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9일 화요일

꿈을 가슴에 품고 - 사랑하는 요한이에게 / DreamMaker - Gentle Rain



요한아, 너의 글이 나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그리고 너의 짧지만, 또 짧지 않은 글에 대해서 며칠 동안 곰곰히 생각했구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 또 목회자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으로, 교사로, 우리는 정말 동일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처음에 초등부 교사를 시작할 때가 생각난다. 스무살 바로 그 때, 눈이 반짝이는, 그리고 굉장히 수다스러운 아이들 다섯명이 내 앞에 앉아 있었고, 나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지. 아이들은 늘 모든 것이 궁금했고, 모든 것을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했어. 그 아이들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어. 그런데 돌이켜 보면 참 그 아이들에게 해 준 것이 없는 것 같구나. 

중등부 교사 때는 더 쉽지 않았지. 아이들은 말이 없었고 그저 바닥을 바라보기만 했고, 나는 뭔가 가르칠 것은 많았지만 사실 쉽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은 언제나 무엇인가 조금은 나에게 이야기하길 원했고, 자신들의 고민을 알아주길 바랬고, 지금도 내 마음에 남은 것은, 그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그 순간들이 행복했다는 것, 비록 지금은 아무도 연락이 닿지 않지만, 그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구나. 

네가 그런 것 처럼, 나 역시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다. 교육의 본질은 뭘까? 사실 나는 교육학 이론이나, 사상이나, 점수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눈여겨 보고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답이 아님을 알고 있지. 물론 그런 것은 중요하겠지, 그러나 너와 나의 인생에, 그리고 우리가 다루고 있는 모든 이들의 인생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도전하고 다루는 목표와 꿈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질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그리고 그것이 정말 우리의 삶에 적실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의 결론은 "질문" 이야. 우리는 질문해야 해. 그리고 질문을 받아야 해. 물론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질문은 아닌걸 너도 알꺼야.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함으로써 듣는 이가 무지를 깨닫게 되는 것을 바랬고, 그 안에서 답을 찾아가기를 바랬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우리 안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언제나 답은 하늘로 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희미한 답의 조각들만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을 확증하고 수정하는 것은 결국 말씀, 하나님의 뜻이지. 

그런면에서 나는 교리 교육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초보적인 배움의 단계에서는, 언제나 기초적인 지식과 암기가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만약에 암기에만 그친다면, 그리고 그것을 점수화 시키고 요점을 정리하고 하는 과정에서만 그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절반의 과정만 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도 강력해.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초단위로 변하는 매우 급격하게 변하는 다변화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가지의 교리를 암기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괄호에 정답을 넣었다고 그것으로 교육이 끝난 것일까? 당연히 아닐꺼야. 왜냐하면, 모든 이들은 결국 "삶의 실제" 앞에서 그 누구도 함부로 그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다양성 앞에서, 그 교리를 혹은 진리를 펼쳐야 하기 때문이지. 

요한아, 나는 이것을 단순히 "적용" 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아. 왜냐하면 그 단어는 우리에게 너무나 협소하게 들리기 때문이야. 말씀과 적용 이라는 두가지 카테고리는 마치 신앙 지적인 내용과 체계 자체와, 그것을 우리 삶에 펼쳐내는 것이, 서로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착각하게 만들지. 지식적인 배움 혹은 암기 습득 을 통해서 배운 것과 삶 자체를 괴리시켜버릴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 

우리가 칭의에 대해서 배울 때,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라는 것을 배울 때에, 하늘 아버지라는 것에 대해서 배울 때에, 그것이 진실로 우리의 내면과, 삶의 순간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닐꺼라고 생각해. 

함께 읽었던 얀시가 좋았던 것은, 그는 삶 속에서 진리를 고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에게 교리는 진리이고, 진리는 삶 속에서 확증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겠지. 아마 얀시 책 처음에 나오는 내용이지? 한 몸을 파는 여인이, 교회에 가봐야 수치심만 더해지는데 거기 가서 뭐하겠냐는 내용..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의 용서와 칭의가, 그리고 참된 교회의 역할이, 이 여인의 삶과 말 속에서 의미를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저 우리가 괄호 넣기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존귀함을 다루는 것임을, 우리는 그때서야 이해하게 되는 것 같구나. 

네가 이야기한 것처럼, 바른 지식을 전수하고, 그 지식에 기반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 그것은 교회 교육의 아주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해. 나는 거기에다가 살을 덧붙여서, 결국 "한사람의 개인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 가운데 펼칠 수 있는 통찰력과 지혜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동력과 근원을 만들어주는 것" 이 교회 교육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싶어. 

