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9일 화요일

꿈을 가슴에 품고 - 사랑하는 요한이에게 / DreamMaker - Gentle Rain



요한아, 너의 글이 나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그리고 너의 짧지만, 또 짧지 않은 글에 대해서 며칠 동안 곰곰히 생각했구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 또 목회자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으로, 교사로, 우리는 정말 동일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처음에 초등부 교사를 시작할 때가 생각난다. 스무살 바로 그 때, 눈이 반짝이는, 그리고 굉장히 수다스러운 아이들 다섯명이 내 앞에 앉아 있었고, 나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지. 아이들은 늘 모든 것이 궁금했고, 모든 것을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했어. 그 아이들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어. 그런데 돌이켜 보면 참 그 아이들에게 해 준 것이 없는 것 같구나. 

중등부 교사 때는 더 쉽지 않았지. 아이들은 말이 없었고 그저 바닥을 바라보기만 했고, 나는 뭔가 가르칠 것은 많았지만 사실 쉽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은 언제나 무엇인가 조금은 나에게 이야기하길 원했고, 자신들의 고민을 알아주길 바랬고, 지금도 내 마음에 남은 것은, 그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그 순간들이 행복했다는 것, 비록 지금은 아무도 연락이 닿지 않지만, 그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구나. 

네가 그런 것 처럼, 나 역시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다. 교육의 본질은 뭘까? 사실 나는 교육학 이론이나, 사상이나, 점수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눈여겨 보고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답이 아님을 알고 있지. 물론 그런 것은 중요하겠지, 그러나 너와 나의 인생에, 그리고 우리가 다루고 있는 모든 이들의 인생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도전하고 다루는 목표와 꿈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질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그리고 그것이 정말 우리의 삶에 적실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의 결론은 "질문" 이야. 우리는 질문해야 해. 그리고 질문을 받아야 해. 물론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질문은 아닌걸 너도 알꺼야.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함으로써 듣는 이가 무지를 깨닫게 되는 것을 바랬고, 그 안에서 답을 찾아가기를 바랬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우리 안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언제나 답은 하늘로 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희미한 답의 조각들만 가지고 있을 뿐, 그것을 확증하고 수정하는 것은 결국 말씀, 하나님의 뜻이지. 

그런면에서 나는 교리 교육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초보적인 배움의 단계에서는, 언제나 기초적인 지식과 암기가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만약에 암기에만 그친다면, 그리고 그것을 점수화 시키고 요점을 정리하고 하는 과정에서만 그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절반의 과정만 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도 강력해.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초단위로 변하는 매우 급격하게 변하는 다변화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가지의 교리를 암기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괄호에 정답을 넣었다고 그것으로 교육이 끝난 것일까? 당연히 아닐꺼야. 왜냐하면, 모든 이들은 결국 "삶의 실제" 앞에서 그 누구도 함부로 그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다양성 앞에서, 그 교리를 혹은 진리를 펼쳐야 하기 때문이지. 

요한아, 나는 이것을 단순히 "적용" 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아. 왜냐하면 그 단어는 우리에게 너무나 협소하게 들리기 때문이야. 말씀과 적용 이라는 두가지 카테고리는 마치 신앙 지적인 내용과 체계 자체와, 그것을 우리 삶에 펼쳐내는 것이, 서로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착각하게 만들지. 지식적인 배움 혹은 암기 습득 을 통해서 배운 것과 삶 자체를 괴리시켜버릴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 

우리가 칭의에 대해서 배울 때,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라는 것을 배울 때에, 하늘 아버지라는 것에 대해서 배울 때에, 그것이 진실로 우리의 내면과, 삶의 순간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닐꺼라고 생각해. 

함께 읽었던 얀시가 좋았던 것은, 그는 삶 속에서 진리를 고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에게 교리는 진리이고, 진리는 삶 속에서 확증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겠지. 아마 얀시 책 처음에 나오는 내용이지? 한 몸을 파는 여인이, 교회에 가봐야 수치심만 더해지는데 거기 가서 뭐하겠냐는 내용..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의 용서와 칭의가, 그리고 참된 교회의 역할이, 이 여인의 삶과 말 속에서 의미를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저 우리가 괄호 넣기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존귀함을 다루는 것임을, 우리는 그때서야 이해하게 되는 것 같구나. 

