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Possible Vs Impossible / 이미 넌 고마운 사람 - 김연우



사랑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너의 소중한 편지를 받은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는구나. 유독 이곳 먼곳에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다만 네가 그곳에서 그런 것 처럼, 이곳에서도 아름다운 가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어. 

돌이켜 보면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다시 너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니 또 많은 하고 싶은 말들이 생각이나. 내 마음 안에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작게나마 너에게 도움이 되고 또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오늘도 글을 적어 본다. 너의 진지한 편지 앞에서, 나 역시 또한 굉장히 신중하게 되고, 한글자 한글자가 더욱 정성이 들어가게 되. 너의 질문들을 통해서 어쩌면 내 마음 속에만 묻어두고 고민했던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오늘 답장은 조금 더 길어질 지도 모르겠어. 며칠 전,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동네 골목을 걸으면서 너에 대해서 생각했어. 하늘의 구름은 마치 흩날리는 하얀 눈 같았고, 길가의 나무들의 단풍 잎은 자신들을 뽐내며 손을 흔들고 있었어. 이미 그것들은 정말 진지하게 나에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평생 주를 부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는지도 몰라. 

네가 나에게 책을 요약하는 법을 다시 한번 물은 것은 좋다고 생각해. 나도 나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핵심 단어와 저자의 성찰, 그리고 자신의 언어로 바꾸는' 너의 방법이 너무 좋다고 생각하고, 나도 그런 방식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꺼야. 오히려 나는 너보다 더 요약을 잘 못한다고 생각이 들기도 해. 나는 다만 그냥 내용을 압축하겠다는 일념 하나만 마음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돌이켜 보면, 사실 나에게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그 책을 읽고 요약할 때에 느꼈던 나의 감정, 기쁨, 환희, 그리고 이 요약이 반드시 나와 누군가에게 유익을 줄거라고 생각했던 그때 그 마음인 것 같아. 그런 마음이 들 때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몇시간이고 꼼짝않고 책과 씨름하면서도 힘든 줄 몰랐으니까. '산이 올라서 거기 올라간다' 라고 말했던 누군가의 말 처럼, 소중하고 의미있는 책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 그 자체가 너무 좋았고, 언제나 책이, 그리고 저자가 나를 손짓하며 부른다고 느꼈어. 가장 최근(그래도 벌써 3년은 넘은 것 같지만)에 정리한 것이, '완전한 진리' 에서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의 흐름을 보여준 부분이었는데, 한번 정리하고 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던 것을 기억해. 

너에게 썼던 답장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너와 내가 사용했던 '도전' 이라는 단어가 조금 다른 맥락으로 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리더쉽에 대해서 늘 고민하는 너에게 '도전'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나태한 생활에, 나의 무지함에, 도전이된다 라는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사실 나에게 '도전' 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신적인 지혜 혹은 복음이 나에게 다가온다' 는 의미에서 도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아마도 호튼의 '복음이 이끄는 기독교'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 같아.(책을 한국에 놓고 와서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이해해주렴) 거기에서 호튼은 복음을, 우리가 아는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우리에게 설명해. '복음 이라는 것' 은, 언제나 우리에게 '낯선 것' 이라고 말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복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것은 우리에게 정말 '낯선 것' 이라는 것이지. 내가 말한 도전이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도전이야. 난 언제나 도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이러한 복음을 전제하고 있어. 

너에게 쓰는 답장은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아주 정밀한 글은 아니야. 하지만 너에게 내가 얻은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꼭 알려주고 싶어. 그리고 너에게 그것이 도움이 되기를 바래. 그것은, 연약하고 부족한 내가 이해하기로는, 설교는, 책은, 생각은, 철학은, 대화는, 단 두가지의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는 거야. 그것은 'possible' 그리고 'impossible'이야. 