그것은 한 개인의 관점에서는, 교육학적으로는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개체가 되도록 해 주는 것이겠지. 말씀을 스스로 이해하고 발견하고, 그것이 자신의 삶 속에서 펼쳐질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을 기독교 세계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고, 교리의 삶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겠지. 중요한 것은, 언어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것의 실체 자체라고 생각해. 우리는 언제나 충분히 말씀을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해. 하나님의 진리가 가슴에 심기고, 그리고 그것 앞에 자신의 생각, 고민, 육체, 정신 그 모든 것이 평가 받아야만 하지. 

그리고 또한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바로 그런 통찰과 지혜가 전수되어야 할꺼야. 그것은 사실상 가족을 통해서 전수된다고 생각해. 마음 아프지만, 지금의 교회는 가족이 점점 해체되고 있지. 전문화된 교육 부서가 부모의 권위를 위임받고, 그들에 의해서 종교 교육이 행해지는 현실이지.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교회에 명령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야. 우리의 지혜의 전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통찰과 순종, 인생에 대한 펼쳐냄은 가정을 통해서 전수되고. 그리고 그 정점에는 아버지가 있지. 

내일 수업 시간에 볼 다큐멘터리를 오늘 미리 한번 보았어. 단순히 영어가 부족해서 한번 미리 보고 갈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마음에 큰 은혜가 되었구나. 인본주의 교육학으로 망가진 교회 교육, 그리고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한 사람들의 격려와 도전을 보았어. 네가 말한대로, 모든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그것에 기반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배워야 할꺼야. 그리고 그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가정" 이야. 

네가 느끼는, 하나님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 그리고 내 자신이 그 앞에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대화를 통해서 나눠진다고 생각해.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이 필요하겠지. 나는 혹시 선생님들이 결석하실 때, 그 반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한가지 질문만 했어. "오늘 목사님 설교 듣고 무슨 생각했니?" 놀라운 것은, 아이들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이 있고, 그 중에서는 아주 탁월한 것도 있다는 것이지. 나는 약간의 교정과 그리고 많은 격려, 그리고 하나님께 그들을 의탁하는 기도를 아이들과 함께 하나님께 드렸어. 그때 아이들의 얼굴이 밝았던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언젠가 성경 일독학교 강의를 하고 났을 때에, 어떤 성도님이 격려해 주셨어. 목사님이 강의하시면 하나도 모르는 저도 알 것 같아요. 나는 다른 어떤 말보다 그 말이 너무 기뻤어. 세계 최고의 강사가 되지 않아도 좋아. 가장 지혜가 없는 이들이 지혜를 얻는다면, 그리고 그 지혜를 얻는 길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길에 함께 설 수 있다면, 나는 언제나 그것으로 족해. 

사람은 언제나 교만해지지. 그리고 그 교만한 입장에서 책을 쓰는 것을 보게 되. 누구나 자신의 책에 "고대 근동" 이라는 외계어를 쓰지만, 나는 맥그라스의 책을 보기 전까지 정확히 고대 근동이 어디인지 몰랐어. 그는 친절해. 그는 자신이 그 단어를 인용하면서, 나에게 고대 근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지. 천재로 추앙 받는 맥그라스이지만, 그야 말로 약자를 배려하는 진정한 지식인이 아닐까? 

나의 꿈은 너무나 단순해.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고 싶어. 성도들이 지혜를 가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험한 길을 나누며 함께 가고 싶어. 단순히 암기와 일방적인 배움과 납득 되지 않는 가르침에 대한 강요로 지친 이들에게, 공감과 질문과 고민이 있는 목회를 하고 싶어. 그리고 나 자신 뿐 아니라 함께 가는 이들도, 그 고민 끝에 하나님 앞에 순복하고 싶어. 하나님 당신만이, 우리의 전부이며 목적이며 진정한 아버지시라고..

가족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어. 가족 간에도 화목하지 못하고, 시기와 분쟁과 분노와 인내하지 못함이 가득한데, 그런 가족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교회 안에서 부서를 나누고, 망가진 부모님들이 다시 주일 학교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이 그들에게 위탁되는 현실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어. 정말 이것처럼 악순환은 없을꺼야. 세상은 바쁘고 힘들지만, 부모들은 삶의 급박한 현장에, 생존을 향해 몰리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책임과 특권은 여전해. 그것은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이야. 나는 그런면에서, 이 시대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하기 위해서는, 장년 교육이 가장 중요하고 또 절실하다고 생각해. 결국 아버지 어머니를 통해서 신앙은 전수되고, 또한 그들을 통해서 주일 학교 아이들이 신앙을 배우기 때문이야. 

