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하란에 도착하고 라헬과 라반을 만나는 장면은 너무나 극적입니다. 라헬은 야곱이 누구인가를 알고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라반은 야곱을 만나기 위해서 다시 달려옵니다. 야곱은 감정이 복받쳐서 크게 웁니다.
처음부터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 칠년을 일하기로 약속합니다. 그는 결혼 지참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으로 그것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라반은 자신의 조카에게 받아낼 것은 반드시 받아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반은 보통의 고용주를 뛰어넘습니다. 야곱이 탐이 난 그는 그를 더 부려먹기로 작정하고 대 사기극을 준비합니다. 마치 리브가가 야곱을 이용했던 것 처럼, 라반은 자신의 딸 레아를 이용해서 야곱을 속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속였던 것 처럼 동일한 모습으로 라반에게 속아 넘어 갑니다. 그리고 꼼짝 없이 칠년을 더 일하기로 약속합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무르는 야곱이지만, 마치 야곱의 원래 가족이 그대로 옮겨온 것 같습니다. 사는 곳은 다르지만, 사는 방식은 동일합니다. 속고 속이는, 빼앗고 더 빼앗는 모습입니다. 야곱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고 있고 그의 삶은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성경은 노골적으로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받기를 너무나 원하지만 그러나 야곱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태를 여십니다. 야곱이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레아를 사랑하십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백성을 번성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는 계속 됩니다. 레아는 아들들을 연속해서 낳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조상인 유다를 낳습니다. 레아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주님을 드러내며 찬양한 사람이 됩니다. 거짓이 난무하는 가운데, 혼란스러운 가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피어나며 주님을 향한 찬양이 울려퍼집니다.
스터디 바이블은 야곱이 "성경적인 보복(the biblical principle of retribution)"을 경험한다고 해석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표현이 옳은 표현인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성경을 조금만 살펴보더라도 인과 응보로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제대로 보복하셔야 했다면, 아담과 하와로서 인간의 역사는 끝이 나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그분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 가십니다. 한편으로는 그가 저질렀던 거짓과 사기를 거의 동일한 모습대로 당하게 하십니다. 때론 그 모습이 인간적인 눈으로는 보복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거짓을 뛰어넘으며, 그분의 계획과 열심은, 인간의 혼란과 좌절을 넘어섭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진 가장 큰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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