네가 이야기한 것처럼, 바른 지식을 전수하고, 그 지식에 기반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 그것은 교회 교육의 아주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해. 나는 거기에다가 살을 덧붙여서, 결국 "한사람의 개인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 가운데 펼칠 수 있는 통찰력과 지혜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동력과 근원을 만들어주는 것" 이 교회 교육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싶어. 

그것은 한 개인의 관점에서는, 교육학적으로는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개체가 되도록 해 주는 것이겠지. 말씀을 스스로 이해하고 발견하고, 그것이 자신의 삶 속에서 펼쳐질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을 기독교 세계관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고, 교리의 삶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겠지. 중요한 것은, 언어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것의 실체 자체라고 생각해. 우리는 언제나 충분히 말씀을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해. 하나님의 진리가 가슴에 심기고, 그리고 그것 앞에 자신의 생각, 고민, 육체, 정신 그 모든 것이 평가 받아야만 하지. 

그리고 또한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바로 그런 통찰과 지혜가 전수되어야 할꺼야. 그것은 사실상 가족을 통해서 전수된다고 생각해. 마음 아프지만, 지금의 교회는 가족이 점점 해체되고 있지. 전문화된 교육 부서가 부모의 권위를 위임받고, 그들에 의해서 종교 교육이 행해지는 현실이지.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교회에 명령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야. 우리의 지혜의 전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통찰과 순종, 인생에 대한 펼쳐냄은 가정을 통해서 전수되고. 그리고 그 정점에는 아버지가 있지. 

내일 수업 시간에 볼 다큐멘터리를 오늘 미리 한번 보았어. 단순히 영어가 부족해서 한번 미리 보고 갈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마음에 큰 은혜가 되었구나. 인본주의 교육학으로 망가진 교회 교육, 그리고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한 사람들의 격려와 도전을 보았어. 네가 말한대로, 모든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그것에 기반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배워야 할꺼야. 그리고 그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가정" 이야. 

네가 느끼는, 하나님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 그리고 내 자신이 그 앞에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대화를 통해서 나눠진다고 생각해.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이 필요하겠지. 나는 혹시 선생님들이 결석하실 때, 그 반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한가지 질문만 했어. "오늘 목사님 설교 듣고 무슨 생각했니?" 놀라운 것은, 아이들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이 있고, 그 중에서는 아주 탁월한 것도 있다는 것이지. 나는 약간의 교정과 그리고 많은 격려, 그리고 하나님께 그들을 의탁하는 기도를 아이들과 함께 하나님께 드렸어. 그때 아이들의 얼굴이 밝았던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언젠가 성경 일독학교 강의를 하고 났을 때에, 어떤 성도님이 격려해 주셨어. 목사님이 강의하시면 하나도 모르는 저도 알 것 같아요. 나는 다른 어떤 말보다 그 말이 너무 기뻤어. 세계 최고의 강사가 되지 않아도 좋아. 가장 지혜가 없는 이들이 지혜를 얻는다면, 그리고 그 지혜를 얻는 길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길에 함께 설 수 있다면, 나는 언제나 그것으로 족해. 

사람은 언제나 교만해지지. 그리고 그 교만한 입장에서 책을 쓰는 것을 보게 되. 누구나 자신의 책에 "고대 근동" 이라는 외계어를 쓰지만, 나는 맥그라스의 책을 보기 전까지 정확히 고대 근동이 어디인지 몰랐어. 그는 친절해. 그는 자신이 그 단어를 인용하면서, 나에게 고대 근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지. 천재로 추앙 받는 맥그라스이지만, 그야 말로 약자를 배려하는 진정한 지식인이 아닐까? 

나의 꿈은 너무나 단순해.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고 싶어. 성도들이 지혜를 가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험한 길을 나누며 함께 가고 싶어. 단순히 암기와 일방적인 배움과 납득 되지 않는 가르침에 대한 강요로 지친 이들에게, 공감과 질문과 고민이 있는 목회를 하고 싶어. 그리고 나 자신 뿐 아니라 함께 가는 이들도, 그 고민 끝에 하나님 앞에 순복하고 싶어. 하나님 당신만이, 우리의 전부이며 목적이며 진정한 아버지시라고..

