성령충만의 결과들을 보여주는  가지 묘사가 이어진다술취함과 비교할 때에 성령 충만은억제되고 이성적인 도덕적 품행으로 끌어감으로써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그리고  결과들은 관계에서 나타난다성령 충만의 건전한 결과들의  가지 주된 영역은예배와 교제이다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 양쪽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신다성령 충만한 사람은그들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믿음으로 붙잡는 정도가 다르다.


보통 수준의 그리스도인들은조용하면서도 전혀 극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성령의 '선물또는 '세례' 받았다고  있다만약 그들의 수준 낮은 신앙 생활이 문제라면성령 충만을 회복해야 한다오순절적인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그것을 성령으로 받는 세례라고 부르는 자들에게는그런 경험의 일부가 마귀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또한 많은 부분이 심리적이며 어떤 부분들은 실제의 회심이다


중요한 것은하나님이 정해주신 표준은단회적으로 성령의 '세례' 받은  후로 거룩함과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향해 꾸준히 자라가도록 하셨다는 것이다그러므로 특정인의 경험이매우 다양하며타당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판에 박힌 어떤 정형을 강요해서는 안된다그리고  어떤 경험들도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번째 은혜의 사역과  중요성에서 비교될  없다또한 모두 불완전한 것이다.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성령의 열매는특질들을  개씩 묶어서 나누는 것이 가장 간단한 구분이다첫째로 하나님둘째로 다른 사람들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묘사한다성령의 열매는고르거나 선택할  있는 자유가 없다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함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 이루기 때문이다성령은 서로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신다그러나 그분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열매를 맺도록 일하신다치우친 그리스도인은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반면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나타내는 인격적 특성은 언제나 온전하고 성숙하며 충만하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인격적 특성들을 개발할  있는가첫째로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초자연적인 것이다둘째로이것은 열매이기 때문에조건이 충족된다면 자연스럽게 자란다근본적인 원리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이다우리는 무엇을 심을 것인지를 결정함으로써 우리가 거두게  것이 무엇인지 미리 결정할  있다사도가 '심는 으로 의미하고자  것은우리의 생각과 습관생활 방식삶의 방향과 삶의 훈련 등으로 구성된 전체적인 삶의 패턴으로 보인다


자연적 성화와 관련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우리가 제대로  밭에 제대로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육체를 위해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고성령을 위해 심으면 '영생 거두게 된다또한 성품이라는 것은 일생에 걸쳐 열매를 맺는다 점진성 때문에우리가 심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며공적개인적 경건의 삶의 습관을 위해 자신을  훈련하게  것이다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기원이 초자연적이기 때문에겸손과 믿음이필요하다또한 성장을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또한 점진적이기때문에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종종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대조시킨다교회는 하나인데 이유는  성령이 모든신자 안에서 거하시기 때문이다또한 교회는 다양한데 이유는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을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성령의 은사들은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그것은 어떤 은사와  은사를 발휘할  있는 역할을 가리키거나아니면  어떤 역할과  역할을 감당할  있게  주는 은사를 가리킨다신약 성경에는 모두 합쳐서 스무  이상의 은사가 나온다그리고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은그보다 훨씬 많은 은사들을 주실  있다.


