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노인이 된 아브라함이, 뛰어다니면서 정성을 다해서 손님을 대접합니다. 귀한 고기와 풍성한 밀가루를 동원해서 친절을 배풉니다. 저는 풍성한 친절이야 말로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바베트의 만찬" 이야기를 통해 풍성함을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점점 구체화되어서 시기까지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사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터트리고 맙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자신의 현실을 끝까지 쳐다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현재의 모습과 상황이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계속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는 어려운 일이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라에게 화 내지 않으시는 것이 너무 인상적입니다. 마치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나의 상황과 나의 모습만을 쳐다볼 때에, 우리는 여호와의 일하심에 대한 감각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시지 않고 우리를 설득하시며 여호와 자신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저는 늘 창세기 18장의 맥락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가 연결되는 것이 문맥적으로 매끄럽지 않다고 느낍니다. 특히, 여전히 말씀에 대해서 확고하지 못한 사라의 웃음 뒤에 연결되는,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그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대조가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 동참시키십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브라함이 그 심판의 과정 속에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심판의 이야기를 듣고, 아브라함이 얼마나 빠르게 계산하는지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든 소돔과 고모라를 보전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여호와 하나님 역시 어떻게든 소돔과 고모라를 보전하고 싶어 하십니다. 의인이 열명만 있어도 남겨 두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과 진노의 하나님이라는 보통 사람들의 편견이 언제나 아쉽습니다.
큰 도시에 단 열명의 의인이라는 비율이 참으로 낯설게 느껴집니다. 상상해 보았습니다. 설령 의인 열명이 남아 있더라도 핍박받고 비웃음 당하며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보다는 마지 못해서 거기서 견디고 있을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당장 그 도시의 사람들은, 그 열명에 대해서 전혀 눈여겨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의인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터디 바이블은 18장의 이해를 마무리하면서, 로마서 5장에 등장하는, 한 의인으로 인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연결합니다.
행위적으로 그리고 내면적으로 단 하나의 흠도 없이 완벽한 온전한 의인은, 역사 가운데 단 한명만 존재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의 희생과 성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온 세상이 구원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덧 입게 됩니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자비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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