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나와 가족들이 경험한 아픔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한 주목할 부분은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의 태도입니다. 성경은 세겜이 디나에게 감정적으로 깊이 빠졌고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겜의 입장에서는, 디나를 강간한 것이 자신의 사랑의 표현이었고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과 디나의 오빠들에게는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야곱의 가족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디나를 더럽힌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질 수 없는 명백한 악이며 범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백성이 가족 있는 그 기준과,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명백하게 달랐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여"라는 단어는, 창세기 2장 24절에서 그의 아내와 "합하여"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참 육체적 관계를 포함한 사랑이라는 것은 결혼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의 이방인들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무조건 욕심을 채우고 보는 악한 이들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끔찍한 일을 딸이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극히 수동적으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크게 분노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하여서 정식으로 결혼하고 그 땅에 함께 거하면서 자신들과 경제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이득을 얻으라고 제안합니다.
야곱은 뒤로 물러나있지만,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을 응대합니다. 할례를 받아야만 누이를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몰과 세겜과 그 성읍의 사람들은 이제 드디어 야곱 가족들과 한 공동체가 되고 자신들이 큰 유익을 얻을 것을 예상하며 할례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두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몰래 성읍을 기습하여 하몰과 세겜을 포함해서 모든 남자를 죽입니다. 그리고 잡혀 있던 디나를 되찾아옵니다. 그리고 나머지 나들들이 그 성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노략합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노략하였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디나를 되찾아오는 것으로 혹은 재물을 적당히 가져오는 것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반드시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고 또 모든 것들을 노략해야만 했을까요?
물론 신명기 20장 14절 말씀에 적을 노략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말씀이 존재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 맥락상 어떤 성읍을 공격하기 이전에 먼저 화평을 선언할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에 오늘의 사건과는 컨텍스트가 많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저의 관점에서는 이 사건은 쉽게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모든 사건을 알게 된 야곱은 오히려 화를 냅니다. 야곱은 이 일로 인해서, 자신의 죽고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안위와 가족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누이의 명예가 가장 중요하다고 항변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행동을 쉽게 판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과연 가족이 이런 일을 당했을 때에 이성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저는 34장에서는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부분을 좀 더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의 차이입니다.
세상은 "사랑"이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모든 도덕적인 선을 넘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악을 악이라고 부르며 더러운 것을 더러운 것이라 부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에 대하여 의심하게 하며, 성경의 말씀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장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행동의 모든 기준들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혹시라도,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한 악한 세상의 기준과 더러운 것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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