영적 은사와 타고난 재능 사이에는 분명히 연관 관계가 있다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실  부터 마지막을 계획하신분이시기 때문에우리의 회심 이전과 이후 사이에연속성이 없다고 쉽게 결론 짓지 말아야 한다또한 몇가지은사는 기적적이지 않고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타고난 자질을 영적인 은사로 바꾸어 놓는 요인은 그 목적과 동기이다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은사는그분이 주시는 타고난 재능과  들어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영원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 성령의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다어떤 은사들은 무척 평범해 보인다가르치는 은사나 권위하는 은사구제하는 은사나 긍휼을 베푸는은사는 기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극단을 경계해야 하는데기적의 은사가 없다고 대답하는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거의 모든 일이 기적적이라는 견해이다성경의 기적들은성경에서  군데 뭉쳐서 등장한다율법선지자주님사도라는 게시의 주된  시대이다기적들의 주된 목적은새로운 게시의 시대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이미 특별한 계시가 완성 되었기 때문에 기적의 일상성을 믿지는 않지만하나님의 주권 가운데기적의 특수한 상황은 얼마든지 일어날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하는가고전 12:28-29 그리고  4:11 목록을 분석   때에  동시에 사도라는 말이 목록의  처음에 나타나고고린도전서의 목록에서는 사도를 '첫째' 지칭하여 처음  은사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그러므로 사도의 은사는 열두 제자바울 그리고 아마도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한두 사람이  포함되는 그리스도의 사도들로서바로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의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선지자는 어떠한가그것은 '예언' '선지자' 대한 우리의 정의에 달려 있다구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선지자는 계시가 주어지는 통로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자들이다그런 성경적 의미에서 보면 이상선지자는 없다고   있다특별히 '사도와 선지자들 함께 묶여 있고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터이다 기초 자체는 다시 놓여질  없으며선지자라는 일차적 의미에서는  은사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성경에서 선지자는일차적으로 미래에 대한 예언가가 아니라하나님의 입으로 계시의 통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적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는 신약 성경의 네장 모두가  절에서 강조하는 단어들은 '파스혹은 '헤카스토스이다은사란 널리 퍼져있는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것이다지역교회 전통 이미지는많은 일을 하는 목회자그리고 기여하는 바가 없는 대다수 교인들이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은사주의적 운동의 성장의 배경이 된다그리스도의 몸을 믿는다면모든 은사를  사람에 주셨다는 것을 고백한다면하나님의 은사를 가진 일꾼들을 일으켜 주시도록 간구하고활용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하고 기회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교회는 은사적 공동체이다모든 구성원은 '카리스마' 가지고 있으며어떤 경우에든지  가지 이상을 가지고 있다.


영적 은사들은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하나님의 영의 선물이며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다그러므로 어떤 지체도 자신을 경멸해서는 안되며동시에 자만해서도 안된다은사는하나님이 임의로 나누어 주시는 하사금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어떻게 사용 되어야 하는가은사는 자신을 위해서도혹은 에배를 위해서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교회에 덕을 끼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그러므로 봉사의 선물이다세운다는 것은다른 사람들을 돕고위로하고강건하게 하는 것이다덕을 세우는 것에 따라서 은사의 중요성이 다른데세우는 역할을 많이  수록 가치가 더욱 커진다그리고 가르치는 은사야말로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하나님의 진리야 말로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세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이라 알려진 현대의 현상이신약 성경에 나오는 은사와 동일한 것인지는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어떤 이들의 방언의 심리적 해방감 혹은 새로운 차원의 자유는 부인할 필요는 없다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에  때에바울은말하는 자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방언을 강하게 저지하고 있음이 확실하다또한마음으로 적극적으로 개입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찬미란 바울에게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이 틀림 없다또한 신약 성경에서 덕을 세우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말하기 때문에그리고 모든 영적 은사들 역시 봉사의 은사이며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바울 사도가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면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바울 사도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역의 영광스러운 목표는“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온전한 연합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도록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이것은 진리와 사랑이라는  쌍을 통해서 성취될  있다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해야 한다진리는 영적 성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그러나 진리는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져야 한다그러므로 은사들은 사랑 안에서 발휘되어야 한다사랑은 가장 높은 은사보다도  귀한 제일 좋은 길이다그리스도인의 삶이란사랑진리은사봉사라는  측면을 가진끊어질  없는 고리 또는 원과 같은 것이다.