모든 사람은 이 두가지의 큰 틀을 기반으로 해서 움직이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어. 예를 들어 우리가 드러커와 같은 경영에 관련된 책을 읽을 때에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조직 이론에 근거하고, 행동과 감정을 조절하고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 간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의 'possibility'를 전제로 하고 읽는다고 말할 수 있을꺼야. 사실 그런 맥락은 어떤 의미에서 소위 기독교의 진리에 근간했다고 말하는 리더쉽과 관련된 책도 마찬가지일꺼야. 그것도 우리가 노력하고 도전한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의 'possibility'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너도 알꺼야.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물어보고 싶어.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부합하는 것인가?' 네가 아는 것처럼 비록 너보다는 부족하지만 경영에 관련된 책들도 어느 정도 보았고,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도 즐거워해.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에서 '주도적이 되라' 라는 내용을 보고, 처음으로 만들어진 모임 속에서 그 룰을 따라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에, 그 모임이 순식간에 살아나는 것을 보고 참 감동을 받은 기억이 있어. 그리고 네가 아는 것처럼, 적어도 내가 맡은 일에 있어서는 조직 이론을 이용하고, 그래도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을 해. 

그러나 다시 한번 나와 그리고 너에게 물어보고 싶어. '우리는 정말 완전한 사람일까? 우리는 정말 진정한 possibility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노력하고, 도전하고, 힘을 쓰고, 갈고 닦고, 결심을 하고 연습을 하면, 정말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그것이 신앙이든 기도이든 지혜이든 영성이든 그 어떤 것이든 이루어지는 것일까? 

너의 경우는 잘 모르겠어. 그러나 나는 너무 많이 실패했어. 수 많은 규율들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글쎄, 그것 중에 절반 정도를 성공했을까? 하나님의 뜻을 살려고 했지만, 글쎄, 그 결심의 절반을 살았을까? 그것이 나의 현실이야.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현실일꺼야.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impossible'이야. 

사랑하는 친구야, 내가 저번 편지에 '그릇'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 기억할꺼야. 나는 나에게도, 그리고 너에게도, 그 그릇을 만드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그릇의 이름은 'possible' 혹은 'impossible'이야. 

만약에 우리가 'possible' 이라는 그릇을 만들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우리를 흥분되게 할꺼야.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가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내가 훈련하고 규율을 지키고 성실히만 한다면,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possible'의 그릇은 우리를 기쁘게할꺼야.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어. 그 끝에는 절망만이 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완전한 승리와 성공을 얻을 수 없는 'impossible'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설교이든, 책이든, 리더쉽이든, 우리를 힘들게해. 

그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큰 고통이 되고 말꺼야. 왜냐하면 우리는, 결승점이 없는 마라톤을 달리는 사람들과 같으니까. 'possible'이라는 그릇 속에서 우리는, 그 누구도 온전한 자존감 혹은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할꺼야. 우리의 인생이 잘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자존감이 낮은 이유는,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부족한 이유는, 우리가 노력이 부족해서이든, 우리가 기도를 적게 해서이든, 우리가 성경을 적게 읽어서이든, 혹은 우리가 무엇인가 하지 않아서 이기 때문이니까.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고, 그 결과는 언제나 스스로에 대한 비참한 감정, 좌절, 슬픔, 절망, 비교 의식 이런 것들이야. 

그런데 난 생각해. 언제나 이 'possible'의 그릇은 세상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그릇이야. 노력한대로 이루고, 노력하지 않은 자는 얻을 것이 없고, 성공한 사람들은 칭찬받고, 실패한 사람은 좌절하고, 넉넉한 자는 인정받고, 가난한자는 무능한자로 취급받는 그 'possible' 의 그릇은 언제나 익숙해. 그러나, 'impossible'의 그릇이야 말로, 나에게 가장 '도전적인' 그릇이야.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나에게, 많은 독서 끝에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리고 책들을 요약하고 설명하고 이야기하는 그 끝이 한마디로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impossible'의 그릇, 곧 '복음' 의 발견이라고 말하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이야기하지. 복음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대부분의 경우 언제나 복음을 'possible'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으로 만들어갈 뿐이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행하는 것들이 넉넉히 승리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 세상 속에서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삶이 정렬되고 지혜를 얻게 되는 그런 어떤 것이지.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는 것 역시, 그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야.

물론, 그런 면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야. 우리의 삶 속에는 엄연히 'possibility' 가 존재해.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예전보다 훨씬더 시간을 잘 활용하고, 예전보다 훨씬 집중해서 공부하고, 예전보다 훨씬 따뜻한 마음이 생겼어. 그러나 돌이켜 보면, 참 우스운 일이야. 정말 내가 변했을까? 아니,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여전히 시간을 활용하지 못하고, 여전히 놀기를 좋아하고, 여전히 잔인하고 악하니까. 어쩌면 나는 예전보다 결코 낳아진 것이 전혀 없는지도 몰라. 

