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의 전기 저자인 해리 스타웃(Harry Stout)은 칼빈주의 복음전도자인 휘트필드가 미국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때,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과 아주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고 기록한다. 두 사람 서로가 갖고 있는 사상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이 서로 친했다는 사실에 다소 놀랄 것이다. 휘트필드는 칼빈주의 교리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고 청렴하고 도덕적으로 엄격한 “청교도”라는 용어의 표상이었다. 반면에 프랭클린은 종교에 대해서도 모독하는 발언을 일삼았던 종교회의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성적으로도 문란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프랭클린이 하나님께 선택받지 않은 자들 중 하나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을지라도 그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증거로만 볼 때에는 그는 분명 선택받지 않은 자들의 범주 안에 들기에 충분했다. 또한 휘트필드도 프랭클린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고 평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주의 복음전도자 휘트필드가 종교회의주의자인 프랭클린과 시간을 보낸 것은 단지 그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과연 하나님은 휘트필드가 벤저민 프랭클린과 함께 즐기는 시간을 허락하셨을까 하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물론 어느 칼빈주의자라도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의 우정을 통해 미리 예정하신 특별한 목적이 있으셨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먼 미래에 대한 목적론적인 논의 말고, 그들이 나눈 순수한 우정 자체에 대해서 묻고 싶다. 하나님은 휘트필드가 프랭클린과의 사귐을 즐기는 것을 허락하셨을까? 우리 주님은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우정을 그저 기쁘고 즐거운 일로 여기셨을까?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이 편지를 통해 주고받는 내용들에 흡족해하셨을까?
휘트필드는 친구의 건강을 걱정해주었고 필라델피아에 갈 때마다 그의 집에 머물기를 원했으며 프랭클린이 잘못한 일로 가슴 아파했다. 하나님은 선택받지 않은 백성 중의 하나라고 거명된 사람과 나눈 우정 자체에 관심이 있으셨기 때문에 휘트필드가 프랭클린과 나눈 시간이 발생하기를 원하셨던 것일까? 다시 말해 구원의 특별한 은혜 바깥의 사람들에게 있는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과 그렇지 않는 자들 사이를 어떻게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이 질문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면서 이를 근본적인 질문과 연결하였다. 우리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특별한 은혜의 경계 바깥에 있는 자들에게 있는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들에 대해 과연 하나님의 관점과 동일하게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리처드 마우, 문화와 일반 은총: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운 것 가운데 빛나신다, trans. 권혁민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
57–59.
만일 우리가 신학적으로 성령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생명을 선물로 주시고, 더 나아가 지성, 음악적인 재능, 건강, 튼튼한 체력과 같은 타고난 재능을 주셨다고 말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과 의지가 건설적이며 외적으로 선한 것들을 행할 수 있도록 주권적으로 역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가? 예를 들어,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종 고레스가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칙령을 반포한 것이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해서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가? 만일 우리가 교리문답적인 관점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모두 선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이 인간의 모든 역사를 다스리시고, 인간들이 선을 행하도록 이끄신다고 말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이러한 역사는 결국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데 말이다.
John Bolt, “Common Grace, Theonomy, and
Civic Good: The Temptations of Calvinist Politics,” Calvin Theological Journal 33, no. 2 (November 2000): 237.
리처드 마우, 문화와 일반 은총: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운 것 가운데 빛나신다, trans. 권혁민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
73.
학위를 위한 공부가 모두 끝난다면 정말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좋아하는 C.S. 루이스나 마이클 호튼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의 독서를 지켜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훨씬 더 큰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책을 한꺼번에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십대 때에는, 제가 중요하게 읽어나가야 하는 책들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하기 위해서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기본적으로 소화해야 하는 책들이 있었습니. 그리고 오래전에 그것을 정리해 놓았고 이 책들이 저의 생각과 삶의 방향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 정진부 목사의 "독서 간증"
https://prezi.com/xkmxlmjzkp-x/for/?utm_campaign=share&utm_medium=copy
하지만 사십대의 저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제가 기본적으로 익혀야할 내용들과 책들을 섭렵한 이후는, 이제 저는 일종의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자유롭게 탐구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한 분야에 굳이 얽매이지 않고, 어쩌면 저와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그런 책이라도 자유롭게 읽고 생각하고 적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깊이 있는 책 한권을 여러번 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정독의 독서"는 한 사람의 사고를 확장시키며 그 내용을 내면 속으로 자리잡게 합니다. 저 역시 단 한권의 책을 들고 그 책을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다섯권 정도의 책을 동시에 읽어나가면서 저는 한권을 정독하는 것과는 또 다른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넓은 세상 속에서 다양한 진리의 조각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실 신학책만 읽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비슷한 맥락의 비슷한 해석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가장 익숙한 일입니다. 물론 그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진리인 성경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다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익숙하기 때문에 제가 염려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에게, 그리고 제 스스로에게조차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성경 해석에 대한 이야기만 붙들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세상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는 목표는 너무나 숭고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성도의 가장 높은 수준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속에 매몰되지 않고 세상을 배우고 이해하고 평가하고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성경적으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만" 매몰된다면, 그러한 숭고한 목표는 실질적으로는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성경만 알아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만 이해해서는 나의 삶 가운데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적용할지도 방향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면에서 목회자로 그리고 성도로서 제 삶 속에서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절박해집니다.
만약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으로만 나눈다면 사실상 다양한 책을 읽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배척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교회의 주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의 죄를 억제하시며, 죄인들에게도 여전히 탁월한 지성과 통찰력을 주십니다. 심지어 어떤 부분에서는 성도를 넘어서는 지식과 지혜들을 그들에게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여전히 세상 속에서 그분의 자비를 드러내심을 보이십니다.
흘러가듯이 사는 것 같았는데 저도 모르게 뭔가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섯권 정도를 한꺼번에 틈나는대로 읽으면 매우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다양한 책들이 비교가 되고, 그 안에서 저자들의 논리를 한꺼번에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더욱 확장되어서 성경적인 이해와 비교해보게 됩니다.
이러한 독서법은, 단순히 신학 책 한권을 읽어나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면의 치열함을 만들어냅니다. 혹은 세상과 저의 영적인 대결이기도 합니다. 배우면서 도전하면서 싸우면서 겸손해지면서 성숙해집니다. 이것은 제가 과거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고, 저에게 있어서 삶의 지식의 확장과 성경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방향입니다.
물론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은 모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자가 진실하게 마음을 담아서 쓴 책이라면, 비록 부족하더라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책들 중 대부분은 철저하게 진화론을 기반으로해서 쓰여진 책들입니다. 읽으면서 철저히 반대하고 또 마음이 상당히 불편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는 그런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이 이 시대에, 그리고 제 자신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그 어느때 보다 진지하게 탐구하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책을 읽어서 요즘에 너무 행복하다"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소박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니 좋겠다"고 아내가 웃더군요. :) 어쩌면 저의 행복의 기준이 매우 낮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행복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이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흩뿌려져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분이라면, 그리고 궁극적인 성도의 영적인 성숙을 추구하는 분이라면, 다양한 책을 한꺼번에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