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7일 일요일

루저(Loser), 희망을 노래하다 / I Look to You - Whitney Houston



첫학기가 시작되고, 클래스의 학생들에게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마음에 드는 논문을 찾아서, 그 논문에서 논문 주제문 열개를 찾아오세요." "음, 별로 어렵지 않은 걸?" 의기 양양하게 주제문을 찾아서 제출했습니다. 결과는 교수님으로부터 그 중에 일곱개에 물음표(?) "진부, 이것들은 주제문이 아닙니다."

약간 당황했습니다. "음 그럴 수도 있지." 다시 찾아오라는 숙제에 더욱 성의를 다해서 일곱개를 찾아갔습니다. "ㅋㅋ 이제 제대로 했을꺼야." 수업 중 쉬는 시간에 교수님이 저를 부릅니다. 일대일로 이야기하는데 교수님 표정이 조금 심각합니다. "진부, 네가 제출한 것 중에 다섯 개가 여전히 아닌걸?"

식은 땀이 났습니다. 부끄러운 것도, 당황스러운 것도 둘째였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었나?"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학문의 영역에 대한 좌절감, 이것이 칼빈에서의 저의 시작이었습니다.

좌충우돌, 첫 학기는 논문을 쓰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클래스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지나갈 줄 몰랐습니다. 주제를 잡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학자들의 의견으로 힘을 실어서 저의 의견을 개진한다는 것은, 아..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학기의 삼주 정도가 지나, 드디어 주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교수님의 격려를 받았습니다. "진부, 너는 드디어 너의 글을 쓸 수 있는 주제를 제대로 잡았고, 그런 면에서 큰 진보를 이루었다" 마음에 날개를 단 것 처럼 기뻤습니다.

저의 한학기 동안의 주제는 "교리 교육" 이었습니다. 교리 교육을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리 교육 교제는, 당연스럽게 암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금방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대부분의 교리는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왜일까요? 무슨 의도가 있을까요? 특별히 교리 문답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루터는, 왜 자신의 소요리 문답을 그러한 형식으로 만들었을까요?

도서관의 오래된 책 냄새가 행복했습니다. 필요한 책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비록 독일어는 알지 못하지만, 영어로 번역된 루터의 글들을 읽으며, 그의 달콤하고도 힘 있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적어도 교회사 가운데, 성경의 진리를, 단순한 암기가 아닌 이해라는 목적을 가지고 교육하는 흐름을 발견했고, 루터 역시 그러한 줄기 안에서 자신의 소요리 문답을 작성했다는, 저만의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이곳의 점수를 채점하는 기준은 아주 세분화 되어 있고 철저합니다. Focus, Argument, Clarity, Engagement of Sources, Style 학기가 끝나고 마지막 페이퍼를 돌려 받는 날, 저의 페이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진부, 너의 주제는 Th.M. 수준에서는 조금 쉽다고 느껴지고, 좀더 확고한 점수를 위해서는 좀더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했다."

교수님의 평가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저의 출발점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헤매고, 당혹스러울 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아주 냉정하게 제 점수와 각 영역별의 교수님의 평가를 분석해 보면, 저는 평균은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탁월함에는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힘에 진하게 공부하고 나서, 결과물을 받아들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특별히, "교육" 그리고 "배움"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곳의 과정의 표면적인 목표는, 그 분야에 학자를 배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생"이 바로 "교육의 과정"이며 "성장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궁극적으로 경험하고 발견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진정한 교육"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해할 때에 이곳의 과정의 본질은 결국, "논리적인 인간"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세상을 분별하고, 그 말씀 가운데 자신의 의견을 확립하고 분명하게 인생을 전진할 수 있는 것" 제가 이해할 때에 이것이, 이곳의 교육의 내면적인 목표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곳의 공부는, 표면적으로는 학자를 만드는 과정일 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내면과 궁극적인 목표는, 훌륭한 인간혹은 성도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을 기르는 과정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학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과정을 포기해야 할까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과정을 통해서 혹 표면적인 목표를 이룰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내면적인 진실한 목표를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니다. 저는 매 순간 "배울" 것이며 "성장"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순간 순간 "교육의 참된 목적"을 잊어버립니다. 때론 본말이 전도되어서, 학위가 그 목표가 되어버리기도 하고, 혹은 점수가 목표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목표의 표면은 될 수 있겠지만, 목표의 본질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학위나 점수가 목표가 되어버리면, 공부라는 것이 혹은 교육이라는 것이, 결국 학자가 되기 위한, 혹은 아주 머리가 뛰어난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전유물" 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저의 가장 큰 우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공부에 대한 선입견 혹은 포기" 입니다. 공부란, 원래부터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과정을 통과해서 학자가 되기 위한 것이고, 교육이란, 평범한 사람들은 그 학자를 우러러보며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 받아들이는 상황입니다. 그것은 결국 수동적인 인생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어떠한 발전도 성숙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에 의해서 조정당할 위험에 쉽게 노출되고,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해 고통 받을 뿐입니다.

어쩌면, 이미 뛰어난 사람이 뛰어난 글을 쓰고, 똑똑한 사람이 공부를 잘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타고난 머리를 가져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학원에 불러 놓고서는, 우리 학원 덕분에 훌륭한 대학에 갔다고 현수막을 거는 것은, 사실상 모두를 기만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나 그런 결과를 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면에서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똑똑한 사람이 좋은 학교에 입학해서 학자가 되는 것은, 일반인들의 인생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물론 그들의 역량이 넓은 의미에서 일반인들의 삶에 좋은 영향력을 주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도 없이, 똑똑한 사람이 소정의 과정을 거쳐 학자가 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그들만의 일"로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배움이 성숙이 그리고 교육이, 상위 몇프로 만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 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진정한 교육은, "여러모로 부족한 그 어떤 사람이, 성숙해 가는 것 그 자체" 라고 생각합니다. 탁월한 사람이 성적을 잘 받는 것을 목표로 삼고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잘하는 특정인이 정상에 올라가 우매한 모두를 다스리는 형태가 아니라, 부족하고 가망이 없어보이는 사람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숙해져가는, 그래서 일반인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가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제가 추구하는 것은 좀더 보편적인 교육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두려운 것은, 교회 역시 때로는 "엘리트 교육" 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이들에게 집중하여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족한 이들이 교육을 통해서 희망을 발견한다면, 루저가 교육을 통해서 다시 한번 자신의 인생을 노래할 수 있다면, 사실 그것이야 말로 정말 어렵고, 또 그것이야 말로 가장 갚지고 숭고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의 유학 생활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이곳에서 너무나 뛰어난 분들을 많이 봅니다. 제가 그분들보다 지적으로, 통찰력으로 한참 부족하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저의 길을 묵묵히 가겠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저의 과정은, 지식과 교육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이들, 평범한 사람들 혹은 루저라고 불리는 이들을 위한, 정말 부족한 저의 작은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한학기를 이겨냈습니다. 다음 학기는 어떨까요? 다음 학기 실라버스를 확인하니, 첫 학기는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두번째 학기 시작을 며칠 앞두고, 큰 긴장감과 그리고 동시에 설래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선하게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루저의 노래" 를 부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이든이를 잘 보살피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목적이 제 인생과 저희 가정 안에서 충만히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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