나 역시 언제나 자존감이 낮아지고, 스스로에게 절망하고, 희망이 없어보이고, 어쩌면 네가 너 스스로에게 느끼는 그 이상으로 낙심하고 슬픔에 젖어. 나 자신에 대한 그 어떤 희망도 볼 수 없을만큼 절망하고 괴로워해. 하지만 그럴 때 마다 난, 'impossible' 그리고 '복음' 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돌이켜봐. 그것은 언제나 나 자신 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 어떤 절대적인 신적인 내용이야. 

우리는 'impossible'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행하셨어. 우리는 제대로 이룬 것이 없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셔. 나는 내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존감을 제대로 가져본적 없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모든 일하심이 나의 것이 되었어. 우리의 'impossible'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분은, 그리스도 한분이야. 

'possible'의 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야. 그러나 'impossible'의 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그리스도, 삼위 하나님'이야. 'possible'안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은,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계발할 것인가, 어떻게 인생을 지혜롭게 살 것인가, 어떻게 승리를 만들어 낼 것인가 바로 그것이지만, 'impossible'안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과 관심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그분의 복음에 더욱 다가가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 복음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이해하는데 있다고 생각해. 

아마도 맥그라스 책 에서 보았던 내용인 것 같아. '종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 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칭의, 복음 이런 것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논리 정도로 이해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우리의 자존감, 인생에 대한 의미, 좌절과 절망 뿐인 현실 속에서의 안정감,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유일한 희망 등으로 마치 거미줄 처럼 연결되어 있어. 

만약에 우리가 'impossible'의 그릇을 만들지 못한다면, 다른말로 하면, 참된 복음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쉽게 절망하고 말꺼야. 내가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에, 'possible'의 입장에 있는 누군가가, 우리가 기도를 몇시간 했느냐고 묻고, 성경을 몇장 읽었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의 온 마음은 정죄감에 가득찰꺼야. 모든 인생에 대한 절망과 슬픔에 대한 원인을 나 자신에게 향할 것이고, 결국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고사(枯死)' 시키고 말꺼야. 

네가 인용한 얀시의 글은, 'possible'의 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이야기한 내용이라고 생각해. 그 그릇은 네가 인용한대로, 미움과 죄책감, 갈등으로 뒤범벅인 곳이고, 모든 것이 다 엉망인 곳이지. 결국 그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포용하고, 설명하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그 어떤 또 다른 관점, 세상이 제공하지 않는 또 다른 특별한 틀을 발견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 

참 이상하지, 'possible'의 그릇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마음이 뜨거워지지가 않아. 그저 죄책감에 눌릴 뿐이야. 인생을 이렇게 해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들, 성경을 몇독했고, 기도를 몇시간 했고, 그랬더니 병이 치유되었고, 이런 이야기들은 오히려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할 뿐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참 자신은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 하지만 역시 그들도 연약한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결국 'impossible'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그 말을 하는 자기 자신도, 그리고 듣는 나 자신도 쉽게 잊어버리지. 

그런데 이상해. 'impossible'의 그릇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겁고 눈물이 흘러. 하나님 이야기만 하는데, 예수님이 다 해주셨다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신다고 말하는데, 인생이 마음대로 안되도, 주님 뜻 안에 있는 것이니 힘내라고 하는데, 주님을 더 알아야 하는데 라고 말하는데, 설교와 책과 모든 논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한 없이 높아지시는데,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힘이되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결심을 하게 되고, 그것이 유일한 소망임을 알게 되.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 그리고 리디머 처치에 가서 설교를 들을 때 그랬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 그것이 내 마음을 움직인다고 느꼈어. 호튼이 이것을 고민한 사람이고, 루이스가 이것을 고민한 사람이야. 나는 설교자이든, 작가이든,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해. 'impossible'의 인생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서 고민한 그 사람이야 말로, 바로 진정한 '복음'을 발견한 사람이고 희망을 찾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박영선 목사님 설교를 가끔 들으면 느껴. 그분이 얼마나 지독스럽게 그리스도를 인생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의절대적인 관계성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를 하는지, 왜그럴까? 왜냐하면 우리의 'impossible' 인생 속에서 그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이야.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좋은 그릇을 만들어가기를 바래. 네가 추구했던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내가 다 알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의 작은 글이 너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래. 어쩌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너무나 당황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의 글이 너의 생각에 작은 단서라도 되면 좋겠어. 