가족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어. 가족 간에도 화목하지 못하고, 시기와 분쟁과 분노와 인내하지 못함이 가득한데, 그런 가족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교회 안에서 부서를 나누고, 망가진 부모님들이 다시 주일 학교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이 그들에게 위탁되는 현실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어. 정말 이것처럼 악순환은 없을꺼야. 세상은 바쁘고 힘들지만, 부모들은 삶의 급박한 현장에, 생존을 향해 몰리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책임과 특권은 여전해. 그것은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이야. 나는 그런면에서, 이 시대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하기 위해서는, 장년 교육이 가장 중요하고 또 절실하다고 생각해. 결국 아버지 어머니를 통해서 신앙은 전수되고, 또한 그들을 통해서 주일 학교 아이들이 신앙을 배우기 때문이야. 

요한아, 나는 이제 아버지가 되었구나. 그 벅참, 감격, 기쁨 그리고 그 막중한 책임감과 무게를 다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나의 아들 이든이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경험할 꺼야. 나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어떤 태도를 갖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고민하는지 배울 꺼야. 그래서 나는 너무나 긴장되고, 또 동시에 가슴이 너무 벅차구나. 

세상에는, 하나님 외에는 완전함이 없구나.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불완전하며 연약하지. 그러나 요한아, 우리 마음에 꿈을 품고 살자. 네가 돌보는 순원이, 성도가,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리가 교리로 머물지 않고, 삶 속에서 드러나기를 바란다. 너의 절망 가운데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한 믿음이 드러나기를 바라고, 너의 죄 가운데 하나님의 칭의를 붙드는 간절함이 드러나길 바란다. 우리가 치열하게 복음의 내용들을 삶 속에 반추하고 그것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어떠한 질문에도 진지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을꺼야. 

무형의 교육이야 말로 가장 어려운 교육이라고 생각해. 그 사람에게 맞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수준높은 교육이지. 나는 오히려 참된 교육자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가장 필요한 말을 가장 적실할 때에 하기 위해서, 우리는 수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한다고 생각해. 

놀랍게도, 무지한 사람일 수록 교만함으로,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서 그 어떤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지. 결국 우리에게는 그들을 지치지 않고 설득하려는 용기와 실력도 필요하겠지. 그렇기 때문에 요한아, 우리를 준비하자. 그 준비는 고민하는 거야. 그리고 그 고민으로 우리의 현실을 사는 거야. 삶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가장 탁월한 책들을 함께 읽자. 그리고 그것으로 고민하고 또 이야기를 나누자. 왜냐하면 결국 지혜는 먼저 배우는 것이고, 그 이후에 나의 것으로 내면화 할 수 있기 때문이야.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내세우거나, 이름을 드러내거나, 혹은 그 어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오직 한가지 이유만으로.. 지금 그리고 또 언제나, 우리를 필요로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그리고 감사하게 미천한 우리를 사용하시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늘 격려하시고 용기 주시기를. 

- 너를 사랑하는 진부 목사가 - 


P.S. 네 글을 보고 함께 읽고 싶은 문단이 몇군데 생각이 났다. 함께 읽고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옮겨볼께. 


- Divided the Movie : a Youth Ministry Documentary Film

http://vimeo.com/26098320


- Torrance, Thomas F. , The school of faith : the catechisms of the Reformed Church. xxxvi

아마도 뉴욕 리디머 처치(Redeemer Church) 팀 캘러(Timothy keller) 목사님이 자신의 글에서 인용한 것을, 너무 마음에 들어서 찾아낸 인용문이야. 

Christianity is above all the question the Truth puts to man at every point in his life, so that it teaches him to ask the right, the true questions about himself, and to form on his lips the questions which the Truth by its own nature puts to him to ask of the Truth itself that is may disclose or reveal itself to him. Now the Catechism is designed to do just this, and it is therefore an invaluable method in instructing the young learner, for it not only trains him to ask the right questions, but trains him to allow himself to be questioned by the Truth, and so to have questions put into his mouth which he could not think up on his own, and which therefore call into question his own preconceptions. In other words it is an event of real impartation of the Truth. 


