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목사님의 출타로, 주일 설교를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준비하게 되어서 두주간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고, 평소에 성경 통독을 하다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본문인 요한복음 9장 1-12절을 설교 본문으로 정하였습니다.
이번 설교도 동일하게, 충분한 개인 묵상과 스터디 바이블들, 그리고 필요한 주석들을 충분히 참고하였습니다. 하지만 평소때 보다 훨씬 더 개인 묵상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계속적으로 퓨전 설교를 연습하고 적용하면서, 목회적으로 굉장히 좋은 설교의 틀이다 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첫째로, 퓨전 설교는 성도님들에게 본문의 개요를 먼저 설명하여서 이해를 돕습니다. 개요를 먼저 설명하기 때문에, 전체 본문의 구조를 머리 속에 담고 적용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설교의 경우 본문 자체가 9장 전체를 다루어야했기 때문에, 굉장히 압축적인 논리 전개가 필요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퓨전 설교의 틀 안에서 개요를 먼저 다루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내용을 압축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일반적인 주해 설교였다면, 설교의 처음부터 쉬지 않고 9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다루다가 저도 성도님들도 지쳐버렸을 것입니다. 아마 퓨전 설교의 틀을 충분히 숙지하지 않았다면, 9장 전체를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할 생각 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퓨전 설교는 목회적인 강조점을 충분히 다룰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을 충분히 주해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설교의 기본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특정한 청중을 대상으로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청중에게 필요할 만한 혹은 목회자의 입장에서 본인이 섬기는 지역 교회의 성도님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판단할 경우에, 단순히 주해를 일렬로 늘어 놓는 설교 구조를 넘어서서, 특별한 강조점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면에서, 퓨전 설교의 구조는 "주해적이면서 동시에 주제적"입니다.
이번 설교의 첫번째 적용 파트는 저에게 매우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번째 적용은, "논쟁할 것인가? 아니면 자비를 베풀 것인가"라는 적용이었습니다.
물론 주해적으로만 보면, 사실 이 부분은 그렇게 큰 강조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도님들을 공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논쟁만 하는 것에 치우친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그 부분이 공동체 가운데 분명한 적용점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감하게 첫번째 적용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적용에서는 Exegetical Summary와 칼빈 주석, 그리고 카슨의 주석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특히 틴데일 요한복음 주석이 얇은 주석임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명쾌하고 매우 탁월하다고 느꼈습니다. 고신 총회 설립 60주년 기념 성경 주석 사도행전편은, 생각보다 논점들을 피해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자에게는 죄송하지만, 많이 아쉬웠습니다.
칼빈의 설명을 보니, 성경 전체에서 죄와 고통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한 사람을 정죄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칼빈은 이 부분에 있어서 너무나 목회적이면서 또 냉철하면서도 따뜻하게 풀어내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깊은 존경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QUESTION—Did
this man and his parents ever sin?
Be careful that the
translation does not indicate that either of these never sinned. Jesus was
talking specifically about what sin caused this man’s blindness. It could be
made clear by translating something like, ‘His sin did not cause him to be
blind nor did his parents’ sin cause him to be blind’ [TH, TRT].
Ronald Trail, An Exegetical Summary of John 1–9, Exegetical Summaries (Dallas, TX: SIL International, 2013), 480.
3. Neither did this man sin, nor his parents. Christ does not absolutely say that the blind man, and his parents, were free from all blame; but he declares that we ought not to seek the cause of the blindness in sin. And this is what I have already said, that God has sometimes another object in view than to punish the sins of men, when he sends afflictions to them. Consequently, when the causes of afflictions are concealed, we ought to restrain curiosity, that we may neither dishonour God nor be malicious towards our brethren. Wherefore, Christ assigns another reason. This man, he says, was born blind,—
John Calvin and William Pringle,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Bellingham, WA: Logos Bible Software, 2010), 367.
그리고 결론을 맺으면서 인용했던 브라이언 스턴버그의 예화는 Jon Courson의 커멘터리에서 보고 인용하였습니다.
Maybe
you’ve heard his story: During the ’68—’69 season, Brian Sternberg was at the
West Coast Relays in Fresno, California, pumped, primed, and poised to break
the world record in the pole-vault. The day before the meet, he was doing what
pole-vaulters often do—working out on the trampoline. But following one
particular double flip, he hit the metal railing and broke his neck. It was a
tragedy and a shock to the track and field world when Sternberg was told not
only that he would never vault again, but that he would be a quadriplegic for
the rest of his life.
Jon Courson, Jon Courson’s Application Commentary (Nashville, TN: Thomas Nelson, 2003), 514.
세번의 연속되는 주일 설교를 감당하면서, 많은 부분을 배우고 또 감사했습니다. 자랑이 되기 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말하지는 않지만, 너무 열심히 준비한 설교였고, 또 너무 소중한 설교였습니다. 내용적으로도 그리고 구조적으로 만족스러웠고, 또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 가운데 설교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하고 읽은 모든 책들의 정수가, 이 설교 한편 안에 모두 녹아 들어갔습니다.
너무 설교에 집중해서, 마치 제 자신의 자아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느낌도 강하게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스피커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어렴 풋이 깨달아 아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음 속에 준비하던 만큼 충분히 강조할 부분들을 강조하였습니다. 체력적으로 너무 지쳐서 실수가 있었지만, 끝까지 원고를 놓치지 않고 설교했고, 마지막 설교에서 조차 다섯번 정도 밖에 발음에서 실수가 없었습니다.
설교 원고를 준비하면서 여러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용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실제로 하면서 울지 않기 위해서 많이 노력했습니다. 영상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예수 이름 높이세" 찬양을 2절까지 설교 후에 찬양하였습니다. 사실 목이 다 상해버렸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찬양이 바로 성도이자 목회자인 저의 신앙 고백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결국, 성도님들에게 하기 전에 설교자 본인에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교를 준비하게 하시고 마무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며 설교하는 자리에 세워주시는 측량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겪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저의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게 하시는 주님의 신비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님을 경배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