외국인 아저씨들과 하는 QT모임에서,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를 물어봤을 때, 그분중 한분이 이렇게 대답했어 '그것이 의미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meaning for)'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 '아니요,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성도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작은 것이라도 해야한다는, 그리고 끊임 없이 그것으로 압박하고 정죄받는, 내가 이루어내는 performance 혹은 conclusion으로 판단받는 'possible'의 그릇 안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한, 타락한 세상의 사랑일 뿐이야.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한(얼마나 많은 이들이 완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불완전을 설명하고 주장하는지) 사랑을 전제로 한 'impossible'의 그릇 안에서만, 우리의 모든 삶이, 좌절이, 슬픔이, 고통이, 열심이, 눈물이, 승리가, 실패가,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될꺼야. 그분의 완전하고 흠 없는, 조건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기반으로 한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부으시는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발견해나가고 다가갈 때에,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치더라도 헛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용납하고 기꺼히 그 길을 갈꺼야. 그리고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열정과 힘이 우리 안에서 솟아 나올꺼야. 

역설적이게도, 이 결론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지나야 했어. 오히려 더 많은 성경을 읽어야 했고, 기도해야 했고, 책을 읽어야 했어. 외로웠고 힘들었어. 그러나 주님께서 그 시간들을 은혜로, 홀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하고 감사해.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거쳤던 길들을 거쳤다고 생각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작은 실질적인 조언은, 'possible'과 'impossible'의 틀로 나눠서, 생각하는 연습을 해 보길 바래. 다른 이들과 대화하면서, 책을 보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그들을 분류하고 분석하고 적용해보길 바래. 어떤 이들의 말이 정말 진리인가? 과연 어떤 이들의 말이 우리의 인생을 제대로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 그 어떤 훌륭한 이들에 관한 것이라도, 모든 것들을 부지런히, 겸손히 그리고 진지하게 판단해 보길 바래. 그럼 너에게 좋은 생각의 훈련이 될꺼야.

네가 얀시를 인용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염치가 없는 사람' 이야.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이 이야기를 더 좋아해. 왜냐하면 네가 적은 이야기는 우리 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이야기지만, 이제 네가 적을 이야기는 우리 속에 없는 이야기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야. 그렇게 기억력이 약한 나이지만, 얀시를 통해 평생에 마음에 새긴 한마디야.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언제나 너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너의 마음이 늘 주님 안에서 강건하기를,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주님 뜻안에서 해결되기를,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기를,


너를 주안에서 사랑하는 진부가. 


2012년 10월 21일 일요일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 그대라는 말 - 정엽


중학교 때 한 친구를 알게 되었습니다. 순박하게 생기고, 집안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친구였습니다. 학기 초에는 굉장히 친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일로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그 친구가 저에게 사과를 했지만 저는 마음을 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학년이 끝나는 내내, 그 친구를 마음으로 무시했습니다. 그 어떤 화해의 신호에도 응답하지 않고, 마치 그 친구가 없는 것 처럼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교묘하게, 그 친구가 외로움을 느끼도록 일부러 행동했습니다. 사실 그 모든 과정과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제가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일은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끄럽고 슬픈 감정, 그리고 왜 그렇게 그 친구에게 잔인하게 행동했을까 스스로 곱씹어보며 끊임 없이 반성합니다. 그 친구가 저 보다 가난하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친구 정도는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그 친구보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기독교를 알아가고, 복음을 알아갈 수록, 저의 지난 시간이 부끄럽고 슬프고 아픕니다. 그리고 더 사람을 조심스럽게 대하게 됩니다. 결국 복음의 꽃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되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결국 우리의 신앙을 이야기해 주는, 가장 유일한 한가지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틀 안에서 해석하는 성경과 인생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그 어떤 것, 실용적인 그 어떤 것으로 사람을 대하는 세상의 풍조를 거슬러,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그 사실 하나로 존중하고 아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을 외모로, 학벌로, 재산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그 사실 하나로 인하여, 그 사람 앞에서 허리가 숙여지고 아끼고 보살피는 바로 그것이, 진정 거듭난 우리의 정체성이며 거듭남의 열매입니다.