- 전성수, 부모라면 유대인처럼 하브루타로 교육하라, 77-79.

최근에 구입해서 읽고 있는데, 다루는 주제의 중요성에 비해서 책이 내용이 많이 부족해. ^-^ 그래도 아직 이런 주제에 대해서 이만큼 다룬 책을 본 적이 없어서 나에게 너무 소중한 책이야.

"물고기를 잡아주면 하루를 살 수 있지만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일생을 살 수 있다"는 말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의 격언이다. 이 말은 지식 자체보다 지식을 얻는 방법과, 지식을 창조하고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게 하는 지혜야말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교육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대인은 아이에게 단순한 지식보다 현명한 지혜를 쌓게 하는 데 주력한다. 지혜는 가정에서 부모에 의해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로운 자만이 지식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지혜가 뒤지면 모든 것에서 뒤지며, 지혜가 있는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생각한다. 

사고력을 키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기 나름의 의문을 품는 것이다.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곧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알면 알수록 숱한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지적인 성자은 그런 의문들을 풀기 위해 무수히 질문하고 더 넓고 깊이 사고하는 과정에서 비약적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질문은 인간을 진보시키는 길잡이이자 지성의 출발점인 셈이다.

2013년 1월 27일 일요일

루저(Loser), 희망을 노래하다 / I Look to You - Whitney Houston



첫학기가 시작되고, 클래스의 학생들에게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마음에 드는 논문을 찾아서, 그 논문에서 논문 주제문 열개를 찾아오세요." "음, 별로 어렵지 않은 걸?" 의기 양양하게 주제문을 찾아서 제출했습니다. 결과는 교수님으로부터 그 중에 일곱개에 물음표(?) "진부, 이것들은 주제문이 아닙니다."

약간 당황했습니다. "음 그럴 수도 있지." 다시 찾아오라는 숙제에 더욱 성의를 다해서 일곱개를 찾아갔습니다. "ㅋㅋ 이제 제대로 했을꺼야." 수업 중 쉬는 시간에 교수님이 저를 부릅니다. 일대일로 이야기하는데 교수님 표정이 조금 심각합니다. "진부, 네가 제출한 것 중에 다섯 개가 여전히 아닌걸?"

식은 땀이 났습니다. 부끄러운 것도, 당황스러운 것도 둘째였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었나?"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학문의 영역에 대한 좌절감, 이것이 칼빈에서의 저의 시작이었습니다.

좌충우돌, 첫 학기는 논문을 쓰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클래스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지나갈 줄 몰랐습니다. 주제를 잡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학자들의 의견으로 힘을 실어서 저의 의견을 개진한다는 것은, 아..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학기의 삼주 정도가 지나, 드디어 주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교수님의 격려를 받았습니다. "진부, 너는 드디어 너의 글을 쓸 수 있는 주제를 제대로 잡았고, 그런 면에서 큰 진보를 이루었다" 마음에 날개를 단 것 처럼 기뻤습니다.

저의 한학기 동안의 주제는 "교리 교육" 이었습니다. 교리 교육을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리 교육 교제는, 당연스럽게 암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금방 의구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대부분의 교리는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왜일까요? 무슨 의도가 있을까요? 특별히 교리 문답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루터는, 왜 자신의 소요리 문답을 그러한 형식으로 만들었을까요?

도서관의 오래된 책 냄새가 행복했습니다. 필요한 책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비록 독일어는 알지 못하지만, 영어로 번역된 루터의 글들을 읽으며, 그의 달콤하고도 힘 있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적어도 교회사 가운데, 성경의 진리를, 단순한 암기가 아닌 이해라는 목적을 가지고 교육하는 흐름을 발견했고, 루터 역시 그러한 줄기 안에서 자신의 소요리 문답을 작성했다는, 저만의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이곳의 점수를 채점하는 기준은 아주 세분화 되어 있고 철저합니다. Focus, Argument, Clarity, Engagement of Sources, Style 학기가 끝나고 마지막 페이퍼를 돌려 받는 날, 저의 페이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진부, 너의 주제는 Th.M. 수준에서는 조금 쉽다고 느껴지고, 좀더 확고한 점수를 위해서는 좀더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했다."

