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도입 부분에 사용한 예화는, 아마도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나왔던 내용을 살짝 각색한 것입니다. 편지는 한번에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신서도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설교 본문을 나누어서 설교하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그러나 큰 맥락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매일 아침 성경을 듣지만, 그래도 에베소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제 자신이 가장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자칫하면 마치 우리의 행위 자체에 구원이 있는 것처럼 오늘 본문이 이해되기 쉽지만, 맥락 속에서는 바울 사도의 의도가 잘 드러납니다. 새로운 신분과 정체성 그리고 그것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성도에 대한 각성과 촉구입니다.
요즘에 일반 은총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서 그런지, 타락한 자들에 대한 묘사와 일반 은총을 조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마음으로 억지로 억누르는 인간에게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릴 뿐입니다.
주석을 보면, 수 많은 문법적인 구조와 논리적인 해석이 등장합니다. 목회자인 저도 마치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특별히 심령의 새로움 이라는 것은 논쟁적인 부분입니다. 저는 설교 가운데 신학적인 논쟁을 두드러지게 넣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목회자인 제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신학자 다수의 의견은 아니지만, 아래 내용을 통해서 설교의 방향을 잡고 부드럽게 설명을 넣었습니다. 저자의 설명과 에베소서 전체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설득적이었기 때문입니다.
The majority of English translations (and many commentators) have taken the spirit (τῷ πνεύματι) as a reference to the human spirit. This is a plausible interpretation because Paul speaks of the human spirit on many occasions (e.g., Rom 1:9; 8:16; 12:11; 1 Cor 5:3; 7:34; 14:15; 2 Cor 2:13; Col 2:5). Although nowhere else does Paul speak of the human spirit being renewed, conceivably he could do so. A number of factors, however, lead us to conclude that Paul is here referring to the Holy Spirit, who is the operative influence in renewing the minds of believers.
(1) Paul never refers to the human spirit in Ephesians; every reference is to the Holy Spirit. In fact, the theme of the work of the Spirit is a major motif in this letter, occurring thirteen times.
(2) Some of the statements about the Spirit earlier in the letter point toward seeing the operation of the Spirit here. In the prayer of 1:17, Paul prays that the Spirit will bring to them wisdom and revelation in knowing Christ better (an activity of the mind). In the prayer of 3:16, he asks the Father to strengthen them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their inner selves (which would include the mind).
(3) The only other time this precise combination of the dative article with the “Spirit” (τῷ πνεύματι) occurs is in 1:13, where it clearly refers to the Holy Spirit (“you were sealed with the Holy Spirit”).
Clinton E. Arnold, Ephesians, Zondervan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0), 288–289.
이 본문에 대한 대부분의 주석은, 정체성의 문제를 다룹니다. 저는 물론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뭔가 실제의 성도님들의 삶과는 조금 떨어져 있다고 느낍니다.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내면을 잘 살펴야 한다라는 표현으로 바꾸면서 좀 더 마음에 와 닿게 설명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팀켈러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아, 성경적인 확신과 그 자유로움이 너무 좋았습니다. 너무 음성을 높이지 않아도 그 내용이 마음에 깊이 와 닿고, 이분이 정말 확신 가운데 설교한다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도 요즘에는 조금 더 차분하게 천천히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음성이 높아집니다. 제 자신이 흥분할 것이 아니라, 들으시는 성도님들이 은혜 받으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이방인과 성도의 내면과 외면의 연결의 구조를 다루었다는 점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였지만, 제 안에서 깊이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프렌시스 쉐퍼는 생각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뀐다고 확신있게 이야기합니다. 일반 심리학도 비슷한 맥락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치 그런 사람인 것 처럼 행동하면 생각까지 바뀐다고 설명합니다.
아직 저 역시 고민중입니다. 저의 지식과 안목이 더 넓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라는ㄱ ㅓㅅ은 내면에서 시작해서 외면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저의 삶 역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 에베소서 4장 17-24절 설교
혹시 성도님들께서는 학창 시절에 연애 편지를 쓰셨거나 받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일입니다. 내가 연애 편지를 받았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어서 편지지를 꺼내 보는 것입니다. 편지지가 무려 다섯 장이 넘는 것입니다.
너무 놀랐습니다. 그리고 첫장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이미 밤이 너무 늦었습니다. 한번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시간이 늦었는데 어떻게 해야될까요? 나머지 장을 다 한꺼번에 읽어야할까요? 아니면 그냥 잠자리에 들어야 할까요? 이건 물어보는 것 자체가 민망한 상황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단 한명도 연애편지를 한장만 읽고 잠드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누구 누구에게 라는 그 시작부터 마지막 그 한 문장까지 단번에 다 읽어 낼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치 연애편지를 읽는 것 처럼 에베소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시간과 공간과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구원의 역사가 저의 마음 깊이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많은 구절들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지만 그 내용들을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 전에 예정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크신 능력을 넘치게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퉁잇돌이 되시며 사도의 가르침이 우리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든지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더 충만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온 성도는 마땅히 함께 힘을 더하고 서로 도우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에베소서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오늘 말씀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4장의 앞부분에서는 성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면 이제는 성도가 아닌 사람들을 등장시키면서 대조를 하시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의 전형적인 어떤 모습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그 공통의 방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분명한데, 먼저 이 사람들은 허망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열심히 살기는 열심히 사는데 삶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진정한 참된 방향과 목적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시기를 이방인들은 그들의 총명이 다시 말해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그 능력과 힘이 어두워졌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이방인들 중에도 남들이 감탄할 만한 지식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한계는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어두움 때문에 그들의 판단과 생각과 선택들이 악한 영향 아래 놓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자신의 마음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진정한 생명에서부터 완전히 떠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마치 로마서 1장의 말씀이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이방인들은 결코 핑계를 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은 무지하여서 아무런 책임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영원한 능력이 만물 속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방인들은 의도적으로 그것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께서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묘사할 때에 단순히 그들의 마음에 대해서만 묘사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어두워진 그 마음은 그들의 행동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감각 없는 자라는 것은 감각이 없는, 냉담한, 무정한, 태연한 그런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완료 시제를 사용해서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마음이 굳어지고 어두워진 사람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차갑고 냉정하고 죄를 지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그런 악한 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방인들이 죄를 지을 때에 누군가 억지로 시켜서 짓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19절에서 자신을 방탕에 방임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죄에 넘겨주는 것입니다. 죄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죄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욕심으로 행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탐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욕심 혹은 탐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지만 끊임 없이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다. 끊임 없이 어떤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그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성도 이렇게 앞에서는 이방인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셨다면, 이제 바울 사도는 우리 성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20절에 “오직”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러나” 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앞에 등장한 이방인들과 뒤에 등장하는 성도들을 분명하게 대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바울 사도께서 이방인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처음에 먼저 이방인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이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설명하신 것 처럼 성도들에게도 있어서 동일한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먼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 우리 마음 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는 그 지식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21절에 보니 우리가 예수님으로 부터 듣고 예수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인이 가지지 못한 하나님의 능력의 복음입니다.