이 세상에,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못난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답답한 나 자신이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결국,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아끼고 싶습니다. 내가 얻고자 하는 이익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뭔가 호감가는 어떤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존중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복음의 역사를 제 삶 속에서 풀어나가고 싶습니다.

요즘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만큼 며칠 동안 허리가 좋지 않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약해지지 않도록, 깊은 마음 속에서 용기와 자신감이 솟아나도록, 제가 마땅히 해야할 바를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인내할 수 있도록,

그래서 오늘도
행복.


2012년 10월 14일 일요일

사랑하는 친구에게 - 독서에 대해서 / 바람기억-나얼




사랑하는 친구에게.

오늘도 네가
무사히 행복하게 하루를 보냈기를 진심으로 바래.
그리고 너의 어려운 부분을 위해서
같이 기도하고 있어. 힘내렴.

나는 이곳에서
추석 기념으로 아내와 만두국을 끓여먹었어.
감사하게도 한국 마트가 있어서 떡과 만두를 샀고,
아내와 함께 맛있게 먹었어.
이제 한국 떠난지 일년이 훌쩍 넘어가니,
나도 모르게 한국이 그리운 것 같아.
아직 공부를 끝내려면 시간이 좀더 걸리니
좀더 열심히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 :)

갑자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빛이 어두움으로 들어온다'

너도 알다시피, 그리고 네가 말한 것 처럼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많지 않지만 또 적지 않은 책을 읽었어.
그리고 독서야 말로 아주 중요한,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첩경이고
중요한 길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언제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 믿음, 성경, 하나님, 예배, 무릎, 기도, 눈감음, 바램, 간절함'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해.
그것은 언제나 어두워져 있는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한없이 무기력하고 연약한
우리들이, 새로운 생명을 찾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

자기 전에
아내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이
이제 조금은 습관이 되었어.
짧은 기도이지만, 하루를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행복한 잠자리를 간구하고,
태중에 아기가 건강하기를 소망하는 시간은,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적인 시간' 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그 시간이, 이곳에서의 하루를 지나며
가장 소중한 시간인 것 같아.

글쎄, 나를 향한 너의 질문에 굉장한 진지함을 느껴.
"책을 잘 읽는 법, 요약하는 법, 통찰과 영감을 주는 것"
어떻게 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는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내가 너에게 어떻게 대답해 줄 있을까?

만약에 네가 그저 지나가는 말로 물어본다면
그저 나도 대수롭지 않게 말하겠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 역시 많이 고민을 했어.
그래서 며칠 동안 곰곰히 생각해 봤네.

어쩌면 네가 나에게 던진 질문은,
성도로 또 목회자로, 그리고 아버지로서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질문인 것 같아.
너처럼 가장 아끼는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앞으로 섬길 성도님이, 그리고 나의 자녀가
바로 그것에 대해 물어본다면,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해 줄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근래들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이십대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지나면서
많이 생각했던 바로 그 부분을 네가 물어본 것 같아.
그리고 이제는 조금은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사랑하는 친구야,
통찰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도전' 과 '대화' 에서 온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가장 탁월한 저자'를 향한
'도전과 대화' 라고 생각해.

너도 아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많은 책들이 있지.
누가 그 책을 평가할 수 있을까?
베스트셀러라는 기준이? 혹은 고전이라는 기준이?
사실 잘 모르겠어. 그러나 나는 한가지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그 책이 나를 향해 '도전' 하고 있는가를 물어보고 싶어.

어쩌면,
어떻게 책을 정리하는가는 두번째 문제일지도 몰라.

오늘도 학교 과제로 책을 읽었어
"How to Read a Book / Mortimer J. Adler"
꽤 유명한 책인 듯 해. 좋은 이야기가 많이 적혀 있더구나.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분석적으로 읽는지,
어떻게 필기구를 사용할지, 어떻게 index를 사용할지,
어떻게 해야 시간을 절약할지,

그러나 그것은 정말
부수적인 문제일지도 몰라.
돌이켜 보면, 책을 잘 읽어야 하는 것에 대한 책을 몇권 봤고,
그리고 그 중에 내가 이미 적용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도
발견했지만, 정작 그것이 내 핵심은 되지 못했으니까.