교수님의 평가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저의 출발점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헤매고, 당혹스러울 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아주 냉정하게 제 점수와 각 영역별의 교수님의 평가를 분석해 보면, 저는 평균은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탁월함에는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힘에 진하게 공부하고 나서, 결과물을 받아들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특별히, "교육" 그리고 "배움"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곳의 과정의 표면적인 목표는, 그 분야에 학자를 배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생"이 바로 "교육의 과정"이며 "성장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궁극적으로 경험하고 발견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진정한 교육"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해할 때에 이곳의 과정의 본질은 결국, "논리적인 인간"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세상을 분별하고, 그 말씀 가운데 자신의 의견을 확립하고 분명하게 인생을 전진할 수 있는 것" 제가 이해할 때에 이것이, 이곳의 교육의 내면적인 목표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곳의 공부는, 표면적으로는 학자를 만드는 과정일 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내면과 궁극적인 목표는, 훌륭한 인간혹은 성도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을 기르는 과정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학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과정을 포기해야 할까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과정을 통해서 혹 표면적인 목표를 이룰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내면적인 진실한 목표를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니다. 저는 매 순간 "배울" 것이며 "성장"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순간 순간 "교육의 참된 목적"을 잊어버립니다. 때론 본말이 전도되어서, 학위가 그 목표가 되어버리기도 하고, 혹은 점수가 목표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목표의 표면은 될 수 있겠지만, 목표의 본질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학위나 점수가 목표가 되어버리면, 공부라는 것이 혹은 교육이라는 것이, 결국 학자가 되기 위한, 혹은 아주 머리가 뛰어난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전유물" 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저의 가장 큰 우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공부에 대한 선입견 혹은 포기" 입니다. 공부란, 원래부터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과정을 통과해서 학자가 되기 위한 것이고, 교육이란, 평범한 사람들은 그 학자를 우러러보며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 받아들이는 상황입니다. 그것은 결국 수동적인 인생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어떠한 발전도 성숙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에 의해서 조정당할 위험에 쉽게 노출되고, 인생의 방향을 잡지 못해 고통 받을 뿐입니다.

어쩌면, 이미 뛰어난 사람이 뛰어난 글을 쓰고, 똑똑한 사람이 공부를 잘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타고난 머리를 가져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학원에 불러 놓고서는, 우리 학원 덕분에 훌륭한 대학에 갔다고 현수막을 거는 것은, 사실상 모두를 기만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나 그런 결과를 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면에서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똑똑한 사람이 좋은 학교에 입학해서 학자가 되는 것은, 일반인들의 인생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물론 그들의 역량이 넓은 의미에서 일반인들의 삶에 좋은 영향력을 주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도 없이, 똑똑한 사람이 소정의 과정을 거쳐 학자가 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그들만의 일"로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배움이 성숙이 그리고 교육이, 상위 몇프로 만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 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진정한 교육은, "여러모로 부족한 그 어떤 사람이, 성숙해 가는 것 그 자체" 라고 생각합니다. 탁월한 사람이 성적을 잘 받는 것을 목표로 삼고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잘하는 특정인이 정상에 올라가 우매한 모두를 다스리는 형태가 아니라, 부족하고 가망이 없어보이는 사람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숙해져가는, 그래서 일반인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가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진정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제가 추구하는 것은 좀더 보편적인 교육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두려운 것은, 교회 역시 때로는 "엘리트 교육" 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똑똑한 이들에게 집중하여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족한 이들이 교육을 통해서 희망을 발견한다면, 루저가 교육을 통해서 다시 한번 자신의 인생을 노래할 수 있다면, 사실 그것이야 말로 정말 어렵고, 또 그것이야 말로 가장 갚지고 숭고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의 유학 생활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이곳에서 너무나 뛰어난 분들을 많이 봅니다. 제가 그분들보다 지적으로, 통찰력으로 한참 부족하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저의 길을 묵묵히 가겠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저의 과정은, 지식과 교육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이들, 평범한 사람들 혹은 루저라고 불리는 이들을 위한, 정말 부족한 저의 작은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한학기를 이겨냈습니다. 다음 학기는 어떨까요? 다음 학기 실라버스를 확인하니, 첫 학기는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두번째 학기 시작을 며칠 앞두고, 큰 긴장감과 그리고 동시에 설래는 마음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선하게 이끌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루저의 노래" 를 부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이든이를 잘 보살피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목적이 제 인생과 저희 가정 안에서 충만히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2013년 1월 5일 토요일