요한아, 나는 이제 아버지가 되었구나. 그 벅참, 감격, 기쁨 그리고 그 막중한 책임감과 무게를 다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나의 아들 이든이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경험할 꺼야. 나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어떤 태도를 갖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고민하는지 배울 꺼야. 그래서 나는 너무나 긴장되고, 또 동시에 가슴이 너무 벅차구나. 

세상에는, 하나님 외에는 완전함이 없구나.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불완전하며 연약하지. 그러나 요한아, 우리 마음에 꿈을 품고 살자. 네가 돌보는 순원이, 성도가,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리가 교리로 머물지 않고, 삶 속에서 드러나기를 바란다. 너의 절망 가운데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한 믿음이 드러나기를 바라고, 너의 죄 가운데 하나님의 칭의를 붙드는 간절함이 드러나길 바란다. 우리가 치열하게 복음의 내용들을 삶 속에 반추하고 그것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어떠한 질문에도 진지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을꺼야. 

무형의 교육이야 말로 가장 어려운 교육이라고 생각해. 그 사람에게 맞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수준높은 교육이지. 나는 오히려 참된 교육자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가장 필요한 말을 가장 적실할 때에 하기 위해서, 우리는 수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한다고 생각해. 

놀랍게도, 무지한 사람일 수록 교만함으로,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서 그 어떤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지. 결국 우리에게는 그들을 지치지 않고 설득하려는 용기와 실력도 필요하겠지. 그렇기 때문에 요한아, 우리를 준비하자. 그 준비는 고민하는 거야. 그리고 그 고민으로 우리의 현실을 사는 거야. 삶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가장 탁월한 책들을 함께 읽자. 그리고 그것으로 고민하고 또 이야기를 나누자. 왜냐하면 결국 지혜는 먼저 배우는 것이고, 그 이후에 나의 것으로 내면화 할 수 있기 때문이야.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내세우거나, 이름을 드러내거나, 혹은 그 어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오직 한가지 이유만으로.. 지금 그리고 또 언제나, 우리를 필요로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그리고 감사하게 미천한 우리를 사용하시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늘 격려하시고 용기 주시기를. 

- 너를 사랑하는 진부 목사가 - 


P.S. 네 글을 보고 함께 읽고 싶은 문단이 몇군데 생각이 났다. 함께 읽고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옮겨볼께. 


- Divided the Movie : a Youth Ministry Documentary Film

http://vimeo.com/26098320


- Torrance, Thomas F. , The school of faith : the catechisms of the Reformed Church. xxxvi

아마도 뉴욕 리디머 처치(Redeemer Church) 팀 캘러(Timothy keller) 목사님이 자신의 글에서 인용한 것을, 너무 마음에 들어서 찾아낸 인용문이야. 

Christianity is above all the question the Truth puts to man at every point in his life, so that it teaches him to ask the right, the true questions about himself, and to form on his lips the questions which the Truth by its own nature puts to him to ask of the Truth itself that is may disclose or reveal itself to him. Now the Catechism is designed to do just this, and it is therefore an invaluable method in instructing the young learner, for it not only trains him to ask the right questions, but trains him to allow himself to be questioned by the Truth, and so to have questions put into his mouth which he could not think up on his own, and which therefore call into question his own preconceptions. In other words it is an event of real impartation of the Truth. 


- 전성수, 부모라면 유대인처럼 하브루타로 교육하라, 77-79.

최근에 구입해서 읽고 있는데, 다루는 주제의 중요성에 비해서 책이 내용이 많이 부족해. ^-^ 그래도 아직 이런 주제에 대해서 이만큼 다룬 책을 본 적이 없어서 나에게 너무 소중한 책이야.

"물고기를 잡아주면 하루를 살 수 있지만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일생을 살 수 있다"는 말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의 격언이다. 이 말은 지식 자체보다 지식을 얻는 방법과, 지식을 창조하고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게 하는 지혜야말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교육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대인은 아이에게 단순한 지식보다 현명한 지혜를 쌓게 하는 데 주력한다. 지혜는 가정에서 부모에 의해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로운 자만이 지식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지혜가 뒤지면 모든 것에서 뒤지며, 지혜가 있는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생각한다. 

사고력을 키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기 나름의 의문을 품는 것이다.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곧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알면 알수록 숱한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지적인 성자은 그런 의문들을 풀기 위해 무수히 질문하고 더 넓고 깊이 사고하는 과정에서 비약적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질문은 인간을 진보시키는 길잡이이자 지성의 출발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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