가장 실제적인 것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나는 zotero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
한번 검색해서 찾아보렴.
네가 원하는 주제별로 모든 자료들을 정리할 수 있으니까.
심지어 논문에서 각주까지 자동으로 만들어줘.
나도 1년 정도 전부터 목표를 가지고 자료를 정리하고 있어.
그러나 너도 알겠지.
단순히 자료가 우리를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 역시 네가 원하는 궁극적인 정답은
아닐테니까.

사랑하는 친구야,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들은 하나도 정리하지 못한 것 같아.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 그 책을 들고와서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면,
밤을 세워서라도 말할 수 있어. 아니 말하고 싶어.
누군가 나에게 어떤 책이 나의 인생에 가장 감동 깊었냐고,
진심으로 물어본다면, 난 그 사람과 밤을 세워서라도 이야기할꺼야.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생명' 과 같은 것이니까.

나에게는 따로 요약해 놓은 자료도 없어.
그리고 나에게는 정리해 놓은 노트도 없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마치 하나의 줄거리처럼,
하나의 큰 줄기처럼 내 마음에 남아 있다는 것을 느껴.

왜 그럴까?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그 모든 저자들을
정말 내 마음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그들을 존경한다는 것만은 분명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마치 늘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는 내가 읽은 내용들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미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것이 되었어.

나는
마이클 호튼을, 필립 얀시를, 맥그라스를, 로이드존스를,
박영선을, 루터를, 루이스를, 정말 사랑해. 난 그들을 존경해.
그들은 내 전부야.

비록 그들이 신학적으로는 조금씩 다른 입장에 서 있고,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또 어떤 이들의 비난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정말 사랑해.
왜냐하면 그들은 인생에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내가 경험한 모든 것에 있어서
나를 향해 '도전' 했기 때문이야.

나는 어떤 책을 어떻게 정리하느냐보다,
어떤 책을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너도 동감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소중해.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진지해.
아픔과 슬픔, 고통과 눈물, 기쁨과 환희, 감격과 흥분,
이 모든 것들이 얽혀 있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소중해.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할 수 없지.
그것은 신앙도, 인생도, 모든 것이 마찬가지인 것 같아.

인생에 대해서
쉽게 쓰여진 많은 책들이 있다고 생각해.
그러나 나 자신에게 질문해봐,
인생이 그렇게 쉬운 것일까?
그저 기도 한번 한다고 모든 것이 뚝딱 해결되는 것일까?
그저 그렇게 몇가지 룰들을 지킨다고 성숙해지는 것일까?
잘 정리된 책 몇권을 읽으면,
나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쩌면, 인생은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이해되는 아주 어려운 것인 것 같아.
그리고 그 시간들을 지나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분만이 우리의 전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겠지.
그리고 내가 읽은 모든 내용들의 그 끝에는,
결국 주님이 계시고,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설명된다는 것을 경험해.

그래서 나는 진지한 작가들을 좋아해.
그들은 모두가, 우리가 가진 편견과 습관,
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질문' 하고 '도전' 하는 사람들이야.
그리고 내가 한 것은 그저,
그들의 '도전' 에 '동참' 한 것 밖에 없어.

나는 정말 그들과 '대화' 했다고 생각해.
그들은, 내가 책을 펴서 그 책의 첫줄을 읽는 그 순간부터
나에게 말을 걸어 왔어.
가장 어렵고 심오한,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그들의 고민을 나에게 말했어. 그리고 난 대답하고 질문하고,
단번에 답이 나오지 않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몇년이고 마음에 품고 있었어.
줄을 치고, 물음표를 그리고, 수도 없이 책의 귀퉁이를 접고,
몇시간이고 걸으면서, 마음에 새기고 고민했어.

어쩌면, 참된 독서는,
정신이 조금 이상해지는 것인지도 몰라.
이미 몇권의 책에서, 참된 독서라는 것은
그런 것이라는 것을 이미 확인했어.