the first worship song of me and my wife / How Precious - Jinbu jung, Jinhee Lee


아주 오래전 아마 고등학교 때, 사랑하는 하종이가 자신의 집에서 프로그램을 하나 보여주었습니다. 컴퓨터 화면에는 피아노 건반이 왼쪽에 그려져 있었고, 다양한 길이의 막대기가 그 건반의 위치에 따라서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습니다. 하종이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그것은 아주 조악하지만 나름의 피아노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마 그때가, 제가 처음으로 컴퓨터 음악을 접한 날입니다. 그 이후로 시간이 흘렀고 이제 음악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현실의 세계에서 가상의 세례로 옮겨졌습니다. 놀라운 기술의 거듭된 발전으로, 비록 수준은 차이가 있겠지만, 이제 누구나 집에서도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종이는 훌륭한 뮤지션이 되었지만, 저는 보다 평범한 길을 걸었습니다. 사실 목회자에게는 음악보다는 공부가, 책이, 그리고 사색이 더 필요했습니다. 많은 시간을 찬양 인도를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저에게 음악은,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러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그런 것이었습니다. 

인생에 누구나 잊지 못할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추억들이 있습니다. CFNI를 졸업한지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시간들이 가슴에 생생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유학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 언제였냐고 물어본다면, 주저 없이 조나단과 함께했던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가 완벽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는 참으로 부족한 디렉터이지만, 그러나 저에게 있어서는 목회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 중 한명입니다.

조나단이 가르쳤던 Song Writing 시간은 저에게 참 생소했습니다. 막상 곡을 지으려고 건반 앞에 앉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참 괴로웠습니다. 제가 음악성이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다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곡을 쓰기 위해서 고민하고, 가사를 쓰고 가다듬는 행복에 빠진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제 인생에 있어서 큰 감격 중 하나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시편 8편을 바탕으로 쓰여진 곡이 적다고 생각되어서 이 곡을 아내와 함께 쓰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곡의 핵심적인 부분에 영감을 주었고, 나머지 부분을 제가 채웠습니다. 가사는, 자연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과 영광,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분께 대한 감사와 감격을 짧고 간결하게 적어 보았습니다.

물론 CFNI 이전에 컴퓨터 음악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학 기간 중 랜디 아담스에게, 프로툴 클래스를 통해 컴퓨터 음악의 기초를 배운 것에 감사합니다. 기초 강좌였기 때문에 비록 깊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명성 있는 엔지니어에게 수업을 배웠다는 것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음악 편집 프로그램과 음향에 대한 기본 이해를 처음으로 제대로 익혔습니다.

비록 시간이 흘렀지만, CFNI 에서의 감사한 시간들을 돌아보며, 아내와 함께 만든 소중한 곡을 제 컴퓨터로 레코딩과 믹싱까지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듣고 나눌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합니다.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어설픈 아마추어일 뿐이지만, 더군다나 못하는 노래에, 변변한 제대로 된 콘덴서 마이크 하나 없이 녹음했고 그래서 어떤 부분은 참 유치하지만, 저와 아내의 꿈을 향해 내 딛는 아주 작은, 그러나 의미 있는 한걸음이라 생각합니다.

CFNI 재학 시, 학기 중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서 기본 코드를 가르쳐주시고, 열정적으로 지도해 주신 뮤지션 유진 형님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음향의 기초에 대해서 성실하게 지도해주신, 보고 싶은 승록 전도사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목회자가 쓸데없는 것 한다고 타박하지 않고, 늘 인내해주고 지원해주는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언젠가 주님께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아내와 함께 찬양 인도하는 귀한 은혜가 저에게 주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에, 아름다운 자연과 세상의 만물을 볼 때에, 그것을 만드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뜻이 충만하게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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