주목할 표현은 20절 말씀에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독특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배울 때에 사람 자체를 배우기 보다는 어떤 율법이나 규례를 배우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그분과 영적으로 연합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절대로 분리될 수 없고 우리가 그분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운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부터 24절까지는 성도가 마땅히 살아가야 하는 삶의 그 방향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분명히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도 여전히 어려움과 유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완전 주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마치 성인군자처럼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죄의 유혹도 없고 완전해 진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탐욕의 욕심이 여전히 우리 안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그 예전의 모습이 약해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벗어버리라” 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옛 습관과 살아가던 방식을 면밀히 살피고 그것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더욱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에서 삶의 방향을 명령하십니다. 2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심령이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과 우리의 영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풀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으로 밀마암아 마음과 영혼이 새롭게 되어라 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성령님의 다스림을 간구하면서 우리의 내면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24절 말씀을 보니, 하나님을 따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 처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새로운 정체성과 삶의 패턴을 가지고 연습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사람을 입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와 닿으셨습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 생각과 태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먼저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방인들의 생각과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허망해졌는가 그리고 얼마나 그들이 어두워졌는가 그것을 먼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은 그 허망하고 어두워진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 때문에 방탕함에 자기 자신을 내어 주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이러한 내면과 외면의 연결이라는 것은 성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단순히 성도의 내면이 중요하다 혹은 단순히 외면이 중요하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도의 내면은 전쟁 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옛 사람의 영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내면에서 여전히 육신의 탐욕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한 성도는 반드시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거룩한 행동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절반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행동만 바꾸도록 추구한다면 우리는 자칫 바리새인과 같은 내면의 변화 없이 겉만 그럴 듯한 위선적인 신앙을 가질 위험이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만약에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우리의 내면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라고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내 내면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내면을 성경에 비추어서 제대로 파악하고 분석하고 그것이 얼마나 문제가 가득한가를 이해하고 탈피하고자 노력하며 주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에 그때에서야 새 사람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이어지는 또 다른 말씀의 강조점은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면의 변화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기독교에 대한 큰 오해 중에 하나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것이 기독교이다” 라고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면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분명히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 혹은 목표라는 것은 단순히 내면만 관찰하고 생각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 처럼 의롭고 거룩한 그 새로운 삶을 우리가 반드시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격적인 내면의 변화가 중요하고 그것이 시작이지만, 그것은 결국 우리의 의롭고 거룩한 행동으로 연결되고 반드시 거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인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결국에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일한 패턴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다스리시는 성령 하나님을 힘입어서, 우리의 외면적인 행동과 섬김과 사랑과 태도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마땅한 것이며 우리가 단순히 우리의 내면에 대해서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겉모습의 변화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크게 깨달은 한가지는, “성도는 세상과 반대로 살아가야만 한다” 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 중에 “역행자” 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자로 쓰여진 제목입니다. “어떤 일에 순응하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 이것이 바로 역행자의 뜻입니다. 사실 이 책은 기독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책인데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한 책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성도와 교회야 말로 역행자라는 확신을 다시 한번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면 되겠습니까?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방식 딱 그 반대로 역행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도대체 어떻게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질문할 필요는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방인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없이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탐욕을 부리는 것입니다. 방탐함을 즐기면서 나를 거기에 던지는 것입니다. 하도 많이 죄를 지어서 감각조차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성도가 어떤 사람인가? 교회는 어떤 것인가? 이방인들과 역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탐내고 남까지 해치고자 하는 그 욕심을 버리고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방탕하고 악한 것들을 즐기지 끊어내는 것이고 더 이상 나를 거기에 던져서 더 타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의로운 태도와 말과 생활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무감각해지고 잔인하고 냉정한 마음을 돌이켜서 깨어있고 따뜻하고 배려있는 마음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성도가 걸어가야 하는 역행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자리에 세우시기 위해서 얼마나 은혜와 능력을 베푸셨는지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의 뜨거운 사랑을 날로 깊이 배워 가기를 원하고,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더 깊은 관계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 일을 통하여서 나의 생각이 변하고 세상의 역행자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여전히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옛날의 나의 정체성과 습관을 벗어 던지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자아와 새로운 태도와 행동을 날마다 힘써 추구하며 전진하시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하여 베푸신 놀라운 사랑과 능력과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의 옛 자아와 옛 태도와 습관과 악행들을 버리게 하시고, 오늘 하루 동안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을 거스르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정체성과 행동으로 살아가도록 은혜를 더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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