인류사에 남을만한
가장 훌륭한 저자들과의 만남, 대화, 질문, 도전,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있어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고,
혹시 네가 조금이라도 감동을 느낀다면,
바로 그것이 감동의 원천이고, 어느 곳에서도 홀로
외롭지 않을 수 있는 나의 유일한 피난처야.

나도 네가 생각하는 것 처럼,
기독교라는 것은 결국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관계 안에서 성숙해간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것이 바로 교회의 비밀이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개인의 성장이라는 것은,
내가 위에서 설명한 '그 어떤 것'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해.
그것은 '학위' 와는 다른 또다른 어떤 것이고,
'공부'와는 다른 또 다른 어떤 것이고,
'교육' 이라는 단어와는 또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네가 공감하는 것처럼, 우리는 많은 지식을 필요로해.
그것이 생활에 관련된 것이든, 혹은 신앙에 관련된 것이든,
그러나 결국 그러한 지식을 담아두는 그릇을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모두 흩어져 버릴꺼야.

어떤 이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결국 그는 자신만의 그릇 안에서 그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러므로 결국 너와 나에게 주어진 주제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과 모든 것을 담아낼 그 그릇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그릇은 결코 순간의 책 몇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고,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고 고민하고 도전하는
그 독서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원하는 대답을 했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
분석적으로 쓰는 것보다, 오히려 은유적으로 쓰는 것이
너에게 더 유익할거라고 생각해.
나의 짧지만 장황한 글이 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래.

나는 말할 때 눈이 빛나는 사람을 좋아해.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말함에 있어서
확신과 자신과 감격을 표현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네가 바로 그런 사람 중에 한명이야.

우리가 다시 만나서 함께 이야기할 때에,
나의 눈이, 그리고 너의 눈이
더욱 빛나기를 진심으로 바래.
우리가 읽은 책들에 대해서 경험에 대해서,
그토록 위대한 그들과의 대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가에 대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할 시간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래.
너를 위해 계속 기도할께.

너를 사랑하는 친구 진부가.

2012년 10월 5일 금요일

故 김경주 집사님을 기리며... / My life is in your hands - Kirk Franklin



오래전에 삼성병원 암병동을 다녀왔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바삐,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아름답지만 그러나 차가운 병원의 건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어지럽게 뻗어있는 복도를 지나 조심스레 병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故 김경주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이미 병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지만, 두 부부의 얼굴은 너무 밝았습니다. 집사님의 손을 꼭 잡고 간절히 기도 할 때, 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냥 마음이 아팠습니다.

집사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마음이 먹먹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원망하기 보다는 자신을 원망하고, 어려워도 힘들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짐을 묵묵히 감당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집사님이 바로 '그런 분' 이셨습니다.

왜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아픈 일이 일어나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언제나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감정은 논리보다 앞서고, 슬픔은 신학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자신이 그렇습니다. C.S.루이스가 이미 '고통의 문제'를 썼지만, 아내를 잃고서 새롭게 고통을 이해한 것 처럼, 우리는 큰 아픔과 슬픔 이후에야, 우리의 신앙을 발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참 약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이곳에 멀리 떨어진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같이 슬퍼하는 것, 자신의 반쪽인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린 남편의 아픔 앞에서, 삶의 기둥이자 모든 것인 엄마를 잃어버린 자녀의 상실 앞에서, 자녀를 먼저 가슴에 묻어야 하는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 연약한 목회자인 제 자신도 함께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것,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저의 마음 가운데, 그리고 고인을 사랑했던 모든 분들의 마음 가운데, 故 김경주 집사님이 기억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분의 아름다운 신앙이, 고통 가운데서도 지켰던 그분의 믿음이,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미소가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깊은 슬픔 가운데 있는 고인의 가족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주님의 참된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모든 절망의 끝에 있는 '죽음' 과, 그리고 그 죽음조차 이기신 주님의 '승리'가, 낙심하고 절망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원망하는 우리의 마음에 다시 찾아오기를, 때론 우리를 버리신 듯한 상황으로 인해 어둡고 차가워진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확정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아지기를, 그리고 언젠가 그날 다시, 집사님의 환하고 따뜻한 미소를, 그 어떤 고통과 슬픔도 없는 주의 나라에서 다시 뵙기를..

그래서 오늘은,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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