결론적으로우리는 우리 안에서 성령이 사시도록 하신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회개와 믿음순종을 통해 성령의 충만함을 더욱더 구해야 한다계속적으로 성령을 위해 심음으로써 그분의 열매가우리의 성품 가운데 자라나 무르익도록 해야 한다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인 개개인  아니라교회에 대해서도관심을 갖고 계신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은사는 봉사를위한 많은 다양한 능력들이며모든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한가지 은사는 가지고 있다그것은 주권과 은혜 가운데 분배되며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우리는 그것을 교회를 세워 성숙케 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한다그리고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3. 비평적 평가

저자의 주장 가운데예수님의 특징적인 사역이 옮겨 버리는 것과 가져다 주는 것으로써 이중적이라는 것은 한국교회 가운데 매우  시사점을 가진다(25). 왜냐하면 일반적인 보수적인 교단에서는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옮겨버리는 것은 강조하지만가져다주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다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절반만 인정하는 것이며 신학적인 구조적 결함이라 부를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서성도는 자신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에 대한 건전한 지식과 이해는 있지만그럼에도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이 현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지금  순간에하나님께서영적으로 부어주신 축복에 대한 인식이 약하다그래서 이러한 질문을 필연적으로 가지게 된다하나님의 칭의가나에게 있었다면도대체 현재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하나님께서나에게 주시는 은혜와 그분의 도우심은 어떤 것인가과연 성령 하나님은 나의  가운데 어떤 역할을 하시는 것인가이러한 실질적인 질문과 혼란들에 대하여  책은 답을 준다.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죄의 용서와 성령이라는 두가지임을 분명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성도들은 영적인 자만심과 엘리트주의에 빠진다(27).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약속 또는 선물과 동일한 것이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편적으로 주신 것을특정한 누군가만 누릴  있는  어떤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하나님께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자랑하며마치 다른 이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영적 엘리트주의를 깨트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작업은믿는 자들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모두가 구원의 과정 가운데 경험하는 것임을 보편적인 축복임을 성경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만약에 이것이 흔들리면은사주의에서 주장하는  처럼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며교회는 잘못된 성령론에 사로잡힌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로 가득하게  것이 틀림없다.


성령의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특별히 성령의 은사를 생각할 때에 중요하다한국 교회는 기도원을 통해서 많은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고그곳에서 소위 은혜 받은 성도들이 지역 교회 가운데  영향력을 발휘했다문제는 그들이성령의 은사를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노력으로 얻은  처럼 특권 의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령의 은사들과 성령의 열매가 익어가는  두가지를 철저하게 구분한다그리고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은 성령의 은사를 충만히 받은 것이 아니라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임을 논증하는데그것은 목회의 현실가운데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65).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성령 충만을 확인할  있다는 저자의 논증은 책을 읽는 독자에게 평생동안 힘쓰고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은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 준다.


저자가 염려하는  처럼  역시사람들이 소위 성령 체험을 하고서는그것을 모든 이들이 경험해야 하는 정형으로 강요하는 것을 염려한다(85). 저자의 이야기하는  처럼 어떤 경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라는  번째 은혜의 사역과 비교될  없다(86). 바로  부분이 확실하게 지켜질 때에사람들은 영적인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있다그리고 훨씬 내면적이며 관계적인 성령의 참된 열매를 추구할  있는 열정을 가질  있게 된다


특별히 최근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심각한 가정 폭력 이후에 안수를 받은 목사의 경우를 생각할 때에참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몇가지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목회자가  경우그것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성경 전체를 살펴볼 때에성경의 기적들이 전체적으로  군데에 몰려서 등장하며그것은 새로운 계시의 시대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목적으로 나타난다라는 저자의 주장은현대의 시대에 있어서 교회가 무엇을 더욱 힘써야 하는지에 대한 탁월한 방향을 제시한다(122). 


그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지금에도 기적을 능히 베푸실  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힘써야 하는 것은외적으로 보이는 기적이 아니라 내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성령의충만과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방향이야 말로영적으로 미성숙한 성도들의 죄들로 인해 사회로부터 지탄 받고 있는 한국 교회가 힘써 가야할 길이라   있다.


은사라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탁월한 통찰이라   있다(131). 영적인 엘리트주의를 벗어나모든 성도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할 때에드디어 목회자중심이 아닌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로서 역할을 제대로   있는 논리적인 근거를 갖는다


결국 목회자의 역할은성도들이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사용할  있도록 돕는 것임을 책을 통해서 확신하게 된다(133).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공동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은사가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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