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사람들은 성경에서 표현하는 합환채가 인간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에 임신을 유도한다고 믿었다고 스터디 바이블은 설명합니다. 레아이든 라헬이든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서 인간의 지혜를 따라서 어떻게든 자녀를 낳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고, 또 라헬의 소원을 들으셨고 그녀들의 태를 여셨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아마도 야곱의 가정은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26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야곱을 시기했던 그 감정이, 30장에서 레아가 라헬을 시기하는 단어로 그대로 사용됩니다. 라헬이 언니를 시기하여서 자기가 자식을 낳게 하라고 야곱에게 억지를 부리자 야곱은 성을 냅니다. 넷 바이블은 "the anger of Jacob was hot" 이라고 번역하면서 야곱의 화를 그대로 표현합니다.
이런 와중에 주시는 넘치는 자녀들을, 일반적인 복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들이 순수하게 좋은 일들의 모습으로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고통 중에 선한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자녀들의 복 뿐만 아니라 그는 큰 부를 얻게 됩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이제는 떠나고 싶다고 어려운 이야기를 꺼냅니다. 라반은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이지만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라반이 야곱의 성실함과 그를 통해 오는 축복을 인정하면서도 그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의 성실함과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보여주면 세상이 감탄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억울한 경우입니다. 성실함과 탁월함이 반드시 형통함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이 무늬 있는 양과 염소를 자신의 품삮으로 정하겠다고 제안합니다. "바로 그날" 야곱은 그런 무늬가 있는 가축을 자신의 아들들에게 빼돌립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야곱을 부려 먹었지만 그는 여전히 구두쇠일 뿐입니다. 악덕 고용주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 당시의 문화적인 믿음에 따라서, 야곱은 동물들이 짝짓기를 할 때에 얼굴덜룩한 가지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무늬를 가진 가축들이 태어납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이것이 유전적 조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이며 기적임을 설명합니다. 야곱은 결국 부자가 됩니다.
야곱은 이제 속이는 자가 아니라 속임을 당하는 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였고 그것은 라반조차 인정하였습니다. 야곱은 진실한 청지기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야곱은 부자가 됩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자기 자신의 탁월한 지혜에 스스로 탄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적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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