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반가운 분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2초 정도 대답을 망설였습니다. 마음에 많은 생각이 있지만 풀어서 이야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잘 지내고 있다”는 의례적인 하지만 최선의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목회자를 한마디로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마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저에게 물어본다면 저는 “안부를 묻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전도사로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부터 그랬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시는 분이든 그렇지 못하던 분이든, 만나면 그리고 전화를 하면 안부를 묻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대화를 풀어갑니다.
가장 어려운 경우는, “단답형”으로 끝나는 경우입니다. 아무리 제가 대화를 더 나누고 싶어도, 그냥 "별일 없다" 라고 말하는 분에게 더 가가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사실 속은 상합니다. 짝사랑처럼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냥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돌이키는 마음은 무겁습니다. 많이 노력하지만 단답형의 대답을 다섯번 정도 이상을 들으면 현실적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다른 곳을 향해야 할 때입니다. 여전히 저에게는 보살펴야할 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수월한 혹은 행복한 경우는, 본인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하시는 경우입니다. 뭔가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본인의 현재의 상황을 말씀해주시는 경우입니다. 목회자는 “안부를 물을 뿐 아니라 그것을 듣는 사람”입니다. 주의 깊게 듣고, 최선을 다해서 성의 있게 저 역시 반응하려고 노력합니다. 저의 가족의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저 역시, 조금은 당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인의 이야기를 하신 이후에 이어서 “목사님은 어떻게 지내세요?” 라고 성도님께서 묻는 경우입니다. 평균적인 횟수로 보면 성도님에게 스무번 안부를 물을 때에 한번 정도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약간 붉어집니다. 사실 마음으로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현실적으로 접어야 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목회자도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잊고 살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또 안부를 물어보실 때에,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사함을 느낍니다.
왜 제가 당황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참을 고민해서 답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마음에 있는 “진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 본 경험이 혹은 기회가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아내에게는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저의 삶의 이야기의 일부분을 누군가에게 이야기 해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사실 저의 이야기를 말하는 법을 거의 잊고 살아온 듯합니다. 저의 삶의 전체 맥락이, 주로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사람이지 안부를 묻는 대상이 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용하지 않는 부분이라 퇴화된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심지어 요즘에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라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
최근에 제가 한가지 깨달은 것은, 저에게 있어서 “일상의 대화”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지 혹은 최근에 와서 그런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상당히 과묵한 사람이 되었고, 저의 말을 하기 보다는 주로 듣는 사람이 되었고,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뭐 말을 좀 줄여서 사는 것도 괜찮지 않냐" 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언어를 통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핵심적인 목회의 일이기 때문에, 저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도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리고 앞으로의 저의 목회와 삶의 방향을 가늠해 보면서, 요 며칠은 아내와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제 자신이 저를 현상적으로 관찰 해 볼 때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저는 "대화를 꽤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내와 대화할 때에 최소 한두시간 정도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최근에 심방한 분들도 두시간 이상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내용들은 매우 의미가 있었고 또 저의 마음을 고양시키는 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어를 사용하는데 필요한 인지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다만 제가 어려운 것은, “일상의 대화” 입니다. 일상이란 무엇일까요? 언뜻 떠오르는 것은, 가족, 차, 날씨, 집, 재산, 스트레스, 옷, 가구, 인테리어, 컨디션 정도 인 듯 합니다. 그런데 막상 글로 적어 놓고 보니, 저는 무엇이 일상인지조차 감을 잡지 못하겠군요. 어쩌면 일상이라는 것은, 누구와도 쉽게 나눌 수 있는 주제 혹은 영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크게 깊이 들어가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스몰톡입니다.
그런데 제 머리 속에는, 일상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어려운 영역들로 꽉 차 있습니다. 때론 심장이 너무 고동을쳐서 버겁다고 느낍니다. 비전, 삶의 변화, 성도의 성숙, 성경 교육, 북클럽, 독서 성경 묵상, 자기 계발, 생과 사, 십자가, 진실한 인간 관계 이런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저로 부터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저의 존재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보편적으로는 일상이라고 누군가에게 선뜻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에도, 저는 너무 진지합니다. 그러다보니 저의 진지함이 사람들을 지나치게 불편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방이 준비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제가 타이밍에 못 맞추고 쓸데 없이 진지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지 결과는 "어색함"입니다.
일상의 대화는 쉽지 않은데, 오히려 상대방에게 이렇게 저렇게 자꾸 질문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저는 질문을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 그럴까? 그것도 돌아 보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북클럽의 셋팅이 몸에 배여있습니다. 북클럽은 참여하는 분의 자기 표현속에서 자아의 성찰과 적용이 중요하게 일어납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있어도, 상대방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지금까지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냉정하게 돌이켜보니, 어쩌면 상대방은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데, 그것을 배려라고 생각하며 착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북클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10년에 가까운 저의 학문적인 고민과 실천은 저를 이런 사람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저는 저의 소신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을 한번 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고 혹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될만한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항상 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몇번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저의 스스로의 확신 때문에 제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경우입니다. 그래서 제 자신을 더 조심하고 절제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방적인 명령의 맥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저를 참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대화를 주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최대한 더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제 스스로에게 더 중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답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일상의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볍게 날씨 정도의 대화만 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여전히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오랜 대화 끝에 아내의 조언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정도로만, 상대방이 사용하는 주제 정도에 대해서만 대화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주제넘는 혹은 쓸데 없이 질문하느니 그냥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분위기를 적당히 맞추되 일상의 대화 딱 거기까지라면, 그것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대화가 좀 더 진지하게 풀릴 수도 있겠지만, 무리하여서 거기로 끌고 가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보다 훨씬 소극적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좀 더 보편적인 삶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자신을 보면, 여전히 많이 편향되고 또 그릇이 작습니다. 언제쯤 좋은 목회자로, 일상의 대화조차 자유로운 사람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40대를 지나면 그정도의 연륜과 깊이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의 아픈 고민이 미래를 향한 작은 초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저의 대화를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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